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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인생론 어떻게 살 것인가 1.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의 생애에도 사계절이 있는가?] 인간의 생애를 계절에 비유할 수 있을까? 20대는 열정적이면서도 답답하고, 천둥 번개처럼 우렁차지만 왕성하게 자라다가 지쳐서 끝나는 시기다. 하루를 보내고 난 저녁에 그날 하루를 찬미함과 동시에 이마의 땀을 닦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고된 것이기는 하지만 노동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시기다. 이런 시기를 우리는 인생의 여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30대는 인생의 봄이다. 따뜻한 공기가 감도는 시기, 때로는 공기가 너무 차가운 시기, 그리고 언제나 불안정하고 자극적인 시기다. 수액이 끓어오르고, 나뭇잎이 무성해지며, 꽃향기가 넘쳐난다. 매혹적인 아침과 밤을 맞이하는가하면,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뜬 다음 일터로 나가며, 참된 일에 힘을 쏟고 일종의 예감을 느끼는 시기다. 40대는 정지하는 듯 신비스러운 시기다. 상쾌한 바람이 부는 드넓은 고원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로 시선을 던진다. 이것이 인생의 가을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애에는 겨울이 없다. 어쩌면 희망도 없이 외롭게 병석에 누워 있는 기간을 인생의 겨울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 사람은 노예다] 어떤 학자들은 바쁘지 않고 한가한 것을 무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끄럽게 여긴다. 본인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도 한가하면 무능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한가롭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귀한 것이다. 그것은 악덕이기는 커녕 오히려 미덕이다. 한가한 인간이 바쁜 인간보다 훨씬 행복하다. 인생의 목적이 명성의 획득이나 돈다발을 긁어모으는 일이라고 믿는 자들이라면, 자기 인생을 얼마나 낭비했는지는 죽는 순간에나 깨닫고 후회할 것이다. [근거 없는 관습에 길들여져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나 인생관은 대개 실제로 살아 보고 경험해 본 결과를 통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습관에 의해서 타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것은 여러 종교를 잘 알아 보고 공부해 보고 믿어 본 후에, 그 중에서 가장 알맞은 종교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났다거나, 친구를 따라 우연히 교회에 가게 되었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런 타의적 선택에 의한 삶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현실에 불만이 있다면 그것을 뒤집어 보기 바란다. [돈이 많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점심 한 끼에 5천원을 쓰는 사람도 있고, 5만원을 쓰는 살다고 해서 배가 더 부른 것은 아니다. 2백만 원짜리 침대에서 자는 사람이 2십만 원 짜리 침대에서 자는 사람보다 잠을 더 편하고 깊이 잔다는 보장도 없다. 큰 호화 저택에서 사는 사람이 오두막집에서 사는 사람보다 더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저절로 찾아오는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이웃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거나 안심하게 마련이다. 특히 이웃이 겪고 있는 불행을 자기가 겪고 싶지 않을 때 “나는 정말 천만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걱정이 있고, 질투나 고통이 있다. 어떤 사람은 늘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늘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행복한 순간에도 남의 불행을 보면 어쩌면 자기에게도 그런 불행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게 된다. 타인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웃이 갑자기 당한 불행한 사태를 자기 입장에 대입시켜 보면서 자기가 당할 수도 있었던 그 불행을 이웃이 대신 겪고 있다는 생각에 심리적으로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또한 남의 불행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그와 똑같은 불행이 자신에게도 닥치게 되면 남의 불행과 자신의 불행을 비교해 본다. 과거의 남이 더 불행한지 지금의 자기가 더 불행한지, 똑같은 상황에서 자기가 더 나은지 남이 더 나은지 비교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타인과 비교해 보는 마음이 없다면 타인의 불행에 대해 기뻐하는 마음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평등을 지향하는 버릇이 있다. 나도 사람이고 너도 사람인데, 혹은 나와 너는 같은 나이인데, 똑같은 처지에 있었는데, 왜 너는 그런 행운을 얻고, 나는 왜 이런 불운을 겪는지 알 수 없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그런 행운과 불운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 기뻐하는 심리 상태에 자연히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비와 비눗방울을 닮은 인간이 가장 행복하다] [좋은 친구는 깊은 침묵으로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잠자는 친구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깨어 있을 때의 그의 얼굴은 어떤가? 거칠고 보잘것 없는, 거울에 비친 바로 당신의 얼굴이 아닌가? 깊은 침묵으로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좋은 친구라 할 수 있다. 친구의 모든 것을 다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친구에 대한 동정은 딱딱한 껍질 안쪽에 숨기라. 그리고 그것을 쥐어짜면 한없이 단맛이 우러나올 것이다. 노예 같은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없고, 폭군 같은 사람은 친구를 얻을 수 없다. 2. 영혼은 왜 단련되어야 하는가 [선은 힘이고 악은 무기력이다] 인간은 선을 추구한다. 행복도 자신의 힘이 증가하는 것을 느끼는 감정이다. 어떤 힘에 대한 저항이 극복될 때 인간은 행복을 느낀다. [동정심은 무기력을 옹호하여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만든다] 동정심은 인류의 발전을 저해해 왔으므로, 바꾸어 말하면 도태의 원인인 것이다. 독일인들은 철학이 신학자들 때문에 황폐해졌다는 말의 뜻을 이해할 것이다. 개신교 목사들은 독일 철학의 원조이자 독일 철학을 망친 장본인들이다. 개신교에 대한 정의를 내리라고 한다면, 나는 이성의 반신불수라고 말하고 싶다. [행위는 약속할 수 있지만 감정은 약속할 수 없다] 감정은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언제까지나 누구를 사랑하겠다든가 미워하겠다든가, 또는 영원히 충성을 바치겠다고 약속한다면, 그는 자기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에 불과하다. [질투보다 분노가 차원 높은 감정이다] 너와 나는 대등하다고 늘 생각하고 있을 때, 나도 상대방도 대등하다는 것을 서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관계가 지속되고 있을 때, 어느 한쪽의 우월성이 두드러져서 그 균형이 깨지게 되면, 다른 쪽은 질투하게 된다. 그런 경우 질투하는 쪽은 상대방을 원래의 균형 상태로 끌어 내리려 하거나 자신을 상대방의 높이로 끌어 올리려고 행동한다. 여기에 두 종류의 상반된 행동 방향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그처럼 대등한 상태에서는 한쪽의 지위나 위치가 낮아지고 한쪽이 높아지면, 낮아지는 쪽이 분노한다. [우리는 남이 지은 죄를 용서할 권리가 없다] 사람은 자기도 자신을 모른다. 내가 나도 모르는 데, 하물며 남을 어떻게 알고 용서를 한단 말인가. 나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한, 그래서 그것이 의문으로 남아 있는 한, 사려 깊은 인간에게는 남을 용서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용서할 수 있는 경우가 한 가지는 있다. 만일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기 잘못을 확실히 잘 알고 있다면, 어떤 형식으로든지 그를 처벌할 권리를 가진 사람만이 그를 용서할 권리를 갖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정한 사람이 되려면 냉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이 공정하다는 것은 그가 용기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냉정함도 구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냉정함만이 공정성을 지켜줄 수가 있다. [종교와 형이상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가령 인간의 두뇌를 배제시켜 보자. 그러면 세상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두뇌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회나 문헌학자들은 인류에게 최선이 아닌 최악의 방법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인식을 가르쳐왔다. 모든 종교는 형이상학적 인식을 기초로 하여 일부 신학자들이 자기 방식대로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신앙적 방식과 가능성만으로는 인간은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될 뿐이다. 이미 종교는 행복, 평화, 사랑 따위의 거미줄같이 보잘것없는 가능성에다 사람들의 목숨을 걸어 놓았다. 형이상학적 세계란 인간에게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 그 실체조차 파악할 수 없는 세계인데, 그것을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 규정해 놓을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이 예상보다 더 멋지게 증명되었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용납할 이유가 없다. 지금 인간은 험난한 현실에서 자신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고 질병, 고통, 근심에서 벗어나기도 힘겨운 편인데,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이유와 행복한 삶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그것은 마치 격심한 폭풍우 속에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선원에게 바닷물의 과학적 분석 결과에 관해서 질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그 해답은 그저 무관심하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을 극복하고 초월한 초인이 되라]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설파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들은 독을 품은 자들, 삶을 멸시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죽기를 바라는 자들이다. 그러니 제 발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과거에는 신에 대한 모독이 가장 큰 모독이었다. 그러나 신은 죽었고 신을 모독하는 자들도 죽었다. 지금은 이 지상에 대한 모독이 가장 큰 모독이 되었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현실보다 더 숭상하는 것이 가장 엄하게 경계할 대상이 되었다. 한때는 영혼이 육체를 모독했다. 