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30 전남도민일보
말로는 안됩니다-김순애 권사
자식을 위한 부모의 기도는 끝이 없다.
숨질 때 되도록 호흡하듯 찬송하며 간구하는 기도의 하나는 가족과 자녀들 위한 것이다.
어려움이 있어서만 아니다.
평탄하고 복되게 살더라도 변함없는 신앙생활과 대를 잇는 믿음의 가문 되는 것이 소원인 것이다.
김순애는 7세 때 어머니를 잃었고, 10세 때 가난 때문에 집을 나왔다.
섬마을에 사는 장로님 댁 애기들 업어주는 담살이로 들어갔는데 그 집은 예수 믿는 가정이었다.
그 가족을 따라 교회를 다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
부모에게서는 물려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만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 고향으로 돌아와 가난한 머슴과 결혼했다.
부부가 열심히 일해서 논밭이며 산지를 갖게 되었다. 세 아들도 어머니 따라 교회를 다녔다.
가난을 벗어버린 부부는 자녀들에게는 가난과 못 배운 한을 물려주지 않기로 굳게 작정하고
학교에 보냈다.
큰 아들이 학교 따라 객지로 나가더니 교회를 멀리했다.
새 식구로 들어온 자부는 극성스럽게 우상을 섬겼다.
달마다 초삼일이면 떡시루에 촛불에 켜고 제사를 올렸다.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점쟁이를 찾아다녔다. 외출하는 것까지도 길흉을 묻고 다녔다.
그렇게 살면서 손자들이 공부를 잘해서 좋다는 학교에 진학했다. 만사가 잘 나가는 집안으로 보였다.
잘 나가던 집, 어머니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내 믿음으로 살아도 장래가 훤하다고 자신했던
그 집이 이상스럽게 꼬이기 시작했다. 일류대학에 들어간 아들이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어려운 일로 졸업을 못한 것이다. 둘째는 남들이 쉽게 취득하는 그런 자격시험에 번번이 낙방이었다.
이해가 안 되었다. 이렇게 콱콱 막힐 수 없었다. 답답함과 불안과 좌절감이 가정을 짓눌렀다.
아우가(이영하 목사) 형님의 가정을 위해 기도를 작정했다.
형님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확신했다.
형수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도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탄의 세력을 물리쳐야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날마다 강단에 엎드렸다.
영적인 싸움이고 간절한 부르짖음이었다. 철장권세로 사탄을 물리쳐 주기를 간구했다.
“하나님, 우상을 섬기는 우리 형수는 제 말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임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불러 주시옵소서.” 하고 부르짖었단다.
두 해째 되던 어느 날이었다. 목사님 형수가 범상치 않은 꿈을 꾼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손이 그녀에게 성경책을 안겨주었다. 평안했다.
늘 꾸었던 그런 꿈처럼 지나칠 수 없는 신기한 일이었다. 마음이 편하고 평안했다.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이 찾아온 것 같았다. 점쟁이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점쟁이가 문에 들어서는 부인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다시는 여기로 날 찾아오지 마소. 인자, 자네 형제간들 따라 가…” 하고는 괴성 같은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간 것이다.
예배당으로 갔다. 남편도 아내 따라 교회에 출석하면서 믿음을 회복했다.
우상을 섬겼던 그 때 그 정성보다 더 열심이었다.
그 동안 섬겼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 그 분, 그 하나님이 진리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녀들에게 맺혔던 일들이 풀리고 기적 같은 회복과 성공의 길이 열렸다.
큰아들이 서울상대를 나와 회사 중직이 되고, 둘째는 서울공대를 나와 연구원이 되고,
큰딸은 사업가, 둘째딸은 목사 아내가 되어 영국으로 나갔다.
손자들이 잘 자란다. 범사가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다.
믿음을 회복한 큰 아들은 농촌인 고향 교회 장로가 되었고 우상을 섬기던 자부도 권사가 되었다.
김순애 권사의 두 아들과 조카들 그리고 손자까지 6명이
목사가 되고(이영하-광주백향, 이중하-북평제일, 이명하-운대, 이선하-중국선교사, 박병주-영국,
이정현-미국 유학) 여럿이 장로가 되었다.
한 사람, 권사님의 믿음이 이씨 가문의 축복의 씨앗이었다.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신 말씀처럼.
예수, 그 이름이 새 생명이고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