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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9회 느헤미야기 8장-13장
느헤 8,1-18 율법 봉독
“그때에 온 백성이 일제히 ‘물 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청하였다. 에즈라 사제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율법서를 가져왔다.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룻날이었다”(1-2). 율법학자이며 사제인 에즈라가 느헤미야기에서 여기에 처음으로 나온다. 8-9장에서는 에즈라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반면, 느헤미야는 한 번 언급되는 것으로 그친다.
이제 에즈라 이야기는 삼인칭으로 바뀌면서 에즈라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8)으로 묘사되는 “모세의 율법서”를 공적으로 봉독하는 장면에 초점을 맞춘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로 이루어진 회중이 모인다. 에즈라는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 번역하면서… 그것을 설명하면서 읽어주었다’. 에즈라는 아람어 번역 또는 타르굼을 사용했을 것이다. 레위인들도 율법 교육에 열심히 참여한다.(8,7.9.11.13) 그 자리에 있었다고 거론되는 느헤미야의 이름(8,9)은 후대에 첨가됐을 것이다. 그 근거는 레위인들과 나란히 다른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문장구조와 문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에즈라의 봉독은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8,3) 행해졌다. “그는 ‘물 문’ 앞 광장에서,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3). 이것은 율법에 대한 백성들의 열정이 대단했었음을 암시해 준다. 그때 거기에 모인 백성들은 무려 6시간 이상 말씀을 듣고 있었던 셈이다. 이같이 오랜 시간 동안 말씀을 받는 일에 열중했다는 것과 더불어, 그들이 날이 밝자마자 모였다는 것도 그들의 열심을 잘 드러내준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그런 다음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6).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는 모세오경 전체를 소리 높여 읽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레 동안 계속된 율법 봉독의 첫 번째 봉독에 해당할 것이다(8,18).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하느님 백성이 모세의 율법에 얼마나 무지한가를 익히 알고 있었다. 성문화된 율법은 비교적 새로운 것이었다. 따라서 우선 이 성문화된 율법이 알려져야 했고 백성은 그 율법에 자신들을 맡겨야 했다. 그리하여 율법을 공포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대집회가 예루살렘에서 열렸다.
“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8). 에즈라는 이레 동안 하느님의 율법서를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줌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실천했고, 백성은 이로써 에즈라가 읽어 준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 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9).
이때부터 유다교는 책의 종교, 기쁨을 가져온다고 여긴 토라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종교가 된다(8,9-11). 이 이야기는 초막절 축제의 갱신으로 마무리된다(8,14-18; 레위 23,33-43; 신명 16,13-15 참조). “그들은 주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신 율법에, 일곱째 달 축제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은 초막에서 지내야 한다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14). 백성들은 율법의 말씀에 따라 초막을 만들어 그 안에서 지냈다. 사람들은 7일동안 초막절 축제를 보내고 8일째 되는 날 거룩한 집회를 열었다. 다시말해 이 축제는 일곱째 달 십오일에 시작하여 7일 동안 계속되고, 8일째 되는 날, 곧 이십이일에는 마감 의식이 거행된다. “에즈라는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날마다 하느님의 율법서를 읽어 주었다. 사람들은 이레 동안 축제를 지내고,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법규대로 거룩한 집회를 열었다”(18).
느헤 9,1-37 참회기도
“그달 스무나흗날,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루옷을 입고 흙을 뒤집어쓴 채, 단식하러 모여들었다. 이스라엘의 후예들은 모든 이방인과 갈라선 뒤, 제자리에 서서 자기들의 잘못과 조상들의 죄를 고백하였다”(1-2). '스무나흗날'은 초막절 행사가 완전히 끝난 22일의 이틀 후였다. 따라서 여기 언급되는 백성들의 회집(會集)은 초막절 행사와는 관계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백성들이 다시 모인 것은 하느님께 대한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그들이 칠월 초하루날에 죄를 인하여 슬피 울기는 했지만(8,9), 초막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온전한 회개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에즈라는 중요한 절기들이 지난 한날을 택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철저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자루옷을 입고 흙을 뒤집어 쓰고 단식한다는 것은 이것은 죄의 자각(自覺)으로 인한 애통한 마음의 외적인 표시이다. 죄의 회개와 관련하여 금식만 언급되는 부분은 1사무 7,6에 굵은 베옷을 입고 우는 경우는 창세 37,34과 1열왕 21,27에 나오며 그리고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는 것은 1사무 4,12 등이다.
