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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정치(Politique),
§.17. 통제 사회들에 관한 후기(Post-scriptum sur les sociétés de contrôle, 1990)
Gilles Deleuze, Pourparlers 1972-1990, Minuit, 1990, pp.240-247(P.250)
- L’autre journal, n° 1. Mai 1990 – 대담이 아닌 기고문이다.
철학과 정치의 연관에서 사회라는 터전 위에서 현상으로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푸꼬의 통시적 관점에서 정리는 유효하다. 르네상스에서 근대사회의 전환기는 산업사회라고 한다. 르네상스에서 자의식의 생성과 위상이 정해지는 시기이며, 유럽의 각 국가들은 자기 입말과 지식 체계를 세운다. 그리고 대중들이 힘을 얻는 시기에는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지식의 확장을 있었다. 푸꼬는 통치사회라는 용어로 왕정 군주체제에서 근대 국가로 넘어갈 것이다. 이런 통치시대의 자리 잡기는 사회의 분화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훈육과 규율을 정초하는 시기이다. 1830년 이래로 산업귀족 즉 부르주아 등장으로 훈육의 체계는 병영, 병원, 학교, 공장에서 체계를 형성한다. 이런 훈육사회의 체계 속에 이력(경력)형성 또한 제도의 확립에 중요한 중추적 역할을 한다. 그리고 산업 사회에서 비행기와 전기에 의해 속도와 강도의 개념이 들어오면서 삶의 터전은 부르쥬(성내와 주변)에서 지역을 넘나드는 코드(규율)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이차대전에 이르기까지 두 번의 전쟁은 지역코드의 탈코드화와 세계화라는 재코드화로 이어질 것이다. 환경과 영토화의 확장에서 훈육이 국가의 통치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하여, 단일성(통일성)과 동일성이라는 틀로 묶기에는 넘쳐나는 지식 영역이 다변화가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이 학문들 간의 소통은 상층에서는 가능한 영역이었지만 심층에서는 어떤 측면에서 불연속적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양립불가능성에 이르기도 한다.
양립불가능성에는 형이상학적 배경이 있다는 것인데, - 여기서 심층형이상학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 상층형이상학에서는 그래도 지식의 통합 또는 종합이 가능하고 실행할 수 있다는 쪽이 우세하였고 2대전 후에도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향한다고 주장했던 20세기 초와는 달리, 자본 자체가 제국을 형성하고 있다는 견해들이 등장한다. 산업사회의 생산에서 잉여, 제국주의의 금융의 자기증식은 제국이라는 새로운 탈영토화의 체제를 형성할 것이다. 이 탈영토화에서 자본의 무한 증식을 창출하려는 재영토화에는 소통의 통제가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 통제사회는 규소의 시대에 디지털이라는 매체들 통해서 점점 전지구적으로 확장되어 갈 것이다. 통제사회가 사회의 여러 집단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이지만, 제국의 통제는 추상적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학문은 아직도 통일된 방식이 있는 것도 아니며, 삶의 터전에서 예술, 스포츠, 매체 등은 제국에 포획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각각은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이것들로 자본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고, 또는 얼마나 깊숙이 포획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이 논쟁거리이다.
들뢰즈는 푸꼬의 장점을 이어받아 통치, 훈육, 통제의 구분을 받아들이면서, 이것들이 갖는 논리적 근거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 규소의 시대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는 어떤 관계와 소통의 연관이 있는가? 그는 이를 논리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카프카 작품의 소송을 끌어들인다. 법률적 통제로부터 “소송”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3가지인데(이 설명은 그의 작품 카프카(1975)의 5장에 있다), 그 중 첫째는 불가능하니, 젖혀두자. 나머지 둘, 겉치레 방면(l'acquittement apparent)과 무제한 유예(l'atermoiement illimité)인데, 즉 하나는 법률적 코드에 대항하여 무죄임을 입증하는 노력하며, 그 법률체계 속에 포획되어 자신을 소진하는 것이며, 또는 다른 하나는 코드의 장악이 전적으로 개인을 포로로 만들지 못한다는 빈틈에서 가끔은 법률적 구조에 속해 있지만 경계에서 수시로 임의적 자유를 행사하면서 용출선을 찾아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견해로는, 이것들을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논리’ 또는 ‘형식’이라 본다면, 사실상 3가지가 아니라 4가지라는 점을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네 가지 중에서 양 극단의 두 가지를 제외하면, 즉 하나는 완전히 포로처럼 천국의 세계에 사는 형상론의 경우와 다른 하나는 자연의 필연성에서 방황하며 생성의 삶을 사는 질료론의 경우를 제외하면, 위에서 “소송”에서 언급했듯이 이중화 또는 가지치기처럼 표면의 양면성이 남는다. 하나는 제도와 인습에 따라 사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생성의 자유와 창조를 확보하려는 삶이다. 전자의 매인 삶은 관습적이고 또는 안전한 삶에 복속하는 것인데, 자신의 노력과 생산을 상부에 의탁하는 예속의 삶이다. 후자에서는 새로운 변역(變易)의 삶을 살아가자면 형상에 저항하기도 하고 권력에 밀려 심층으로 흐르기도 하며, 표면의 균열을 내며 용출선을 만드는 삶이다. 들뢰즈는 후자의 환경도 제국의 통제 속에서는 달동네나 반지하의 삶처럼 포섭되어 있다. 통제사회는 이들의 폭발을 경계하며 통제를 통하여 경계 안에 묶어 두려는 재코드화로 간다. 들뢰즈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불연속적이고 간헐적으로 솟아나는 폭발성, 즉 혁명성을 완화하기 위해 복지정책을 다양화하게 실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인민의 저항과 용출선은 여전히 혁명적이다.
