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의 생물학
이제 과학도 요리가 대세?
| 입력 2015년 03월 30일
우리의 문명을 돌아볼 때 금성 대기의 온도를 측정할 수 있는 인류가 수플레(달걀흰자로 거품을 내 몇몇 재료를 섞어 오븐에 구워낸 요리)가 만들어질 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는 건 유감스러운 일이다.
- 니콜라스 쿠르티, 영국 옥스퍼드대 물리학과 교수
얼마 전 끝난 ‘삼시세끼 어촌편’이라는 프로그램이 화제가 됐다. 출연자인 차승원 씨의 요리솜씨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내들 두 세 명이 하루 세끼를 해결하느라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프로그램의 취지가 무색할 정도였다.
예전에는 맛집탐방이나 ‘오늘의 요리’ 정도가 전부였는데 요즘은 다양한 컨셉의 요리 관련 프로그램이 부쩍 늘었다. 그러다보니 스타 셰프들이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바야흐로 요리의 전성시대다.
그런데 이런 트렌드가 딱딱한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도 시작된 것일까. 생명과학 분야의 권위지인 ‘셀’ 3월 26일자는 ‘식품의 생물학’을 특집으로 다뤘다. 그런데 이게 보통 특집이 아닌게 3월 26일자 전체를 할애한 것. 170여 쪽에 걸쳐 20편 가까운 글이 실렸고 다들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한마디로 지난 10년 동안 식품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과학발견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방대한 내용을 다 소개할 수는 없고 여기서는 분자요리의 생물리학을 다룬 글과 다중감각적 맛(풍미) 지각에 대한 리뷰를 소개한다.
● 1도만 차이나도 달걀 상태 달라
이 글 앞에 인용한 옥스퍼드대 쿠르티 교수의 말처럼 아직까지도 요리가 진행될 때 물리화학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엄밀한 연구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한다. 미국 하버드대 공학응용과학부 마이클 브레너와 피아 쇠렌센은 기고문에서 그 한 예로 달걀 요리를 들고 있다. 우리는 보통 끓는 물에 달걀을 삶기 때문에 시간에 따라 삶은 정도가 다를 뿐이다. 그런데 60~70도인 물에 달걀을 둘 경우 불과 1도 차이에도 달걀의 상태가 꽤 다르게 나온다. 즉 이 온도범위가 달걀에서 생물리적 전이가 일어나는 구간이라는 것.
1_조리 과정에서 물의 온도에 따라 달걀의 상태가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 단백질의 변성과 엉킴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 Modernist Cuisine 제공
달걀을 삶으면 액체 상태인 투명한 흰자가 희고 불투명한 고체(젤)로 바뀐다. 이 과정을 분자차원에서 들여다보면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 단백질이 변성되면서 풀린 뒤 다시 네트워크를 이뤄 엉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펄펄 끓는 물의 경우 모든 단백질이 이런 과정을 거치지만 60~70도 범위에서는 단백질 종류에 따라 변성 유무가 다르다. 즉 60도에서는 일부 단백질에서만 변성이 일어나 네트워크가 미약해 흰자도 반투명하고 흐물흐물하지만 70도에서는 대부분에서 변성이 일어나 백탁에 단단한 형태가 된다는 것. 그러나 이런 개괄적인 설명만 할 수 있을 뿐 온도에 따라 구체적으로 어떤 단백질들이 변성되고 다시 뭉쳐지는가는 아직 모르는 상태다.
