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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 요한계시록 강해(99) - 마라나타
본 문 : 계시록22 : 6 ~ 21
계22:6~22절,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이것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리라 하더라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 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나 예수는 교회를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 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할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 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의 본문은 요한계시록을 마무리하는 에필로그이며, 2018년 1월 9일 첫 강해를 올리며 시작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강해의 시간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다소 산만한 구성처럼 보이기도 하고, 논리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용을 잘 정리해 보면, 두 개의 주제로 요약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예언으로서 요한계시록 말씀의 권위를 확증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예수님의 신속한 오심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6절의 말씀을 보면, 지금까지 공부한 요한계시록에서 예언한 내용들이 “결코 속히 될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의 “결코 속히 될 일”(‘데이 게네스다이 엔 타케이’;δει γενέσθαι ἐν τάχει)을 원문대로 해석하면, ‘신속하게 반드시 되어야만 하는 것들’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요한계시록을 가르쳤을 때 한 학생이, ‘신속하게 반드시 된다고 하면서 왜 지금까지 안 이루어진 겁니까? 라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들이 믿는 예수님이 속히 온다면서 왜 지금까지 안 오느냐‘며 조롱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긴 계시록을 기록된 것이 AD 95년경이고 그로부터 1,900년 이상 지났습니다. 주님이 오실 것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조롱받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여기 ’속히‘(‘신속하게’;ἐν τάχει)라는 문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건이 단순히 성급하게 완성하는 것을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목적의 확실한 성취’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의 “신속하게 반드시 되어야만 하는 것들”은 직전의 21장의 내용인 ‘새 예루살렘의 도래’와 같은 미래적 종말의 사건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같은 이미 시작된 종말 사건을 가리킨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신속하게 되어야만 하는 것들’은 이미 십자가로 실현된 종말로서의 ‘초림’과 언제가 미래에 완성될 종말로서의 ‘재림’에 모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은 이처럼 이미 실현된 것과 아직 실현되지 않고 완성을 남겨 놓은 것들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를 곧 ‘이중적 종말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신속하게 되어야만 하는 것들’에 의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이 긴밀하게 연동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초림 이후에 성도들은 이미 재림을 선취적(先就的)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적인 의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시간적인 의식이라는 것은 역사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 개념이지 하나님의 의식과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는 묵시의 세계에 계시다는 사실을 또한 잊지 맙시다.
여기 ‘속히’라고 번역된 ‘타케이’(ταχει,6절)나 ‘타쿠’(ταχύ,20절)는 ‘타퀴스’(ταχύς)라는 형용사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헬라어 ‘타퀴스’는 ‘갑자기, 선뜻, 반드시’ 등의 의미가 더 강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속히’는 시간적 의미인 ‘곧’이라는 의미보다는 ‘번복되거나 취소됨 없이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어서 7절에서도 ‘속히 오리니’(‘신속하게 오신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전체에서 ‘오심’(‘엘코이’,ἕρχομαι=to come, to go)는 표현은 6회(2:5,16;3:11;22:7,12,20) 사용되고 있습니다.
계2:5, “내가 네게 임하여”(ἔρχομαί σοι=I am coming to you)
계2:16,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ἔρχομαί σμι ταχύ=I am coming to you quickly)
계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ἔρχομαι ταχύ=I am coming quickly)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
계22:7a, “내가 속히 오리니”(ἔρχομαι ταχύ=I am coming quickly)
계22:12a, “내가 속히 오리니”(ἔρχομαι ταχύ=I am coming quickly)
계22:20b, “내가 속히 오리니”(ἔρχομαι ταχύ=I am coming quickly)
위의 여섯 개의 본문에서의 ‘오심’은 단순히 재림 만을 가리키고 있지 않습니다. 처음 두 개(계2:5, 16)는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든 오시는 조건적이며 상시적 오심을 말합니다.