그러면 통제사회를 바꾸는 방식은 없는가? 제국이 자기 자본의 증식을 위해 전지구적으로 개인을 파편화하며 재코드화를 하는 것은, 시장의 자유화로서는 완전히 이룰 수 없어서 인민 대중의 소통의 통제에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이 통제가 무한 증식으로 디지털의 발전에 따라 정보화, 숫자화를 통해 인민을 거의 장악하고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도시에서 탈코드로서 소집단의 형성으로써, 또는 시민사회의 형성과 활동으로써, 노마드 활동이 통제에 대항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런데 파편화된 개인도 흐르고, 소집단도 흐른다. 그 흐름이 공감과 공명으로 덩이를 형성하고 연대하며 봉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 글에서 들뢰즈는 가타리의 견해를 빌려 몇 가지 프로그램을 제시했는데, 들뢰즈가 이 작은 꼭지 쓰는 당시는 초기이기도 하고, 아직은 디지털시대가 전개되고 있는 중이어서, 답이 아니라 대비로서 끝난 것 같다.
제국의 뱀 또아리는, 인민의 생성과 같은 두더지의 구멍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문제를 폭파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인가? 천국의 허구, 부활의 망상을 폭파시키는 것이 인민의 흐름일 것인데, 그러하다면 다시 형이상학적으로 상층의 형상론의 허구에 대항하는 심층의 질료론의 생성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내재성의 권능과 권능의 활동으로 탈주선들을 만들고, 다발을 형성하는 것, 그것에는 전위로서 첨단의 폭발력을 지닌 혁명적 전위가 필요하다. 인민과 더불어 새로운 놀이, 새로운 세대, 달리 말하기, 달리 살아가기가 필요하다. 자연 속에서.. 미세한 선들이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창조, 혁명을 생성하는 것이다. (54T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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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통제 사회들에 관한 후기(Post-scriptum sur les sociétés de contrôle, 1990), 240-247.
- L’autre journal, n° 1. Mai 1990 – 대담이 아닌 기고문이다.
1) 역사적(Historique) 240
푸꼬(Foucault, 1926-1984)는 훈육사회들(les sociétés displinaires, 규율사회들)을 18세기와 19세기에 위치하게 했다. 이 사회들은 20세기에 절정에 도달한다. 이 사회들은 유배(감금, 갇힘)라는 거대한 환경을 조직화하는 데로 진행한다. 개인들은 하나의 닫힌 환경에서 다른 닫힌 환경으로 끊임없이 이행하며, 그 환경의 각각은 자기 법칙(ses lois)[규율]을 가지고 있다. 우선 가족이고, 다음은 학교이며(너는 더 이상 가정 속에 있지 않다), 그리고 병영이며(너는 더 이상 학교에 있지 않다), 그리고 공장이며 때때로 병원이며, 특별나게 감금의 환경인 감옥도 있다. 유럽 51(Europe 51(1952)의 여주인공은, 그녀가 노동자들을 볼 때, “나는 단죄받은 자들을‥… 본다고 믿었다”라고 소리칠 수 있다. (240)
그러나 푸꼬가 또한 알았던 것, 그것은 이 모델[훈육사회]의 간결함이었다. 이 모델은 통치사회(les sociétés desouveraineté)에 계승된다. 그것의 목표와 기능들은 다른 모든 것들이었다(생산을 조직화하기보다 공제[편취]하는 것이고, 삶을 관리하기보다 죽음을 결단한다). 이런 이전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한 사회를 다른 사회를 큰 전향을 조작한 것 같다. 그러나 제반 규율들은 자기 차례가 되어, 천천히 자기 자리를 차지하는 또한 제2차 대전 이후에 서두르는, 새로운 힘들 덕분에[때문에] 위기를 인식하게 되었다. 훈육사회들은, 그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있지 않는 것이고, 우리가 [거기에] 있기를 끝낸 것이다. (240-241)
