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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말[김덕수]
영주 없는 토지는 없다
마호메트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
게르만족의 이동은 서양사에서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전통적인 시대구분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라인강, 다뉴브강이라는 유럽중부의 자연 경계를 국경으로 하던 로마제국이 5세기 말에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몰락하고, 게르만 부족국가들이 서로마제국의 각지를 점령하면서 게르만족의 시대, 즉 중세유럽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시대구분법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중세의 시작을 7, 8세기의 이슬람족의 침입으로 설명하려 한 학자가 바로 벨기에의 역사가 앙리 피렌느(H. Pienne, 1862~1935)였다.
피렌느는 로마제국을 지중해 국가로 성격짓고, 지중해가 로마제국의 정치적 통일과 경제적 통일을 유지시켜 주는 보루의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서로마제국의 여러 지역에 수립된 게르만 부족국가들이 로마의 지배질서는 무너뜨렸지만, 로마의 문화, 지중해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로마의 경제체제, 특히 로마의 화폐 등은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에 있다. 게르만족의 침입에 따른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도 로마문화는 게르만족을 압도하면서 그 골격을 유지했고, 지중해의 해상무역도 여전히 활발했던 것이다. 특히 5세기 말에서 7세기 초까지의 프랑크왕국 메로빙 왕조를 보면 그 점은 보다 분명해진다. 메로빙 왕조는 로마문화의 기반 위에서 성립된 국가였으며, 로마제국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라틴어가 행정사무나 상업에서 사용되었고, 일반인들도 그것을 배워서 사용했다는 점이 그 증거가 된다. 경제적으로 보면 지중해 동부로 전해진 동방의 산물이 지중해를 통해서 배에 실려 마르세유로 운반되고, 거기서 내륙지방으로 수송되었다. 또한 로마시대의 주화인 금화 솔리두스가 그대로 유통되었다. 즉, 게르만족이 침입하고 부족국가들이 난무하는 혼란의 와중에서도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인 고대의 전통, 다시 말해 지중해적 통일성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종말을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피렌느의 견해이다.
그러면 중세의 시작을 언제로 보아야 하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피렌느가 제시한 것이 "마호메트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는 유명한 명제이다. 즉 이슬람의 성립과 팽창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서양의 고대가 끝났다는 것이다. 게르만족의 침입에도 살아남은 지중해 중심의 고대 질서는 이슬람의 흥기하고 팽창하고 과정에서 무너졌다고 피렌느는 보았다.
이슬람 세력의 씨를 뿌린 것은 마호메트였다. 그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 아래서 알라신의 계시를 받고 자신의 고향인 메카에서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신교를 믿던 당시 메카 시민들에게 유일신교를 전파한다고 박해를 받고 622년에 메디나로 탈출해서 교세를 확장했다(헤지라). 그런 지 10년도 못 되어 다시 메카를 점령했다. 그 후 메카는 이슬람의 성지가 되었는데, 마호메트가 죽을 무렵에는 아라비아반도의 절반 가량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이슬람 세력은 놀랄 정도로 빨리 팽창하였다. 7세기 중엽까지 시리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그리고 이집트를 정복한 이슬람 세력은 그 이후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더스강까지 진출하고, 서쪽으로는 지중해 아래쪽 해안을 타고 북부아프리카 전역을 점령, 8세기초에는 스페인까지 이르렀다(711). 이슬람은 다시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을 침입했으나 샤를마뉴의 할아버지였던 찰스 마르텔에게 저지되어 더 이상 유럽대륙으로 진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부지중해 연안에 있는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 리비아,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지중해인데 반 이상이 이슬람의 세력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크왕국은 더 이상 지중해를 해상 무역로로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서유럽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했다. 지중해 연안에 있던 무게 중심이 북쪽으로 이동하였고, 그 결과 프랑크왕국은 새로운 시대, 중세유럽 문명의 주도자가 된 것이다. 즉 이슬람의 침입으로 인한 지중해 중심의 전통적 질서의 붕괴를 중세유럽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전제가 된 것이다.
특히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는 지중해를 이슬람에게 내주는 대신에 프랑크왕국을 견고한 내륙국가로 다지는 정치, 사회, 문화 개혁을 시도했다. 샤를마뉴는 이른바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불리는 문예부흥을 이룩하고, 로마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받았다. 이 샤를마뉴제국에서 이후 중세유럽의 주역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나왔다.
