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일 토요일 맑음
어제 저녁에 도착하여 예약한 호텔에 짐을 부린 후 바로 타멜 거리로 나가 바로 눈에 띠는 마트에 들어가 이름도 아름다운 에베레스트 비어를 두 병 샀다.
“건배, 우리들의 건강과 즐거운 여행을 위하여.”
“무사귀환을 위하여.”
집에서 썰은 후 꽁꽁 싸매 가지고 온 무김치에 맛있게 먹었다. 맥주의 온도는 냉장고 기능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은 듯 미지근함만 가시고 있어 딱 내가 좋아하는 온도이다. 진짜 에베레스트 만년설에서 녹아나오는 물로 만들었는지 맥주맛이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맛이 느껴졌다.
밤늦게 마신 맥주탓인지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밤새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일어나보니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확실히 서울 우리동네는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호텔이 밀집한 거리인데도 숲이 우거진 집이 많고 비둘기와 이런 저런 새들이 저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날아 다닌다. 건물의 외양은 지붕이나 창문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색깔도 나름 신경을 쓴 집들이 많아 네팔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언니는 일어나자마자 샤워부터 마치고 맨몸으로 돌아다녔다.
“언니, 누가 보면 어쩌려고. 옷이나 걸치고 다니세요. 커튼 쳐 드릴까요?”
“아니, 상관없어.”
“아침부터 네팔 남자들한테 육보시라도 하시게요?”
“보여주는 사람이 잘못인가? 보인다고 보는 사람이 잘못이지.”
“그럼요. 보이면 얼른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군자겠죠.”
첫 숙소가 허름하다거나 불편하여 마음에 안 들까봐 걱정했는데 아직까지는 괜찮은 듯 별 말이 없어 다행이다.
아침식사는 구운 토스트와 오믈렛, 베이컨, 과일, 버터와 잼으로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뭐가 잘못됐는지 방에 올라와 커피 한잔 내려마시고 나자 바로 언니는 화장실로 직행, 한바탕 쏟아내면서 신고식 한번 요란하게 한다. 다른 것은 똑같이 먹고 언니는 베이컨을 먹고 나는 소시지를 먹었는데 베이컨이 잘못되었나?
몇 년 전, 미얀마에 입성한지 며칠 되지 않아 택시 기사가 잘못 데려다 준 북한식당에서 비빔밥을 먹고 밤새 스무 번 넘게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다음날도 온종일 누워서 화장실을 적어도 스무 번은 더 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도 나는 비빔밥 대신에 평양냉면을 먹어서 화를 면했었다. 다행인 것은 이번에는 설사 한번으로 끝난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늘 먹거리에 조심을 하는 언니가 여행 내내 먹는 것을 더욱 조심을 기하는 바람에 네팔다운 음식이라든가 길거리 음식 같은 것은 거의 맛을 못보고 말았다.
나라얀히티 궁전 박물관,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 간 곳이다. 예전에는 지도를 보고 찾아갔다면 지금은 구글지도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 달라졌다. 늘 차도와 인도가 구분된 길만 걷다가 둘이 분리되지 않은 타멜 거리는 좁은데다 온갖 탈것이 빵빵 경적을 울리며 스칠 듯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아침부터 왜 그리도 많은지. 결국 택시를 타고 말았다.
1만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외국 대사들을 접견하던 크고 으리으리한 방과 왕의 가족들이 썼던 잘 꾸며진 방들과 직원들이 사용하였던 소박한 방들까지 얼마나 많은지 돌고 돌아도 끝이 나지 않았다. 이곳은 샤왕조가 거처하던 왕궁으로 2008년 공화정으로 바뀔때까지 사용되었고 그 이후에는 박물관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는 것이다. 2001년에 왕실 일가족을 몰살시킨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는데 이곳이 그곳이라니 역사의 현장속에 있다는 것이 남의 나라이지만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동남아시아의 왕궁들이 대개가 비슷한데 이곳의 특이한 점은 살아있는 거대한 호랑이나 사자 등 짐승을 잡아서 박제를 곳곳에 해 두고 접견실의 바닥에도 동물의 가죽을 벗긴 그대로 깔아 왕실의 위엄이 더 느껴지도록 했다는 점이다.
방은 갈수록 작고 수수해져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느낄 즈음 밖으로 나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잘 어우러진 정원을 둘러보다보니 실제 왕과 그의 가족들이 기거했던 공간이 따로 나왔다. 당시에 탔던 멋진 자동차와 마차들이 전시되어 있고 집안에는 사치스럽기도 하면서 나름 소박함이 묻어나는 왕과 왕비, 왕자들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저기 커피숍 뷰가 좋겠다. 한번 가보자.”