우리는 감옥, 병원, 공장, 학교, 가정 등 감금의 모든 환경들에 대해 일반화된 위기 속에 있다. 가족은 “내부(un intérieur)”이며, 학교, 직업의 다른 내부처럼 위기에 처해(en crise) 있다. ... 학교를 개혁하는 것, 병원, 군대, 감옥 등을 개혁하는 것 [문제거리이다]; 그러나 각각은 제도들이 다소 긴 회기이지만 유한하다는 것을 안다. 중요한 것은 단지 문을 두드리는 새로운 힘들의 성립 때까지, 이들의 고뇌를 관리하는(gérer) 것, 이 시민들[소속인]을 고용하는(occuper, 차지하다) 것이다. 훈육사회들을 대체하는 중에 있는 것은 통제사회들(les sociétés de contrôle)이다. “통제”, 이것은 버로스(Burroughs, 1914-1997)가 새로운 괴물을 고안하기를 제안한 것이고, 푸꼬(Foucault, 1926-1984)가 우리의 가까운 미래로서 인정한 것이고, 비릴리오(Paul Virilio, 1932-2018)가 또한 끊임없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초특급 통제 형태들을 – 닫힌 체계의 지속에서 조작하는 낡은 규율들을 대체하는 형태들을 - 분석한 것이다. (241)
가장 엄한 또는 가장 관용 있는 체제가 어떤 것인지를 묻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들의 각각에서는 해방과 예속이 대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감금 환경으로서 병원의 위기에서, 부문화[업무구분]에서 즉 낮에 병원과 가정에서 돌봄은 처음에 새로운 자유를 표시할 수 있었으나, 또한 가장 엄한 감금들과 경쟁하는 통제 메카니즘들에 함께 나누어 참여할 수 있었다. 걱정하거나 희망하거나 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새로운 무기를 찾아야 한다. (242) [이 새로운 무기를 인민, 대중이 찾을 수 있을까? 대중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학습과 습득의 시간이 필요한데, 이 과정이 예속으로 비치는 것은 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넘어 저세상 등을 강조하는 삶의 방향이 예속 또는 포획된 것이 문제이지, 과정에서 일정부분을 같이 가며 다른 절편 또는 선들과 연대하여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작동이다. 그 새로움의 창안과 선들의 창조적 노력이 변혁을 가져온다.]
2) 논리적(Logique) 242
개인이 지내는 여러 다른 기숙제도들(les internats) 또는 갇힘의 환경들은 독립적인 변이[변종]들이다. 누구나(사람들은) 매번 제로(0)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그리고 모든 환경들의 공통적인 언어가 있고, 그 언어는 아날로그(analogique, 유비적)이다. 반면에 여러 다른 통제기구들(les contrôlat)은 분리할 수 없는 변수들이며, 변할 수 있는 기하학의 체계를 형성하는데, 그것의 언어는 디지털(numérique, 숫적)이다(이것이 필연적으로 이진법이라 말하고자 원하지 않는다). 감금들은 주물(des moules)들, 구별된 주형제조기들(des moulages)인데, 그러나 통제들은 마치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자동 변형하는 주형제조기 같은, 또는 마치 그 가루들이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변화하는 체(un tamis, 거르는 체질) 같은, 조절장치(une modulation)이다. 사람들은 그것을[체를] 임금의 문제들에서 본다. 즉 공장은 균형이라는 점에서, 생산 작업에서 가장 높은 가능성을 지닌, 임금에서는 가장 낮은 가능성을 지닌, 내적인 힘을 지니는 몸체(un corps)이다. 그러나 통제 사회에서 기업은 공장을 대체했고, 기업은 영혼(une âme)이고 가스(un gaz)이다.틀림없이 공장은 상여금들의 체계를 이미 알고 있고, 그러나 기업은, 도전들, 경쟁들, 극히 희극적인 토론들을 통과하는 영속적인 준안정성이 상태에서, 각 임금의 조절을 부여하기 위하여 더 깊이 힘쓴다. 만일 가장 바보스런 텔레비전의 방송 게임들(놀이들 les jeux télévisés)이 그 많은 성공을 거둔다면, 그것은 그 놀이들이 기업의 상태를 적합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242) - [개인의 몸의 활동은 아날로그인데, 여러 통제 기제들은 디지털이다. 이 둘 사이에 조절장치가 필요할 것인데, 공장은 그래도 생산과정의 몸의 활동이 주이라 생산과 임금의 균형을 잡으려 한다. 그런데 기업은 영혼이라 비유한 것이 흥미롭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상여금이 문제이다. 내가 보기에 균형있는 분배가 아니라 잉여착취일 것인데, 기업은 통제를 통해서 특히 텔레비전(매체)을 통해서 상여금의 놀이(게임)하듯이 한다고 표현하는 것 같다. 자본가와 자본에 봉사하는 경영자들은 상여금(배당금)의 확대를 매체들을 통해서 정당화하는 것이다. 공장이 신체이며 기업이 영혼이 되었다는 사고방식도 로고스 중심의 사고이며, 유기체화된 총체를 사유하는 누스의 사유는 아니다. 그런데 들뢰즈가 심신이론처럼 설명하는 것이 흥미롭다. 그래서 소제목도 논리적이라 했을 것이다. (54TKF) ]
