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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폐가를 읽는 여행자
홍기정
시인은 누구인가? 시인은 세상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문예바다 2026년 봄호에 실린 몇 편의 시는 이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한다. 김부회의 「폐가를 읽다」, 김지요의 「시인」 등이 그렇다. 윤수향의 「밤송이」를 포함하여, 세 편의 시를 살펴 읽어 보자.
1. 김부회, 「폐가를 읽다」
부서진 벽 틈에서 바람이 운다
흙벽,
깨진 벽 귀퉁이에 팔랑거리는 누런 신문지 조각
도배지조차 못 붙이고
살다, 머물다, 떠나간 나름의 이유들이
낯선 여행길을 마중 나왔다
어느 날짜로부터 정지한 뉴스의 발자국이
촘촘히 음각된 폐가
골 깊은 낡은 시간은
점점 길어지는 망각의 주름들을
스스로 늘려 나가고 있다
한때의 가십과 뉴스
헌 뉴스가 된 하소연을 토렴하는 깊은 밤
제 키보다 웃자라는 숲의 무대를
등장하다 퇴장하는 숱한 활자의 그림자들
거욷하게 떨어져 나간 벽 사이
노쇠한 지문誌文들을 푸석한 온몸에 채록한 채
홀로 남아 허름해진 한 채
바람과 소리가 겨끔 내며 나풀거리는 계절
푸른 하늘을 실어 온 들판 달구지가
가만가만 짐을 부려 놓는
고단한 어둠의 차양 밑
달빛 아래 공손하게 달빛 등을 켜
우우웅, 모호한 소리들을 들춰 내며
길 찾는 사람을
혼자 반기고 있다
이 시는 인상적인 폐가 이미지를 보여 준다. 폐가의 벽은 신문지로 도배되어 있다. 오래된 신문지들은 바래고 찢어졌다. 화자는 이것의 묘사에 집중한다. “깨진 벽 귀퉁이에 팔랑거리는 누런 신문지 조각”, “어느 날짜로부터 정지한 뉴스의 발자국이/ 촘촘히 음각된 폐가”, “한때의 가십과 뉴스/ 헌 뉴스가 된 하소연을 토렴하는”, “제 키보다 웃자라는 숲의 무대를/ 등장하다 퇴장하는 숱한 활자의 그림자들”, “노쇠한 지문誌文들을 푸석한 온몸에 채록한 채/ 홀로 남아 허름해진 한 채” 등이 그렇다. 이 시는 상당 부분 이 이미지 묘사의 반복 변주이다.
신문지로 도배된 낡은 집은 고단한 이야기를 품은 늙은 인간을 닮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는 생명력을 소진한 인간 같다. 그에겐 인생 전체를 도배할 만큼의 가난과 고생 이야기가 있다. 사이사이 “한때의 가십” 같은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독자를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자기 안에 품고 소진해 갈 뿐이다. 폐가처럼 시간 속에 조금씩 부서져 갈 뿐이다. 이 시의 폐가 이미지는 이런 고단하고 쓸쓸한 삶의 끝자락을 비유적으로 보여 주는 듯하다. 인간에게 이야기하기는 숨쉬기와 같다. 읽히지 않는 이야기는 끊어진 숨과 같다.
이 시의 화자는 여행자이다. 그는 굳이 낯선 폐가에 들어가 도배된 신문지의 글자들을 읽어 본다. 이 행동은 ‘시인은 무엇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처럼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은 쓰는 사람이기에 앞서 읽는 사람이다. 폐가와 같이 고단하고 쓸쓸한 사람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에 다가가 기꺼이 귀 기울이는 사람이다. 이것이 시인의 임무에 대한 이 시의 이해이다. 그는 아무도 찾지 않아 버려진 이야기를 굳이 찾아 주워 들고 읽는 사람이다. 묵혀진 이야기를 읽어 주는 것은 승천하지 못한 자의 원을 풀어 주는 일 같기도 하다.
