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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삿 3:7-11
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년을 섬겼더니
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10.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11. 그 땅이 태평한지 사십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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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조상호목사
1998년 1월호 뉴스위크의 표지에 <케네디 가문의 저주: 또 다른 무모한 삶과 비극적 죽음>이라는 제목이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 뉴스위크지에는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 가문에 발생한 또 다른 비극에 대해서 언급되었습니다.
1998년 1월2일에 마이클 케네디가 콜로라도주 에스핀의 스키장에서 39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피살과 사고사, 각종 추문으로 얼룩진 케네디 가문의 비극에 다시 한번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사실 마이클 케네디의 죽음은 케네디 집안의 여섯 번째 비극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삼촌인 존 에프 케네디는 대통령이었던 1963년 11월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46세의 나이로 암살되었습니다.
아버지인 로버트 케네디 역시 1968년 6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지명 선거운동을 하던 중 켈리포니아에서 42세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맏형인 조세프 케네디 주니어는 2차 세계 대전 중 29세 때 비행기 추락으로 전사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여동생 캐슬린 역시 28세 때인 1948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도 자신이 암살당하기 전에 애디슨병을 포함하여 세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기 7개월 전, 막내 동생 테드 케네디는 비행기 사고로 허리를 다쳤습니다. 또한 테드 케네디는 그의 형 로버트 케네디가 살해된 지 12개월 후에 동승했던 여자의 익사사고에 연루되었습니다.
마이클의 형 데이비드 케네디 역시 1984년 플로리다에서 마약 과다 복용으로 숨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기 석 달 전, 미숙아로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이 이틀 만에 숨진 비운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케네디 가문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공통점은 젊은 나이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케네디 가문의 문제가 무엇일까?
계속되고 있는 케네디 가문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원인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케네디 가문의 비극의 원인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 가게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메릴린 하키여사입니다.
그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는 책에서, 계속되고 있는 가문의 저주를 끊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치유사역을 하는 사역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그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책을 놓고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 전달되는가?”라는 논쟁도 벌어졌습니다.
1997년과 1998년 당시 한국의 <빛과 소금>이라는 기독교계통의 잡지에서 이런 주제의 특집 기사를 게재함으로 한국교계에 굉장한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로마서 1절과 2절에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크리스챤들에게 죄와 저주가 유전되는가’라는 말하며, 저주는 결코 유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창세기 8장 21절 하반절에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는 말씀과 로마서 5장 12절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라.”는 말씀에 따라 죄와 저주는 유전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5~6년이 지난 지금도 그 논쟁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쟁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러한 주장들을 보면서 재 스스로 한 가지 결론은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한 개인의 모든 문제의 원인을 죽은 조상으로부터 찾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조상이 후손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 역시 위험하다.” 이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사는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세대에서 일어난 사건은 다음 세대에서 종종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가정 치료학과 상담 심리학, 그리고 현대 의학에서 입증됩니다.
또한 지나간 역사를 보아도 입증됩니다.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에 있었던 사사시대를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적이 있는 5절부터 6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그 다음에 1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번에는 4장으로 넘어가서 4장 1절을 보겠습니다.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6장으로 넘어가서 6장 1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는 단어가 무슨 단어입니까? ‘
또’, 영어로 'Again'이라는 단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후손들은 범죄 한 후에, 또 다시 반복하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앞 세대의 악습이 그대로 전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 세대의 잘못이 후세대에게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사사 시대의 패러다임(Paradigm), 즉 전형적인 패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대의 범죄를 반복하여 답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도록 징계를 가하고, 징계를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엎드립니다. 그러면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줍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하나님께 범죄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무려 340년 동안이나 이러한 악순환을 반복했습니다. 그들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반복되는 악순환의 사슬을 끊어야 했지만, 그들은 그 악순환의 사슬을 끊지 못했습니다. 결국 사사기의 역사는 악순환의 끊임없는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악순환의 첫 번째 장면입니다.