영혼은 육체가 여위고 처참해지고 굶주리기를 바랐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혼은 육체와 이 지상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영혼은 스스로 여위고 처참해지고 굶주리게 되었다. 이러한 영혼이 느끼는 쾌감은 자학 그 자체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우리 영혼은 초라하고 더러우며 가련한 자기만족에 가득 찬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사실 인간은 더러운 강물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더러워지지 않고 더러운 강물을j야 한다. 결국 인간은 초인이 되어야만 한다. 초인이란 이러한 바다와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 바다 안에서 인간이 느끼는 심대한 경멸은 소멸하게 될 것이다. 나의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초라하고 더러우며 가련한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나의 행복은 나의 생존 그 자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이러한 말도 할 것이다. 도대체 이성이란 무엇인가? 사자가 먹잇감을 추격하듯 지식을 추구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초라하고 더러우며 가련한 자기만족일 뿐! 그리고 계속해서 이러한 말을 할 것이다. 도덕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도덕을 기꺼이 실행한 일이 없다. 나는 그동안 선과 악을 구분하느라 얼마나 지쳐 있는가? 도덕이란 것은 모두 초라하고 더러우며 가련한 자기만족일 뿐이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나는 내가 불꽃이나 이글이글 불타는 숯 덩어리가 아님을 안다. 그러나 참다운 정의는 불꽃이며, 또 이글이글 불타는 숯 덩어리가 아니겠는가? 동정이란 무엇인가? 동정이란 인간을 사랑하는 자가 못 박힌 십자가가 아닌가?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동정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자문하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이 하늘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것을 들을 수만 있다면! 뜨거운 불꽃의 혀로 여러분을 핥아 줄 번갯불과 여러분에게 필요한 열정을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초인이다. 초인이야말로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시장의 똥파리들을 피해 고독으로 돌아가라] 3. 세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4. 신은 왜 죽었는가 「이 부문에서 그가 말하는 “신관(神 觀念)”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기에 책의 내용 대부분을 이곳에 그대로 올렸다. -편집자」 [신과 교류하는 인간, 신에게 굴복하는 인간] 옛 그리스인들은 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유대인들과 전혀 달랐다. 그리스인들은 호메로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신들을 숭배하고 섬기지는 않았다. 인간을 신의 노예로 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신을 인간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지위나 계급에 속하는 특정 존재로만 보았을 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신과 인간의 본질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과 인간은 서로 피가 통하는 관계이며, 이해관계가 얽혀서 싸우거나 화해하고 동맹을 맺는 관계로 보았다. 반면에 이탈리아의 여러 농민 종교에 나타나는 신들을 보면, 그리스의 경우와 매우 대조적이다. 이탈리아인들은 아무리 포악한 권력자가 횡포를 부려도 저항하지 않고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이런 기질 때문에 그들은 절대 권력자인 신 앞에서도 비굴하게 쩔쩔 매고 숭배하고 따르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로마에 뿌리를 내린 그리스도교는 이처럼 본래 권력에 약한 로마인들의 속성에 편승하여 하나님을 절대 권력자로 군립 시키는 한편, 죄악의 미명으로 인간을 위협하여 깊은 흙탕물 속에 몰아넣었고, 철저한 죄의식 속에 헤매게 했으며, 마침내 거기에 하나님의 자비로운 빛을 비추어 주었다. 따라서 죄악의 세상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알게 되자마자 은총의 황홀경에 빠져 하나님을 숭배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순식간에 천국이 자기에게 왔다고 믿기 시작했던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리스도교는 그처럼 인간의 병리적 열광의 심리 상태와 감정적 몰입 현상을 이용해서 인간의 이성을 지배하고, 감성과 정서의 고갈을 추구해 왔던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결국 멀쩡한 사람을 죄의식으로 옭아매고 파멸시키거나 마비 또는 도취하게 만들어 왔다. 더구나 그리스도교는 절제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는 야만적이며 저열한 반 그리스적인 것으로 변모했다.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공허하고 권태로운 것으로 여기던 사람들은 이 종교에 쉽게 굴복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죄에 대해 지옥을 내세워 위협하고 처벌하려는 하나님, 속죄를 강력히 요구하는 하나님, 은총을 선별적으로 베풀어 주는 하나님을 강조해 왔다. 만일 그러한 것들이 참으로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무수한 성직자들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러 나설 시간과 여유가 어디 있는지 묻고 싶다. 성직자들은 오히려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에 전율과 공포를 느껴 겸손해지고 은둔자가 되어 오로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만 평생을 바쳐도 시간이 모자랄 판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그들은 어떠한가?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 오직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헌신적으로 나섰다고 말하고 있다. 자기 죄에 대한 속죄조차 힘겹고, 자신을 구원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마치 구원의 약속을 미리 받은 것처럼 태연한 태도를 취하는 성직자들을 보면, 그들이 철저히 무지하거나 정신박약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들이 왜 일시적인 안일 때문에 영원한 진리를 무시하는 바보짓을 저지르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수많은 성직자들이 스승 예수의 명성과 그에 대한 존경심에 눈이 멀어 진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고도 위험한 장난을 제발 빨리 끝내 주기를 바란다. [교회는 권력 유지를 위해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인류가 믿고 있는 방식대로라면,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지금보다 더욱 선해야 하고, 인간의 권력이 더욱 강화 되고 확대되도록 도모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은 자신의 본능적, 이성적 힘을 보다 강력하게 발휘하여 이 지상에서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초인의 전형적인 단계로 향상될 수가 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지금까지 인간이 초인적 힘을 갖추는 것을 계속 억제하고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기 위해서 악과 악인까지 만들어 냈다. 강한 자를 악인으로 몰고 그를 버림받아야 할 존재로 만들어 강자의 권력 의지를 계속 꺾어야만 저항을 받지 않고 교회 권력을 유지할 수 잇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 권력은 가난한 자, 힘없는 자, 비천한 자와 한패가 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의 강한 생존 본능을 관념에 그치도록 했고, 다른 최고의 정신적 가치들을 죄악시하고, 나아가서는 그런 가치들에 대한 열망조차 품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로 인해 인간의 본능과 이성은 강할수록 더욱 불건전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내가 보기에 가장 안타까운 희생자는 파스칼이었다. 파스칼은 자신의 이성이 원죄 때문에 타락되었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의 이성은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타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지금 인간의 “도덕” 이라는 것에는 구애받지 않고 말하고 있다. 나는 지상의 어떠한 생물이나 개체든 선천적 본성과 본능을 잃어버리고 자신에게 해로운 것들을 선택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을 타락이라고 말한다. 모든 생물은 힘이 강해지면서 성장을 해야만 이 세상에서 종족이 유지되는 반면, 힘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린 생물이나 개체는 계속 쇠퇴하고 멸망해 간다. 그런데 지금 인류는 힘의 의지가 결핍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쇠퇴의 가치와 허무주의적 가치가 신의 이름으로 인류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심을 베푸는 종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정심은 삶의 에너지를 높여 주는 강렬한 욕망의 반대 개념이다. 강자가 누군가를 동정하려면 그는 힘을 잃어야 한다. 동정심 때문에 힘이 손상을 입는 것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로 인해 인간의 삶 자체가 손상된다는 것이다. 힘의 손상으로 인한 고통은 동정심을 통해 감염, 확산된다. 결국 경우에 따라서 동정심 때문에 인간의 삶은 그 균형이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실례가 바로 나사렛의 예수였다. 그의 삶의 에너지는 총체적 손상을 입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인류의 낡은 골동품일 뿐이다] 일요일 아침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런 의문을 품고는 했다. 2천 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로 자칭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한 유대 청년 예수의 사건이 지금까지 잊히지 않고 추앙되고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도대체 무슨 근거가 있는가? 우리 자신도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 그리스도교는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수많은 인류 유산 가운데 가장 낡은 골동품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에 관해 엄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라는 낡은 유산이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지금도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오늘의 세상은 말세이며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고 2천년 동안 내내 소리치고 있다. 