2절에서 “모든 이방인과 갈라선 뒤”라는 갈라섬은 에즈라 9-10장을 우선 생각하게 되지만, 에즈라기에서는 이방 여자들과 관계를 끊는 것임에 반해서, 여기에서는 이방인 전체와 갈라서는 것이다. 레위 23,42는 초막절 기간 동안 이방인들이 초막에서 지내는 것을 금지하지만, 신명 16,14에 따르면 이 축제에 동참할 수는 있었다. 그래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2절을, 바로 이들이 앞으로 나오는 이스라엘인들의 공동고백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이 전례에서는 배제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당신은 주님 당신 홀로 주님이십니다. 당신께서 하늘을, 하늘 위의 하늘과 그 군대를,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는 당신께 하늘의 군대가 경배합니다”(6). 6절부터 9장의 마지막 부분인 38절까지는 백성들의 회개 기도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기도를 서술한 것은 일단의 레위인들이었고(5절) 에즈라는 이들의 배후에서 교육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한 듯하다. 이 기도문을 가리켜 혹자는 시편 밖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예배 기도문들 중의 하나라고 평한다. 백성들의 거듭되는 반역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이 기도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능력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창조에 있어(6절), 이집트와 홍해에서(9-11절), 광야와 시나이에서(12-21절),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22-25절), 판관들을 통해서(26-28절),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통해(32-37절).
“당신은 주님, 당신 홀로 주님이십니다”에서 '주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뜻으로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이라는 문구(5절)와 매우 잘 어울린다. 이 칭호는 하느님께서 인위적으로 조작된 이방신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존재이심을 강조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하늘 위의 하늘과 그 군대”에서 ‘하늘'은 대기권 혹은 궁창(창세 1,8)을, '하늘들의 하늘'은 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하늘, 즉 우주를 가리킨다.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란 지구에서 살도록 창조된 모든 동식물과 사람을 가리킨다(창세 1,20-30). 즉 하느님께서는 자연 세계를 만드시고 그것의 질서가 유지되도록 섭리하시는 것(1베드 3,7) 생물을 지시고 그 생명을 계속 연장시켜 주시는 것을 가리킨다(시편 36,6).
“이 모든 것이 저희에게 들이닥쳤지만 당신께는 잘못이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진실하게 처리하셨고 저희는 악하게 행동하였습니다. 저희 임금들과 수령들과 사제들과 조상들이 당신의 율법을 실천하지 않았고 당신 계명과 당신께서 내리신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33-34).
최초의 유배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백 년이 채 못 되어 하느님 백성은 다음 몇 세기 동안 나아갈 방향을 제법 훌륭하게 정립해 놓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다시는 같은 땅에서 모두 함께 살지는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하느님 백성의 대다수 공동체들은 이미 바빌론과 이집트에 확고하게 뿌리내렸으며, 이들이 자기네 선조들의 땅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후 여러 세기가 흐르면서 소아시아와 그리스와 이탈리아 여러 곳에도 많은 공동체가 세워졌다. 하느님 백성은 뭇 민족들 가운데로 퍼져 나가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정체성을 보존하려면 새로운 제도들과 지도자의 역할들이 옛것들과 나란히 발전할 필요가 있었다.
보존된 옛 제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전’이었다. 거룩한 도성 안에 계시는 야훼 하느님의 현존은 하느님 백성에게 그들 일체성의 근원을 매 순간 일깨워 주었다. 이집트에 있든 바빌론에 있든 하느님 백성에 속한 이들은 성전에서 그들의 이름으로 바쳐지는 예배에 직접 참여하게 될 날을 고대하곤 했다. 하지만 성전에서 예배가 집전되는 동안은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율법에 따른 예배의 의무는 완수되었다. 팔레스타인 밖에 거주하는 이들은 기부를 통해서 성전과 성전 전례를 지원하였다. 그리고 성전에서는 성대한 축제들이 열렸는데, 모든 이들이 순례를 와서 여기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였다.