특별히 계3:11절은 재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시간’으로부터 지켜 주시기 위해 오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성만찬의 현장에 오시는 것으로 상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22:7a, 12a, 20b절은 모두 동일한 문구가 사용되고, 같은 문맥 안에 속해 있어서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 3개의 본문 모두 역시 성만찬의 정황에서 오심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분의 오심의 절정으로서 마지막 때의 “오심”(재림)을 나타낸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그분의 ‘오심’이 항상 재림만을 나타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상황에서 이 세상으로 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7절 후반절에서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속히 오신 결과를 보여줍니다. 즉 “예언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승천하시어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상시적으로 오시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커다란 위로와 격려가 되지 않을 수 없으며, 예수님의 임재와 통치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절로 넘어갑니다.
계22:10절,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이 본문의 말씀은 단8:26, 12:4,9절에서 마지막 때까지 책을 인봉하고 간수하라고 말씀한 내용과, 계5:1~5절에서 힘센 천사가 “누가 그 책을 열며 그것의 인들을 떼기에 합당한가?”라고 외치며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말씀하신 것과는 정반대의 내용입니다.
여기 ‘인봉하지 말라’는 말씀은 계5장에서 죽임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께서 인봉된 책을 열게 된 사건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책이 인봉되었다’는 것은 종말의 때에 책의 인을 떼게 될 것을 전망하는 단12:4절을 배경으로 볼 때 아직 종말이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반대로 이야기하면, 어린양의 대속적 죽음으로 종말이 도래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은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인봉된 책과는 달리 열려져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이 문구는 어린양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반복될 수 없는 것처럼, 그 결과로서 종말적 사건도 되돌릴 수 없고, 그리고 되돌리지도 말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상징적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사건 이후부터의 기간을 종말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의 십자가로 시작된 종말은 그 마지막 종말이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말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때가 가깝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미래적 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된 것과 완성될 것을 이중적으로 포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곧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 시작된 종말의 완성에 대한 기대를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11절을 열겠습니다.
계22:11절을 보면,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이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 선택되어 믿음을 소유한 자들을 제외한 모든 죄인들은 계속해서 불의하고 더럽게 살게 되지만, 하나님께 선택된 자들은 의를 행하고 거룩하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소유한 성도들은 이 땅에서 의를 행하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며 연습하며 훈련하여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일에 전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계12:12절을 봅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여기 ‘내가 줄 상’의 ‘상’(μισθος,미스도스)이란 단어는 계11:18절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라는 문구의 ‘상 주시며’라는 문구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심판과 대조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의 종들 선지자들과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문구를 연결하면 ‘그의 행한 대로 갚아줄 나의 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일한 대로 갚아 줄 나의 상”은 무엇일까요? 흔히 봉사 많이 하고, 선교하고, 헌금 많이 하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 분량에 따라 차등 있는 상을 주실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이라는 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에 따르면 그 ‘상’을 위해서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해야 할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요6:28~29절을 엽니다.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하시니”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해야할 유일한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그 믿음이라는 ‘일’의 결과로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거룩을 향한 분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계22:14절을 보시면,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여기서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옷을 빠는 것’은 더러운 것들을 제거하는 행위로서 ‘도덕적이며 영적 청결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선 계12:14절을 공부할 때, 성도들은 어린양의 피에 이미 두루마기를 희게 빨아 입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 땅에서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빠는 삶, 곧 거룩한 삶을 살게 됨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본문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22:15절을 찾습니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여기 ‘성 밖’이란 새 예루살렘 밖을 가리키고 있는 말씀으로, 그 밖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목록은 ‘개들(성적 타락한 자들)과 술객(점술가)들과 행음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을 좋아하며 만들어내는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데, 이런 자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의 힘을 믿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힘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성도들은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을 공고히 하며 두루마기를 빠는 일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선물이 너무나 소중하기에 세상을 향해 ‘당신들도 어서 거기서 나와 이리로 오라’고 외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7절의 말씀을 보면, 성도들의 삶이 ‘복의 전달자’로서의 삶이어야 함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22:17절,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6절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메시아로 계시하신 직후, 다음 17절에서는 성령과 신부가 말하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 ‘성령’과 함께 등장하는 ‘신부’는 구속 역사의 절정의 시점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새 예루살렘(계21:2)으로서, 종말적 관점에서 본 교회 공동체 전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교회 공동체는 흠이 많은 계2~3장에 등장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화와는 전적으로 다른 완전히 새로워진 교회 공동체입니다.