“바람과 소리가 겨끔 내며 나풀거리는 계절/ 푸른 하늘을 실어 온 들판 달구지가/ 가만가만 짐을 부려 놓는/ 고단한 어둠의 차양 밑”에 주목해 보자. 이 구절에는 평화로운 휴식과 같은 피로의 이미지가 나타나 있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두 가지 피로를 언급한다. 하나는 현대 성과사회의 자기 착취적 경쟁이 유발하는 탈진과 우울의 피로이고, 다른 하나는 무장 해제와 무위의 휴식이 가져다주는 평온과 치유의 피로이다. “고단한 어둠의 차양 밑”은 후자의 피로를 떠올리게 한다. 시인의 읽기를 통해, 폐가는 나쁜 피로를 풀고 좋은 피로의 상태에 접어든다.
폐가는 치유받고 건강해진다. “달빛 아래 공손하게 달빛 등을 켜/ 우우웅, 모호한 소리들을 들춰 내며/ 길 찾는 사람을/ 혼자 반기고 있다”는 그 건강해진 폐가의 모습을 보여 준다. 폐가가 품고 있던 글자들 또는 폐가와 같은 사람들이 품고 있던 이야기들은 시인의 도움을 받아 시가 된다. “우우웅, 모호한 소리들”은 그 시를 의미한다. 그 시는 “길 찾는 사람”에게 휴식처가 되어 주고 안내자가 되어 준다. 이제 폐가는 글자들을 품은 채 그저 소진해 가지 않는다. 시를 품고서 방황하는 사람을 기다린다.
2. 김지요, 「시인」
고양이 한 마리 동그랗게 누워 있다 앉았다 어디론가 걸어간다
요리조리 흙을 헤집어 보고 버려진 양동이를 기웃
물성이 궁금한 듯 핥아 보고 건드려 본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도
기다리지 않는 것도
햇빛 한 줌으로 한나절을 놀 것 같은 자세
발을 길게 뻗어 비린 골목의 맛을 물고 다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바람의 보법으로 걷는다
은밀하고 무심하게
마른풀만 남은 겨울의 공터 박새 한 마리 언 땅을 톡톡 두드리고 간다
고양이는 어떤 궁리에 도달한 듯 덤불을 헤치고 오래 들여다본다
안으로 잠긴 문 앞에
이 시는 고양이 한 마리에 대한 묘사이다. 이 고양이는 호기심이 많고 탐구심이 강하다. 흙을 헤집어 보는 것, 버려진 양동이를 기웃거리고 핥아 보는 것 등은 주변 세상 이것저것에 대한 고양이의 호기심과 탐구심을 보여 준다. 이 시의 흥미로운 점은, 제목이 ‘시인’이라는 것이다. 고양이의 행동은 시인의 일상 자세를 비유적으로 보여 준다. 시인은 고양이처럼 호기심과 탐구심을 가지고 주변을 세세히 살핀다. 그것은 자주 쓸데없는 짓이 되지만, 쓸데가 있고 없고는 시인의 관심사가 아니다. 시인은 모든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대한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도/ 기다리지 않는 것도”는 고양이의 무심한 듯한 태도를 보여 준다. 이것은 의미에 대한 시인의 태도이다. ‘누구’는 지금 이곳에 없는 자이다. 언젠가 올 것도 같지만 안 올 것도 같은 자이다. 그는 의미를 가지고 구원하러 오는 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들은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그 기다림으로 세월을 보낸다. 이 시의 고양이 같은 시인은 그러지 않는다. 시인은 자기 삶을 의미의 기다림으로 채우지 않는다. 그러나 아예 안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느슨하고 가벼운 태도를 유지하며 나름대로 탐구의 삶을 산다.