성전에 계시는 주 하느님의 현존이 하느님 백성에 일치의 근원이었다면, 율법 즉 하느님의 뜻은 그 일치의 끈이었다. 이제 율법은 기록으로 고정되었고, 그 필사본들의 입수가 가능해진 만큼, 하느님 백성은 어디에서든지 간에 율법을 알고 율법에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백성 사이에 율법에 대한 커다란 사랑과 헌신이 자라났고, 자기네 율법이 다른 민족들과 종교들의 가르침들보다 얼마나 더 탁월한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율법을 부여받게 된 데 대해 감사와 자부심을 느꼈고, 율법이 요구하는 겸손으로 그것을 실행코자 노력하였다.
팔레스타인 지역 안에서는 백성의 지도권이 대사제에게로 넘어갔다. 대사제란 성전에서 주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의 통솔자였다. 이 직책은 그 기원과 발전이 모두 불분명하다. 유배 이후에 대사제가 어떻게 임명되었는지도 분명하지 않고, 그가 갖는 의무와 권한이 무엇이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아무튼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제는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으며 백성들의 재판을 권장하는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최초의 귀환자들을 이끌었던 두 사람, 즉 다윗 와가의 왕손인 즈루빠벨과 사제 요수아가 행사했던 이원적(二元的) 지도권은 계속되지 못했고 즈루빠벨을 왕위에 앉히려는 시도도 있었는지 모르나 얼마 안 가서 대사제의 ‘즉위’만이 가능한 것으로 입증되었다(즈카 6,9-14).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역할을 하는 율법 학자들이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였음을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이 율법 학자들은 팔레스타인에서나 바깥 공동체에서나 그 중요성이 점점 켜져 갔다. 그들은 율법서와 성경의 일부가 된 다른 책들의 사본을 만들었으며,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설명해 주거나 새롭고 낯선 상황에 율법을 적용하는 데 대한 어려운 문제들에 답해 주기 위해 율법을 연구하였다. 이들은 또한 율법을 하느님 백성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에도 책임이 있었다. 히브리 말은 율법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성경의 언어가 되어 버렸다.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 하에서 공통 언어는 아람 말이었고, 그 후에 그리스의 지배 하에서는 팔레스타인 밖에 있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들이 일반적으로 그리스 말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배지에서 귀환한 후 몇 세기가 흐르면서 완전히 새로운 제도가 생겨났는데, 바로 ‘회당(시나고가)’이었다. 구약성경 안에는 회당에 관한 자세한 자료가 거의 없다. 그러나 회당의 뿌리가 바빌론에서 이루어졌던 유배자들의 모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확실하다. 율법에 따른 희생 제사를 바칠 수 없었던 유배자들은 성전이 없었기에 한 장소에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야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유산을 연구했다. 이런 모임들은 유배가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회당은 공동체가 모여 기도하고 하느님 말씀과 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수행할 수 있는 행위들(예컨대, 희생 제사)을 제외한 형태의 예배를 드리는 모임이 되었다. 회당의 예식들은 어디에다 공동체를 형성하든 이 백성의 신앙과 신심을 키워 주는 곳으로 발전했으며, 오래지 않아 하느님 백성이 사는 고을이나 도시면 어디에나 회당이 조직되었다. 율법 학자들은 회당에서 해설자요 교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특히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회당에 의해 설립되면서 그 역할이 더욱 커졌다.
이민족들과의 관계는 다양했다. 팔레스타인 밖의 공동체들은 거의 필수적으로 국내의 경우보다 더 개방적이었다. 유배 이후의 시기에 대한 자료가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에 이러한 발전상들을 명확하게 보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원전 100년경에 이르기까지 야훼 하느님의 공동체에 가담하는 이교도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는 바이다. 이러한 과정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이 분명하다.