피렌느에 따르면 카롤링거 왕조의 성립이야말로 지중해 세계의 통일성이 무너지고 유럽 본토에서 게르만, 로마, 기독교가 융합된 중세유럽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질서에 이슬람이 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슬람이 지중해무역을 중단시켰으므로 중세유럽은 토지를 매개로 한 농업 문화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중세의 시작을 8세기로 보는 피렌느의 시대구분법은 중세유럽의 성립에 이슬람이 미친 중요한 영향을 환기시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중세유럽의 형성이라는 문제를 외부적인 요인, 즉 이슬람의 팽창으로 보는 것은 역사발전을 외부적 요인으로 돌리는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고전적인 시대구분법을 대체하지는 못했다.
영주 없는 토지는 없다.
강력한 통일제국을 형성했던 샤를마뉴의 프랑크왕국도 그가 죽고 영토가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되면서 사실상 와해되었다. 게다가 9~10세기에 걸쳐 노르만, 이슬람 그리고 마자르족의 침입이 계속 이어짐으로써 혼란과 무질서는 더해 갔다. 분열하는 중앙권력으로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없었다. 따라서 각 지역마다 독자적인 실력자들이 지역을 스스로 방어해야 했고 일반 민중은 자연히 그러한 유력자들에게 보호를 구해야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서양의 중세 봉건사회가 성립되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중세 사회는 지방분권체제였다. 오늘날처럼 중앙권력이 한 국가의 영토 안에 속속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런 체제가 아니었다. 물론 중앙에 왕이 있었다. 그러나 왕관과 왕이라는 칭호 그리고 그것이 주는 영예가 전부였다. 사실상 왕이 통칠 수 있는 영역은 왕령에 한정되었다. 왕은 왕령지에서 나오는 수입만으로 살아갔다. 그래서 "국왕은 스스로 먹고 산다."는 속담이 나올 정도였다.
왕령 이외의 토지는 영주라 불린 유력자의 소유였다. 영주들은 근대적 의미의 대토지소유자 이상을 의미했다. 그들은 자기 영내의 토지에 대한 경제적 권리뿐 아니라 경제 외적 권리, 즉 영내에 거주하는 영민들에 대한 재판권, 조세권 등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 나름대로 병력을 거느릴 수도 있었다. 영주들은 저마다 자기 영내에서는 군주나 다름없었다. 영주 중에는 세력을 잃고 몰락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영주 없는 토지는 없다."는 원칙이 중세시대 전체를 지배했다. 서양 중세 시대의 토지제도는 "하늘 아래 왕의 토지가 아닌 것은 없다."는 속담으로 상징되는 중국 당대의 율령제도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뿔 없는 소
중세 유럽의 농민들은 일상생활이 자유롭지 못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장원에서 살았다. 장원의 규모가 저마다 달라서 하나의 촌락이 하나의 장원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고, 큰 촌락의 경우에는 두 개의 장원이 되기도 했다. 장원은 중세 농민들의 일상생활이 영위되는 터전이었다. 모든 장원에 영주가 상주한 것은 아니었지만, 장원 안의 토지는 영주의 소유였다. 장원내의 경작지는 영주 직영지, 농민 보유지로 나뉘어졌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영주 직영지가 농민들의 부역으로 경작된다는 점이다. 이 부역은 평균해서 1주일에 3일 정도였다. 중세는 신앙의 시대여서 일요일은 노동하지 않았으므로 1주일의 반은 영주의 직영지에 가서 일해야 했다.
장원내의 농민 모두가 부자유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인신의 자유가 없는 농노였다. 신분적으로 부자유했던 농노는 자기가 사는 장원을 떠날 자유가 없었다. 그는 장원의 영주 직영지에 필요한 노동력의 일부로서 장원의 영주가 바뀌면 장원과 더불어 새로운 영주에게 예속되었다. 농노는 부자유한 신분을 인두세를 물었다. 다른 영주소속의 농노의 딸과 결혼하는 경우에는 해당 영주에게 노동력의 감소를 의미했기 때문에 이를 보상하는 의미에서 혼인세를 물었다. 농민 보유지도 농민의 소유지가 아니라 영주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하여 농노에게 할당된 땅이었다. 따라서 농노는 보유지를 상속할 때 상속세를 물었으며 상속자가 없는 경우에 토지는 영주에게로 돌아갔다. 농노는 각종 잡역에 동원되고, 영주 자녀의 혼인 등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공납을 바쳐야만 했다. 농노는 이외에도 각종 영주권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것은 영주가 단순히 토지소유자라는 경제적 요인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었다. 본질에 있어 경제 외적인 권리요 권한이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공권력에 해당하는 것이다.
