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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 김시습 (작품읽기) 평양은 옛 조선의 서울이었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방문하자, 기자가「홍범(洪範)」구주(九疇)의 법을 일러주었다. 무왕이 기자를 이 땅에 봉하였지만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 이곳의 명승지로는 금수산, 봉황대, 능라도, 기린굴, 조천석, 추남허 등이 있는데, 모두 고적이다. 영명사의 부벽정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영명사 자리는 바로 고구려 동명왕의 구제궁터이다. 이 절은 성 밖에서 동북쪽으로 이십 리 되는 곳에 있다. 긴 강을 내려다보고 평원을 멀리 바라보며 아득하기 그지없으니, 참으로 좋은 경치였다. 그림 그린 놀잇배와 장삿배들이 날 저물 무렵 대동문 밖에 있는 유기에 닿아 머물게 되면, 사람들은 으레 강물을 따라 올라와서 이곳을 마음대로 구경하며 실컷 즐기다가 돌아가곤 하였다. 부벽정 남쪽에는 돌을 다듬어 만든 사닥다리가 있다. 왼편에는 청운제, 오른편에는 백운제라고 돌에다 글자를 새겨 화주(華柱)를 세워 놓았으므로, 호사자(好事者)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천순(天順) 초년에 개성에 홍생이라는 부자가 있었다. 그는 나이도 젊고 얼굴도 잘생긴데다 풍도가 있었으며, 또한 글을 잘 지었다. 그가 한가윗날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평양에 베를 안고 와서 실을 바꾸었다. 그런 뒤에 배를 강가에 대자, 성안의 이름난 기생들이 모두 성문 밖으로 나와서 홍생에게 추파를 던졌다. 성안에 이생이라는 옛 친구가 살았는데, 잔치를 베풀어 홍생을 환영하였다. 홍생은 술이 취하자 배로 돌아갔지만 밤이 서늘하고 잠도 오지 않아서, 문득 장계가 지은 「풍교야박」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그래서 맑은 흥취를 견디지 못해 작은 배를 타고는, 달빛을 싣고 노를 저어서 올라갔다. 흥취가 다하면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올라가다가, 이르고 보니 부벽정 아래였다. 홍생은 뱃줄을 갈대 숲에 매어 두고, 사닥다리를 밟고 올라갔다.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며, 맑은 소리로 낭랑하게 시를 읊었다. 그때 달빛은 바다처럼 넓게 비치고 물결은 흰 비단처럼 고운데, 기러기는 모래밭에서 울고 학은 소나무에서 떨어지는 이슬 방울에 놀라서 푸드덕거렸다. 마치 하늘 위에 옥황상제가 계신 곳에라도 오른 것처럼 기상이 서늘해졌다. 한편 옛 서울을 돌아보니 하얀 성가퀴에는 안개가 끼어 있고, 외로운 성 밑에는 물결만 부딪칠 뿐이었다. 「맥수은허」의 탄식이 저절로 나와, 이내 시 여섯 수를 지어 읊었다. 부벽정 올라와 시흥을 못 견디고 읊으니 흐느끼는 강물 소리가 애끓는 듯하여라. 용 같고 호랑이 같던 고국의 기상은 이미 없어졌건만 황폐한 옛성은 지금까지도 봉황 모습 그대로일세. 모래밭에 달빛이 희니 기러기는 갈 길을 잃고 풀밭에는 연기가 걷혀 반딧불만 날고 있네. 사람 세상에 바뀌고 보니 풍경마저 쓸쓸해져 한산사 깊은 곳에서 종소리만 들려 오네. 임금 계시던 궁궐에는 가을 풀만 쓸쓸하고 구름 낀 돌층계는 길마저 아득해라. 청루 옛터에는 냉이풀만 우거졌는데 담 넘어 희미한 달 보며 까마귀만 우짖네. 풍류롭던 옛일은 티끌이 되었고 적막한 빈 궁성엔 찔레만 덮였구나. 오직 강물만이 옛날 그대로 울며 울며 도도히 흘러서 바다로 향하누나. 대동강 저 물결은 쪽보다도 더 푸르네. 