‘개종자들’은 두 부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하나인 프로셀리테(proselyte: ‘가까이 다가오는 자’라는 뜻의 그리스 말로, 유다교로 개종한 이를 가리킴)는 하느님 백성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는 새로 태어난 사람으로 취급되어 할례를 받고 몸을 씻고 희생 제사도 바쳤으며, 이교인으로 살던 과거의 모든 유대를 끊어야 했다. 이것은 비교적 엄한 형태의 개종이었다. 또 다른 형태의 개종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God- fearer)’ 이라고 불렸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야훼 하느님을 성경에 계시된 대로, 또 하느님 백성이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였다. 즉, 계명과 정결례에 관한 법규를 지켰으며, 회당 예배에도 참석했다. 하지만 그들은 할례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따라서 완전한 하느님 백성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이런 형태의 개종은 비교적 철저함이 덜했기 때문에 많은 이민족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느헤 10,1-40 맹약의 규정
“이 모든 것 때문에 우리는 맹약을 맺고 그것을 기록하였다. 밀봉한 그 문서에는 우리의 수령들과 레위인들과 사제들이 서명하였다”(1). 1절은 9장과 10장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맹약이란 ‘견고한 언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계약 당사자들이 계약 의무를 다짐하기 위해, 그리고 언약을 어겼을 경우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상징적 의식으로서 짐승을 잡아 둘로 쪼갠 후 그 사이를 지나면서 엄숙히 선서하던 고대 사회의 계약 체결 관습에서 유래하여 '메리트'가 '언약'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수령들과 레위인들과 사제들’ 이들은 모두 백성들의 지도자들이다. 여기서 지도자들이 먼저 죄악에서 떠나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암시되고 있다. 이들이 서명을 하였다. 이는 구체적으로 진흙에 새겨 구워 만든 도장을 언약문(言約文)에 찍는 행위를 가리킨다.
10장 2절 이하에서는 밀봉한 문서에 서명한 이들인 사제들, 레위인들, 사제들의 명단이 나온다. 그리고 29절에는 맹약의 규정들을 앞에서 언급한 지도자 계급의 사람들 이외 모든 이들이 규정을 알도록 하였다. “유력자인 저희 형제들을 지지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하느님의 율법에 따라 걷고, 주 우리 하느님의 모든 계명과 그분의 법규들과 규정들을 지키고 실천하며, 어기면 저주를 받겠다고 맹세하였다”(30).
그런데 이방인과의 통혼(通婚)과 관련된 에즈라의 개혁 조치(에즈 9,10장)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그 같은 악습이 완전히 근절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에즈라의 개혁으로 통혼의 문제는 얼마 동안 거의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즈라가 페르시아 궁전으로 소환되어 오랜 기간 그곳에 있었고(8,1), 느헤미야도 에즈라가 다시 돌아오기 직전에 온터라, 이방인과의 통혼 악습은 되살아났음이 분명하다(13,23).
따라서 앞으로는 이민족과의 결혼을 피해야 한다(31절). 안식일이나 축제일에 상거래를 해서는 안되고(32절) 안식년에 관한 법규들을 준수해야 하며(32절), 성전 전례는 세금과 다른 여러 규정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34-40절).
이민족과의 혼인에 대한 대책에 있어서 이스라엘 선조들의 그 같은 행위들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적어도 시대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과, 그 시대에는 어떤 종류의 가혹한 조처가 필요했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기 나라의 안과 밖에 흩어져 살면서 한 임금이 다스리는 통일된 정치 조직도 없고 예루살렘에 모두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도 없었던 상황, 이 새로운 상황은 하느님 백성에게 어떤 단호한 행동과 결단을 하도록 요구했다. 외국인들과 외국 문화 속에 동화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그러한 조처가 없었다면 과연 하느님 백성이 존속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유배를 간 사마리아인들은 몇 세기가 흐른 후에 어떻게 되었던가? 그들은 아시리아인들에 의해 끌려갔던 유배지에서 그곳 민족들의 문화와 종교 속에 묻혀 그냥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같은 과정이 주로 이민족들과의 통혼이라는 평범한 수단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하느님 백성은 수가 매우 적었으며 페르시아 제국 전역에 흩어진 서로 다른 공동체들 안에서 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규정들을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에즈라와 느헤미냐의 법규 근저에 깔려 있던 생존을 위한 결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혼혈 결혼 금지 규정은 또 신앙의 전수(傳受)와 관현하여 가정의 중요성, 특히 어머니의 역할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아주 새로운 의식을 지적해 주고 있다. 개종하지 않은 이민족 아내와 어머니는 거의 필연적으로 자녀를 하느님 백성의 신앙으로 양육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체험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은 있었으니, 이민족 아내가 이스라엘인 남편의 신앙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느헤 11,1-36 예루살렘에 자리 잡은 이들
“백성의 수령들은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았다. 나머지 백성은 제비로 열 사람 가운데에서 하나를 뽑아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게 하고, 아홉은 다른 성읍들에서 살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은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겠다고 자원한 모든 사람에게 축복하였다”(1-2).