7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며 살도록 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방인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8절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원래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이름은 ‘두 배나 악하다’는 뜻의 'double wickedness'로서, 그는 대단히 악명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악명 높은 자에게 무려 8년 동안이나 짓밟혀 고통 가운데 노예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가운데, 비로소 그 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배신하고 떠나갔던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됩니다. 부르짖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세웠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옷니엘입니다. 그는 첫 번째 사사였습니다. 원래 이 사사(士師)라는 말은 영어로 Judge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문자적으로는 ‘판단하는 사람’, ‘재판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사사가 재판관의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매우 다양한 일을 감당했습니다.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는 비상시국에는 국방부장관으로서 역할을 했고, 평상시에는 정치지도자로서 나라 일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비록 사사는 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왕에 버금가는 나라의 여러 가지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후,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 회개하며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옷니엘이라는 한 사사를 세워주셨습니다. 저는 이 옷니엘이 어떻게 해서, 무슨 이유로 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믿음의 가문에서 자란 사람
첫째로 옷니엘은 믿음의 가문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성경에서 인물을 소개할 때, 일반적으로 ‘누구누구의 아들 아무개’라고 합니다.
3장 15절을 보면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고 소개되어 있고, 3장 31절에도 ’아낫의 아들 삼갈’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옷니엘은 조금 다르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나스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갈렙의 아우’라는 말이 먼저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갈렙이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갈렙이란 사람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복전쟁의 영웅이었습니다. 나이 40세 때, 가데스 바네아에서 민족의 지도자 모세로부터 40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고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와서 믿음의 보고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나이 85세가 되었을 때에도 어느 젊은이 못지않은 용기를 가지고, 후에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인 헤브론 산지를 점령했던 장본인입니다.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건국 역사의 기둥 같은 인물 입니다. 그는 45년 전의 광야생활 때나, 45년 후 가나안 정착 때나, 40세의 젊은 나이였을 때나, 나이 들어 85세가 되었을 때나, 변함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던 사람입니다.
또 신명기 1장 36절에서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이라고 언급된 것을 보면, 갈렙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따랐던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갈렙의 특징을 정리한다면 일관된 믿음과 철저한 순종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사 옷니엘은 바로 그 갈렙의 아우였습니다. 옷니엘을 소개하려면 당연히 형 갈렙을 소개해야 할 만큼 갈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옷니엘은 가나안 정복전쟁의 영웅 갈렙을 형으로 둔, 다시 말하면 믿음의 형을 두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믿음의 가문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녀가 어떠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느냐에 따라 자녀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자녀들을 결혼을 시킬 때 꼭 배우자만 볼 것이 아니라, 배우자의 가정까지 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가정에 입만 열면 “이 놈, 저놈, 이 새끼, 저 새끼”하면서 늘 반말을 쓰고 욕을 하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그 자녀 역시 부모를 본 받아 반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녀가 갑자기 자기 아빠에게 오더니 “아빠, 진지 드셨어요?”라고 아주 고상한 말을 하더랍니다. 이 말을 듣고 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야, 너 어디서 존댓말을 배웠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꼬마가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야! 나는 농담도 못하니?”라고 말했답니다. 피할 수 없이 자녀들은 부모를 닮습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말이 있고, 서양에서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Like father, like s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부모 밑에 좋은 자녀가 나옵니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사상가요, 탁월한 설교가요, 훌륭한 교육가로서, 프린스톤 대학교 총장이었던 죠나단 에드워드에 대해서 몇 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는 가난한 목사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역자의 생활은 좀처럼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그는 언제나 분주했습니다. 그렇지만 할 수만 있으면 밤 시간에 자녀들을 무릎에 앉혀놓고 같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또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고 합니다. 또 새벽 일찍 일어나 촛불을 켜놓고 아내와 자녀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예배를 드리곤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가문에서 자란 자녀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훗날 미국의 역사를 주름잡는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죠나단 에드워드가 떠나간 지 200년이 넘었는데, 그 후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부통령이 1명, 지사가 3명, 사장이 3명, 고급공무원이 80명, 대학총장이 13명, 변호사가 100명, 교수가 65명, 법대 학장이 1명, 판사가 3명, 의사가 36명, 의과 대학장이 1명, 그 외에도 수백 명의 목사와 선교사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역사를 주름잡는 수많은 인물들이 죠나단 에드워드의 믿음의 가문을 통해서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가정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반말하는 부모 밑에 반말하는 자녀가 나오고, 믿음의 부모 밑에 믿음의 자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문제 가정에서 문제 자녀가 나오고 믿음의 가정에서 믿음의 자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믿음의 가문을 일으키는 주역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은 자녀들이라면 부모님의 믿음을 계승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둔 부모님이라면 다른 어떤 것보다 후손들에게 믿음을 전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옷니엘과 갈렙처럼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