천고 흥망을 한탄한들 어이하랴. 우물에는 물이 말라 담쟁이만 드리웠고 돌 단에는 이끼가 끼어 능수버들만 늘어졌네. 타향의 풍월을 천수나 읊고 보니 고국의 정희에 술이 더욱 취하여라. 달빛이 난간에 밝아 졸음조차 오지 않는데 밤 깊어지며 계화 향기가 살며시 떨어지네. 오늘이 한가위라 달빛은 곱기만 한데 외로운 옛성은 볼수록 서글퍼라. 기자묘(箕子廟) 뜨락에는 교목이 늙어 있고 단군사(檀君祠) 벽 위에는 담쟁이가 얽히었네. 영웅은 적막하니 지금 어디에 있는가 풀과 나무만 희미하니 몇 해나 되었던가? 오직 그 옛날의 둥근 달만 남아 있어 맑은 빛이 흘러나와 이 내 옷깃을 비추네. 동산에 달이 뜨자 까막까치 흩어져 날고 밤 깊어지자 찬이슬이 나의 옷을 적시네. 문물은 천년이라 옛 모습 간 데 없건만 만고의 강산에도 성곽은 허물어졌네. 하늘에 오른 성제(聖帝)께선 돌아오지 않으시니 인간에 남긴 이야기를 무엇으로 증거하랴. 황금수레에 기린 말도 이제는 자취 없어 연로(輦路)에는 풀 우거지고 스님만이 홀로 가네. 찬이슬이 내리자 뜰의 풀이 다 시드는데 청운교와 백운교는 마주보고 서 있구나. 수나라 대군의 넋이 여울에서 울어예니 임금의 정령(精靈)이 가을 매미 되었던가. 한길에는 연기만 낀 채 수레 소리도 끊어졌는데 소나무 우거진 행궁(行宮)에는 저녁 종소리만 들리네. 누각에 올라 시를 읊어도 그 누가 함께 즐길 건가 달 밝고 바람도 맑아 시흥이 시들지 않네. 홍생은 읊기를 마친 뒤에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일어나 그 자리에서 춤을 추었다. 한 구절을 읊을 떄마다 흐느껴 울었다. 바로 뱃전을 두드리고 퉁소를 불며 서로 화답하는 즐거움은 없었지만, 마음 속으로 느꺼워하였다. 그래서 깊은 구렁에 잠긴 용도 따라서 춤추게 할 만하였고, 외로운 배에 있는 과부도 울릴 만하였다. 시 읊기를 마치고 돌아오려 하자 밤은 벌써 삼경이나 되었다. 이때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서쪽에서 들려 왔다. 홍생은 마음 속으로 "절의 스님이 시 읊는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찾아오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하며 앉아서 기다렸다. 그런데 나타나고 보니 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두 시녀가 좌우에서 따르며 모셨는데, 한 여인은 옥자루가 달린 불자(拂子)를 잡았고, 다른 한 시녀는 비단 부채를 들고 있었다. 여인은 위엄이 있고도 단정하여, 마치 귀족집 처녀 같았다. 홍생은 뜰 아래로 내려가 담 틈으로 비켜서서 그가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았다. 여인은 남쪽 난간에 기대어 서서 달빛을 보며 작은 소리로 시를 읊었는데, 풍류와 몸가짐이 엄연하여 범절이 있었다. 시녀가 비단방석을 펴자, 여인이 얼굴빛을 고치고 자리에 앉아 낭랑한 소리로 말하였다. "여기서 방금 시를 읊던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어디에 있소? 나는 꽃이나 달의 요물도 아니고, 연꽃 위를 거니는 주희도 아니라오. 다행히도 오늘처럼 아름다운 밤을 맞고 보니, 만리장공 넓은 하늘에는 구름도 걷히었소. 달이 높이 뜨고 은하수는 맑은데다, 계수나무 열매가 떨어지고 백옥루는 차갑기에, 한잔 술에 시 한 수로 그윽한 심정을 유쾌히 풀어 볼까 하였소. 이렇게 좋은 밤을 어찌 그대로 보내겠소?" 홍생이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였다. 그래서 어찌할까 머뭇거리다가 가늘게 기침소리를 내었다. 시녀가 기침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와서 청하였다. "저희 아가씨께서 모시고 오라 하였습니다." 