여기서부터는 예루살렘의 주민 수를 늘리기 위한 조치들이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예루살렘의 주민 수를 증가시키기 위한 최초의 노력이 언급되고 있는 7장, 특히 그 장의 4절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도성은 넓고 컸지만 그 안의 백성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집들도 아직 지어지지 않은 채였다”(7,4).
“백성의 수령들은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았다” 이에 대해서는 그 즈음 '수령들'이 솔선 수범하여 먼저 예루살렘에 정착했다는 견해와 포로에서 돌아온 첫날부터 '수령들'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는 견해 등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이처럼 두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여기의 '머물렀고'(야솨브)가 그런 두 가지의 해석을 가능케 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헤미야 도착 전에 이미 상류층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언급이 있음(2,16)을 볼 때, 대다수의 '수령들'은 애당초부터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이번의 맹약 갱신을 계기로 타지역으로 가서 살았던 일부 수령들까지 일괄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봄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한편, '수령'(사르)은 일반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나머지 백성은 제비로 열 사람 가운데에서 하나를 뽑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잠언 16,33)는 믿음에 따라서,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 살던 백성들의 10%를 예루살렘으로 이주시킨 것을 가리킨다. 이때 가족 전체가 이주했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 조치로 인하여 이산(離散)가족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룩한 도성’ 이는 후기에 기록된 구약 성경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18절; 이사 48,2). 그런데 이 같은 어구로 예루살렘을 수식한 까닭은, 예루살렘이 비록 이방 대적들의 위협이 가장 많았던 곳이긴 하지만 예배의 중심지이며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의 거주가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를 암시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보인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겠다고 자원한 모든 사람에게 축복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제비뽑혀서 본의 아니게 예루살렘으로 이주하게 된 백성 이외의 사람 중 그들과 함께 이주하여 살기를 자청한 사람들로 보는 견해가 있다. 또한 제비 뽑혀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야 할 백성 중 기쁜 마음으로 가는 자들로 보는 견해 등 두가지 해석이 제시된다. 그러나 첫째,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야 할 숫자를 십분의 일로 못 박았고(1절) 둘째, 여기의 '자원한'(나다브)이라는 단어는 대개 재귀형으로만 사용되어 마땅히 이행해야 할 의무를 기꺼이 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두 해석 중 후자가 보다 타당하다.
3절 이하는 예루살렘에 자리 잡은 우두머리들에 대해 열거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들의 소유지에 사제, 레위인, 성전 막일꾼들, 솔로몬의 종들이 후손들이 자리를 잡았다. “유다의 자손들과 벤야민의 자손들 가운데 일부가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았다. 유다의 자손으로는 아타야가 있었는데, 아타야는 우찌야의 아들, 우찌야는 즈카르야의 아들, 즈카르야는 아마르야의 아들, 아마르야는 스파트야의 아들, 스파트야는 마할랄엘의 아들, 마할랄엘은 페레츠의 자손이다”(4).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백성들 중에는 여기의 두 지파 이외의 출신도 분명히 있었다. 즉,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출신 및 심지어는 아세르 지파 출신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당시 유다 지파와 베냐민지파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구성하던 주요 구성원이었다는 점에서, 이처럼 두 지파만이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11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밖에 정착한 사람들에 대한 이름이 나온다.
느헤 12,1-26 즈루빠벨과 귀향한 사제들과 레위인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과 예수아와 함께 올라온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이러하다.”(1). 느헤미야는 인구 재정착 작업을 마친 후 (11장), 이스라엘의 존재 기반인 주님께 대한 신앙의 종교적 제도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사제 및 레위인들의 족보를 조사한다.
