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02. 소림사와 중국 선종
관광지로 변한 禪 발상지 안타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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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사 탑림 > |
사진설명: 소림사를 거쳐간 수많은 고승들의 유적과 정신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소림사 탑림. 전탑의 나라 중국을 대표할 만한 탑들이 촘촘하게 서있다. |
2002년 10월8일 화요일. 공현석굴에서 받은 감동을 가슴에 그대로 품은 채 등봉(登封)시로 향했다. 소림사에 가기 위해서였다. 무협지나 무협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중국무술의 성지(聖地) 소림사(少林寺). 그러나 무술 때문에 소림사에 가는 것은 아니다.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가 머물며 수행했던 곳이기에 굳이 일정에 넣었다.
등봉시에 도착하니 밤8시. 등봉시 야시장에서 밥을 먹고, 호텔에 들어가니 밤10시였다. 소림국제호텔 710호에 누워 책을 뒤적였다. 소림사에 대해 이렇게 나왔다. “임제종(臨濟宗)의 대가람이다. 고루(鼓樓)인 초조암(初祖庵)은 원(元)나라 때 건물이고 본전은 송나라 때(1125) 건물이다. 본전 내부에 있는, 인왕.용 등을 부각한 석주(石柱)는 유명하다. 석주 외에 다수의 당.송 이후의 비석, 동위시대의 삼존불, 북제시대의 조상(造像) 등 200기(基) 이상이 남아 장관을 이룬다. 사찰은 496년 북위 효문제가 발타선사를 위하여 창건했다. 달마(達磨)대사가 530년부터 9년간 여기서 좌선했다.” 북위 효문제가 제위에 있었던 시기는 471년부터 499년까지. 소림사는 효문제 말년에 창건된 사찰이었다.
다음날인 10월9일. 아침 일찍 소림사로 출발했다. 등봉시에서 소림사로 가는 길은 탄탄대로였다. 탁 트인 풍경, 잘 닦여진 아스팔트, 신선한 공기 등 모든 것이 좋았다. 도로 옆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고 있는데, 안내인 방호씨가 옆구리를 찔렀다.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니, 평지에 갑자기 우뚝 솟았다는 느낌이 드는, 거대한 산이 보였다. “숭산의 소실봉”이라고 설명했다. 과연 멋진, 말 그대로 웅장한 산이었다. “수많은 구도자들이 저 산을 넘어 소림사에 들렀겠지….” 산을 보는 순간 무수한 생각이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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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숭산 소실봉(맨위). |
숭산(嵩山)은 중국의 5대 명산 가운데 하나인 중악(中嶽). 국가가 신악(神嶽)으로 지정한 것은 당나라 때인 688년이지만, 이전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널리 존숭돼왔다. 광활한 평야지대 한 가운데 2300m나 되는 웅대한 거산이 우뚝 솟았으니, 웅자(雄姿)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숭산의 36개 봉우리 가운데 중앙의 준극봉(峻極峰), 동쪽의 태실봉(太室峰), 서쪽의 소실봉(少室峰)이 가장 유명하다. 수많은 사찰들이 숭산에 있지만, 소실봉 기슭에 있는 소림사와 태실봉 기슭에 있는 숭악사(嵩嶽寺)는 중국 제일의 명찰에 포함된다. 물론 지금은 관광의 명소이기도 하다.
한 참을 쳐다보았다. 넋을 놓고 있는데, “저 산을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소림사가 나온다”고 방호씨가 덧붙였다. 차는 계속 앞으로 달렸지만, 시선은 왼쪽의 산에 고정시키다시피 했다. 산의 오른쪽을 돌아가니 과연 많은 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상점도 있고, 가정집도 있고, 무엇보다 무술을 가르치는 학교가 연이어 나타났다. “소림무술을 가르치는 학교인데,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에서 유학 온다”고 설명했다. 학교 마당엔 학생들이 줄지어 무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얏! 얍! 어이!”하는 힘찬 구렁소리가 차에도 들려왔다. 무술의 본향인 소림사에 도착한 것이다.