사람들은 지금도 하나님께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계속 기도 하고 구원과 행복을 간청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죄를 예수가 대신 속죄했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사후에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십자가 앞에서 말할 수 없이 굴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모든 말들은 무덤에서 나온 지저분한 유물들처럼 흉측한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왜 이런 케케묵은 말에 현혹되어 오늘날까지 어리석은 것을 저지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성보다 감각을 자극하는 교회의 몽환적 실내 장식] 모든 종교가 다 그렇지만, 신을 섬기는 고대의 모든 예배 행사들도 사람들이 이상한 충동적 분위기에 빠져들게 하려고 애써 왔다. 태양신을 섬기든 하나님을 섬기든, 고대의 신전들은 오늘날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환각, 경탄, 황홀감을 자아내어 인간을 심리적인 병적 상태로 유도해 왔다. 예배에 참석한 신도들이 이해타산의 냉정한 계산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순수한 이성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온갖 수단이 동원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경우도 교회에 들어온 신도들의 이성을 지배하기 위한 온갖 감성적 장치를 사용해 왔다. 실내조명을 어둡게 한다든가 침울한 성가의 멜로디를 증폭시켜 긴장감을 조성함으로써 사람들의 정신 집중도를 높이는 것 등이 그 예다. 또는 설교나 기도의 어조를 높이고 격렬하게 호소하여 감정을 심하게 촉발, 집중시켜 한결같이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호소력이 강한 예배가 되도록 도모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처라는 교회의 권위를 동원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려는 감각적인 기교와 장치에 불과하다. 그래서 교회의 여러 곳에 예수의 고난을 연상시키는 공간을 마련하여 하나님이 그곳에 머물러 있는 듯 한 위엄을 과시하고 공포심을 자아내는 건축 양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것은 신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실감하도록 애절한 인상을 주고, 극도로 감동을 느끼게 하며, 죄책감을 이용해서 신도들의 구원의 희망을 자제하려는 성직자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장치들이었다. 인간은 아무리 신과 종교를 거부하려 해도 종교적인 느낌이나 분위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는 없다. 무신론자들도 감각을 갖고 있는 이상 신앙적인 분위기에는 쉽게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음악이 주는 느낌과 감동에서 예외일 수 없는 것과 같다. 감각과는 거리가 먼 철학 이론조차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희망적이거나 평화적인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면 귀가 솔깃해진다. 예를 들어 철학이 “화가 라파엘이 그린 마돈나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완전한 복음”에 과해서 언급한다면 그림에 관심이 없던 사람도 눈을 크게 뜨는 것과 그 이치가 같다. 일부 사상가 중에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대해 비판하고 반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교회에서 울려나오는 성가나 그 벽에 걸린 성화들이 주는 종교의 감각적 마력 앞에서는 그들의 당당한 이론들마저 허물어지고 맥을 못 추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론은 지성에 호소하지만 감각은 욕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둘 사이의 간격을 메울 수가 없다. 이것은 배고픔은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서 음식의 존재를 입증하려 하지 않고, 다만 음식을 탐내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이치와 같다. 사람들이 철학 중에서도 종교에 관련된 부분을 한층 더 선호하는 이유는 진리가 우리 마음을 위로해 주기를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그와 같은 감각적 광기에 도취되거나 광기 자체를 숭배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어떤 흥분 상태가 사람의 뇌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상태에서 어떤 영감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광기의 절정에 도달한 사람이나 신탁을 받은 자들을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기도 했다. 바로 여기서 그릇된 종교적 이론의 바탕들이 만들어져 왔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런 광기에 휘둘렀던 경박한 사람들에게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유대민족은 생존을 위해 신을 이용했다] [예수는 인류를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 종교 권력에 대항한 죄로 죽은 것이다] 종교 권력을 장악한 성직 계급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죄 많은 사회다. 백성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사회를 죄인으로 채우는 것이 그들의 삶의 조건이 되었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죄로 가득 찬 사회에서만 권위를 발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제들은 세상을 죄의 온상이라고 규정하고 백성은 신 앞에서 용서받아야 할 죄인들로 취급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한다는 명제는 한마디로 사제에게 무릎을 꿇는 사람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무섭고 막강한 교회의 권력 아래 있던 유대 민족에게 희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바로 예수의 저항운동이었다. 예수의 주장만이 유대 민족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배척했다. 예수는 유대교에 대해 반항의 횃불을 든 이단자였다. 유대교 사제들의 눈에 예수는 신의 뜻에 저항하는 주모자이자 반역자였다. 예수가 유대교에 대해 반항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도대체 무엇에 대해 항거한 것인지 묻고 싶다. 예수가 쏜 반역의 화살이 향한 곳은 오늘날 우리들이 교회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었다. 예수의 저항운동은 당시 유대교 성직자들과 성직 계급에 대한 저항이었다. 예수는 사회의 부패와 퇴폐가 아니라 종교적 특권 계급에게 반항했고, 당시 신학자들과 사제들의 권력을 부정한 것이다. 그 당시 예수가 유대교의 막강한 권력에 도정했다는 것은 지구상에 존재하던 가장 뿌리 깊은 민족적 삶의 본능과 의지와 그 세력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다. 권력에 대한 예수의 저항운동은 오늘날로 말하면 무정부주의자, 즉 정치범의 범죄행위였다. 예수는 마침내 유대교의 최고 권력에 도전한 죄로 당국에 체포되어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왕 나사렛의 예수라고 십자가 팻말에 기록된 것처럼,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배 권력에 도전한 죄로 죽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가 인류를 대신해서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 증거를 아무 데서도 찾을 수가 없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채운 족쇄]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는 누가 죽였는가? 그 해답은 명료하다. 그를 죽인 것은 유대교의 최고 사제들이었다. 그는 유대교에 대한 반란을 획책한 죄로 처형된 것이다. 죽음이 임박하자 그는 자기 가르침의 확고한 증거를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보여 주겠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죽음이 사도들에게 용서의 관대함을 보여 주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통해서 구세주에 대한 통속적인 기대가 등장했다.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실현될 것이며 구세주가 자기들의 적을 심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지상의 나라가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대체될 것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그들은 스승의 죽음을 계기로 유대교의 바리새 사람들과 신학자들에 대한 경멸과 반감, 그리고 복수의 감정을 그런 식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복수는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옛날 유대인들이 적에 대한 복수를 위해 신을 자기로부터 떼어 놓고 더 높은 곳에 올려놓았던 것과 같다. 그것은 오직 하나인 신의 외아들을 위한 원한의 소산이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예수의 죽음을 허용 했는가?”라는 부조리한 의문이 남는다. 이에 대해 예수의 제자들은 참으로 부조리한 해답을 내놓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류의 죄를 용서해 주려고 자신의 외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속죄의 희생은 그처럼 야만적으로 잔인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들의 죄를 대신 받아 죽은 희생, 이 얼마나 잔인한 이교주인가! 예수는 죄 그 자체를 없애려고 했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마저도 부정했다. 그는 신과 인간을 하나로 보았고 스스로 기쁨 속에서 살았다. 이런 그의 삶은 그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수가 죽자 제자들은 예수에게 구세주라는 족쇄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과 재림의 가르침이 나왔고, 희생적인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나왔다. 이 부활의 가르침 때문에 복음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축복의 모든 개념이 제거되었다. 부활보다 더 큰 축복은 없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모든 문제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바울은 율법적으로도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을 그는 이렇게 논리화했다. “만일 예수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 신앙은 헛된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는 실현 불가능한 약속 중에서도 가장 경멸스럽고 수치스러운 가르침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그것이 바울의 가르침이었다. [영웅도 천재도 아닌 자유주의자 예수] 나는 복음서처럼 읽기 힘든 책도 세상에 없다는 점을 솔직히 고백한다. 나 역시 젊은 역자들처럼 문헌학자들의 글을 탐독하던 20대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책을 읽기에는 삶이 너무 진지해졌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많은 사도들이 쓴 성서들의 진정성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대체로 성서들의 이야기는 가장 애매한 문학 분야 가운데 하나이다. 