즈루빠벨과 및 예수아는 바빌론으로 부터의 제1차 귀환을 주도했던 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였다(에즈 2,2). 따라서 1절부터 7절까지에 언급되는 사제 가문은 모두 최초의 귀환 대열에 속했었다. 한편, 1-7절 외에 12-21절과(느헤미야 초기시대의 사제 가문의 명단), 10,2-8(느헤미야후기 시대의 사제 가문의 명단)에도 사제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느헤 12,27-30 예루살렘 성벽 봉헌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할 때, 사람들은 레위인들을 곳곳에서 찾아내어 예루살렘으로 데려왔다. 자바라와 수금과 비파에 맞추어 감사와 노래로 봉헌식을 기쁘게 올리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성가대가 모여들었는데, 예루살렘 주변 일대와 느토파인들의 촌락들, 벳 길갈, 게바와 아즈마 들판에서 왔다. 성가대는 예루살렘 주변에 촌락들을 세우고 살았던 것이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자신들을 정결하게 한 다음, 백성과 성문들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였다”(27-30).
성벽을 완성한 후 이제 장엄한 예식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이야기이다. 성벽을 봉헌할 때 “레위인들을 곳곳에서 찾아내어 예루살렘으로 데려왔다.”(27절) 하는 표현에서 역대기계 역사학파들이 강조하고 싶어 하는 ‘레위인’이 눈에 들어온다. 성벽을 봉헌하는 중요한 순간에 레위인들을 중요한 위치에 놓고 싶어 하는 의도가 드러난다. 레위인들은 그 땅의 도처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이처럼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소환되어야 했다.
느헤 12,44-47 백성이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후원함
“그날, 예물과 맏물과 십일조를 보관하는 방들을 맡을 사람들이 임명되었다. 이는 율법에 정해진 대로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몫을 각 성읍에 딸린 밭에서 거두어 그곳에 모아 놓으려는 것이었다. 유다인들이 직무를 수행하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보고 기뻐하였기 때문이다”(44).
하느님의 집을 관리하기 위하여 그 직무를 수행할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임명되고, 백성들이 이들을 후원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도 역대기계 역사학파들이 사제들, 레위인들, 성가대, 문지기들과 그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역대기계 역사학파들은 사제들과 레위인들에 대한 강조뿐만 아니라 성가대와 문지기들에 대한 강조 역시 잊지 않는다. “즈루빠벨과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성가대와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필요한 몫을 주었다. 백성은 레위인들에게 돌아갈 거룩한 몫을 떼어 놓았고, 레위인들은 아론의 자손들에게 돌아갈 거룩한 몫을 떼어 놓았다”(47).
느헤 13,1-30 느헤미야의 개혁
기원전 433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465-424년) 통치 제32년에 느헤미야는 수사로 돌아간다. 12,27-43과 7,1-5에 묘사된 사건이 일어나 후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숙적인 토비야가 다시 권력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예루살렘에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13,7-8).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토비야의 집 세간을 모두 제거해 버린다(13,9). 그리고 레위인 후원(13,10-13)과 안식일 휴일 규정을 다시 확립한다(13,15-22). 이민족과의 혼인을 금지하고(13,23-27; 에즈 9-10장 참조). 대사제직 자리와 관련된 산발랏 집안의 영향력을 약화시킨다(13,28-29). 이런 활동과 다른 종교개혁(13,30-31)은 그를 에즈라와 유사하게 보이게 한다.
느헤미야의 두 번째 개혁이 이루어지는 부분이다. 느헤미야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제삼십이년(기원전 433-432년)에 바빌론으로 돌아갔지만, 귀환한 유다인들이 안정된 정착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자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다. 느헤미야는 성전 정화, 레위인의 대우, 안식일 준수, 이민족과의 혼인 금지 등 강력하게 개혁 조치를 수행하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할 때부터 끊임없이 방해하던 토비야가 하느님의 집 뜰에 있는 방에 머무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를 그 방에 들인 엘야십 사제를 꾸짖고는 토비야를 내쫓은 후 그 방을 정결하게 한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야, 엘야십이 하느님의 집 뜰에 있는 방을 토비야에게 차려 주는 악행을 저지른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몹시 화가 나서 토비야의 집 세간을 모두 방 밖으로 내던지고, 방들을 정결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런 다음에 하느님의 집 기물들과 곡식 제물과 향료를 도로 가져다 두게 하였다”(7-9).
