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Unnamed Monument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
#2, 4.3심포지움
2003년이었을까… 해마다 동아시아심포지움이 열렸고 늘 참석했다.
오키니와 학살, 대만 2.28 항쟁 , 4.3항쟁을 다루는 심포지엄이었다.
아마도, 그 해 처음으로, 제주도에서 지원을 받아 그랜드호텔? 이었나..에서 열렸다.
저녁 만찬 자리였다. 살다보니…이런 저녁이 있는 시간을 하면서…먹을려는데, 기다리라고 했다.
조금 늦는다고 했다. 이윽고, 우근민 도지사가 왔다. 그리곤, 하는 말이…
“제주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온다. 그들이 이 아름다운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공항 활주로 아래에 4.3희생자 시신들이 아직도 묻혀있다느니…피의 섬이라느니..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 오고 싶겠나….”
뭐…이런 말들이었다.
그 이후…속 쫍은 난, 관심 끊었다.
#3, 이운방
작년에 105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2003년 같은 해 였을 것이다. 지금의 봉개동 4.3평화공원 자리 맞은 편 빈터에서
첫 위령제가 열렸다. 그 전까진 종합운동장에서 열렸었다.
모슬포에 살고 있던 영감님을 찾아갔다.
“위령제에 함께 가시죠. 촬영도 하고 싶고…합동위령제엔 한번도 안가보셨잖아요?”
“싫어..”
“왜요?”
“말론 합동위령제라고 하는데.. 무장대들은 다 빠졌잖아? 그게 무슨 합동위령제야?”
“그래도…일단 한번은 가보시죠?”
“안가…이전에 따로 위령제를 할 땐 버스타고 일부러 찾아갔지. 사람이 없으니…나라도 가야지...
그런 맘으로 몸이 불편해도 해마다 갔지. 이젠 갈 필요없지…사람도 많이 오고…정부에서도 오잖아?”
그래도 기어코 모시고 갔다. 그가 말햇다.
“빠진 사람들도 많지만.. 모처럼 동네 사람들 이름도 보니…그런대로 좋았어,..”
그는 공산주의자였다. 그가 말했다.
"시지프스의 노동처럼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죽는 그날까지"
그것이 공산주의자의 임무라던 그.
그는 4.3항쟁 전, 남로당 대정면책이었다.
#4, 이덕구 비문
평화공원의 백비 비문을 누가 썻는지 난 모른다. 하지만 안다,
신촌 어느 골짜기에 서 있는 이덕구 가족묘의 비문 보다도
역사관도 열정도 후세대를 향한 책임감도 없다는 것을.
역사는 당대여야 하고, 당대의 시간과 싸우는 일이다.
그것이 지금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후대에 미룰 일이 아니다.
이덕구가족묘의 비문엔 이렇게 적혀있다.
‘그들의 외침 결코 헛되지 않으리’
진드르 껴안은 신촌리엔 선지자 네 분 계셨다.
진달래꽃 흐드러지게 피어 한라산 골짜기마다 산새 지저귀고
물오른 나무 이파리 프르름 가득하여 평화와 희망을 목청껏 노래하던
그 해 무자년 4월 초승 제주 온 섬 아수라장
누가 우리 부모 형제를 범하는가 누가 우리 친구 이웃을 범하는가
이건 아니야! 친구여 형제여 이웃이여 당하고만 있을쏜가
분연히 일어나 불쌍한 백성 함께하자
59년 전 산에서 들에서 골짜기에서 제주 백성에게 외치던 그들의 함성 들립니다.
온몸을 불사른 신촌마을 네 선지자
이호구선생, 이좌구선생, 이덕구선생, 이순우선생
이제는 구천에서 고이 내려오소서 맺힌 원혼을 푸소서!
살아있는 우리가 앞에 나서 저 산새들 울음 멈추게 하리오
아! 어찌 이들 네 선지자를 잊으리오. 이 민족을 사랑했고 온 백성을 다독이던
그 정신 그 애국심 후세에 남기려 작은 정성 모아
여기 작은 돌에 이름 석 자 새겨 영원히 기리리라.
글. 이승익 세움. 장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