영주권의 구체적 내용은 다양하다. 영주는 장원내에서 제분, 제빵, 포도압축 등 일상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시설을 독점하고, 장원내의 주민들에게 이를 강제적으로 이용하게 하고, 요금을 징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장원내의 제반 생산시설의 독점과 이의 사용을 강제할 권리는 도로, 교량, 항만의 부두시설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영주권의 핵심은 영주재판권이었다. 영주는 재판권을 행사함으로써 농노를 부자유한 신분에 예속시키고, 그들을 장원의 노동력으로써 토지에 결박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재판권에는 도망간 농노를 쫓아가서 잡아올 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영주들은 재판에서 벌금형을 선고함으로써 수입을 늘리기도 했다. "뿔 없는 소"라는 말은 강력한 영주권 아래 있는 농노들의 비참상을 잘 대변한 말이었다. 물론 고대의 노예들과 비교하면 그 지위는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다. 농노들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재산을 소유하고 상속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근대적 자유인에 비해 중세의 농노의 지위는 열악한 것이었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롭게 한다.
중세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장원과 영주, 그리고 농노이다. 중세는 본질적으로 자연경제와 농촌의 시대였다. 서기 4~5세기의 게르만족의 이동으로부터 9~10세기 이슬람, 노르만, 마자르족의 침입을 겪는 동안 로마제국 시기에 번성했던 도시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10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 동안 모든 이민족의 침입이 종식되고 유럽사회가 게르만족의 이동 이후 처음으로 전반적인 안정을 되찾자 새로운 활기가 돌면서 중세유럽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즉, 중세도시는 우선 상업 부활의 산물이었다. 대체로 주교가 있던 지역 또는 대영주의 성채가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특히 교통이 좋은 곳으로 상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겨울을 나기 위한 일시적인 거류지였던 도시가 점차 상인들의 거주지로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피렌느의 말대로 중세도시는 바로 '상업의 발자국' 위에 생겨났다. 중세도시가 경제적인 면에서 중세적인 농업사회에 상업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의미한 것 이외에도 도시가 농촌에 미친 영향을 컸다. 도시는 농촌으로부터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주변 농촌에 거주하던 수공업자들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상공업이 활기있게 발전하면서 그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점차 그곳을 다스리는 영주의 봉건적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원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유와 자치권을 요구하게 되었는데 이는 영주권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도시민들은 자유와 자치권을 돈으로 사는 경우도 있었고, 힘으로 쟁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도시가 12세기 중엽까지는 자유와 자치권을 획득하였고, 그것은 특허장으로 확인되었다. 그 내용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신분의 자유와 경제활동에 필요한 자유였다.
중세시대에는 모든 지역에 저마다 영주가 있었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영주권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도시는 일종의 '특권지역'이 되었다. 누구든지 도시 내에 1년과 1일을 거주하면 그는 그 이전의 신분이 무엇이었든지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롭게 한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제 도시 안에서는 장원 안에서 일상화되어 있던 영주, 농노의 관계가 통용되지 않았고, 시민은 곧 자유인을 의미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중세도시는 자유와 더불어 영주재판권이나 교회법으로부터 해방되어 독자적인 재판권과 사법권을 가지는 특수한 법적 구역이 되고, 시 참사회라는 독자적인 행정기관과 시민군 등을 가지는 자치제가 되었다. 시민들은 도시 내에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도시법을 제정하고, 이에 복종하고 도시를 수호하는 동시에 상호 도울 것을 선서로써 서약하였다. 그리고 저마다 예외없이 도시의 혜택을 향유하는 동시에 수입에 따라 평등하게 도시의 여러 가지 비용을 부담했다. 또한 자기가 거주하는 도시를 자랑하고 그것을 위하여 헌신하였으니 그들의 도시에 대한 애착심은 오늘날의 애국심에 비할 만한 것이었다.