언니가 왕궁을 나서자마자 맞은편 최상층에 자리 잡은 커피숍을 발견하였다. 나는 아래만 보고 다니는 편이고 언니는 여기저기 위아래 잘 보고 다니는 편이다.
이곳은 타멜 거리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네팔의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백화점이고 커피숍은 맨 위층에 있었다. 히말라야 자바 커피숍으로 자국에서 생산되는 커피만을 취급하고 있다고 했다. 수제버거와 커피를 시켰는데 커피맛이 진하지도 않은데 향은 아주 풍부하여 네팔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자주 마셔줘야겠다 생각했다. 전세계적으로 안 들어간데가 없는 스타벅스가 유일하게 발을 못 붙이는 데가 네팔이라고 하는데 이유는 자국의 커피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나라얀히티 왕국 박물관이 바라보이는 창가에 앉아 오후 내내 시간을 보내다 왔다.
오는 길에 보니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들어가는 곳이 있어 우리도 들어가 보았더니 가든 오브 드림스라는 꽃과 나무가 잘 가꾸어진 정원이었다. 토요일 오후라서 인지 이곳의 많은 젊은이들이 친구들 혹은 연인과 와서 SNS에 올릴 사진과 동영상을 찍느라 분주하였다. 우리도 이들과 어울려 몇장의 사진을 찍고 잠시 분위기에 취해있다가 나왔다.
숙소로 돌아오니 나른하면서도 즐거운 것이 드디어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서 일 것이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오늘도 이시간이면 어제와 같은 하루를 보내고 저녁밥 먹고 텔레비전 보면서 잘 시간을 기다리고 있겠지?
쌀을 씻어 밥을 하고 오는 길에 산 야채를 다듬어 된장국을 끓여먹고 나도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이제부터 무엇을 하지? 하고 있는데 언니가 말했다.
“잠자려면 아직 이른데 저녁 산책이라도 하고 올까? 한국 식당에 들러 정보도 좀 얻고.”
그 사이 적응이 되었는지 타멜 거리가 익숙해졌다.
“언니, 오토바이에 치면 다친 사람만 손해니까 최대한 가로 붙어서 걸으세요.”
나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어느 유튜버가 삼겹살을 맛있게 먹었던 방송이 생각나서 대장금이라는 한국식당을 찾아갔다. 주인도 없고 손님도 없고, 허탕치고 나오려는데 우리 또래로 보이는 남자손님 세 분이 들어와 자연스럽게 합석을 하게 되었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같이 다닌 동창생들인데 다들 성공적인 삶을 살다가 얼마전에 퇴직을 하고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의기투합하여 네팔 트레킹에 도전을 하였다고 한다. 15일 동안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다녀오고 골프도 치고 저녁이면 한국식당에 와서 삼겹살을 먹으면서 팁을 팍팍 뿌리는 에너지 넘치는 전형적인 한국남자들이다. 보름동안 한국 사람을 거의 본적이 없어서 우리가 너무 반갑다며 또 삼겹살을 시켰다.
“감사합니다. 이것 그냥 먹기 그리니 내일 맥주는 우리가 살게요.”
그리고는 주는대로 덥석덥석 받아 마셨다. 배가 부른데도 네팔 맥주는 잘도 들어간다.
“언니, 우리 그냥 마시자. 내일 우리가 사면 되지 뭐.”
그런데 술을 통 크게 안 시키고 한 병 한 병 주저하면서 사서 얼마인지 물어보니 한병에 7천원이라고 한다. ‘허걱, 7천원? 맥주 한병에!’ 한국에서도 맥주 가격이 5천원으로 오르면서 식당에서 술을 안 마시는데 네팔에서 7천원이라니. 이럴줄 알았으면 가만히 있을걸 내일 술은 우리가 사겠다고 큰소리 뻥뻥 쳤으니 낼 이 술고래 아저씨들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밤새 머리 좀 굴려야할 듯.
일상을 벗어나 히말라야 설산을 맘껏 휘젓고 돌아온 때문인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호기롭고 우리보다 더 우리를 반갑게 대해주는 분들과의 시간은 계속 더 이어져 값비싼 아이스크림까지 얻어먹고 돌아왔다. 카트만두에 온지 이틀만에 평생 잊지 못할 재미있는 추억들이 벌써부터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언니, 그나저나 내일 그 아저씨들 술 너무 많이 마시면 어떡하지?”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잠이나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