공장은 개인들을 몸체(corps [조립체])로 구성했고, 이는 기업가와 노동조합의 이중 장점을 위해서이다. 기업가는 대중들 속에서 각 요소를 감시했고, 그리고 노동조합은 저항하는 대중을 동원했다. 그러나 기업은 끊임없이 진정시킬 수 없는 경쟁의식을 도입하며, 경쟁의식은 마치 건강한 대항의식처럼, 개인들 자체들 사이를 대립시키며, 각자를 자기 스스로 분리하게 하면서 각자를 관통하게 하는 탁월한 동기화작업이다. (242) [공장에는 기업가와 노동조합의 상관관계가 남아있다. 그러나 기업에서는 노동자를 개별화하고, 파편화하여 자기 스스로를 보존하는데 온 신경을 쓰게 만든다. 이는 앞에서 말한 매체들의 조절작업이 성공한 것이다(언론의 지배). 사실 기업은 부실해도 최고경영자의 몫(상여금)은 거대하고, 노동자는 생계비를 투쟁하는데, 기업의 폐쇄라는 협박으로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으로 계속 노동한다. - 그러면 경영자의 연봉과 노동자의 임금 사이의 조절을 통한 준안정상태를 만들 수는 없는가? 현 우리 상황은 혁명 아니면 불가능하다. 학벌(지식)과 학력(경력형성, 공무원 이력형성)의 격차가 임금의 격차이라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 직종 안에서 임금 격차를 두 배 이상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자해도, 기업과 (하청업체로서) 공장의 분리는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져 왔다. - 이런 착취와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매체의 역할이었던가? 학자들이 이에 동의하여 자본의 하수인 또는 포획자가 된 것이 아닌가? 학자들이 상층공상학과 심층실증학 사이를 구분하지 못하여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상층공상학의 침을 발라 글을 쓰고 있다는 것조차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을 통해 독일 철학 미국을 통해 들어온 영국철학 합하여 앵글로색슨 철학이 얼마나 상층공상학 인지에 대한 반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층공상학에 대해 다른 방향이 있음을 플라톤 전공자 박홍규선생님이 있었다. 벩송을 통한 운동과 시간으로부터. (54TKF)]
“성과급(salaire au mérite)”의 조정(적)원리는 국립학교교육 자체에서는 시도가 없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기업이 공장을 대체하고, 계속적인 경력형성(la formation permanente)이 학교(l’école)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고, 연속적 통제가 시험을 대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학교를 기업으로 넘기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243)
훈육의 사회들 속에서 사람들은 다시 시작하기를 멈추지 않았다(학교에서 병영으로, 병영에서 공장으로), 반면에 통제의 사회들에서 사람들은 아무 것하고도 끝내지 못한다: 기업, 경력[이력]형성, 서비스 등은, 마치 보편적 변형작업처럼, 동일한 조정 작업의 공존하는 준안정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사회의 두 전형을 경첩으로 세우면서, 소송에서 가장 두려운 법률적인 형태들을 묘사한다: 훈육사회들의 겉치레 방면(l'acquittement apparent)(두 감금들 사이에서)과 통제사회들의 무제한 유예(l'atermoiement illimité)(연속적 변이)는 매우 다른 두 가지 법률적인 양태들이며, 그리고 만일 우리의 권리가 주저하며 그 자체하면서 위기일 때, 그 이유는 우리가 다른 곳에 들어가기 위하여 한 곳을 떠나기 때문이다. (243)
훈육[규제] 사회들은 두 축을 갖는다. 개인(l’individu)을 지적하는 서명, 대중(mass) 속에서 자기 위치를 지적하는 수 또는 등록 번호이다. 규제들은 이들 둘 사이에서 양립불가능성을 결코 보지 못한다. ... 반대로 통제사회에서 본질적인 것은 서명도, 수(un nombre)도 아니고, 숫자(un chiffre)이다. [통제사회에서] 숫자는 군호(un mot de passe, 암호)이며, 훈육사회들은 명령어(des mots d’ordre, 암호)로 규제되어 있다(저항의 관점이라기보다 집합적 관점으로부터). 숫적 언어[디지털 언어]는 숫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정보의 접근과 거부를 표시한다. (243-244)