이처럼 자치공동체로서의 중세도시는 중세시대의 독특한 것이었다. 이러한 도시가 농촌의 거주민 특히 인신의 자유가 없는 농노들에게 매력적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영주가 부당하게 대우하는 장원의 농노들은 집단적으로 장원을 탈출하기도 했을 것이다. 도망친 농노에 대해서는 영주에게 추적, 체포권이 있지만, 일단 도시에 와서 1년 1일만 잘 숨어 지내면, 그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중세도시들은 이러한 농촌의 이탈민들을 흡수해서 자체의 규모를 키워 갔다.
자유인이 되면 도시에서는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물건을 만드는 직공이 될 수도 있었을 뿐 아니라 도시에서는 즐거운 놀이도 있고, 돈 버는 길도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자유의 날개는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중세의 억압구조에서 벗어난 농노는 자유의 의미를 배웠을 것이다. 도시의 공기를 호흡하면서 자유의 의미를 점차 깊이있게 체득해 갔을 것이다.
아담이 밭을 갈고 하와가 옷감을 짤 때 그 누가 영주였는가?
중세 봉건사회는 14세기에 총체적인 위기를 맞는다. 특히 14세기 중엽 전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유럽 인구를 14세기 초의 1/3~1/2로 격감시켜서 봉건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농촌은 일손 부족에 시달렸고, 농지가 버려지거나 아예 마을 전체가 폐촌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 영주와 농민 모두가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영주들은 노동력의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서서히 진행되던 농노해방을 중단하고 부역을 강화하려 했다. 왕의 관리들은 임금을 동결하기 위해 '노동조례'를 제정하기도 했다. 더욱이 백년전쟁의 전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1381년 의회가 신설한 인두세는 농민들에게는 과중한 것이었다. 1381년에 영국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농민들의 분노가 터진 사건이었다.
농민반란의 지도자는 와트 타일러였지만 농민들에게 반란을 고무시킨 것은 켄트의 수도사 존 볼(John Ball)이었다. 원래 성직자였던 볼은 심금을 울리는 연설로 유명했다. 당시는 인쇄매체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연설이 최고였다.
볼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농민들을 고무했다. 창세기에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화와의 생애가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아담은 땀을 흘리면서 밭을 갈아야 하고, 하와는 해산의 고통을 당해야 한다고 선언되었다. 모든 사람은 똑같이 이러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이야기로써 볼이 내세운 구호는 "아담이 밭을 갈고 하와가 옷감을 짤 때 그 누가 영주였는가?"였다. 영주는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근면하게 일했다. 자기가 필요한 것은 자기가 만들었다. 스스로 밭을 갈아서 씨 뿌리고 자기 먹을 곡식을 스스로 거두었다. 자기 옷도 스스로 만들어 입었다.
그런데 영주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생산물을 빼앗고 각종 부담을 강요한다. 인간사회의 모든 불행의 원천은 바로 영주들이다. 농민들은 영주들의 몫까지 생산하기 위하여 땀을 흘려야 한다. 그러면서도 영주들은 끊임없이 농민들에게 무엇인가를 더 요구한다. 영주들이야말로 사악한 악마이다. 그들이 없어져야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감동적인 볼의 설표의 요지였다.
볼의 설교는 억압당하던 농민들에게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이었다. 영주의 권위를 자명한 것으로 인정해 온 농민들에게 이제 그들의 존재는 신의 질서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불의 설교에 감동한 '경작하는 사람, 실 짜는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인근 영주들의 저택을 공격했다. 그들의 무기라야 고작 방망이 정도였고, 극소수가 활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힘이 뭉칠 때 엄청난 파괴력이 있었다. 런던시에서 임금 동결령 때문에 의회에 불만이던 가난한 시민들이 농민반란군에게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농민군대는 런던까지 입성할 수 있었다.