또한 레위인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제대로 배당되지 않아 그들이 제 밭이 있는 곳으로 달아나자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여 원래대로 회복시켜 놓는다. “그러자 모든 유다인이 곡식과 햇포도주와 햇기름의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왔다”(12). “저의 하느님, 이 일을 한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제 하느님의 집과 그분 섬기는 일을 위하여 제가 한 이 덕행을 지워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14).
한편 안식일인데도 식품을 들여와 사고파는 모습을 보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규정을 지킬 수 있도록 바로잡아 놓는다. “나는 레위인들에게 자신들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들을 지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라고 지시하였다. ‘저의 하느님, 이것도 저를 위하여 기억해 주십시오.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저를 가엾이 여겨 주십시오”(22). 그리고 이민족과 혼인한 사람들을 꾸짖고 저주하며, 또 그들 중 몇몇을 때리고 머리털을 뽑기도 하는 등의 행동을 한다. 이는 비슷한 상황에서 에즈라가 취한 행동과는 대조되는 행동이다(에즈 9,3).
한편 여기에서 반복되어 들어오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하느님께 자신이 한 좋은 행동을 기억해 주시라고 기도’하는 모습이다. 하느님께 자신을 좋게 기억해 주시라는 기도로 느헤미야기는 마무리된다. “저의 하느님, 저를 좋게 기억해 주십시오”(30).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의 메시지>
주제 요약
위에서 선택된 구절들은 다음과 같은 주제를 강조한다.
· 유배에서의 귀환과 전례의 복구 (에즈 1,5-11; 3,1-13; 6,19-22)
· 반대, 적대감, 고통 (에즈 4,1-5; 느헤 2,10.19-20; 4,1-17; 6,10-14)
· 페르시아 제국의 권위에 대한 관심 (에즈 6,1-12; 7,14; 느헤 1,11; 2,1-9)
· 율법서 (에즈 6,18; 7,6.10; 느헤 8,1-18)
· 예배와 공동체에서 이방인 배척 (에즈 6,21; 9,1-5; 느헤 13,23-27)
· 이스라엘의 집회 (에즈 10,1.8.12.14; 느헤 5,13; 8,2.17; 13,1)
· 백성의 죄 고백과 율법에 대한 순종 (에즈 10,1-15)
·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는 공동체 (느헤 5,1-13)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의 신학
오늘날 정통 유다인의 관점에서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를 읽는다면 배타주의적 자세와 공동체 둘레에 벽을 쌓고 율법의 가장 작은 규정도 엄밀히 준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완벽하게 지지하는 본문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유로운 개인주의 안에서 교육받은 유다인이나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이 책들을 읽는다면 에즈라의 메시지에 충격을 받아 거부감을 느낄 것이고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질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가 전하는 메시지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가려내고 선택할 수 있는가?