둘째로 옷니엘은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이었습니다. 옷니엘은 단순히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고, 믿음의 가문에서 자란 것 때문에, 그가 사사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기 교회의 교인 하나가 은혜를 받은 이야기를 쓴 글을 제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부부가 있었는데, 이 부부는 부부라기보다는 원수지간이었습니다. 부부가 각자 다른 방을 쓸 뿐 아니라, 만나기만 하면 “이 원수”, “저 원수”하면서 서로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가 똑같이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남편은 아내가 너무 예쁘다고 하고, 아내는 남편이 너무 귀엽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원수지간이었는데, 은혜를 받고나서는 서로 죽고 못 사는 관계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하루는 그 댁에 심방을 갔더니, 그 집의 부인이 목사님한테 불평할 게 하나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 소리에 목사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속으로 걱정을 했습니다. ‘그 동안 받은 은혜의 약발이 이제 끝났나보다. 큰일 났구나.’ 그런데 부인이 하는 말이 기가 막힙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이 잘 때 눈 감고 자게 만드셨나 몰라요?“ 그 목사님은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듣고 보니 자기 남편이 너무 예쁘게 보여서 밤에 잘 때도 얼굴을 쳐다보면서 자고 싶은데, 하나님이 눈 감고 자게 만들어서 남편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은혜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으면 푼수가 됩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풀 한 포기도 예쁘게 보입니다. 호박 하나도 귀엽게 보입니다. 다 예쁘게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용서와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충만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예쁘게 보이고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 든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모든 것이 다 불평불만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다 꼴 보기 싫습니다. 이 사람을 보아도 시험거리, 저 사람을 보아도 상처거리입니다. 이쪽을 보나, 저쪽을 보나 불만입니다. 이것은 주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은혜가 떠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부정적으로 보고, 입에서는 불평불만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입만 열면 불평불만을 쏟아놓고, 다른 사람을 헐뜯고 험담한다면, 그 사람은 현재 은혜가 떠난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러한 상태라면 그 때가 바로 위기입니다. 성령 충만 달라고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은혜를 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옷니엘은 단순히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고, 믿음의 가문에서 자란 것 때문에, 그가 사사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의 용맹스러움 때문에 그가 사사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의 용맹스러움을 인정합니다. 여호수아 15장 16절과 17절을 보면, 가나안 정복 전쟁의 영웅인 갈렙이 헤브론 남서쪽 20Km 지점에 위치한 전략 요충지인 기럇 세벨을 공략하는 자에게 자기 딸을 포상으로 걸자, 옷니엘은 그곳을 단숨에 공략할 만큼 전쟁에 능한 장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그런 용맹이나 어떠한 병법이나 능력 때문에 그가 사사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비결이 있었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옷니엘이 메소보다미아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의 재능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용맹스러움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 즉 성령께서 그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사사 옷니엘은 사실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도 우리처럼 연약하고 실수 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우리가 가진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그처럼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으면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세상의 수단과 방법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1982년 부산 수영로교회 정필도목사님께서 안식년을 맞이하여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의 일입니다. 밤낮 영어로 공부하다보니 기도할 시간이 줄어들어 자꾸 마음이 건조해져서 꼭 사막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그렇게 공부를 해서 목회학 박사는 받을지 모르지만, 목회를 더 이상 못할 것 같게 되어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었습니다.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던 공부를 뒤로 하고, 가장 먼저 기도부터 하고 그 다음에는 성경을 한 시간 이상씩 읽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한인교회를 나가면 현지에서 목회하는 목사님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까봐, 한인교회도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장소를 물색하다가 집 마당에 있는, 앉으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인 개집 속에 들어가서 매일 한 시간, 두 시간씩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개집 안에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말랐던 눈물이 회복되고,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해지고, 마치 사막에 오아시스가 이루어진 것처럼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기도가 끝나면 다시 한 시간씩 성경을 보고 나서 공부를 했는데, 놀라운 것은 공부가 기가 막히게 잘 되더랍니다. 심령이 컬컬하고 답답한 가운데 공부할 때는 공부가 잘 되지 않았는데, 기도를 충분히 하여 성령 충만을 받고나서 공부를 하니까 논문도 잘 써지고 오히려 공부가 빨리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승리의 비결은 세상에 있지 않고 성령의 능력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세상의 방법들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재주와 재능을 중요시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능력을 중요시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성령의 충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
셋째로 옷니엘은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11절을 보면 그러한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그 땅이 태평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옷니엘이 사사로 버티고 있는 40년 동안에 이스라엘은 전쟁 없는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옷니엘 한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에 평화와 번영이 찾아왔고,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인생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남서울 평촌교회에서 시무하시는 김태권목사님의 글을 보니까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없어야 될 사람입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 가룟 유다가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둘째, 있으나마나한 사람이 있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티가 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해서 안 될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넷째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그 사람으로 인하여 수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없어야 될 사람입니까?