2_젤화제 같은 기능성 식재료나 진공회전농축기 같은 실험기기를 이용하면 기존 요리법으로는 불가능한 식감이나 풍미를 지닌 요리를 만들 수 있다. - Ferran Adria(위), Blua Producers(아래) 제공
글에서는 지난 10여 년 동안 활발하게 연구돼 온 분자요리(molecular gastronomy)의 예들도 여럿 소개하고 있다. 천연 식재료에서 다양한 젤화제를 찾아 액체 식재료를 젤로 만든 막 안에 가두는 요리들이 탄생했고 화학실험실에서 진공을 걸어 용매를 날려 시료를 농축하는 기구인 진공회전농축기(rotovap)를 써서 기존의 요리과정에서는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향기분자를 유지한 식재료를 이용한 요리를 개발할 수 있게 됐다. 또 새로운 조합의 발효를 시도하기도 한다. 즉 석류씨앗을 유산균으로 발효시키기도 하고 통보리에 사케(일본전통주)를 만드는 곰팡이를 접종시키기도 한다. 분자요리는 아직 시작단계이고 분자요리를 제공하는 식당도 몇 곳 없지만 이런 시도를 하는 요리사들은 과학자라고 저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 와인 전문가도 틀릴 수밖에 없는 이유
몇 달 전 질소충전과자봉지로 만든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화제가 됐다. 질소를 채워 빵빵한 과자봉지를 열어봤더니 정작 과자는 한 줌밖에 안 되더라는 것이다. 물론 도가 지나친 측면이 있지만 감자칩 같은 과자의 경우 외국 제품처럼 단단한 원통 포장용기를 쓰지 않는 이상 봉지에 질소를 가득 채우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그래야 유통과정에서 내용물이 부서지지 않기 때문이다.
‘좀 부서지면 어떤가, 씹는 수고도 덜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감자칩 같은 과자의 경우 입에 넣고 씹었을 때 나는 소리와 감촉이 맛을 평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한다. 즉 감자칩을 입안에 넣고 씹을 때 적당히 저항하다 바스라지면서 나는 경쾌한 소리가 없다면 감자칩을 먹는 맛이 반감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맛이라고 느끼는 현상은 단순히 혀만 관여하는 게 아니라 오감이 전부 동원되면서 지각된 결과다.
옥스퍼드대 실험심리학과 찰스 스펜스 교수는 ‘다중감각적 풍미 지각’이라는 글에서 맛의 이런 측면에 대한 최근 연구결과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앞 문장에서 쓴 풍미와 맛 모두 영어 ‘flavor’의 번역어로 넓은 뜻에서의 맛이다. 좁은 뜻, 즉 미각을 통한 맛은 ‘taste’다. 예를 들어 ‘매운맛은 맛이 아니다’라고 할 때 맛이 좁은 의미의 맛이다. 사실 일상에서 맛이라고 하면 좁은 의미의 맛보다는 넓은 의미의 맛을 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용어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는 넓은 뜻의 맛은 풍미라고 쓰겠다.
음식의 풍미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게 미각이 아니라 후각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지는 꽤 됐다. 즉 후각 정보가 80~90%를 차지하기 때문에 냄새를 맡지 못할 경우 음식의 정체성을 알 수가 없을 정도라는 것. 흥미롭게도 후각 정보와 미각 정보는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예를 들어 아몬드나 체리가 연상되는 향이 나는 벤즈알데하이드를, 감지할 수 있는 한계보다 약간 낮은 농도로 탄 용액을 제시하면 피험자들은 예상대로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고 답한다. 이때 역시 단맛을 느끼는 한계보다 약간 낮은 농도로 사카린을 탄 물을 입에 머금게 한 뒤(피험자는 맹물이라고 느낀다) 냄새를 맡게 할 경우 달콤한 향이 난다고 답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반면 진짜 맹물이나 감칠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MSG을 탄 물을 머금은 경우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즉 후각 정보와 미각 정보가 서로 궁합이 맞을 때(이 경우 달콤함) 민감도가 커진다는 것.
