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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이중화: 혁명의 이유(la raison)
2022년 12월 7일 대설(大雪)
인간은 진솔하게 자치, 자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현존재일까? 인류가 생물학적으로 거쳐 온 과정에 대한 서양 학문 발달사를 읽으면, 인간이라 칭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란 지구상에서 바로 이제 여기에 살면서, 어제와 아제를 이어가려고 노력하는 생명체이다. 이 생명체가 자기를 위한 이기심으로 살까, 아니면 어느 때인가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지구와 더불어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늦게나마 의식적으로 알아채기나 한 것인가.
그런데 포유류가 지구상에 주요한 지위를 차지한 것이 언제쯤일까? 2억년 이전에 공룡이 지구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했던 시절에, 제일 큰 포유류가 요즘의 토끼정도의 크기였다고 하고, 공룡들이 무서워 땅굴을 파거나 굴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지구상의 넷째 대변혁기를 거치면서 거대 공룡이 거의 소멸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흘러 6천5백만 전에 다섯째 거대한 변화에서 작은 포유류가 굴 밖으로 나와서 활동할 수 있었다고 한다. 6백만 년 전쯤에서야 지금 인간을 닮은 유인원이 생겨났다고 하니, 길고 긴 세월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를 누가 세세히 알겠느냐마는, 그 시간의 측정을 실증적으로 갖게 된 것은 그 길고 긴 세월에 비하면 2백여 년 정도 밖에 안 된다.
그 인간이 인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화석을 통하여 추정하는 것도 대퇴부 발달로 달리기 시작하여 경추가 선 것도 2백만전 전이라고 하며, 인간의 유적과 유물을 남기는 구석시시대의 시작을 6만전 전으로 잡는다고 해도, 현생 인류가 사는 방식과는 매우 달랐을 것이다. 그나마 집단을 형성하여 인간들이 바깥에서 거주지를 만들고 식물재배와 동물사육하면서 앞 시대와 다른 삶의 형식을 갖추었다고 하는 시대를 맞이하는 것은, 대략 1만년 전쯤이라 하고의 신석기 시대라고 한다. 그러고 나서 인간이 공동체라는 질서를 갖추어서 살아간 것은 7천년 전쯤에서 석기와 달리 사용할 광물질에서 구리를 다룰 수 있을 때 쯤이라 한다.
신석기시대 이래로 기호로서 표기할 수 있는 여러 방식이 유적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추정하여 아마도 간단한 소통을 위한 언어도 있었을 것이고, 공동체 내에서 분업과 축적도 있었으리라. 지금의 분업과 축적과는 전혀 다를 지라도, 삶의 연속성을 이어가는 방법을 찾아 아제 또는 미래에 대한 대비는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아제에 대한 관점을 갖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는 것을 당연했으리라. 하늘의 별자리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그 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아제를 해명했다기보다, 아제에 대한 바램과 기대를 하늘에 투사해서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인간이 많은 이야기를 남긴 것들 중에서 왜 전쟁의 이야기와 승리자의 이긴 설화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까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인간이 자연에 대한 승리보다 다른 인간집단에 대한 승리를 전승으로 간직하는데, 종족과 공동체의 보존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 제기는 종족보존이 이기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전에 인간류들도 종족보존을 위해 타집단과 전쟁에서 이루어졌을까? 구리와 청동을 다루는 시절에 인간 종에게 전투의 이야기로 넘쳐난다. 그 전투와 더불어 자연의 재해를 극복하는 이야기가 거꾸로 부차적으로 섞여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야기 중에서 자연에 대한 승리는 타집단에 대한 승리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고 느낄 때쯤에서야 지식 또는 학문의 체계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과 정복이 다음 세대에 훈육의 자료로서, 서사적으로 전승되었다고 하지만,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여건과 사건들에 대한 전승이 현자들의 교육에서 중요했을 것이다. 여건과 사건은 지구상의 자연적 조건에서 재현하는데 비해, 영웅이나 현자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반복하지도 않는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자연에 대한 지식이 훨씬 더 인간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느낄 때부터, 그리스 철학사에서 말했듯이, 신화의 시대에서 자연탐구의 시대로 도래했다. 그럼에도 전쟁의 식민지 쟁탈은 자연에서 얻어지는 결과물보다 더 많은 고부가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청동기를 지나 철기 시대에 더욱 잘 알았을 것이다. 언제나 이기심이 부추겼을까, 개인의 탁월한 능력의 자랑거리였을까? 학문의 시작과 발전은 개인의 이기심과 탁월함을 넘어서 인간사의 중요성에 대한 지식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을 것이다.