있으나마나한 사람입니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저 그런 사람입니까?
없어서는 안 될, 꼭 있어야 할 옷니엘과 같은 사람입니까?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없어서는 안 될, 꼭 있어야 할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의 가정이 복을 받고,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내가 다니는 대학 캠퍼스가 복을 받고,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내가 다니는 직장이 복을 받고,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라와 민족이 살며, 세상이 복을 받는 역사가 나타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1년 전 남선교회에서 처음으로 토요기도회를 시작했을 때, 참석하여 말씀을 전하면서 소개한 적이 있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을 다시 한번 소개하고자 합니다. 1739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라는 사람이 미국의 예일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예일 대학은 반 기독교적인 분위기가 팽배한 대학이었습니다. 무신론적인 분위기가 캠퍼스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1740년 8월 브레이너드는 병 때문에 대학을 휴학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몸이 회복된 후에도 브레이너드는 영적으로 눌려있는 대학으로 돌아오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심지어 커다란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대학으로 돌아왔고, 캠퍼스에서 기도운동과 전도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성냥불’ 같은 작은 불씨였습니다. 잠시 붙었다가 곧 꺼져버리는 불꽃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불꽃이 마른 풀에 붙어 거대한 불길로 번져나가듯이 결국 예일 대학에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불길은 예일 대학 안에만 머무르지 아니하고 그 시대를 사르는 커다란 불길로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브레이너드는 인디언 선교를 위해 헌신하다가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한 시대를 살리셨습니다. 내성적이던 한 청년의 헌신이 냉랭한 한 시대를 녹이는 불꽃이 된 것입니다.
1802년 앞에서 잠깐 소개한 적이 있는 죠나단 에드워드의 외손자 티모티 드와이트(Timothy Dwight)가 예일 대학의 학장으로 부임했을 때, 예일 대학은 다시금 영적인 침체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이 때 티모티 드와이트는 캠퍼스의 변화를 위해서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그 일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지도하던 225명의 학생 가운데 75명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흥의 열기는 도처로 퍼져나가 근처의 프린스턴 대학에서도 105명의 학생 중 80명의 학생이 회심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당시 이 대학의 아쉬벨 학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조용히 이슬이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다. 거의 4주 동안 대학 구내에서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에 영향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열정적인 개인기도의 장소로 사용되지 않는 방 또한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누가 신앙에 열심이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신앙에 열심이 없느냐?’라는 질문이 나올 지경에 이르렀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가 점차 메말라가는 이 크라이스트처치와 뉴질랜드와 세계를 살리는 복음의 전진기지가 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나 티모티 드와이트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닳아 없어지고 마는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민족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옷니엘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청년들은 믿음으로 훈련 받고,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냉랭한 캔터베리 대학과 링컨대학과 폴리텍과 티쳐스 칼리지 등의 캠퍼스와 수많은 영어학교에 부흥의 불을 붙이는 거룩한 방화범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중병에 걸려 점차 죽어가고 있는 세상을 치료하는, 영적인 의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