논문은 미각과 후각 외에 시각과 촉각, 청각 등 다른 감각들도 음식의 풍미를 결정하는데 변수가 된다는 연구결과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촉각과 청각까지는 몰라도 시각은 풍미에 영향을 줄 수 없을 것 같다. 음식물을 씹고 있는 입안을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에 넣기 전에 본 음식의 모습이 풍미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예를 들어 체리향이 나는 무색투명한 음료를 만든 뒤 녹색 색소를 타면 많은 사람들이 라임향이 난다고 답한다. 반면 주황색 색소를 타면 오렌지향이 난다고 느낀다.
이런 지각 왜곡의 가장 고전적인 예가 2001년 발표된 와인실험이다. 소믈리에 과정인 학생들에게 자주색 색소를 탄 보르도 화이트 와인을 시음하게 한 뒤 평가를 하게 하면 레드와인에 대한 전형적인 평이 나온다. 이 결과만 보면 와인 감별이 엉터리인가 싶지만 와인의 색이 안 보이는 용기에 담아 시음을 하면 화이트 와인으로 제대로 평가한다. 즉 시각 정보가 풍미의 한 요소로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말이다.
3_똑 같은 딸기 셔벗 디저트도 어떤 접시에 담기냐에 따라 풍미에 차이가 느껴진다. 둥글고 흰 접시일 경우 더 달고 풍미도 풍부하다고 평가한다. - Food Qual. Prefer. 제공
음식뿐 아니라 식기도 풍미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딸기 셔벗 디저트를 검은 접시에 담느냐 흰 접시에 담느냐에 따라 단맛과 풍미에 큰 차이가 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즉 흰 접시에 담긴 디저트를 10% 더 달게 느꼈고 풍미도 15%더 풍부하다고 평가했다. 접시 모양도 영향을 미쳐 각진 접시보다 둥근 접시에 담긴 디저트를 더 달콤하게 느낀다. 한편 코코아의 경우 흰 컵보다 오렌지색 컵에 담겼을 때 더 진하다고 느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접시에 요리를 어떻게 담느냐도 맛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확인됐다. 2014년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러시아 태생의 추상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 ‘그림 201번’에 맞게 식재료를 배치한 샐러드가 한 접시에 소복이 쌓는 전형적인 샐러드나 개별 식재료를 펼쳐놓은 배치보다 더 맛있게 느껴진다고 한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 셈이다.
● 풍미의 공감각
시각이나 청각 같은 별개의 감각이 서로 섞여 지각되는 현상을 공감각(synesthesia)라고 부른다. 앞서 언급한 칸딘스키가 바로 공감각 소유자로 어떤 색을 보면 특정한 음이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공감각 소유자는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보통 사람들도 서로 다른 감각 정보 사이에 ‘궁합’이 있다는 건 경험적으로 느끼고 있다.
4_똑 같은 식재료로 준비한 샐러드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맛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칸딘스키의 작품 ‘그림 201번’을 따라 배치한 샐러드(왼쪽)가 한데 모아놓은 경우(가운데)나 개별 식재료로 나열한 경우(오른쪽)보다 더 맛이 좋다고 평가됐다. - Flavour 제공
실제로 풍미의 공감각적 지각에 대한 연구도 진행됐는데 결과를 보면 수긍이 간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단맛이 나는 음식을 고음과 피아노 소리에 어울린다고 평가했다. 반면 쓴맛이 나는 음식은 저음과 금관악기 소리와 매치했다. 디저트 카페에서 묵직한 색소폰 곡은 잘못된 선곡이라는 말이다.
스펜스 교수는 기고문 말미에서 “최근 발견들은 사람들이 건강한 식습관을 갖게 유도하는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며 “풍미를 지각할 때 일어나는 다중감각적 상호작용을 식품을 설계할 때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에 기반한 저명한 과학저널 출판사인 스프링거는 2012년 공개 학술지 ‘Flavour(풍미)’를 창간했다. 이번 달에도 스펜스 교수의 ‘귀로 먹기’ 등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 논문이 올라와있다. 이런 움직임이 삭막하기만 한 과학에 풍미를 더하는 것 같아 더 반갑게 느껴진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