홍생이 조심스럽게 나아가서 절하고 꿇어앉았다. 여인도 또한 별로 어려워하지 않으며 말하였다. "그대로 이리 올라오시오." 시녀가 낮은 병풍으로 잠깐 앞을 가리었으므로, 그들은 얼굴을 서로 반만 보았다. 여인이 조용히 말하였다. "그대가 조금 전에 읊은 시는 무슨 뜻이오? 나에게 외어 주시오." 홍생이 그 시를 하나하나 외어 주자, 여인이 웃으며 말하였다. "그대는 나와 함께 시에 대하여 이야기할 만하오." 여인이 시녀에게 명하여 술을 한차례 권하였는데, 차려 놓은 음식이 인간세상의 것과 같지 않았다. 먹으려 해봐도 굳고 딱딱하여 먹을 수가 없었다. 술맛도 또한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여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속세의 선비가 어찌 백옥례(白玉醴)와 홍규포(紅 脯)를 알겠소." 여인이 시녀에게 명하였다. "너 빨리 신호사에 가서 절밥을 조금만 얻어 오너라." 시녀가 시키는 대로 가서 곧 절밥을 얻어 왔다. 그러나 밥뿐이었고, 반찬이 또한 없었다. 그래서 다시 시녀에게 명하였다. "얘야. 주암(酒巖)에 가서 반찬도 얻어 오너라." 얼마 되지 않아서 시녀가 잉어구이를 얻어 가지고 왔다. 홍생이 그 음식들을 먹었다. 그가 음식을 먹고 나자, 여인이 이미 홍생은 시에 따라 그 뜻에 화답하였다. 향기로운 종이에 시를 써서 시녀로 하여금 홍생에게 주도록 하였는데, 그 시는 이러하였다. 부벽정 오늘밤에 달빛 더욱 밝은데 맑은 이야기에 감회가 어떻던가? 어렴풋한 나무 빛은 일산처럼 펼쳐졌고 넘치는 저 강물은 비단치마를 둘렀네. 세월은 나는 새처럼 어느새 지나갔고 세상일도 자주 변해 흘러가 버린 물 같아라. 오늘밤의 정회를 그 누가 알아주랴 깊은 숲에서 종소리만 이따금 들려 오네. 옛성에 올라 보니 대동강이 어디런가 푸른 물결 밝은 모래밭에 기러기 떼가 울며 가네. 기린 수레는 오지 않고 님도 벌써 가셨으니 봉피리 소리 끊어졌고 흙무덤만 남았어라. 갠 산에 비가 오려나, 내 시를 벌써 이뤄졌는데 들판 절에는 사람도 없어 나 혼자 술에 취하였네. 숲 속에 자빠진 동타(銅駝)를 내 차마 보지 못하니 천년의 옛 자취가 뜬구름 되었어라. 풀뿌리 차갑다고 쓰르라미 울어대네. 높은 정자에 올라 보니 생각조차 아득해라. 비 그치고 구름 끼니 지나간 일이 가슴아픈데 떨어진 꽃 흐르는 물에 세월이 느껴지네. 가을이라 밀물소리 더더욱 비장한데다 물에 잠긴 저 누각엔 달빛마저 처량해라. 이곳이 그 옛날엔 문물이 번성했었지 황폐한 성 늙은 나무가 남의 애를 끊는구나. 금수산 언덕 앞에 금수가 쌓여 있어 강가의 단풍들이 옛성을 비쳐 주네. 어디서 또닥또닥 다듬이소리가 들려 오나? 뱃노래 한 가락에 고깃배가 돌아오네. 바위에 기댄 고목에는 담쟁이가 얽혀 있고 풀 속에 쓰러진 비석에는 이끼가 끼었구나. 말없이 난간에 기대어 지난 일을 생각하니 달빛과 파도소리까지 모두가 슬프기만 해라. 별들이 드문드문 하늘에 널렸는데 은하수 맑고 옅어 달빛 더욱 밝았구나. 이제야 알겠으니 모두가 허사로다 저승을 기약키 어려우니 이승에서 만나 보세. 술 한잔 가득 부어 취해 본들 어떠랴 풍진 세상에 삼척검을 마음에다 둘 텐가? 만고의 영웅들도 티끌이 되었으니 세상에 남는 것은 죽은 뒤의 이름뿐일세. 이 밤이 어찌 되었나, 밤은 이미 깊어졌네. 담 위에 걸린 달이 이제는 둥글어졌네. 그대와 지금부터 세속 인연을 벗었으니 한없는 즐거움을 나와 함께 누려 보세. 강가의 누각에는 사람들이 흩어지고 뜰 앞의 나무에는 찬이슬이 내리네. 이 뒤에 다시 한 번 만날 때를 알고 싶다니 봉래산에 복숭아 익고 푸른 바다도 말라야 한다네. 홍생은 시를 받아 보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가 돌아갈까 봐 염려되어, 이야기를 하면서 붙잡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보았다. "송구스럽지만 당신의 성씨와 족보를 듣고 싶습니다." 