통화의 오랜 두더지(la taupe)는 감금 환경의 동물이다. 그러나 뱀(le sepent)은 통제 사회들의 동물이다.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체제 속에서, 또한 우리가 타인과 연관하여 살아가는 방식 속에서, 한 동물에서 다른 동물로, 두더지에서 뱀으로 지내왔다. 여러 훈육 받은 인간은 에너지의 불연속적 생산자였는데, 통제의 인간은 오히려 연속적 다발(faisceau) 위에 궤도를 도는 파동적이다. 도처에서 파도타기(surf, 컴퓨터 서핑)은 이미 낡은 스포츠들(sports)를 대체했다. (244)
기계의 전형들을 각각의 사회에 대응하게 하는 것은 쉽다. 기계들은 규정자들이 아니며, 기계들은 자기들이 생겨나서 봉사할 수 있는 사회적 형식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낡은 통치사회들은 단순한 기계들을, 지렛대, 도르래, 시계를 조립한다. 그러나 최근의 [훈육] 규율사회들은 엔트로피의 수동적 위험을 가지고 또 사보타주[느린 근무]의 능동적 위험을 가지고 있는 에너지 기계들을 한 단체[팀]으로서 삼는다. 통제사회들은 제3의 종류의 기계들에 의해, 정보기계들과 컴퓨터들에 의해, 조작 한다.이 기계들의 수동적 위험은 전파방해이고 능동적 위험은 해적질[헤킹]과 바이러스투입이다. 보다 깊숙이 자본주의의 변전[돌연변이]이 없이는 기술의 진화는 없다. 이미 잘 알려진 돌연변이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21세기의 자본주의는 생산작업을 위하여 소유의 집중화에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감금의 환경에서 공장을 세우고, 자본가는 생산 수단의 소유자이기에 또한 우발적으로 유비(아날로지)에 의해 생각된 다른 공간들(노동자의 가정적인 집, 학교)의 소유자이다. (244-245)
또한 생산[물]은 본질적으로 수익[이익창출]적이고, 공장은 기업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가정, 학교, 군대, 공장은 소유자로 향해 수렴하는 분명한 유비적 환경들이, 국가 또는 사적 권능이, 더 이상 아니며. 오히려 뒤틀 수도 있고 변형할 수도 있는 숫자화 된 모습들, 지배인들[경영자들]일 뿐인 동일한 기업의 [암호화된] 모습들이다. 심지어 예술은 은행의 열린회로 속에 들어가기 위해 닫힌 환경을 떠났다. 시장의 정복들은 통제의 장악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훈육의 경력형성에 의해서가 아니며, 원가의 절감에 의해서라기보다 경기의 고착화에 의해서, 생산의 전문화에 의해서라기보다 생산의 변형과정[치장]에 의해서 이다. 부패(la corruption)가 여기서 새로운 권능을 얻는다. 판매 봉사(서비스)가 중심 또는 기업의 “영혼”이 된다. (245) [들뢰즈가 - 요즘 우리 사회에서 - 유통에 영혼을 갈아 넣는다고 하는 용어를 들으면, ... 예전에는 공장에 노동을 갈아 넣는다고 하지, 영혼을 갈아 넣는다고 하지 않는다. 감정노동자라는 유행어에서 보면, 현실 사회의 체계에서는 논리도 진위도 아니고, 감화작용의 문제가 중요하다. (문제제기로서) 감응과 감명이 생성하는 즐겁다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통제는 짧은 회기[기간]와 빠른 회전에 있으며 또한 연속적이고 무제한적이다. 훈육[학습과 돈수]은 긴 지속이이며 무한하고 불연속적이다. 인간은 갇혀있는 인간이 더 이상 아니나, 빚진 인간이다. 사실상 자본주의는 극단적인 비참을 인류의 3/4에게 상수로서 간직하여, 너무나 가난해서 빚을 갚을 수도 없고, 가두기에는 너무나 숫자가 많다.통제는 경계들이 흩어짐에 대해 대처할 뿐만 아니라, 판자집들(bidonvilles, 달동네) 또는 게토들의 폭발에 대처할 것이다. (246) [슬럼가가 늘어날 것인가? 예전에는 도시 변두리인데, 이제는 도시 곳곳에 반지하, 고시빌딩 등에 자리 잡고 있다. 판자촌과 슬럼가를 분산하는 명목으로 재개발에 의한 고층 아파트로 대체하고 있다. 도시의 집중화에도 불구하고 규소의 시대에 중심이탈을 가속화 되고 있다. 그런데 도시 속의 공동화[빈건물]에 대처(?), 산업화의 변전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토지의 삶에서 인성함양으로 학이시습지와 돈돈수돈오의 길로... (54TKF)]