이 진퇴양난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상황이다. 상황을 통해 배타주의와 율법주의는 현실의 일부분에만 영향을 끼쳤음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목숨을 위협하는 반대와 갈등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그런 상황 가운데 하나다. 이스라엘은 전적인 파멸에 직면했다. 예루사렘은 붕괴되어 돌무더기가 되었고 다윗 왕조는 끝났다. 하느님의 ‘거룩한 왕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스라엘은 강력하고 휘황찬란한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 작고 가난한 속국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자신이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확신을 포기해야 하는가? 에즈라와 느헤마야는 이스라엘에게 그 확실을 버리지 말라고 권고하다.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의 엄격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다른 상황은 성경 전체다. 구약성경 정경의 다른 책들은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의 배타주의와 현저히 대조된다. 룻기는 유다인 보아즈와 모압 여인 룻의 거룩한 결혼을 기록한다. 요나는 이방인 아시리아가 복은 받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유다인의 속 좁고 편협한 자세를 풍자한다. 제2이사야서와 제3이사야서는 이스라엘에게 세상을 향해 문을 열라고 설교한다. 복음서와 바오로 서간은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은 사랑의 율법이며 사랑은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는 이런 상반된 책들과 토론하며 읽어야 한다. 이 토론 안에서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의 메시지는 신실한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신앙이 유지되고 전수되는 것은 군대 안이나 한 명의 영향력 있는 성직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실한 가정을 통해서다.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에서 이야기가 전개될 때, 우리는 왕조가 아니라 지도층 사제에 토대를 둔 새로운 지도력의 형태를 보게 된다. 사제 에즈라와 임금의 헌작 시종인 느헤미야가 백성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권위를 행사한다. 그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행동하지 않으며 그들의 역할을 자녀에게 물려주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통치 과업을 수행한 후에 사라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느 정도 과거의 판관들처럼 ‘특별한 상황에서 부상하는’ 지도력을 본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율법에 대해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되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토라가 주로 임금을 대상으로 하고 계약에 대한 충성에 초점을 둔 반면, 율법은 사회적 정체성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모든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행동 지침이 된다. 사람들은 어떻게 율법을 지키는가를 통해 자신들이 이스라엘에 속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달라진 율법 이해는 파멸의 시기에 자연스레 나타난 방어적 반응인 것 같다. 기원후 70년 로마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을 때도 똑같은 반응이 일어난다. 힘없고 조롱받는 사람들은 마차로 주위를 둘러싸고 그 안에 있는 자신들의 공동체 내에서 복종을 요구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지 모른다. 하지만 힘 있고 존경 받는 무리에서 그렇게 복종을 요구한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에서는 성전이 중심을 차지한다. 제2성전을 건설하는 것은 다윗 왕조를 부활시키는 것보다 수월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힘 대신 종교의 힘에 의지한다. 이스라엘은 무력을 행사하거나 이민족의 정책에 대항하지 않고 페르시아 제국의 뜻에 따르면서 살았고, 이런 세속적인 정치권력의 상황 안에서 자신의 힘을 발견해야 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 두 책의 서두에 나오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중요한 신앙고백(에즈 1,2-3)은 이스라엘과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와 맺는 새로운 관계를 묘사한다. 이스라엘은 다른 백성과 통치자가 “하늘의 하느님”을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평화롭게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성전 전례에 대한 강조와 유사한 것이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유다인의 종교생활의 다른 측면, 곧 종교적인 집회다. 이민족과의 혼인이라는 죄를 인정하기 위해 이스라엘 온 백성이 모인다(에즈 10,1.8.12.14). 또한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억압을 중지하려는 그들의 결심을 선언하기 위해 모두 함께 모인다.(느헤 5,13) 그리고 그들은 큰 회중으로서 율법서 봉독에 귀 기울이고(느헤 8,2) 초막절 축제를 기념한다(8,17). 유다인들은 암몬인과 모압인을 “하느님의 회중”(13,1)에서 제외한다. 온 백성으로서 본국으로 송환된 유다인들이 모이는 것은 신명기 신학에 따른 호렙의 큰 ‘집회의 날’ 이미지를 명확하게 반영한다(신명 18,16; 5,22; 9,10; 10,4; 23,2-4 참조).
이 집회 이미지는 유다인들이 희생제물을 바치거나 다른 형태의 성전 전례에 참여할 수 없었던 유배기의 회당의 발전을 반영한다. 그들에게 성전은 없었지만 율법에 귀 기울이고 함께 기도하기 위해 모일 수는 있었다. 기원전 2세기에 만들어진 구약성경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카할을 그리스어 에클레시아보다 시나고게로 더 자주 번역한다.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는 이스라엘의 집회를 강조하면서 후대의 라삐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서 회중의 중요성을 크게 부여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의 메시지는 희망의 메시지다. 파괴와 잔해 속에서 새 생명이 나온다. 에즈라와 느헤미야보다 수십 년 전에 에제키엘이 예고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마른 뼈들”이 하느님의 “영”과 함께 살아난다(에제 37장). 죽음에서 나온 생명은 하느님 은총의 유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