여인이 한숨을 쉬더니 대답하였다. "나는 은나라 임금의 후손이며 기씨의 딸이라오. 나의 선조(기자)께서 실로 이 땅에 봉해지자 예법과 정치제도를 모두 탕왕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였고, 팔조(八條)의 금법(禁法)으로써 백성을 가르쳤으므로, 문물이 천년이나 빛나게 되었었소. 갑자기 나라의 운수가 곤경에 빠지고 환난이 문득 닥쳐와, 나의 선친(준왕)께서 필부(匹夫)의 손에 실패하여 드디어 종묘 사직을 잃으셨소. 위만(衛滿)이 이 틈을 타서 보위(寶位)를 훔쳤으므로, 우리 조선의 왕업은 끊어지고 말았소. 나는 이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절개를 굳게 지키기로 다짐하고 죽기만 기다렸을 뿐인데, 홀연히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나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셨소. '나는 본래 이 나라의 시조인데, 나라를 잘 다스린 뒤에 바다 섬에 들어가 죽지 않는 선인(仙人)이 된 지가 벌써 수천 년이나 되었다. 너도 나를 따라 하늘나라 궁궐에 올라가 즐겁게 노니는 것이 어떻겠느냐?' 내가 응낙하자 그 분이 마침내 나를 이끌고 자기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가서 별당을 지어 나를 머물게 하고, 나에게 현주(玄洲)의 불사약을 주셨소. 그 약을 먹고 몇 달이 지나자 홀연히 몸이 가벼워지고 기운이 건장해지더니, 날개가 달려 신선이 된 것 같았소, 그때부터 하늘에 높이 떠서 천지 사방을 오가며 동천복지(洞天福地)를 찾아 십주(十洲)와 삼도(三島)를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었소. 하루는 가을 하늘이 활짝 개고 하늘 나라가 밝은데다 달빛이 물처럼 맑았소. 달을 쳐다보니 갑자기 먼 곳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소. 그래서 달나라에 올라가서 광한청허지부(廣寒淸虛之府)에 들어가 수정궁으로 항아를 방문하였더니, 항아가 나더러 절개가 곧고 글을 잘 짓는다고 칭찬하면서 이렇게 달래었소. '인간세상의 선경(仙境)을 비록 복지(福地)라고는 하지만, 모두 풍진(風塵)의 땅이다. 하늘나라에 올라와서 흰 난새를 타고 계수나무 아래에서 맑은 향내를 맡으며, 푸른 하늘에서 달빛을 띠고 옥경(玉京)에서 즐겁게 놀거나 은하수에서 목욕하는 것보다야 낫겠느냐?' 그리고는 나를 향안(香案) 받드는 시녀로 삼아 자기 곁에 있도록 하여 주었는데, 그 즐거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소. 그러다가 오늘 저녁에 갑자기 고국 생각이 나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며 고향땅을 굽어보았소. 산천은 옛 그대로였지만 사람들은 달라졌고, 밝은 달빛이 연기와 티끌들을 가려 주었으며, 맑은 이슬이 대지에 쌓인 먼지를 깨끗이 씻어 놓았기에, 옥경을 잠시 하직하고 살며시 내려와 보았소. 조상님의 산소에 절하고는, 부벽정이나 구경하면서 회포를 풀어 볼까 해서 이리로 왔었소. 마침 글 잘 하는 선비를 만나고 보니, 한편 기쁘고도 한편 부끄럽소. 더군다나 그대의 뛰어난 시에다 노둔한 붓을 펼쳐 화답하였으니, 감히 시라고 한 게 아니라 회포를 대강 펼쳤을 뿐이오." 