[[이 세 단계(이데아, 데미우르고스, 아페이론, 부동의 원동자, 로고스, 형성물)를 종교적으로 변주곡으로 쓴 것이 카프카의 대성당의 문지기 이야기일 것이다. 형이상학적으로 쓰면, 셋이란 벩송이 비판하려는 선전제의 둘 단일성(완전: 신 또는 절대자), 단일성을 파악한다는 지성(그것의 논리적 인식: 로고스), 이 둘을 따르다가 예속된 노예 또는 굴종의 의식(양심가책이든 죄의식이든)에 빠져 있는 수동자(비관주의자)를 의미할 수 있다. 카프카의 소송도 완전방면[순진무구], 겉보기방면, 무제한유예(연기)로 셋으로 나누었다. 천국을 우화로서 이야기하는 3가지 스타일에도 닮았다. 3가지란 형이상학에서, 종교에서, 그리고 국가 권력의 지배에서 이다. 들뢰즈는 제국(자본)의 통제 방식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푸꼬의 훈육사회의 예를 들어서 천국(통치사회) 천국의 입구 문지기에게(여러 훈육사회, 가정, 학교, 병영, 공장, 병원 또는 감옥) 잘 보여야 하거나, 천국을 이야기하면서 스스로를 자제(억제, 프로이트)하며 살아가는 통제사회(거푸집에 맞추는 조정 사회, 몸을 옷에 맞추는 조작)일 것이다. 통제사회의 극한은 알파제로에 의해 이루어 질 것이다. 삶은 천국에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 생성과 창조, 자율과 자유의 확장에 있다. - 천국입구의 문지기(염라대왕)와 같은 공상(fiction)이야기 대 산타클로스 할배 같은 우화 이야기에는 차히가 있다. 공상은 찾아가는 곳(낙원)이 있을 것이라는 허구이며, 우화는 도와 줄 것이라는 (구복) 것이 있다는 허구이다. - 바울에 의해 변형된 스토아 사상에서 두 가지, 즉 낙원과 구복을 설파한다. 부활에서 사는 곳이 있고, 그 가는 일에 무한한 사랑으로 도와주는 예수가 있다고 한 것이다. 그 도움을 받으려면 예수의 대속에 감사해야 하며 그 사랑과 부활을 기대하며 노동의 일부(염보돈)을 바쳐라. - 제국주의의 다른 모습 또는 잘 지어낸 이야기(nouvelle, 단편)의 다른 스타일이다. 자본 제국의 이야기이지만, ‘먹여 살려 준다 그리고 저항없이 예속을 따르라.’ 삼성의 방침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카르텔이라고 하는데, 사고가 굳은 것이며 사유하려 하지 않는다. 자주, 자치, 자유보다는 먹여주는데 예속하겠다는 사고. 예속화가 확장될 것인가? (54TKF)]]
3) 계획(Programme 진행순서) 246
통제의 메카니즘을 생각하기 위해 공상과학[소설](science-fiction)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공상소설은 매 순간에 개방된 환경 속에 요소의 지위를, 제한 속에서 동물이라는, 기업 속에서(전자 목걸이, collier électronique) 인간이라는 지위를 부여한다. 펠릭스 가타리는 한 마을을 상상했는데, 거기서 각자는, 이런 저런 가로막는[금지] 막대[통행막대]를 들어 올리게 하는 [개인적] 전자카드(carte électronique)덕분에, 자기 아파트를, 자기 거리를, 자기 구역을 떠날 수 있고, 그러나 또한 그 카드를 저런 날에는 내뱉을 수 있거나, 저런 시간들에는 들어간다. 생각해야 할 것은 통금 막대가 아니라, 오히려 컴퓨터이다. 컴퓨터가, 합법이거나 범법이거나, 각자의 지위에 자리를 정하고, 보편적 조정 작업을 한다. (246) [USB속에 각자의 자기 내용을 저장(등록)하고, 손에 든 스마트폰이라는 열쇠로 통행막대(출입구, 통행로)에 들어갈 수 있는 지 없는지가 결정될 것이고, 입장과 금지를 지시하는 것은 스마트폰에게 명령해주는 통제컴퓨터가 시행할 것이다. 그런 시대가 가까워지고 있다. 알파제로가 그런 사고를 하지 않을까? 문제는 번개, 낙뢰, 화산, 지진 등에 의해 정전되는 경우일 것이다. - 자연의 우연적 사건이라 할 수 있으나, 아자르(hasard, 우연)는 자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손과 발에도 있다. - 그 때 통행 문이 열리지 않을 것이다. 소통이란 몸의 활동과 지속에 있다. (54TKE)]
통제 메커니즘들의 사회기계공학적 연구는, 메커니즘의 여명기에 파악되었는데, 범주적이 되어야만 했고, 사람들이 위기라고 알린 감금이라는 훈육적 환경들의 장소에 자리 잡으려 진행 중인 것을 묘사해야만 했다. 옛 통치 사회들에게서 빌려온 낡은 수단들이 필연적인 적응현상들과 더불어 무대 위에 되돌아온다. (246)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의 시초에 있다는 것이다[소통의 통제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처음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방식 도입을 말하고 싶어한다.].