“햇빛 한 줌으로 한나절을 놀 것 같은 자세”를 보자. 그의 관심은 이런 것이다. 이곳에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궁극의 의미 같은 것이 아니라, 당장 나에게 와 있는 한 줌의 햇빛 같은 것이다. 그것은 아주 대단하진 않지만, 한나절 어울려 놀기 좋은 상대이다. 햇빛은 멀리 해로부터 온 것으로, 한 줌이라 소소해 보일 뿐 본질은 이곳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고양이 같은 시인에게 시란 그런 것이다. “햇빛 한 줌”은 시 한 줌과 같고, “한나절”은 한 생애와 같다. 한 줌 시와 더불어 한 생애를 노는 시인은 “바람의 보법”을 얻어 가볍게 “비린 골목”의 삶을 지나간다.
이 시는 시인은 누구인가 묻고 스스로 답한다. 시인은 대단한 의미 추구자가 아니다. 시인은 자기 세상의 호기심 많은 탐구자이다. 이 시적 탐구의 삶은 사랑의 삶이다. 그는 자기 삶을 사랑하여 변변찮은 주변 곳곳을 세밀히 들여다보고 핥아 보고 건드려도 본다. 그러면서 스스로 가벼워진다. 그는 어느 순간 잠겨 있는 의미의 문 앞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를 추구해서가 아니라 가벼워져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시가 보여 주는 상급 시인 지향은 이러한 가벼움을 얻은 자이다.
3. 윤수향, 「밤송이」
나는 별똥별을 주워 먹으며
허공 단칸방에 살고 있다
마음을 숨기려고
밤마다 달빛과 별빛으로 가시옷을 짜 입었다
여름 땡볕을 당겨 와
단단한 심장도 만들어 보았지만
가을바람 무심히 스쳐만 가는데도
후드득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겨울이 오는 차가운 땅의 맨살에 입술을 대고
열린 가슴팍으로 들락거리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별들의 반짝임이 시가 되지 못한 채 가시옷에 걸려 있다
네가 온다면
나를 찾아내고 만질 수 있다면
나는 너의 손끝을 찔러 혈서를 받을 것이다
그 핏방울로 따뜻한 포옹의 씨를 틔울 것이다
냉정한 바람도 엄혹한 눈발도 웃어넘기고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네가 온다면
몰락마저 달처럼 아름다운 소혹성으로 갈 수 있겠다(몰락=죽음)
지금 이 숲의 가을 속으로
네 체온을 뿌리며
너는 오고 있다
이 시는 재미있는 의인화 상상력을 보여 준다. 주인공은 밤송이이다. 1연 “나는 별똥별을 주워 먹으며/ 허공 단칸방에 살고 있다”와 “가시옷을 짜 입었다”에서 밤송이는 동화 속 주인공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밤송이는 가난하다. 그래도 남모르게 아름다운 별빛 꿈을 키운다. 그것은 사랑 또는 시의 꿈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난한 자의 아름다운 꿈은 철없음의 증거 같아서 드러내기 부끄러운 비밀이 된다. 가시옷의 퉁명스러움은 현실에서 비밀의 꿈을 지키는 방법이다. 그것은 가난 조건에서 자신을 지키는 자존심 가시이기도 하다.
밤송이는 가을이 되면 벌어져서, 품고 있던 밤알들을 땅으로 떨어뜨린다. 그러고 나서 자신도 떨어진다. 1연의 밤송이는 나무에 달린 어린 밤송이이다. 2연의 밤송이는 땅에 떨어진 어른 밤송이이다. 어린 밤송이는 가난하지만 꿈을 키운다. 어른 밤송이는 그 꿈을 송두리째 잃는다. 이 허망한 상실의 모습은 처참하다. “열린 가슴팍으로 들락거리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는다”와 “별들의 반짝임이 시가 되지 못한 채 가시옷에 걸려 있다”가 보여 주는 것은, 더는 간직할 수 없는 꿈을 멀리서 아쉽게 그려 보기나 할 뿐인 생의 패배자 같은 모습이다.