달마대사 수행한 소림사 입구엔 무술학교 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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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소림사 입구에 위치한 무술학교에서 무술을 배우는 학생들. |
무술학교가 즐비한 곳을 지나 모퉁이를 돌아가니, 나무 사이로 소림사 전각들이 언뜻언뜻 보였다 사라졌다. 소림사! 말로만 듣고, 무협지에서만 읽었던 ‘少林寺(소림사)’ 현판이 걸린 산문이 나타났다. 돌사자가 일주문을 호위하고 있다. 산문을 지나 탑들이 즐비한 탑림(塔林)으로 곧바로 올라갔다. 탑림은 소림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데, 벽돌을 쌓아 만든 전탑(塼塔)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전탑의 나라’ 중국을 대표할만한 탑림이었다. 탑 사이를 다니다, 한 곳에 앉아 탑을 어루만졌다.
탑림에서 나와 소림사 본찰(本刹)로 들어갔다. 산문에 들어서니 좌우에 늘어선 즐비한 비석들이 맞아준다. 비석을 살펴보며 나아갔다. 소림사의 기나긴 역사를 보여주는 듯, 비석도 각양각색이다. 대웅전에 참배하고 왼쪽으로 가니 ‘육조당(六祖堂)’이 나온다. 육조당 뒷벽엔 달마대사가 숭산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그린 ‘달마귀서도’가 있고, 좌우로 달마대사부터 혜능스님까지 조사들의 상(像)이 모셔져 있다. 중국 선종의 역사를 되새겼다.
중국의 선은 520년경 갈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 소림사에 정착한, 천축 출신의 눈 큰 사문 달마대사와 함께 시작된다. 달마대사에서 시작된 선은 혜가.승찬.도신.홍인스님을 거쳐 육조 혜능스님(638~713)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적인 선’으로 만개된다. 달마대사에서 혜능스님까지의 이 시기는 “선이 능가종.동산종.우두종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지듯, 인물에 따라 다양한 종파의 활동이 펼쳐지며 인도선의 중국화를 모색하던 때”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선의 중국화를 이룬 인물이 혜능스님이었다. “혜능스님의 선은 문인인 하택신회(670~762)에 의해 크게 선양됐고, 마조도일(709~788).석두희천(700~790) 대에 이르러 완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혜능스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명인 하택신회 선사는 732년 활대(滑臺)에서 열린 무차법회를 통해 “홍인대사의 법을 이은 신수선사, 신수스님의 법을 이은 보적선사의 선은 북종선”이라며 “북종선은 점교(漸敎)로 방계(傍系)고, 돈오법인 혜능대사의 남종선이 달마 이래의 정통”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선의 본질에 있어 북종은 점차적 방편법 즉 점수법(漸修法)이고, 반면 달마 이래의 남종선은 방편으로서의 단계적인 수행인 좌선관행을 택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견성하는 돈오법(頓悟法)”이라며 신수스님 계열을 공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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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소림사의 금강역사상. |
하택선사가 ‘활대의 종론’과 낙양 하택사(荷澤寺)에서 북종선을 공격하며 혜능대사의 남종선을 선양하는 사이, 양자강 남쪽의 강서와 호남 지방에서는 혜능대사의 선을 계승.발전시키는 움직임이 조용하지만 성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강서의 마조도일 문중과 호남의 석두희천 문중이 그들인데, 마조선사에게 혜능대사의 선을 전한 스님은 남악회양(677~744), 석두선사에게 혜능대사의 선법을 전한 인물이 청원행사(?~740)였다. 마조선사와 그 문하는 활동지역의 이름을 따 ‘홍주종’으로, 석두선사와 문하는 ‘석두종’으로도 불리는데, 이 때 비로소 본격적 중국 선인 조사선(祖師禪)이 완성되는 것으로 학자들은 파악한다. 마조선사와 석두선사의 문하에서 몇 대가 지나 10세기 중반이 되면 석두계에서 조동종.운문종.법안종, 마조계에서 임제종.위앙종이 파생돼 ‘오가(五家)’가 성립된다. 100년 뒤인 11세기 중반, 임제종에서 황룡파와 양기파가 갈라져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이 성립되는데, 이 즈음 선은 ‘황금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선은 무엇인가” 되새겨
오가칠종 이후 점차 쇠퇴하던 선에 새로운 활력이 불어 넣어진 때는 12세기 중반. 임제종 계통의 대혜종고(1089~1163)스님이 간화선을 주창하고, 조동종 계열의 굉지정각(1091~1157)스님이 묵조선을 선양하자, 중국 선종은 새롭게 변모된다. 그러다 원나라 이후 선종은 점차 선과 교를 아우르는 선교일치(禪敎一致), 선과 정토사상을 융합한 선정일치(禪淨一致)의 종합불교를 지향하다, 거대한 족적을 불교사에 남긴 채 사라져가고 만다.