탁월한 개인에 의한 체제와 참주(황제)의 지배 방식이 인간 개인들의 고유성과 자주성에 대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자연에 대해 진솔한 이해를 하는 시절에 떠올린 생각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인간들이 전승을 비롯하여 삶에 대한 일정한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서로 간에 자유와 평등을 구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이런 시절에 떠올렸을까? 철학사를 보건데 아테네의 소크라테스 시대에 인간이 스스로 자주성을 발휘할 수 있을지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첫 시대였을 것이라 한다. 중국과 인도에도 비슷한 과정을 겪지만, 인격의 자주와 자유에 관한한 고대 그리스 사유가 근대를 거쳐서 현대에까지, 과거사고의 틀을 벗겨내고 또는 바꾸면서 계속하여 새로운 틀을 만들려고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지중해 중심이었다고 한다. 중국과 인도에서도 삶에서 서로 다른 양상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거의 20세기까지 두 양상이 계급 또는 계층으로 분화되어, 상층에서 자율과 자치를 누리고 하층에서는 종속과 훈육으로 지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중해의 사유가 유럽전반으로 그리고 마젤란의 세계 일주 이후 지구상으로 확대되면서 사유의 양상들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럽의 중세는 종교의 지배라고 하지만, 상층의 의식은 참주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틀은 관념의 완전성과 논리의 일반화에서 온 것이리라. 그러다가 하나의 절대라는 완전자(참주)가 아니라, 근대에서는 자아를 지닌 인격이 완전함과 무한함을 사유할 수 있다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소크라테스가 인격을 사유했던 것이 부활하듯이, 즉 르네상스를 거쳐서, 참주와 신을 벗어난 자아의 주체가 등장했다고 하다. 그럼에도 구습의 영향은 지대하였으며, 지식을 갖춘 소수가 성찰하였던 것을 인민에게까지 확장되는 데는 또한 그로부터 200여년을 거쳐야했다. 벩송이 보기에, 이때 자아의 등장에서 지식의 확대로서 인간의 삶의 영역을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가는 것보다 인격의 함양을 통해 공동체의 공감의 일반화의 길을 갔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식적 방식으로 개념과 관념의 체계 속에서 속좁은 지서의 인식으로 인간의 지위를 세울 것이 아니라, 영혼과 의식의 함양으로 인류 공동체를 창안하는 길로 인격을 정립하는 쪽 가야 했는데, 지식을 중요시하는 지성인들이 상부와 막역한 결합으로 둘째의 길을, 새로운 공동체의 길을 방기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의 방식에서 도구를 통한 삶이 유용하고 편안함을 가져다준다고 여겼고, 또한 자연에서 벗어나 자주와 자유를 획득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알량한 지식인들은 후자의 방식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는 개인의 노력과 인성함양이 뒤따라야 하는데 비해, 일반 민중이 그 인식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잠재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산력의 발달과 기계적 생산 도구들을 인민이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증기기관과 모터의 발달로, 인민들도 스스로 사유하고 구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기에 이른다. 소크라테스시대에 자유민이 인격의 자발성을 갖게 되듯이, 이제는 인민들도 자발성과 자유에 대해 행위할 수 있고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인민의 자발성의 발현으로 자유와 평등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인습과 관습의 영향과 과학적 지식의 일방성은 여전히 상층의 자유와 지위에 관심이 있었지, 인민의 자유와 평등에는 관심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러 혁명들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민의식이 이어지고 발현되었지만, 두 번의 대전쟁은 이런 의식을 묻어버렸거나 편을 가르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냉전이라고.
전쟁 후에 건설과 삶의 도구들의 변화에 인민들은 과거의 삶의 양식에 비해 현재의 삶의 양식의 차이에서 풍요와 안락을 누리고 있다고 여긴다. 그 풍요에는 지배의 예속과 착취가 들어 있다고 맑스와 맑스주의자가 강조하면서, 상층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대 전쟁 이전에 벌써 상층들은 서로를 보존하기 위한 조작작업을 형성하면서, 제도로서 국가 속에 종교의 절대 정신을 포함하고 또한 인식론의 지식의 보편명제를 포함하였고; 따라서 국가, 종교, 절대지식의 삼위일체를 형성하여 제국의 길을 갔다. 이 상층들은 인격의 완성을 향한 노력은 권력의 삼위일체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훈육하고 있었으며, 이런 삼위일체가 논리학과 신학보다 훨씬 강력해졌는데, 거기에는 지식의 완전성과 통일성(신칸트학파와 논리실증주의)이 뒷받침하면서 제국의 길로 가는 길을 정초하였다.
게다가 사람들은 지식이 점점더 통합적이고 완전한 체계로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가운데, 자본이 삼위일체를 차지하면서 자본자체가 제국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그 제국이 자기의 명령과 지시를 내릴 똘만이(마름)로서 국가체계 선정하기보다, AI(인공지성 또는 정보체계)가 대신해 줄 것처럼 믿고 있다. 이 믿음은 소크라테스 시대에 영혼의 완성의 길로 노력과 욕망 대신에 지식과 논리의 길을 택했듯이, - 또한 데카르트 시대에 자아의 형성이 새로운 공동체의 확장으로 인민의 삶을 고양하기보다 자아가 지식을 확대하여 인간의 자연 지배 또는 세계 지배를 향하여 나아갔듯이, - 19세기에 과학의 확장은 인격의 다양체로 가기보다 획일적 제도 속에 종속되도록 나아갔기에, 20세에서는 두 번의 대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그 귀결이 나왔다. 이런 귀결을 감추기 위해 자유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지구상에 곳곳에 쉴틈없이 전쟁을 일으킨 것도 제국이었으며, 이 전쟁을 수사로서 은폐하는 것이 AI의 지배권에 대한 21세기 지식선점권의 싸움이다. 이는 새로운 전쟁일 뿐이다.