홍생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아래 세상의 우매한 사람이야 초목과 함께 썩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나라의) 왕손이신 선녀를 모시고 시를 주고받게 될 줄이야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홍생은 그 자리에서 한 번 읽어 본 시를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다시 엎드려서 말하였다. "우매한 이 사람은 전세에 지은 죄가 많아서 신선의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만, 다행히도 글자는 대강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녀께서 지으신 시도 조금은 이해하였는데,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사미(四美)를 갖추기가 어려운데 (이제 이 네 가지가 다 갖추어졌으니), 이번에는 「강정추야완월(江亭秋夜玩月)」로 제목을 삼아서 사십 운(韻)의 시를 지어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붓을 적셔 한번에 죽 내리썼다. 구름과 연기가 서로 얽힌 듯하였다. 붓을 달려서 곧바로 지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였다. 부벽정 달 밝은 밤에 먼 하늘에서 맑은 이슬이 내렸네 맑은 빛은 은하수에 빛나고 서늘한 기운은 오동잎에 서려 있네. 눈부시게 깨끗한 삼천리에 십이루(十二樓)가 아름다워라. 가녀린 구름에는 반 점 티끌도 없는데 가벼운 바람이 눈앞을 스치네. 넘실넘실 넘치며 흐르는 물에 아물아물 떠나는 배를 보내네. 배 안에서 창 틈으로 엿보니 갈대꽃이 물가를 비추는구나. 「예상곡」이 들리는 건가 옥도끼로 다듬은 건가. 진주조개로 집을 지어 염부주(炎浮洲)에 비치는구나. 지미(知微)와달구경하고 공원(公遠)을 따르며 놀아 보세나. 달빛이 차갑자 위나라 까치가 놀라고 오나라 소는 그림자보고 헐떡이네. 은은한 달빛이 푸른 산을 두르고 둥근 달이 푸른 바다에 떴는데, 그대와 함께 창을 열어 젖히고 흥겨워 주렴을 걷어올리네. 이자(李子)는 술잔을 멈추었고 오생(吳生)은 계수나무를 찍었지. 흰 병풍이 빛도 찬란한데 아로새긴 채색 휘장이 쳐져 있네. 보배로운 거울을 닦아 내어 처음 걸고 얼음 바퀴 구르던 것도 멈추지 아니하네. 금물결은 어이 그리도 아름다우며 은하수는 어이 그리도 유장한지, 요사스런 두꺼비는 칼을 뽑아 없애고 교활한 옥토끼는 그물을 펼쳐 잡아 보세. 먼 하늘에는 비가 처음 개고 돌길에는 맑은 연기가 걷혔는데, 난간은 숲 사이에 솟았고 섬돌에선 만 길 못을 굽어보네. 머나먼 곳에서 그 누가 길을 잃었나? 고향 나라 옛 친구를 다행히도 만났네. 복사꽃과 오얏꽃을 서로 주고받으며 잔에 가득 부어 술도 주고받았네. 초에다 금을 그어 다투어 시를 짓고 가지를 더해 가며 취토록 마셔 보세. 화로 속에선 까만 숯불이 튀고 노구솥에선 보글보글 거품이 이네. 오리 향로에선 용연향(龍涎香)이 풍겨 오고 커다란 잔 속에는 술이 가득해라. 외로운 소나무에선 학이 울고 네 벽에선 귀뚜라미가 우는구나. 호상에서 은호와 유량이 이야기하고 진저(晉渚)에서 사령운이 혜원과 노닐었었지. 어렴풋이 거친 성터에 쓸쓸하게 초목만 우거져, 단풍잎은 하늘하늘 떨어지고 누런 갈대는 차갑게 사각거리네. 선경이라 하늘과 땅이 넓기만 한데 티끌 세상엔 세월도 빠르구나. 옛 궁궐엔 벼와 기장이 여물었고 사당에는 가래나무와 뽕나무가 늘어졌네. 남은 자취는 빗돌 뿐이던가 흥망을 갈매기에게나 물어 보리라. 달님은 기울었다가 다시 차니 인생이란 하루살이 같아라. 궁궐은 절간이 되고 옛날의 임금들은 세상 떠났네. 반딧불이 휘장에 가려 사라지자 도깨비불이 깊은 숲에서 나타나네. 옛날일 생각하면 눈물만 떨어지고 지금 세상 생각하면 저절로 시름겨우니, 단군의 옛터는 목멱산만 남았고 기자의 서울도 실개천뿐일세. 굴속에는 기린의 자취가 있고 들판에는 숙신(肅愼)의 화살만 남았는데, 난향(蘭香)이 자부(紫府)로 돌아가자 직녀도 용을 타고 떠나가네. 