원전도 없는 이런 책에 어떤 과학적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예수가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했고, 무슨 말을 했으며, 왜, 어떻게 죽었는가에 대한 사실 여부가 아니다. 그보다는 과연 예수라는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복음서 같은 책에서 그렇게 전형 화될 수 있었고, 그 전형이 어떻게 계속해서 후세에 전승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심리학자 르낭은 예수라는 인간의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 개념을 적용했다. 즉, 예수가 영웅이라는 개념과 천재라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복음서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를 영웅으로 볼 수가 없다. 복음서에서는 저항이라는 문제에 부딪치면 무능력한 인간이 도덕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서에서 “악한 자에게는 대항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악한 자에게 대항했는가? 복음, 즉 기쁜 소식은 약속된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존재이다. 복음은 지금 우리 마음속에 있다. 현실적인 삶 속에, 그리고 현실의 사랑 속에 복음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도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신의 아들로서 모든 사람과 평등하다고 말했다.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를 영웅으로 만들 수 없었다. 우리가 오늘날 정신이나 문화라고 하는 것들은 예수가 살고 있던 시대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개념이었다. 그런 개념조차 없었던 시대에 예수를 천재라고 규정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예수는 영웅도 아니고 천재도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가 창시한 말이 아니라 이미 우리들 안에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예수를 구세주라는 전형적인 틀 속에 넣는 것을 반대한다. 예수가 구세주라는 것은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상징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가운데 떠돌고 있던 한 가지 개념을 미숙한 상태로 변형시켜 놓은 것일 뿐이다. 초대 교회는 들판의 설교자 예수를 공격하는 광신적 이단자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항하여 그들과 논쟁하고 그들의 악의를 격파할 인물이 필요했다. 따라서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자신들에게 알맞은 신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이후 초대 교회는 복음서와 상충되는 개념인 “재림”이나 “최후의 심판”이라는 미래적인 기대와 약속을 주저 없이 만들어 냈다. 따라서 “구세주”란 당시 사회의 역사와 운명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는 구세주라는 틀 속에 정형화되어야 할 인물이 아니다. [신앙은 기적이 아니며 성서로 증명되는 것도 아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부담과 모순이 없어야 한다. 천국은 그저 어린아이들의 것일 뿐이다. 복음에서 비롯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의 투쟁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복음이란 그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사람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고, 정신 속에 퇴화된 지극히 어린이다운 순수한 것에 불과하다. 신앙이란 분노하는 일도 없고, 질책도 없고, 스스로 방어하는 일도 없다. 그처럼 신앙이란 기적도 아니고 보상과 약속도 아니며, 성서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도 아니다. 신앙은 그 자체가 이미 매순간 기적이며, 보상이었고, 그 자체가 증명이며, 하나님의 나라였다. 신앙은 어떤 한 가지로 정형화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현재 살아 있는 것이어서 형식의 틀에 묶이는 것을 싫어한다. 물론 신앙은 사람들이 사는 환경이나 언어나 소양에 의해 어느 정도 개념의 범위가 정해지는 일은 있다. 초대교회에는 셈족의 유대인적 개념만 있었다. 예를 들면 만찬 의식도 교회가 악용한 개념 중 하나이다. 만일 예수가 인도 사람이었다면 수론 파였을 것이고, 중국인이었다면 노자를 따랐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별 차이를 느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조금 느슨하게 표현하면 예수는 자유주의자였다. 예수는 어떠한 것도 도식화하기를 싫어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말로 고착시키는 것조차 그가 싫어했다는 것을 보면 안다. 어떤 것을 고착화하고 도식화하는 것은 죽은 것이다. 예수만 깨닫고 있었던 삶의 방식, 그가 경험으로 깨달은 것들은 유대 사회에서 고착되어버린 모든 종류의 언어, 형식, 법칙, 신앙교리와는 반대되는 것들이었다. 예수는 가장 내면적인 것들만 말했다. 가령 생명, 진리, 빛 등은 가장 내면화된 그의 말들이었다. 그 밖의 것들은, 모든 현실이나 언어까지도, 예수에게는 하나의 기호와 비유에 지나지 않았다. 그처럼 독특한 상징주의자는 어떤 종교나 예배, 어떤 역사나 자연과학, 어떤 세계적인 경험, 어떤 지식과 정치와 책과 예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야 한다. 더구나 예수는 어떤 특정 지식이나 문화와도 싸워야 할 이유나 필요가 없었다. 국가, 사회, 노동,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것을 “속세”라고 말한다면 예수는 세속적인 교회 조직의 개념을 예감한 적도 없었다. 예수가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그리스도교의 교회 권력과 조직을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교회가 저지르는 부정과 불의란 예수에게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동시에 예수에게는 변증법도 없었고, 신앙과 진리가 어떤 근거에 의해서 증명되어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전혀 없었다. 그는 자유주의자였을 뿐이다. 그가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면적인 빛, 내면적인 행복, 자기 긍정, 그리고 순수한 힘뿐이었다. 그와 같은 예수의 교훈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예수는 그것 자체가 교훈이 되리라는 것도 전혀 깨닫지 못했다. 만일 예수가 죄악을 저지르는 교회의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깨달았더라면, 그는 후세 사람들이 세워 놓은 이 교회의 절대 권력과 맹목적인 가치들 때문에 심한 비탄에 잠겼을 것이다. [누가 사람의 아들이며 누가 신의 아들인가?] 예수의 참모습과 그의 참된 가르침을 알기 위해서는 유대교와 성서에 관한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야 예수가 유대 교회의 가르침과 종교 권력에 저항한 이유를 알 수 잇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무섭게 처벌하는 분이었다, 그러나 복음서를 보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심리적 부담도 느끼지 않는다. 거기에는 처벌도, 인과응보도 없다. 오직 사랑과 용서만 있다. 죄 때문에 인간과 신 사이를 떼어 놓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복음, 즉 기쁜 소식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다른 종교의 신도들과 다른 점은 그들이 복음을 행위로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악의를 품고 남을 미워하지 않는다. 고향 사람이든 이방이든, 유대인이든 유대인이 아니든, 아무도 차별하지 않는다. 인류는 평등하다. 그들에게 이웃은 신앙의 벗이다. 화를 내서도 안 되고, 남을 멸시해서도 안 되며, 헛된 맹세도 하지 않는다. 아내의 부정이 발각되어도 이혼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 명제로 주어졌을 뿐이다. 물론 이런 명제들은 인간의 본능에서 추론된 것이다. 때문에 신도들은 거기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예수는 이 명제들을 일생을 두고 실천했다. 그의 삶과 죽음조차도 그런 삶의 철학을 실천에 옮긴 데 지나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아무런 형식도 의식도 필요하지 않았다. 기도마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유대교적 속죄와 참회의 가르침도 모두 거부해 버렸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명제들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참회도 아니고 죄의 용서를 바라는 기도도 아니다. 복음의 실천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다. 따라서 예수는 죄의 용서와 신앙에 의한 구원이라는 유대교의 여러 논리를 과감히 버렸던 것이다. 유대교의 모든 가르침은 복음에 의해 철저히 부정되었다. 예수는 하늘나라와 영원한 삶을 얻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것만이 예수의 심리적 현실이었다. 그것은 예수가 유대교 신앙을 거부하면서 갖추게 된 새로운 가설과 논리였지, 새로운 신앙은 아니었다. 내가 예수라는 위대한 상징주의자에 관해서 인정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인간의 내면적인 진실, 다시 말하면 내면적인 현실과 진리를 직시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수는 인간의 내면적인 현실과 진리 이외의 모든 자연, 시간, 공간, 역사를 오직 하나의 비유적 기호로 이해했을 뿐이었다. [하늘나라는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경험하는 한 상태일 뿐이다] 예수를 인격자인 신이라든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든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비 그리스도적인 호칭들은 미숙한 종교적 장치이며, 한마디로 사람들의 눈앞에 주먹을 내미는 것처럼 폭력적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상징을 비웃는, 세계사에도 유례가 없는 것이다. 교회가 상징주의를 어떻게 교묘하게 악용해 왔는지를 생각하면 한없는 부끄러움마저 느낀다. 복음서에서 사용된 아버지와 아들 역시 상징일 뿐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기호로서는 나누어질 수 있지만 그 상징성은 분리될 수 없다. 아버지란 영원성과 완전성의 표현이며, 아들이란 모든 사물의 총체적인 정복을 의미한다. 하늘나라 역. 하늘이란 지상을 초월한 어떤 것도 아니고, 죽음 뒤에 오는 어떤 것도 아니다. 복음서에는 죽음이 자연적인 귀결이라는 개념이 없다. 죽음은 이 세상과 또 다른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도 아니고 그 과정도 아니다. 인간의 죽음이란 단순히 어떤 가상적 이론이나 기호로만 표현되는 전혀 별개의 세상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또 다른 어떤 시작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기대하거나 상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곳은 내일도 어제도 없고 천년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마음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경험에 불과하다. 그래서 천국은 어디에나 있을 수도 있고 아무 곳에도 없을 수도 있다. 이렇게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전해 준 예수는 죽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기 위해서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인류에게 전해준 것은 오로지 사랑의 실천뿐이었다. 우리는 그가 재판관 앞에서, 자신을 체포한 자들 앞에서, 자기를 고발한 자들 앞에서, 자기를 비방하고 조소하고 학대하는 자들 앞에 보여준 태도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반항하지 않았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를 학대한 자들을 위해 괴로워하고 기도하고 그들을 사랑했다. 그는 일반적인 허위보다도 성스러움을 내세우는 허위에 대항하는 본능과 열정적인 정직성을 갖추고 있었다. 예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권력자들은 수치조차 모르고 자신들의 욕심과 이익을 위해 복음과는 전혀 반대되는 거대한 교회의 탑을 세웠다. 저 거창한 세계적 연극의 막후에서는 그의 신성을 빈정거리고 손끝으로 조종하는 교회의 권력자들이 교회 자체를 신성시 하며 허리를 굽히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심한 역설은 없다. [예수를 또 한 번 십자가에 못 박은 사도 바울]