인간의 삶에는 행동과 지식의 이중성이 있어왔고, 또한 이중성은 실천과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소크라테스 시대, 데카르트 시대, 벩송 시대의 공통성은 상층의 형이상학의 지배와 명령과 달리, 심층의 형이심학으로 인류 공동체의 삶을 위한 다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인류가 거쳐온 우여곡절의 사건들을 통해서 시대의 증표로서 철학사를 다루고 있지만, 아직도 실질적으로 공동체사회 구현으로 나가는 노력은 지식의 편의와 유용에 밀려나고 있다. 진정으로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고, 달리 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벩송이 고민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사회에서 다른 삶의 실천과 사회 혁명도 중요하지만, 그 혁명이 일어나게 하는 동기가 되는 의식의 전환이 중요하다고 여겨 저술로서 풀어보려고 했을 것이다. 의식의 변역은 문자시대로부터 역사상 세 번을 거쳤지만, - 탈레스에서 신화에서 자연으로, 소크라테스에서 참주제로부터 민주정으로, 데카르트에서 신앙으로부터 자아로, - 벩송은 당대에도 넘어서지 못하는 주지주의가 주도하는 지식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벩송은 인류사에서 혁명은 언제나 가능하다고 여겼으며, 그 혁명은 시간을 필요로 하며, 긴 역사상 간헐적으로 솟아났고 또한 솟아날 때는 폭발적이라고, 강의에서 말하였다. 의식의 혁명으로부터 인간은 자주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자주와 자치를 통한 달리 사는 공동체가 형성되는 가운데, 인민들에서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 것이고, 그 속에서 개인들은 보살들이 되는 것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구체적 노력을 통해 실질적 활동을 했던 이는 고다마 싯달다일 것이다. 역사성 이를 거부하는 것은 상층이었지 인민들이 아니었듯이. 공자는 상층의 의식변화에 기대었으며, 인민보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다. 다른 한편 예수는, 복음에 남겨진 글로 보아, 식민지 지배하에 있는 백성들에게 자아 속의 권능을 깨우쳐 스토아적 냉엄한 도덕성을 – 그 예로서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내어주는 아가페(사랑)이다. - 실현하면서 극복하자는 것으로, 인민들에게 사적 소유가 없는 서로서로 직접 상부상조하는 공동체를 이루자는 것이었으리라. 표면의 분출에는 각성한 현자를 필요했을 지라도, 혁명은 언제나 심층에서부터였다.
지성주의자들의 편가르기는 역사상 식민지 정책과 같았다. 이제 벩송이 제시하였듯이, 자석을 보라. 자석은 두 가지 상반된 힘이 하나이면서 단위를 형성하고 있다. 지구의 자전이 만드는 자기장의 힘은 양쪽이 공존한다. - 상층 인식론과 형이상학이 식민지와 전쟁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세우면서, 언제나 상층인 한 쪽이 심층인 다른 쪽을 무시하거나, 거짓으로 만들거나, 또는 악의 축으로 만들거나, 남녁처럼 빨갱이로 몰거나, 게다가 형이상학적으로 무로 만들며 허무주의를 심었다. 이에 비해 불교의 흥미로운 논쟁에서 공(空)은 공이 아니라 색이라는 실재성을 밝혔듯이, 벩송의 형이심학에서는 다른 한쪽인 빨강이는 무도 악도 공도 아니며 그 자체로 자주와 자유를 실현하려는 노력이며, 그 속에 자연의 권능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지성인이라는 자들 또는 윤석열 정부의 주지주의자들도 사유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무(無) 또는 악으로 몰려고 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마녀재판의 악마적 논법이거나 전쟁과 식민지를 만드는 진실로 사악한 집단의 논리였다는 것이다. 8천만의 사유가 이중성을 또는 이분화를 인정하며 형이심학의 길을 가려는 노력을 할 때, 이 땅에도 자주와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따라서 그 악마적 논법과 사악한 사고의 틀을 깨는 데는 혁명도 필요하다.
지구라는 거대한 자석에는 북극과 남극이 동시에 있다. 그리고 상징적으로 빨강과 파랑으로 표시한다. 지구의 공존 속에 한반도의 공존과 번영에는 공감과 공명의 길로 가는데 있을 것이며 또한 인간 본성을 실현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 (3:40, 55WKF) (4:37, 55W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