중국 선종 발전에 초석을 다진 달마대사, 도대체 달마대사가 중국에 온 이유가 무엇일까. 당시 강남불교 최대 후원자였던 양 무제(재위 502~549)와 달마대사가 벌였던 문답, 〈벽암록〉 제1칙 ‘달마확연무성(達磨廓然無聖)’에 나오는 법거량(法擧揚)을 통해 ‘문자적(文字的)으로’ 알아보자. “짐은 사찰을 세우고 경전들을 사서(寫書)하며, 스님들을 도왔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공덕이겠습니까.” “황제께서는 아무런 공덕도 쌓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과 진리와 수행자를 향한 내 헌신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그럼 부처님은 대체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아무 것도 가르치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내 앞에 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달마대사는 당시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중국 교학불교, 사찰을 창건하는 등 내용 보다 형식에 집착하는 교학불교를 비판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 동쪽으로 왔을 것이다. 문자에 얽매어 자신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양 무제를 뒤로 하고 달마대사는 뗏목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 북쪽으로 향했다. 북쪽으로 간 달마대사는 북위 조정이 인도 스님들을 위해 세운 소림사에 자리 잡았다. 달마대사는 그러나 경내에서 머물지 않고 뒷산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9년간 면벽참선에 몰두했다.
이런 저런 상념을 머리 속에 담은 채 ‘육조당’을 지나 ‘입설정’ 앞에 섰다. 달마대사가 혜가스님(선종 2조)을 제자로 받아들인 곳, 때문에 이곳은 중국 선불교의 탄생지에 해당된다. 어느 겨울날 한 젊은이가 동굴에서 돌아와 입설정에 머물던 달마대사를 찾아 왔다. 달마대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그는 눈 내리는 뜰에 서서 밤을 꼬박 새웠다. “무엇을 구하느냐.”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붉은 눈이 내리면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 젊은이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한쪽 팔을 잘랐고 순간 뜰의 눈은 온통 붉은 빛으로 변했다. 달마대사의 마음도 움직였다. “너의 마음을 이리 가지고 오너라. 내가 편하게 해 주마.” “찾아보니 없습니다.” “네 마음은 이미 편해졌다.”
입설정의 이런 역사성을 기념하듯, ‘단비구법입설인(팔뚝을 잘라 진리를 구하며 눈 속에 서 있는 사람)’이란 문구가 새겨진 주련이 기둥에 걸려있다. 건물 안에는 달마대사.혜가스님 등 조사스님들의 상(像)이 모셔져있고, 그 위엔 청나라 건륭 황제가 쓴 ‘설인심주(눈에 마음의 구슬을 새겨 놓았다)’ 편액이 걸려 있다. 소림사 경내 이곳저곳을 돌아본 후 다시 정문으로 향했다. ‘무술쇼’를 보여주는 등 관광지로 변한 소림사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입구 벽에 쓰여진 ‘선종조정’이란 큰 글씨와 일주문부터 천왕문까지 줄지어 서 있는 비석들을 바라보며, “선은 과연 현대문명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지금 한국에서 선은 무엇인지” “한국의 선이 대안사상이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등을 되새겨 보았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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