글 짓는 선비는 붓을 놓고 선녀도 공후를 멈추었네. 노래를 마치고 사람들 흩어지려니 고요한 바람에 노 젓는 소리만 들려 오네. 여인은 쓰기를 마친 뒤에 공중에 높이 솟아 가버렸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인이 돌아가면서 시녀를 시켜 홍색에게 말을 전하였다. "옥황상제의 명이 엄하셔서 나는 이제 흰 난새를 타고 돌아가겠소. 맑은 이야기를 다하지 못했기에 내 속마음이 아주 섭섭하오." 얼마 뒤에 회오리바람에 불어와 땅을 휘감더니 홍생이 앉았던 자리도 걷고 여인의 시도 앗아가 버렸는데, 이 시도 또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이야기를 인간 세상에 전하여 퍼뜨리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홍생은 조용히 서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는데,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니었다. 난간에 기대서서 정신을 모으고는 여인이 하였던 말들을 모두 기록하였다. 그는 기이하게 만났지만 가슴속에 쌓인 이야기를 다하지 못한 것이 서운하여, 조금 전의 일들을 회상하면서 시를 읊었다. 양대(陽臺)에서 꿈결에 님을 만났었네. 어느 해에야 옥피리 불며 다시 돌아오시려나. 대동강 푸른 물결이야 비록 무정하지만 님 떠난 저 곳으로 슬피 울며 가는구나. 시 읊기를 마치고 사방을 둘러보니 산 속의 절에서는 종이 울고 물가 마을에서는 닭이 우는데, 달은 성 서쪽으로 기울고 샛별만 반짝이고 있었다. 다만 뜰에서 쥐소리가 들리고 자리 옆에서는 벌레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홍생은 쓸쓸하고도 슬펐으며 숙연하고도 두려워졌다. 마음이 서글퍼져서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돌아와 배에 올라탔는데도 우울하고 답답하였다. 어제 놀던 강언덕으로 갔더니 친구들이 다투어 물었다. "어제 저녁에는 어디서 자고 왔는가?" 홍생은 속여서 말하였다. "어제 밤에는 낚싯대를 메고 달빛을 따라 장경문 밖 조천석 기슭까지 가서 좋은 고기를 낚으려고 하였었지. 그런데 마침 밤 날씨가 서늘해서 물이 차가워져, 붕어 한 마리도 낚지 못하였다네.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친구들도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뒤에 홍생은 그 여인을 연모하다가 병을 얻어 쇠약해진 몸으로 자기 집에 돌아왔지만, 정신이 황홀하고 헛소리가 많아졌다. 병상에 누운 지가 오래 되었지만 조금도 차도가 없었다. 홍생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엷게 단장한 미인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우리 아가씨께서 선비님의 이야기를 옥황상제께 아뢰었더니 상제께서 선비님의 재주를 사랑하시어, 견우성 막하(幕下)에 붙여 종사관으로 삼으셨습니다. 옥황상제께서 선비님께 명하셨으니 어찌 피하겠습니까?" 홍생은 놀라서 꿈을 깨었다. 집안 사람을 시켜서 자기 몸을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 입히게 하였다. 향을 태우고 땅을 쓴 뒤에 뜰에 자리를 펴게 하였다. 그는 턱을 괴고 잠깐 누웠다가 문득 세상을 떠났는데, 바로 구월 보름날이었다. 그의 시체를 빈소에 모셨는데, 며칠이 지나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홍생이 신선을 만나서 시해(弑害)된 것이다.' 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