성령과 함께 신부, 곧 교회 공동체가 ‘오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말을 듣는 자들도 ‘오라’고 외칩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이 땅에서 신자다운 사람, 거룩한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오라’고 외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지금까지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성경에 ‘성도는 예수를 믿음을 통해 만사형통, 질병치유, 승승장구’한다는 내용을 한 구절이라도 발견하셨습니까? 오히려 성도는 이 땅에서 고난을 통과한다. 그러나 그 고난은 너희를 양육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그러니 잘 참아라. 이겨내라‘였습니다.
도대체 ’예수를 잘 믿으면 잘 먹고 잘살게 된다‘는 번영신학이나 성공신학, 기복신앙, 신비주의’ 등 이런 것들은 모두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것들은 여전히 힘을 추구하며 자신의 유익과 목적을 위해 하나님마저도 수단화하여 종으로 부리고 싶어하는 악한 죄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러한 자들에게 커다란 재앙으로 갚으실 것이라 천명하셨습니다. 다음 구절로 넘어갑니다.
계22:18~19절을 엽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 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들(거짓 목사들)이 나타나서 진리의 복음에다가 불순물을 섞어서 엉터리 복음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여러 번 경고를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보내신 영인이 아닌지를 조심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요일4:1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영(πνεύμα=spirit)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이처럼 마귀가 보낸 거짓 선지자들이 말씀을 전하는 목사로, 교사로, 선교사로 이 세상에 와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에다 불순물을 집어넣어 세상을 미혹하고 하나님 백성들까지 미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결론으로서의 계시록의 마지막 말씀은 예언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지배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더하다’(ἐπιθη)와 ‘제하다’(ἀϕέλη)입니다.
예언의 말씀들에 무엇인가를 더할 경우, 그 예언의 말씀에 기록된 재앙들을 더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그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면 요한계시록의 말씀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에 참예 함을 제하여 버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더하다’와 ‘제하다’라는 행위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반적 불순종’이 아니고 ‘존재하는 말씀에 덧붙여진 말(inscripturated word)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에로의 집착’을 가리킵니다.
19절의 ‘생명 나무’는 계22:2절에 언급된 ‘강 양쪽에 생명 나무’와 동일한 것이고, ‘거룩한 도시’는 계21:9~22:5절에서 소개된 어린 양의 신부로서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계22:20절입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말씀을 증거하신 예수님께서는 중거하신 모든 내용대로 그것은 ‘확실히 신속하게 오신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앞서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참고해 주시면 이해의 폭이 넓어지리라 생각하며, 여기서는 예수님의 오심은 ‘상시적 오심’과 ‘재창조와 심판을 위한 재림’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재림은 상시적 오심의 절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것은 예수님의 속히 오심의 선포에 대한 신부인 교회 공동체의 정겨운 화답입니다. 예수님의 신속한 오심은 그것이 상시적 오심이든 아니면 재림이든, 신실한 성도들이라면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그 오심의 사건은 현재의 시점에서 ‘임재와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완성의 시점에서 모든 역사가 마무리되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성도를 대표하여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요청하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임재를 소망하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는 대체로 예수님의 재림을 요청하는 의미로 해석되어 온 것은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의 강해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추가하는 말씀입니다.
고전15:42~44절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이 욕된 육신을 땅에 심어 죽어야 새 몸으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엣 백성 60만이 죽고 새 사람 60만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나의 육신을 죽이는 것을 무엇이라 할까요? 바로 ‘순종’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 순종을 성경은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거룩’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도 부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성경은 ‘선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 선한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선한 일’을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위해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10:27)가 될 것입니다. 이게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 자신을 부인하고 너희의 힘을 빼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분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너희 자신의 힘을 쌓아서 너희 자신을 증명하거나 자랑하려 하지 말고 오직 그분께 의지하고 순종하여라’ 이게 믿음입니다.
여러분들은 진정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을 하실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전체의 말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계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첫댓글 감사 드립니다.
집중 할수 있어서 저희 모두 좋았읍니다.
그 분께 의지하고 그 분께 순종의 마음이 차고, 넘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