예수는 누구를 부정했고, 무엇에 저항했으며, 무엇을 세속적이라고 말했는가.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등장은 가장 나쁜 소식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예수가 부정하고 저항했던 바로 그 대상을 다시 긍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를 자신의 십자가에 또 한 번 봇 박았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과 죽음, 복음의 진정한 뜻과 권위마저도 증오에 찬 위조지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바울이 성서를 통해 시도했던 것은 권력이었다.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처럼 종교 권력을 통해서 백성들을 압도하고 힘을 조직화하는 데 교리를 상징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의 방법론은 훗날 이슬람교가 빌려 썼다. 즉,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의 독재, 그리고 조직 관리의 수단과 방식은 바로 바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교는 국가의 정치권력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우리는 바로 그 점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특권이나 독점 지배가 용납되지 않는다. 국가의 경우도 그런 경우에는 혁명이 일어난다. 더구나 그리스도교는 바로 저 높은 자들이 독점한 권력에 저항하는 백성들의 봉기였다. 예수는 권력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와 그들의 눈물에 한없이 연민을 품었던 저항자였다. 그런데 예수가 죽은 후 그의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본래의 그리스도 정신은 계속 타락의 길만 걸어가지 않았던가. 복음서에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교회 권력은 자기들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이나 개인을 지옥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처단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심판하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심판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을 찬미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찬미하고 있었다. 바울이 인류 역사에 저지른 죄는 너무 크다. 그는 초대교회의 역사를 송두리째 날조해 버렸고, 자신이 독자적으로 만든 원시 그리스도교의 역사 위에 이스라엘 역사를 고쳐 쓴 죄를 저질렀다. 복음서는 오로지 교회 권력에 유리한 도덕만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인류는 바로 그런 도덕 때문에 기만당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복음서는 무엇이며 누가 썼는가? 바로 유대교를 반대한 유대인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썼다. 결국 유대교에 저항한 그리스도교든, 그리스도교를 배척한 유대교든, 모두 유대인들의 종교였다. 그릿도교는 유대교에 새로운 방식의 유대인적 삶의 방식을 제시했고, 유대교는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목이 생겼을 뿐이다. 우리는 예수가 유대인이었으며 그를 재판한 사람들도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 것은 그들끼리 벌인 싸움이었다.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보존해 온 유대 정신 중에서 수구와 진보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정치적 싸움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보다 훨씬 자유로운 신조를 강조한, 또 다른 이름의 유대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그 중심에 서 있다. 나는 바울이 주장한 창조적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을 부정한 것이라고 본다. 복음서의 상당부분은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만일 복음의 어떤 부분에서도 현실의 권리를 주장하면 할 말을 못 하게 된다. 따라서 속세의 지혜인 과학이 종교와 부딪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렇게 믿어라” “그렇게 행하라”는 식의 명령에 따르는 신앙은 속세의 지혜로 본다면 현실성이 없는 것이고, 과학에 대한 거부이자 허위다. 따라서 바울은 신앙이 과학과 겨루기 위해서는 거짓이 필요하다는 사상을 일찍이 간파했던 것이다. 이렇게 바울에 의해 날조된 하나님은 속세의 지혜인 과학을 비방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세속적인 지혜를 비난하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바울이 하나님을 그렇게 만든 것뿐이다. 도대체 율법은 그 자체가 모두 현실성이 없는 철저히 유대적인 것이 아닌가! 바울은 그렇게 해서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으로 무장된 우수한 문헌학자들과 의학자들을 적으로 삼아 싸움을 걸었던 것이다. [여자가 사과를 따 먹음으로써 인간은 과학을 얻게 되었다] 성서의 앞부분을 보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보기에 좋았다고 쓰여 있다. 하나님은 인간 이외의 다른 종류의 동물들도 만들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실패였다. 인간은 동물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은 동물을 지배했지만 결코 동물을 닮으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인간이 좋아할 수 있는 다른 동물을 만들었다. 그것이 여자였다. 하와라고 불리는 그 여자는 본질상 뱀이다. 그것을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잘 d나다. 이제 여자 때문에 모든 인류의 재난이 시작되었다. 그것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와 동시에 여자 때문에 과학이 시작되었다. 그것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하와 때문에 금지된 열매를 따 먹게 되고, 그 결과 인류는 지혜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혜는 곧 과학이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함과 동시에 자신의 적도 함께 창조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과학이 점차 인간에게 신의 기능과 역할을 대신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신의 역할을 대신 한다면, 하나님도 인간도 그리스도교 지도자들도 모두 끝장나는 세상이 된다. 도덕의 측면에서 본다면 과학 자체는 금지된 열매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인간의 지혜인 과학을 금지했던 것이다. 과학은 인간이 하나님께 지은 최초의 죄이자 죄의 싹인 원죄가 된다. 그 과학이 바로 그리스도교가 금하는 도덕적 원죄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추종자들은 어떻게 과학을 막아낼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학이 날로 발달하여 신의 영역에 도전하면 할수록 신은 무력해지고 그 결과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교 사제들의 힘도 약화되며, 그들은 설 땅이 없어진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의 고민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지배 권력의 고민이 된 것이다. 따라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찾은 방법은 지혜를 가진 인간을 낙원에서 추방하는 것이었다. 낙원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낙원은 행복, 기쁨, 즐거움, 한가로움이었다. 한가로움은 인간을 사색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색을 부도덕한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리스도교는 죄, 죽음, 고통, 질병, 노쇠 등을 동원하여 인간 속의 낙원을 추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학의 발전을 막기 위해 죄와 벌의 개념을 날조했다] [바울은 로마 제국을 접수한 천재 전략가였다] 그리스도 교도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맥락을 거의 같이 한다. 그들의 목적과 본능은 오직 파괴를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법의 절차를 보면 그 목적은 위대한 교회 조직을 영원히 유지하는데 있다. 바로 교회 체제 안에서만 인간의 삶이 번영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는 역사에서 확실히 읽을 수 있다. 청동보다 영원한 존재이자, 인류 역사가 이루어 놓았던 가장 대규모 조직이었던 로마 제국은 저들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게르만인 들이나 다른 촌뜨기들도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몰락하고 말았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흡혈귀 같은 존재였다. 오랫동안 이룩한 로마제국의 위대한 업적을 그리스도교가 하룻밤 사이에 몰락시킨 것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로마 제국은 폭군 황제들이 등장했을 때도 무너지지 않고 견고하게 버텨 나갔던 나라다. 그러나 로마는 가장 부패한 그리스도교의 조직을 끝내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라는 벌레는 칠흑 같은 밤과 안개를 이용하여 백성들 개개인에게 여성적 감미로움으로 달라붙고 구석구석 침투하여 거대한 로마 제국을 쓰러뜨렸다. 로마의 남성적인 고귀한 본성은 이처럼 은밀한 벌레들의 음모와 비밀 예배, 무고한 사람의 희생의 피를 마시는 행위 등과 결탁한 결과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그 막강한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는 선봉장은 다름 아닌 유대인 바울이었다. 그는 로마뿐 아니라 전 세계의 정복자가 된 영원한 유대인 천재 전략가였다. 그는 예수를 박해한 유대교에서 이탈하여 세력이 약한 상태였던 그리스도교의 종파들을 집결시켜서 세계를 태워 버릴 거대한 불길을 점화하는 방법을 간파했다. 그가 상징으로 내세운 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이었다. 그는 당시에 은밀히 로마 권력에 저항하는 세력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의 음모를 집결시켜 하나의 거대한 권력을 창출해 내고 말았다. 그가 내세운 것은 유대인들이 늘 말하던 “모든 구원은 유대인들로부터 나온다. 는 구호였다. 모든 힘을 집결할 수 있는 통찰력은 바로 바울의 천재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모든 종교에 대해 맹렬히 공격하면서 스스로 구세주의 대변인이 되었다. 