감옥들의 체제(le régime des prisons)에서, 경범죄를 위하여 적어도 “대체” 형법의 탐구, 전자 목걸이의 이용, .... [현재 우리 사회에서 n번방 관련자와 성범죄 발찌는 유용해 보이지 않는다.
학교들의 체제(le régime des écoles)에서, 연속적인 통제 형식들, 학교를 향한 영속적 학력형성의 활동, 대학에서 모든 탐구에 해당하는 포기, 학력의 모든 수준들에서 기업의 입문.
병원들의 체제(le régime des hopitaux) “의사도 환자도 없는” 새로운 의학[의료제도]. [신체 고통의 치료와, 정신병(psychose)의 돌봄은 다른 체계일 것이다. 물론 병원 안가고 자기 치료라는 것이 분야별로 있을 수 있다. 그렇기로 하면, 인민의 삶의 질이 높아야 한다. 최소한 누구나 삶의 터전에서 888(자는데8, 일하는데8, 먹고 만나는데8)을 실행할 수 있는 기본조건(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기업 체제(le régime d‘entreprise)에서, 화폐, 생산물들, 인간들의 새로운 취급방식. [여기서 화폐의 중앙 은행화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타탕하다. 그런데 지역자치의 활성화는 토지의 사적소유의 폐지가 중요하다.] (246-247) [들뢰즈의 네 가지 프로그램(4가지 체제에 대한 전환)은 소통시대에서 이루어져야 할 과제처럼 보인다. 잘못과 서툼에서 오는 위반을 범죄화하는 것에 대해 감옥체제의 변화를 말한 것인데, 이력형성과정에서 오류와 착오는 당연하지 않는가? 여러 실패들을 거쳐서 완성에 이른다. 학교와 병원의 새로운 체제는 우선 무상화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업체제는 산업의 상품경제가 보다, 토지의 생활 경제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것들은 아주 여린(실낱같은) 예들이며, 이 예들은 사람들이 [국가기구] 제도들을 위기에 의해 이해하는 것을, 새로운 영역의 체제의 – 점진적이고 또 흩어지는 - 창설을, 더 잘 이해하게 해 준다.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의 하나는 노동조합들의 부적응에 관한 것이다. 이 조합들은 자기들 전 역사에서, 감금의 환경 속에서 훈육[규율]들의 반대 투쟁에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조합들이 통제 사회들에 대항하는 저항의 새로운 형식들에 적응할 수 있고 또는 자리를 내줄 수 있는가? [앵글로색슨 계열에서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가 맑스주의를 벗어났다고 하는 비판이 이런 것인데, 규소의 시대를 생각해야 할 것이고, 훈육의 시대가 아니라 소통의 시대에 통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 앵글로색슨의 맑스주의자들은 질료론에 접할 수 없는 사고(로고스 중심 사고)에 젖어 있다. 예로서 사샤 릴리(Sasha Lilley, 1975-)의 자본과 불만들: 소동의 시대에 급진사상가들과 대화(Capital and Its Discontents: Conversations with Radical Thinkers in a Time of Tumult, 2011)(자본주의와 그 적들: 좌파 사상가 17인이 말하는 오늘의 자본주의, 한상연, 2011, 돌베게, 484쪽)이다. 앵글로색슨 학자들은 스토아의 기원과 이유(la raison)를 모른다.]
사람들은 미래에 올 형식들의 초안들을 도대체 파악할 수 있는가, 즉 상품구매의 즐거움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공장 노동조합이 택배 노동자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대부분의 알바 노동자는 사회장치 속에 안주하지 않고, 노마드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렇게 살아간다. - 저승이 좋다한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많은 젊은 청년은 낯설게도(이상하게도) 동기부여를 받기를 요청하고, 그들은 견습생으로 또 영구이력형성으로 몰린다.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봉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 그들의 몫인데[답: 인민에게], 마치 그들의 선배들이 힘들여서 훈육들의 목적성을 발견했듯이, 그들이 발견해야 한다. 뱀의 고리들은 두더지 굴의 구멍들보다 더 복잡하다. (247) [겉치레 방면(l'acquittement apparent)은 뱀의 고리들이고 두더지 굴의 구멍은 무제한 유예(l'atermoiement illimité)일 것이다.]