농민군은 왕에게 농노제를 폐지하고 지대를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런던은 공포의 도가니가 되고, 젊은 국왕 리처드 2세는 반란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농민들의 요구는 한 마디로 인신과 토지의 자유, 즉 봉건적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왕의 시종들에 의해 와트 타일러가 살해되고 런던시의 지배층이 민병대를 조직해 공격하고, 지방의 영주들이 병력을 거느리고 도착하자, 반란농민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지방에서의 반란도 영주들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영국의 농민반란은 실패했지만 영주들의 시대가 점차 사라져 가는 한 증거였다.
소녀여! 나아가 프랑스를 구하라.
오늘날은 영국이 유럽대륙과 떨러져 있는 섬나라이지만 중세 때만 해도 영국은 프랑스 땅 안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는 언제든지 영토문제로 충돌할 소지가 있었다. 그 씨앗을 뿌린 것은 11세기 중엽에 영국을 정복하고 왕이 된 노르만디의 공작이었다. 중세는 오늘날과 같은 영토국가 시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보통 때는 문제가 되지 않다가도 상속이나 왕위계승시에는 분쟁이 발생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영토분쟁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장기간 계속된 것이 바로 백년전쟁(1337--1452)이었다. 전쟁의 시작에서 종결까지는 백년이 더 걸렸지만, 그 기간 내내 전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백년전쟁이라 명명되었다. 프랑스 영토가 전쟁터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물적, 인적 손실은 막대했다. 전쟁 초기에는 프랑스군이 군사력이나 사기면에서 불리했다. 특히 흑색 갑옷을 입고 출전하였기 때문에 '흑태자'라는 별명을 가졌던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이 가스코뉴를 근거지로 남프랑스 일대를 돌아다니며 약탈과 방화를 일삼아도 속수무책이었다. 1357년 가스코뉴를 출발하여 르와르계곡까지 진출한 흑태자는 돌아오는 길에 프아티에에서 프랑스군을 만나 크게 격파하고, 국왕 장과 그의 막내 아들 필립을 비롯해서 많은 프랑스 귀족들을 사로잡았다. 더욱이 프랑스에서는 에티엔느 마르셀의 농민반란으로 프랑스왕실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백년전쟁의 영웅인 영국의 흑태자가 1376년에 사망하자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1428년에 영국이 프랑스 전체를 지배할 목적으로 남프랑스로 향하다가 오를레앙을 포위함으로써 전쟁이 재개되었다. 프랑스군은 거듭된 패전으로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어린 왕태자인 샤를르 주변에는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궁정모리배들만이 득실거렸다. 프랑스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았다. 이때 혜성과 같이 나타난 것이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였다.
잔은 프랑스 동부 동레미 출신의 순박한 시골처녀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성인들이 나타나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고 대대로 프랑스 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랭스에서 왕태자를 즉위시키라고 자기에게 계시가 내렸다고 주장했다. 잔은 이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굳게 믿고, 1429년 2월 영국군과 부르고뉴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을 무사히 통과하여 때마침 시농에 체류하고 있던 왕태자를 만났다. 그리하여 그녀는 거의 절망상태에 빠져 있던 왕태자와 프랑스군의 지휘관과 병사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데 성공했다. 잔 다르크에 의해 고무된 프랑스군은 사기를 되찾고 영국군에게 반격하기 시작했다. 우선 오를레앙을 탈환하고 불과 수주일 만에 르와르 계곡에서 영국군을 몰아냈다. 그녀는 왕태자를 설득하여 곧바로 랭스로 진격하고 1429년 7월에는 이를 점령하여 랭스의 대주교의 집전하에 샤를르 7세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한때 사생아로 낙인 찍혔던 왕태자는 이제 신에 의해 축복받은 정통적인 프랑스 왕이 되었다. 그러나 잔은 그 뒤에 콩피에뉴에서 부르고뉴군의 포로가 되어 영국군에게 인도되었고, 루앙의 종교재판에서 마녀로 규정되어 화형되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 19세였다. 샤를르 7세는 잔을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처형된 뒤 종교재판을 다시 열어 그녀의 무죄를 선고했다. 그 후 20세기에 와서야 잔은 성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잔 다르크의 출현은 확실히 프랑스를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구원한 기적적인 일이었으며 이후 프랑스 애국심의 상징이 된 것도 당연하다. 결국 잔 다르크의 출현이후 프랑스군은 승승장구해서 영국을 유럽 본토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1452년 보르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함으로써 영국의 가스코뉴 지배와 기나긴 백년전쟁도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