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30> 서장 (書狀)
여사인(呂舍人)에 대한 답서(1)
사량분별은 계속 허상 만들어 낼뿐…
"모든 부처와 조사는 단 한 법(法)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다만 그 사람이 스스로 믿고 스스로 긍정하며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닫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단지 남의 입에서 나오는 말만을 취한다면, 사람을 그르칠 것입니다. 이 일은 결정코 언설상(言說相)을 떠나 있으며 심연상(心緣相)을 떠나 있으며 문자상(文字相)을 떠나 있습니다.
모든 상(相)을 떠남을 알 수 있는 자도 다만 여사인일 뿐이며, 죽은 뒤에 단멸(斷滅)인지 단멸이 아닌지를 의심하는 자도 다만 여사인일 뿐이며, 곧바로 가리켜 보이기를 바라는 자도 다만 여사인일 뿐이며, 매일 매 순간 성내거나 기뻐하거나 사량하거나 분별하거나 멍청함에 빠지거나 들떠 안절부절 못하는 것도 모두 여사인일 뿐입니다. 다만 이 여사인만이 여러 가지 기이하고 특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며, 모든 부처 모든 조사와 더불어 적멸의 대해탈광명(大解脫光明) 바다 속에서 함께 헤엄치며 세간과 출세간의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선(禪) 공부는 자기의 타고난 본성(本性)을 확인하고 본성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본성은 얻은 적도 없고 잃은 적도 없으며, 얻을 수도 없고 잃을 수도 없다. 주거나 받을 수도 없으며, 더하거나 덜할 수도 없다. 본성은 모양도 크기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양도 크기도 없는 본성을 어떻게 확인하는가?
눈으로 모양과 색을 볼 때 모양과 색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소리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 냄새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고, 입으로 음식맛을 볼 때 음식맛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고, 손으로 물건을 만질 때 촉감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고, 의식으로 무엇을 생각할 때 생각나는 무엇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는다. 즉 지금 온갖 행위동작하는 곳과 사려분별하는 곳과 느끼는 곳과 의욕하는 곳에서 상(相)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이러한 모든 행위동작과 사려분별과 느낌과 의욕이 모조리 본성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본성이니 선이니 공부니 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모두 본성이고 달리 또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지금 여기서 이 글을 읽고 이리 저리 생각하고 궁리하는 것이 바로 본성이고 따로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지금 밖에서 들리는 아이들 소리와 자동차 소리가 본성이며 손 끝에 느껴지는 신문지의 감각이 본성일 뿐이고 또 다른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본성은 매 순간 매 순간의 모든 일에서 조금도 숨김 없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도를 도라고 말하면 도이면서도 도가 아니고, 선을 선이라고 말하면 선이면서도 선이 아니고, 본성을 본성이라고 말하면 본성이면서도 본성이 아니다. 그 까닭은 진실로 모든 것이 도 아님이 없고 선 아님이 없고 본성 아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스스로 사량분별을 통하여 허황된 상(相)을 만들고는 그 허상에 애착하고 가로막혀서 그만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사량분별도 본성이고 사량분별로 만들어내는 허상조차도 모두 본성일 뿐 다른 무엇이 아니다. 어떤 것도 본성을 벗어나 따로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왜 본성을 진실하게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허상을 따라다니며 번뇌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가? 그 이유를 묻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또 하나의 허상을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해야할 일은 오직 하나, 허상을 극복하고 지금 이대로의 본성을 진실하게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허상은 사량분별에서 생기므로 사량분별을 통해서는 계속 허상을 만들어 낼 뿐, 허상을 극복할 수가 없다.
허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쉬어버리는 관문을 반드시 한 번 통과해야 한다. 이제까지 의지하고 있던 허상과 사량분별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마치 아무것도 잡을 것없는 허공(虛空)을 붙잡는 듯한 체험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간절하고 진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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