그는 이 세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불멸의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지옥의 이름으로 로마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구원과 천국이라는 말 하나만으로도 현실적 삶은 부정된다는 사실도 간파했다. 독일에서는 그리스도교와 허무주의가 같은 의미로 통한다. 역사상 유래 없는 강대국 로마 제국은 게르만 민족에게 짓밟힌 것도, 다른 강력한 야만족에게 유린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교활하고 치밀해서 눈에 띄지 않는 유대인에게 능욕 당했고, 속에 감추어 둔 복수심과 비열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한 유대인의 포로가 된 것이다. 저들 무리가 어떻게 로마 제국을 차지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교부들이 얼마나 현명한 방법을 썼는지 잘 알 수 있다. 이슬람교는 본래부터 그리스도교를 경멸하고 있었지만, 이슬람교도들에게는 그럴 권리가 얼마든지 있다. 이슬람교는 남성적 토대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기도의 조건을 부정하면서 기도를 부추기는 모순] 기도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인류의 관습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기도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성립될 수 있다. 첫째, 기도하는 사람이 신의 기분을 가라앉히거나 바꿀 수 있을 때 기도는 비로소 가능하다, 둘째,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때 기도는 비로소 가능하다. 이 두 가지 조건은 대부분의 종교가 채택되고, 지금까지 인류가 계승해온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그리스도교에서만 이 조건들이 부정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다른 모든 종교의 신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지전능하며, 인간의 모든 것을 배려하는 이성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신을 섬기는 종교에서는 기도란 근본적으로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기도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줄 수 없는 것이 어디 있으며, 그러한 하나님을 이 어디 있어서 기도가 필요하겠는가? 그런대도 그리스도교가 기도를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바로 그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놀라울 만큼 뱀의 교활함을 드러내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교가 기도하지 말라는 교리를 가르쳤다면 신도들은 권태를 느낀 나머지 다른 종교로 개종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고 가르쳐 왔다. 그것은 기도를 오락의 대용품 정도로 여긴다는 뜻이다. 만일 그리스도교에 ”기도하라“는 말이 없었다면,”육체 노동“을 스스로 포기한 불행한 성직자들이 할 일이 도대체 무엇이며, 성자들은 또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하지만 기도를 통해 신과 대화하도록 유도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졸라대는 신도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이렇게 나무라고 야유하고 있다. “이토록 전지전능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라느냐?”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성자들이라는 사람들이 고안해 낸 기발한 착상이다. [저 세상을 찬미하는 자들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가라] 세상은 지상의 삶보다 천상의 삶이 더 가치가 있다고 설교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세상에 심한 해독을 끼친다. 그들이 외치는 영원한 삶으로 그들을 이 세상에서 추방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오로지 자학만을 선택한 무서운 자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쾌락도 자학에 불과하다. 지상의 삶을 버리라고 남들에게 설교만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먼저 이 세상을 떠나버리면 좋으련만! 그들의 영혼은 병들었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죽기를 바라고, 삶을 포기하라는 설교를 듣기를 원한다. 또한 그들은 이 세상의 삶보다는 저 세상의 삶이 더 가치가 있다고 사람들에게 설교하며,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뜻을 찬미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므로 이 시체들이 깨어나 소리치지 않도록 , 살아 있는 이 관들을 잘못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병자나 노인을 만나면 “이 세상은 모순에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순에 차 있는 것은 그들 자신과, 이 세상의 한 측면만 보는 그들 심한 우울증에 사로잡힌 채, 죽음을 초래할 사소하고도 우연한 사건이 발생하기만 고대한다. 또한 그들은 지푸라기 같은 삶에 집착하면서도, 자신이 아직도 거기 매달려 있음을 비웃는다. 그들은 외친다. “이 세상의 삶에 집착하는 자는 바보다. 그러므로 삶에 집착하고 있는 우리도 바보다.” “삶은 오직 고통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 말이 옳다. 그러니 그런 자들은 스스로 삶을 끝내라, 오직 고통일 뿐인 자신의 삶을 끝내라. 그리고 아예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스스로 이 세상에서 떠나라”고 가르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 이 세상이 불행하고 살 가치가 없는 곳이니, 아이를 낳을 필요도 없다”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자들도 죽음의 선교사들이다. 삶이란 힘든 노동과 불안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고단한 삶에 몹시 지친 나머지 죽음의 설교에 매혹된다. 그리고 고단한 삶을 잊어버리려 일에 더욱 몰두하고,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런 삶은 헛된 것이다. 그것은 도피이고 망각일 따름이다. 사람들이 삶을 좀 더 소중히 여긴다면, 순간적인 것에 자신을 내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참고 견디며 살아갈 만큼 내면이 충실하지 못하다. 오히려 속이 텅 비어 있다. 지금도 죽음을 설교하는 자로 세상이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복음을 “영원한 삶”이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빨리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스스로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 인간은 구원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영혼의 구원 문제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리스도교는 영혼의 구원을 공상 같은 신화적 입장에서만 설명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화적 설명보다 심리학적 접근이 한층 더 명료하게 이해된다. 신학자 슬라이어 마허가 종교에 심리학을 처음 도입했는데, 이 분야에 여러 학설이 난립하면서 일반의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해서는 심리학적 분석과 접근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인간은 본래 불완전하고 이기적인 존재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처럼 완전해지고자 하는 목표와 이타적인 목표를 지향하면서 하나님을 닮으려고 애쓰는 가운데 죄의 콤플렉스에 빠져 평생을 번민 속에서 보내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맑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왜곡된 모습을 보고 계속 탄식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완전한 모습에 비하면 인간의 모습은 너무나도 보잘것없다. 그래서 우리는 크고 작은 인생 체험의 과정에서 죄의식에 짓눌린 채 하나님의 위협을 끊임없이 느끼고 심판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의 비뚤어진 양심을 질책할 것이 무서워 불안에 떨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잘못을 저지른 뒤 부모의 채찍을 두려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심판하는 재판관이자 처벌하는 관리라는 인식을 우리에게 주입해 왔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과 위기감에서 인간은 어떻게 벗어날 것이며, 누가 과연 우리를 도와줄 것인가? 다시 거울 얘기로 돌아가 보자. 인간의 죄가 이성적 오류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거울에 비친 모습이 일그러져 보이는 것은 거울을 잘못 만들었기 때문이다. 거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다. 본래 불완전하고 이기적 존재인 인간이 만든 거울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자신이 만든 거울을 보면서 불완전한 자신을 완전한 하나님과 비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인간은 왜 불완전하고 이기적인 존재인가? 그것을 이해하려면 이렇게 자문해 보면 된다. “나는 정말 이기적인 존재가 아닌가?” 여기서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이 이기심을 배제한 채 순전히 이타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사조라는 새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어떤 사람이 개인적인 욕구에 근거를 두지 않고 순수하게 오직 타인만을 위해서 행동하기란 “내면의 거센 압력이 없는 한” 불가능하다. 이기심을 느끼지 않는 자아의 존재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랑 그 자체인 하나님은 손톱만큼의 이기적 행위도 할 수 없다. 리히텐베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를 위해 느낄 뿐이다. 이 명제가 너무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부모도 아내도 자녀도 연인도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유쾌한 감각일 뿐이다.” 라로슈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연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연인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처럼 큰 착각은 없다.” 이 말은 우리는 사랑이라는 본질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랑을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이유이다. 사랑은 가장 이기적인 만족을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사랑 그 자체라 해도, 또한 모든 일을 자기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하기를 원한다 해도, 남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려면 먼저 남을 도울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힘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도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며 이기적인 행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타적인 행위는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인간이 이런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당치도 않게 하나님의 본질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보면 마치 자신의 용기를 과대평가하는 돈키호테처럼 보인다.