[들뢰즈의 분석은 푸꼬보다 한발 더 나아가 통제사회가 더욱 미세하게 훈육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면 노마드로서 전쟁기계의 활동방식은 무엇인가? (54NLA)] (lu, 54NLA)
[여기서 새로운 사회, 자율과 자치의 사회에서는 하나 토지의 인민화, 둘 의료와 교육의 무상화, 셋 하늘길 땅길 물길을 공동화. 여기에서 인민 삶 자체가 생성적이고 창조적이고 혁명적 작동과 활동이다. (54TKH)]
[이번 대선에서 검찰개혁, 사법개혁, 언론개혁에 대한 말로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개혁의 실재적인 활동에서 어는 쪽인가를 찾아야 할 것이다. 민중당, 녹색당, 노동당일 것이다. 숫적으로 다수임에도 소수자로 표현되는 다중지성이 표현과 저항이 드러날 수 있는 결선투표가 필수적이다. (54TKH)] (9:22, 54TKH) (8:32, 54TKI)
# 인명록
1769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였다.
1883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1914 버러우즈/버로스(William Seward Burroughs, 1914-1997)[여든다섯], 작가, 시인, 소설가, 화가, 시나리오작가, 공상과학 작가, 산문가, 사진가. 비트 세대. 동명의 아버지(아들보다 오래 살았다). 정키: 회복되지 못한 마약 중독자의 고백(Junky, 원제: Junkie: Confessions of an Unredeemed Drug Addict, 1953). // 1947 아들 버러우즈/버로스(William S. Burroughs Jr., 1947-1981)[서른넷] 미국 소설가, 작가. 동명의 버러우즈의 아들. 자전적 소설 속도(Speed, 1970).
1926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 철학자. 레이몽 루셀(Raymond Roussel, 1963), 지식의 고고학(L'Archéologie du savoir, 1969),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1975,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Histoire de la sexualité, vol. 1: La volonté de savoir, 1976), 성의 역사 3: 자기 배려(Histoire de la sexualité, 3: Le souci de soi, 1984)
1930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 고등학생 때부터 청년사회주의 단체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초기의 횡단성 개념을 통해 구조주의를 공격해 나가던 것에서 점차 분열분석 방법을 통해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실천을 모색하였다. 그는 국가권력의 탄압에 저항하면서도 권력 장악을 위한 대(大)정치가 아니라 다양한 주변자들, 소수자를 중심으로 대중들이 전개하는 '분자혁명'을 강조하였다.
1932 비릴리오(Paul Virilio, 1932-2018) 프랑스 도시계획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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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51(Europe 51(1952) 이탈리아 감독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1906-1977)의 이탈리아 영화. 여주인공: 잉그리드 버그만/베리만(Ingrid Bergman, 1915-1982)(스웨덴 출신 미국배우)
L'Autre Journal(sous-titre d'origine: Les Nouvelles littéraires), 작가 비텔(Michel Butel)이 창간한 프랑스 정기 간행물(1984 à 1993). 1986년부터는 주간지였다고 한다.
(lu 54NLA) (10:16, 54TKH) (10:26, 54TKI)
첫댓글 구멍들(les trous): 당신들이 저술목록과 전기의 [연결] 기준들을 나에게 적용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보기에 나는 충분히 일찍이 나의 첫 저술을 썼으며, 8년 동안 [경험론과 주관성(1947쓰고 1953출판)의 출판, 1953년 이후, 1962년 니체와 철학(1962)을 말할 것이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여러 해 동안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추상적으로 안다. 약간은 마치 다른 어떤 이가 나에게, 내가 믿지만 진실로 내가 아닌, 추억들을 말해 주는 것처럼. 나의 생애에 마치 구멍처럼, 8년의 구멍들(les trous)이 있다. 나에게 나의 생애에서 흥미로울 것 같은 것이 그러한 것인데, 그 구멍들은 빈칸(les lacunes)들을, 가끔은 드라마 같은 것을 허용하고, 그러나 가끔은 그렇지 않는 그런 구멍들이다. 여러 해에 걸친 강경증(强硬症, des catalepsies, 마비증) 또는 여러 종류의 몽유병을, 나의 생의 대부분은 허용했다. (188) - 들뢰즈, "철학에 관하여(1988)", Pourparlers 1972-1990, Minuit.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구멍과도 같다. 그것은 8년의 구멍인 것이다. 내가 인생에 있어서 흥미롭다고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것, 때로는 극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한, 인생에 뚫린 구멍들, 공백들이다. ..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구멍들 속에서 이다. ” - Giles Deleuze, "Signes et événements" - Magazine Littéraire n°257 Sept 1988. (한국어판 「철학에 관하여」, 『대담』, 김종호 옮김, 솔, 1993, 1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