3연에서 밤송이는 2연과 다른 면모를 보인다. “네가 온다면/ 나를 찾아내고 만질 수 있다면/ 나는 너의 손끝을 찔러 혈서를 받을 것이다”는 강렬한 오기의 다짐을 보여 준다. 1연의 밤송이는 순진하면서 자존심 강하다. 2연의 밤송이는 상실감에 빠져 무기력하다. 3연의 밤송이는 용기와 각오를 보여 준다. ‘너’는 떠나보낸 사랑과 시의 꿈이다. 그것이 만약 나를 찾아온다면, 그러기만 한다면, 반드시 붙잡고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 3연의 밤송이는 땅에 떨어져 말라 가면서, 가능할지 알 수 없는 꿈을 각오와 함께 지닌다.
앞에서 가난한 밤송이의 아름다운 꿈을 사랑 또는 시의 꿈으로 보았다. 3연에서 이 꿈은 성질 변화를 보인다. 1연의 꿈은 허공에서 별빛으로 만든 꿈이다. 그것은 외부의 관심과 접근에 적대적인 홀로 간직한 꿈이다. 3연의 꿈은 이 꿈의 상실을 겪고 난 뒤 땅에서 갖게 된 새로운 꿈이다. 그 꿈은 ‘너’로 지칭되며, 만질 수 있는 몸과 피와 체온을 가졌다. 1연의 꿈이 현실 적대적인 초월과 낭만의 꿈이라면, 3연의 꿈은 현실 속 물질적인 관계 맺음의 꿈이다. 이것이 3연의 밤송이가 꾸는 새로운 사랑과 시의 꿈이다.
흥미로운 것은 “너의 손끝을 찔러 혈서를 받을 것이다”에 나타난 폭력성이다. 이것은 사랑 획득을 향한 독한 각오를 보여 준다. 사랑과 독기는 얼핏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래서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이 독기는 말라 가는 밤송이가 품은 관계의 꿈 갈망이 얼마나 절실한지 보여 준다. 가시옷 사용법도 달라진다. 1연의 가시옷은 홀로 간직한 꿈의 방어 도구이다. 3연의 가시옷은 관계의 꿈을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공격적인 포획 수단이다. 여기엔 성적인 암시도 있다. 성은 새로운 꿈에서 사랑과 시의 중요한 방법이 된다.
“냉정한 바람도 엄혹한 눈발도 웃어넘기고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에도 주목해 보자. 1연의 꿈은 쉽게 상처 입는다. 그것은 무심히 스쳐 가는 가을바람에도 후드득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3연의 꿈은 강하다. 그것은 냉정한 바람도 엄혹한 눈발도 웃어넘기겠다고 한다. 4연에서는 몰락마저도 아름다우리라고 말한다. 밤송이의 새로운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밤송이가 할 수 있는 것은 믿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지금 이 숲의 가을 속으로/ 네 체온을 뿌리며// 너는 오고 있다”가 보여 주는 것은, 아무 근거 없이 믿어야 할 뿐인 믿음이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다.
이 시는 인생과 꿈을 보여 준다. 젊은 시절과 나이 들어서의 꿈을 대비해 보여 주면서,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해 말한다. 꿈을 잃고 땅에 떨어진 밤송이가 말라 가면서 깨달은 것은 관계 맺음의 소중함이다. 이것은 좋은 삶의 결론이자 좋은 시의 결론이다. 좋은 시의 꿈은 좋은 삶의 꿈과 같을 것이다. 마지막 부분의 처절한 믿음과 기다림은, 가망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인간이 무엇을 붙잡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남은 선택지는 아무 근거 없이 붙들어야만 하는 희망과 믿음뿐일 수 있다. 삶은 이것에 기대어서만 겨우 버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간 문예바다 여름 호/ 시평)
홍기정 | 고려대 학부대학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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