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자신을 사랑 그 자체인 하나님과 비교하는 일이란 그 얼마나 허황된 짓인가! 하나님과 인간을 비교하는 일이란 꿈에서나 있을 법할까? 그렇다고 사랑 자체인 하나님의 모습을 부인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신을 부정하면 인간의 죄의식도 무너진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닮으려는 인간의 노력은 무의미하게 된다. 인간은 그 두려움을 극복할 자신이 없다. 그런 일은 영혼의 구제를 목표로 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하나님과 영혼의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그래서 더욱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끝내 하나님처럼 되지 못한 채 하나님을 닮으려고 애쓰는 데서 오는 죄책감을 극복할 수 있는 철학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의지가 있다. 이성 또는 공상의 미혹에 대한 통찰력이 강해지면 인간은 그리스도교를 버릴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곧 인간의 자기 구원이다. 5. 무엇이 진리인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지구를 만들었다고?] [종교학자나 철학자가 증거를 보여준 적이 있는가] 과학이 생명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잇는데도 전통적 관습을 지키며 사는 것처럼 부조리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다. 아마도 종교는 과학적 결론이 내려질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인류가 전통적 관념이나 관습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명이나 인간의 기원에 관한 종래의 주장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윤리나 종교의 역사를 철저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죄와 벌에 관한 문제는 지금까지 너무 소홀히 다루어져 왔다. 옛날 사람들은 불확실한 것들에 대해서 환상을 품어 왔고, 후손들에게는 그런 환상을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해 온 것이다. 신앙이란 모든 것을 알아보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강요해 왔다. 지금까지 우리를 설득하려고 애쓴 문제들이 있다.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사후 세계란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신과 만나고 화해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해서 지금까지 종교학자나 유물론자나 철학적 독단론자들이 내놓은 해답은 어느 것 하나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모두 신앙이나 지식이나 하는 것들을 따지지 않고 그냥 살아가기를 원래부터 바란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선택할 것인가] 사람의 자연사는 자살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먼저 이 문제부터 생각해 보자. 기계를 인위적으로 정지시키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기계가 저절로 고장이 나서 못 쓰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더 낳을까? 기계를 억지로 정지시키는 것은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이 힘을 남용하는 것이고, 저절로 멈추기를 기다리는 것은 유지비만 낭비하는 꼴이 된다. 여기서 유지비의 낭비라는 것은, 다른 곳에 좀 더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는 돈이 아깝게도 낭비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일 뿐이다. 수많은 기계들이 아무런 효용성도 없이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기계의 유지란 기계 전체에 대한 일종의 경멸감에서 나오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여기서 인간의 의지와 전혀 관련이 없는 장녀사와, 의지적 이성적 죽음인 자살을 기계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비이성적인 죽음인 자연사는 보잘것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육체가 그 안에 들어 있는 영혼을 얼마나 오래 보존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 된다. 이것은 병들고 여위고 우둔한 교도관이 자기가 맡은 탁월한 죄수가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연사는 그 자체가 역시 자연적인 자살이다. 즉,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비이성적 존재인 자연에 의해 소멸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죽일 것인가, 아니면 그냥 내버려둔 채 죽일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결과는 양쪽 다 죽음이다. 여기서 이성적 죽음의 문제에 종교가 개입되면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한다. 최고차원의 이성적 존재인 신이 저차원의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는 인간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의 뜻이 인간의 뜻을 저지할 힘이 없는 것은 이 대복이다. 그래서 종교는 자살을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로 여겨 금지하는 것이다. 종교는 자연사가 신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면 자연사는 신의 뜻도 아니고 찬미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깊은 지혜에 바탕을 두고 남에게 죽음을 지시하거나 명령하는 일은 미래의 도덕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또한 비도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평안한 밤과 잠 못 이루는 밤 어느 것이 가치 있는가] 어떤 현자가 잠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잠은 우리 인간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다. 잠 못 이루고 밤을 지새우는 자는 멀리하라. 도둑마저도 잠자는 사람을 조심하는 마음에 발소리를 죽인 채 도둑질을 한다. 그러나 야경꾼은 잠자는 사람 따위는 아랑곳도 않은 채 한밤중에도 호루라기를 마구 불며 다닌다. 잠은 사소한 것이 결코 아니다. 밤에 잠을 자려면 온종일 눈을 뜨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에도 여러 번 졸음을 물리쳐야 한다. 그런 노력으로 적당한 피로가 쌓이고, 정신은 나른해 진다. 밤에 잠을 자려면 낮에 여러 번 자기 자신과 타협해야 한다. 자신과 싸워 이기기는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당한 선에서 자신과 타협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밤에 잠을 잘 수 없다. 또한 낮에 몇 가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밤에도 진리를 찾게 될 것이며, 텅 빈 정신은 채워지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낮에 여러 번 웃고 즐거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슬픔의 샘인 밤에 괴로워할 것이다. 그뿐 아니다. 밤에 잘 자려면 각종 미덕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 만일 다음날 거짓 증언을 할 작정이라면, 또는 이웃 사람의 아내를 탐내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깊이 잠들 수 없다. 그러므로 신에게 복종하라.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라. 그러면 깊이 잠들 수 있다. 또한 원수하고도 화해하라. 그렇지 않으면 원수가 꿈에 나타나 괴롭힐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는 권력자들에게도 복종하고 잘 섬겨라. 그래야만 깊이 잠들 수 있다. 그들이 그릇된 길을 걸을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차라리 복종하고 잠을 잘 자는 편이 낫다. 나는 대단한 명예나 재산도 바라지 않는다. 그런 것은 번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예와 재산이 전혀 없어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또한 친구들도 필요하다. 다만 친구는 필요할 때 같이 있다가 적당한 때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러한 교제는 잠을 깊이 자는데 도움이 된다. 이렇게 하여 날이 저물어 밤이 되면 낮에 했던 생각과 행동을 돌이켜 본다. 무엇을 극복하고, 어떤 진리를 깨달았는가? 어떤 일로 웃고 즐거워했는가? 이렇게 곰곰이 생각하고 있자면, 부르지도 않은 잠이 갑자기 몰려온다.」 이 현자는 참으로 바보 같은 말을 지껄이고 있다. 하지만 잠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겠다. 이런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행복할 것이다. 이런 잠은 몹시 두꺼운 벽도 뚫고 전염 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이런 설교에 솔깃한 것도 다 그런 까닭이다. 한마디로 그의 말은 밤에 잘 자려면 낮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생은 의미가 전혀 없다. 참으로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그의 말이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그들은 그저 잠을 깊이 자려고 덕을 실천하는 것이다. 존경받는 학자들에게 배울 지혜란 꿈도 없이 단잠을 자는 방법뿐이다. 그들은 보다 나은 삶의 의미를 전혀 모른다. 잠에 관해 설교한 현자와 똑같은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그들은 더 이상 서 있지 못하고, 이미 누워서 잠들어 버렸다. 잠꾸러기들은 축복받음 자들이다. 그들은 곧 잠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당신의 정신과 감각의 주인은 누구인가]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이 잇다. 나는 그들이 육체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는 육체와 작별하고, 침묵하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몸과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왜 이치에 맞지 않는단 말인가? 더욱이 까달은 자와 지혜로운 자는 “나는 하나의 육체일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영혼이란 육체에 속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단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육체는 하나의 커다란 이성이며, 수많은 감각을 지닌 감각체이다. 전쟁이자 평화며, 한 무리의 양떼이자 이를 모는 목자다. 사람들이 정신이라고 부르는 작은 이성도 육체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육체라는 커다란 이성의 작은 부분에 불과한 사소한 장난감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아라는 것을 떠받들지만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은 육체, 그리고 육체에 깃들어 있는 이성이다. 