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에서 귀국한 후 얼마 안있다가 이란으로 발령났다. 어느덧 대림에서 4년째,해외생활만 3년째.당시 대림은 국내 공시보다는 해외 공시 비중이 거의 8:2정도 되었다.따라서 해외 근무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국내부서나 국내 현장경험이 없는 나에게는 국내발령받기는 어려웠고 또 해외근무를 당연시 했다.
테헤란에서 한시간 남짓 국내 비행기로 이란 남부 걸프만 지역의 조그마한 반다르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경이었다.당시 비록 소강상태이긴 했지만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시내는 온통 전쟁 분위기였다.모든 남자들은 짙은 밤색 잠바 차림이었고.거리와 벽에는 전쟁구호와 전사자들에 대한"신의 축복을"을 상징하는 구호가 널려 있었다.
열살 남짓한 소년들을 전쟁에 끌여들여 마치 오토바이 타고 놀러다니는 듯 이 어린 소년들을 정부에서 유인하여 이용한
것이다.
심지어 호메이니 정권(야하툴라 최고 종교지도자)은 처음 팔레비 왕정을 무너뜨리면서 국들에게 "이제 여러분에게는 평화가 왔다.여러분은 일할 필요가 전혀 없다.미국의 앞잡이 팔레비는 지금 수천조의 달러를 숨겨놓고 있었으니 우리는 그것만 쓰면 놀고 먹어도 된다"문맹율이 90%이상인 이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말만 믿고 호메이니 정권을 환호한 것이다.또"지금부터 모든 국민들에게는 하루 500$씩 배분해주겠다."국민들은 좋아서 날뛰었다.그리고 실제로 .처음 1개월 동안 국민들에게 하루 500달러씩 배분해 주었다.그런데 어느날 부터 쌀을 배급했고,기름도 배급했다.수십년동안 미국등 서방 자유주의에 물들어 있던 백성들은 차가 한집에도 여러대 있었다.그들은 이제 쌀 받으러 줄을 섰고,기름 받으러 줄을 섰다.그 줄이 몇백미터에 달했다.국민들은 겨우 기름을 넣고 나서 얼마 안 있으면 또 기름 준비를 해야했다.이젠 국민들은 당장 먹을 식량과 기름 배급받으려고 데모할 틈이 없어졌다.이렇게 종교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국민을 속였고,무식한 공것을 좋아한 백성들은 점점 비참해졌다.
우리들은 대형버스에 타고 200여킬로 떨어진 산속 깊은 공사 현장으로 갔다.갈 때 길이 험하다고는 느꼈지만 며칠후 휴일날 낮에 놀러가기 위해 다시 그길을 보고 그만 기절할 뻔 했다.길이 얼마나 가파르고 꾸불꾸불 한지 중간에 한번 버스가 구르면 수백리 낭떠러지로 떨어질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가파른 언덕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와서는 대개"여기서 죽치고 있다가 귀국할 때나 이길을 나가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사람마음이라는 게 이번 한번만 하면서 매번 휴일이면 다시 그 길로 휴일을 즐기로 가곤 했다.
나는 Contractor Manager (계약 담당관이라고불렀다).직윈은 혁명전 대령출신의 50대 초반의 Mr.Farid,한국인 김계장.유도대 출신의 사무보조 이군(26세),등 8명정도 되었다.
내 전임자는 김차장이었는데.키가 175센티정도 되는 40 대 중반의 그야말로 영국 신사였는데,런던지점장으로 갔고 나는그의 후임자로 온 것이다.특히 매너가 좋아서 직원들이 좋아했고 영어 통역인 Mr.Farid와 관계가 좋았다.나는 그를 내부하로 대접했으니 긴장관계가 될수 밖에..
그는 종교적인 지식도 풍부했고 무엇보다 아랍어(이란어) 글씨를 너무 예술적으로 잘썼다.그래서 자주 멋떨어지게 아랍어를 써놓고 마무리 할 때 마치 화룡첨정하듯 펜을 착~~ 위로 올리면서 멋지게 썼지?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보면 우리는 그저 감탄했다.사무보조 이 군은 당시 26세로 유도 육단의 건장한 체력을 가졌고 대학 2년때국가대표도 했는데 전망어 없어서 외국에 왔다고 했다.그는 체격과는 달리 심성이 아주 착했고,특히 회를 잘쳐서 휴일에 놀러갈 때는 회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우리는 현장에서 20여 키로 떨어진 바닷가에 가서 적돔 2-3마리를 사고 미리 준비해 둔 과일주를 가지고 마시며 유쾌하게 휴일을 즐겼다.
당시 공사감독으로 미스터.알리 아바이디라는 50후반의 이란인이 있었는데,그는 혁명전에 6개회사의 회장을 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언변이 아주 좋고,논리가 아주 교묘해서 우리를 매번 골탕먹이곤 했다.내가 현장 엔지니어들의 애로 또는 제안사항을 받으면 보퉁 일주일에 3-4통 영문 레터링을 해서
미스터 파리드에게 주면 그가 이란어로 번역해서 미스터 알리 아바이디
감독에게 보내는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때로는 우리의 영문과 번역문이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골탕을 먹였다.나는 파리드에게 정말 어떻게 된거냐고 물으면,파리드는 결코 오역이 아니고 사소한 것을 가지고 괜히 트집을 잡는다는 것이었다. 그런식으로 구실을잡아 공사진행을중단하기 일쑤였다 .우리 모두는 이 이란 공사 감독과 감정이 뒤틀려 있었다.그래서 매번 아침 부서장회의 때는 이 이란인 공사감독을 안주로 삼아 불평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회의때 현장소장 박이사가 걸려온 한통의 전화를 받더니,"야!알리 아바이디가 교통사고 로 죽었대.개새끼!"
그리고는 "평소 친했던(?) 고계장과 김과장이 장례시장에기서 잘가라고 인사 하고 오지!"그랬다.
그래서 우리 둘은 현장에서 가까운 공항에 갔으나 마침 비행기가 뜨는 날이 아니어서 가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위로를 전하고 되돌아 왔다.
캉간 공사 현장에서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는 현장에서. 2박3일로 가는 해발 3,000미터 고도의 2,500년역사의 "시라즈 궁전 관광"하는 것이었다.이것은 현장소장이 수고 많이한 직원에게 주는 일종의 특별휴가였다.나도 이 휴가를 얻은 기회가 생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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