이 말을 믿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진실이니까. 육체는 자아에 관해 떠드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움직이고 있다. 감각이 느끼고 정신이 인식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고 목적도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감각과 정신이 모든 것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감각과 정신은 육체의 도구며 장남감일 뿐이다. 이 두 가지를 조종하는 것은 바로 육체로 대변되는 본래의 자아이다. 본래의 자아는 감각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정신의 귀를 통해 듣는다. 이렇게 감각과 정신을 수단으로 삼아 비교하고 명령하며, 정복하고 파괴한다. 이렇게 하여 자아를 지배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 본래의 자아다. 그리고 바로 당신의 육체 안에 이 본래의 자아가 살고 있다. 그러므로 육체야 말로 당신의 본래의 자아인 것이다. 당신의 육체 안에는 가장 탁월한 지혜보다 더 뛰어난 이성이 있다. 그러니 더 이상 무슨 지혜가 필요하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본래의 자아는 자아의 거만한 태도를 비웃으며 이렇게 생각한다. 자아의 발전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가려는 목적지를 돌아가게 만들 뿐이 아닌가? 나는 자아를 인도하는 끈이며, 자아의 개념을 알려주는 주체자인데!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자아여, 이제 고통을 느껴라! 그러면 이 말을 듣고 자아는 비로소 고통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지 궁리한다. 이처럼 자아는 본래의 자아로부터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때 본래의 자아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기쁨을 느껴라! 그러면 자아는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을 느끼며, 어떻게 하면 더 자주 기쁨을 느낄 수 있을지 궁리한다. 자아는 이렇게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육체를 경멸하는 사람들은 사실 육체를 존경하고 있다. 존경과 경멸, 가치와 의지를 만들어 내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본래의 자아가 자신을 위해 존경과 경멸을 만들었고, 육체가 자신을 위해 자기 손으로 정신을 창조한 것이다. 육체를 경멸하는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그토록 육체를 존경하면서도 결국 육체를 섬기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당신들의 본래의 자아는 죽음을 원하고 있다. 본래의 자아가 원하는 것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극복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육체가, 본래의 자아가 진정 원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당신들의 본래의 자아는 소멸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당신들은 육체를 경멸하게 된 것이 아닌가! 어쩌겠는가, 당신들은 이제 자신을 초월하여 창조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신들은 생명과 이 지상에 대해 분노하고, 질투에 불타는 것이다. 나는 당신들의 길을 가지 않겠다. 육체를 경멸하는 당신들은 초인으로 가는 다리가 없다. [종교가 말하는 진리를 과학으로 증명한 적이 있는가] [인간은 동물이 아닌가] 울 마음속에는 한 마리의 야수가 산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야수에게 곧잘 속아 넘어간다. 도덕이란 그 야수의 밤이 되지 않기 위한 최후의 속임수다. 야수를 잘 속여야 우리는 비로소 도덕적일 수 있는데, 그 야수를 속이기란 여간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적 인간이 기가 어려운 법이다. 만일 우리에게 도덕이 전혀 없다면 인간도 역시 한낱 동물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고귀한 존재로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한층 더 엄격한 규율을 강제해 왔으며, 그것을 통해서 극기의 수련을 계속해 왔다. 것은 인간이 동물적 판단과 가치를 미워했기 때문이다. 옛날에 노예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소유물로 취급한 것을 보면 설명 될 수 있을 것이다. 6. 내가 사랑한 것들 [다섯 가지 여행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멋진가]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데, 나는 여행자를 다섯 등급으로 나눈다. 첫 번째 부류는 가장 의미 없는 여행을 하는 최하급 여행자들이다. 그들은 여행을 떠나는 순간부터 돌아올 때까지 남에게 관찰당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행지나 여행의 대상에 머물러 있지만, 사실상 장님처럼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부류는 자신의 눈으로 실제로 세상을 관찰하는 여행자들이다. 세 번째 부류는 자신이 관찰한 결과를 체험해 보는 여행자들이다. 네 번째 부류는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소화해 내는 사람들이다. 다섯 번째 부류, w행자들은 극소수이다. 그들은 보고 듣고 체험하고 이해한 것들을 즉시 자신의 행동에 활용하는 사람들이다. 인생의 여로를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이렇게 다섯 등급으로 확실히 구별된다. 최하급의 여행자들은 지극히 수동적인 인간들이다. 그러나 최고급의 여행자들은 내면으로 체득한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활용하며 살아가는 행동가이며, 인생의 진정한 여행자인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진보적 철학자였을까] 위협적이고 과격한 진보 세력들이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그들이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란 겉으로는 진보를 표방하지만, 사실은 인류가 과거에 경험하여 폐기해 버린 것들을 주문을 통해 다시 불러낸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 진보라는 명분아래 낡은 과거의 이론을 들고 나오는 것은 그 이론이 이미 검증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반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진보 세력에 대항하는 다른 세력이 한층 더 강력하게 대두되고 만다. 에를 들어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유명해진 것은 그 당시 사회의 학문적 정신의 바탕이 얼마나 허약했던가 하는 점을 잘 증명해 준다. 따라서 그 당시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이 이미 붕괴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이 쇼펜하우어에 의해서 다시금 부활하게 되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많은 학설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철학 이론은 그가 처음 창출해낸 것이 기는커녕 옛날부터 우리에게 친숙했던 형이상학적 욕구의 재탕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오랫동안 우리들이 잊어버리고 있던 이론들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중대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의미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만일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과거의 이론들을 다시 검토해보는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류에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철학적 공적은 매우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또는 아시아의 여러 종교들이 주장하던 독선적 ud가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가 이루어낸 성과를 통해서 그 이후에 페트라르카, 에라스무스, 볼테르 등 계몽주의의 깃발을 높이 든 인물들이 나타나 세계의 역사는 진군을 계속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옛것을 다시 들고 나온 반동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진보의 성과를 거두는 실례를 보게 된 것이다. [가장 사치스러운 철학자] 작은 뜰에 무화과나무 몇 그루가 서 잇고, 약간의 치즈, 그리고 서너 명의 친구들만 있으면 행복하다. 이것이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사치였다. [자연은 위대하고 인간은 불안하다] 소나무는 귀를 기울여 무엇인가 열심히 듣고 있는 것 같다. 전나무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초조해하는 빛은 없다. 나무들은 초조함과 호기심으로 안절부절하지 않으며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살아가는 인간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Review
니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20세기의 철학, 신학, 심리학 등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만큼 그의 영향력은 크고 독창적이다. 이 책은 “니체의 인생론” 이지만 그가 말하는 “신관(神 觀念)”의 대부분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니체가 말하는 신은 성서에서 말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절대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니체가 말하는 신을 기독교적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생각함으로써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물론 니체도 자신이 만든 신을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무신론자라기보다는 다른 비 기독교인들처럼 불가지론자이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왜곡한 사상가였다. 그래서 그의 관점은 비 기독교인들의 구미에 잘 맞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래 맞다, 니체가 말하는 신은 분명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그런 신을 믿는 자들은 정말 바보요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의 이 책을 읽는 대중에게는 그가 말하는 하나님을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한편 기독교인들에게도 이 책이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그들 속에 니체의 생각과 같은 “하나님”이 있는지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몇몇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해서 썼다.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아마 내가 죽은 후에야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사람들이 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진지해져야 하고, 나의 걱정을 잘 견디어 내야 한다. 그리고 가혹하리만큼 정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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