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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깨진 거울-눈, 울-음의 서사
-홍혜문의『나는 안미자입니다.』
김순아(문학평론가)
01.
소설 장르, 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읊조리면서 혹은 쓰면서, 더 적확하게는 치면서, 장르의 복합적인 문제를 떠올린다. 그것은 장르의 하위 종(種)인 시와 소설이 각 장르에 기대하는 관습적 자질들을 필요충분조건으로 담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는 감정을 다룬다. 어떤 시든 시에서 남는 것은 결국 인간의 감정이다. 소설은 이야기 형식을 취한다. 제가끔‘다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특별한 이야기’. 그러나 이야기(敍事)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구술언어로 구현되기 때문에 시가 가진 음악적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소설을 “타락한 시대의 서사시”로 보았던 게오르그 루카치의 말처럼, 서사는 운문적 율격과 세밀한 조탁의 언어에 기반을 둔 장르다. 물론 근대 인쇄술의 발달 이후, 구술적 이야기는 눈으로 읽는 행위로 변화되었지만, 음성언어에 기반한 이야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홍혜문의 소설집『나는 안미자입니다.』는 그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총 8개의 중․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에는 서사시에서 사용되는 반복과 연쇄, 구술적 기법이 빈번하게 사용된다. 그 기저에는 이 세계에서 버려진 자의 어떤 발화되지 못한 억눌린 소리들이 자리한다. 작가는 이야기꾼-페넬로페의 입술을 빌려, 그 (목)소리를 눈물의 이미지와 직조해냄으로써 막막한 현실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는다. 몰려오다 사라지고, 다시 몰려오는 파도처럼, 물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는 때로 나의 고막을 뚫고 들어와 이명을 울리고, 장르 경계에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하나의 문장에 시선을 고정해서는 작가의 전언을 들을 수 없다. 이제 작가가 무수한 소리를 잇대어 무엇을 하려 하는가, 물어야 할 순간이다.
02.
(물)소리. 그것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한다. 시간이 연쇄되기 위해선 사건이 촉발되어야 하며, 그 사건을 발생하게 하는 행위자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행위자의 행위는 무중력의 상태에서 일어날 수 없다. 존재의 처소가 요청된다. 이 처소에 따라 소리가 재현되는 공간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홍혜문 소설의 서술자가 거주하는 공간은 대개‘방’이나 ‘집’. 지극히 사적이면서 여성(적) 공간인 이 장소는 어떤 기원에 대한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저기, 흐릿한 허공에서 꽃잎 하나가 방 안으로 날아든다.
글의 자음과 모음을 연결하여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야 하지만 오늘도 쉽지 않다. ‘벚’이라는 단어를 만들려면 머릿속에서 ‘ㅂ’과 ‘ㅓ’, ‘ㅈ’을 인지하고 명령을 내려야 한다. [...] 그때 딸이 목소리를 높인다. 말분의 검은 눈이 흔들린다.
“엄마 ‘ㅂ’을 먼저 치고 그다음에 여기 ‘ㅓ’를 쳐야지”
당신은 읽었는가? 「말분의 사랑」 도입부다. 여기서 분절된“ㅂ”은 이 작품의 서사를 전개해가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를테면, 벚꽃의‘벚’이 몽환적‘봄’을, 그것이 다시 어린 시절의‘벗’을 불러오는 방식이다. 이러한 환유적 연쇄는 구술적 연행과 관련되며, 우연한 사건들로 점철된 인간 삶을 이야기하는 데 효과적인 작용을 한다. “연분홍 블라우스에 진초록 벨벳 치마를 입고 벚꽃 길을 걸어가고 있다. 머리 위로 만개한 꽃잎이 날렸다”에서 반복 ‧ 변주되는“꽃”은 장자의 나비처럼, 몽환적 봄을 환기하는 동시에 음성적 리듬을 조형한다. 물론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서 뼈대를 다시 맞추어보면, 서두의 이 내용은 이야기의 주요 흐름과는 의미론적 유기성이 별로 없다. 그것은 연속적 시간(의식)이 끊어진 틈새로 잊혀진 기원을 향해 걸어가려는 이야기꾼 특유의 오마주(hommage)이다.
자신의 기원을 찾아가는 홍혜문의 이야기꾼들은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현존하는 존재들의 발생점에서 다시 현재로 내려오는 (여성)계보학적 서사 방식을 취한다. 이 작품의 경우, 서사적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진우라는 남성을 두고 주인공 말분과 친구 순덕 사이에서 벌어진다. 말분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내려온 진우를 만나 글을 배우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 사이에 순덕이 끼어들면서 갈등이 일어난다. 진우는 징집되어 마을을 떠나고, 글을 모르는 순덕이 진우를 향한 연서를 말분에게 써 달라고 부탁하면서 말분과 순덕의 갈등이 시작된다. 순덕이 진우와 관계하여 딸을 낳게 되면서 둘의 갈등은 더 심화된다. 그런데 순덕이 딸을 낳다가 죽음에 이르고, 말분에게 자신의 딸을 부탁하면서 또 다른 사건이 전개된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진우는 소식이 끊기고, 진우의 어머니는 친구의 딸을 떠맡은 말분에게 청혼하기에 이르는데….
여기서 기원의 서사를 추동하는 존재는‘순덕’이다. 순덕은 사라지고 없는 부재의 존재이지만, 말분의 기억 속에 살아서 서사를 추동한다. 작품이 전개되는 동안 서사의 갈등은 순덕을 중심으로 말분과 딸 정혜 사이에서 벌어진다. 정혜는 치매를 앓는 말분에게서 진우라는 이름을 듣고 그 흔적을 찾아 집안을 뒤진다. 그리고 다락방에서 진우와 순덕이라는 이름이 적힌 공책을 발견한다. 거기서 기원의 비밀을 알아챈 정혜는 말분에게서 생모의 이름을 확인하려 한다. 하지만 말분은 끝내 입을 닫아버림(죽음)으로써 기원의 비밀을 지켜내는 일을 성취해낸다. 순덕이 정혜도 빼앗아 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그런데 말분의 이 서사에서 근대 이성애적 삼각형 구도와 가부장적 가족 구조 아래서 희생된 모성이 보이는 것은 나의 눈에 씌어진 정신분석학적 선글라스 때문인가?
어떻든 홍혜문의 서술자가 기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것은 근대적 가족 구조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표제작 「나는 안미자입니다.」는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가부장제라는 억압적 굴레를 피할 수 없었던 여성의 이중적 고통이 배어 있다. 주인공 안미자는 한때 말순이로 불리던 여성이다. 열두 살에 6.25 전쟁이 일어나 부모를 잃은 말순은 한동안 오빠와 함께 살아간다. 인민군과 국방군이 마을에 들어와 격전을 벌이던 전국(戰國)의 상황에서, 말순의 오빠는 그녀의 이름을 미자로 개명해버린다. 여동생을 보호하려는 오빠의 마음이었을까? 그러나 미자에게 이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후, 덮쳐오는 고된 시집살이와 육아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던 그녀. 누군가의 며느리, 또는 엄마로 살았던 미자에게 이름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이 세상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 “36021428”로 환기되는 주민등록번호는 자신을 증명하는 유일한 기호다. 치매에 걸린 엄마 안미자가 이 기호에 집착하는 이유다.
그런데 아쉽게도 엄마는 끝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할 수 없다. 딸 은화는 치매를 앓는 엄마를 외면하고, 엄마와 이름이 같은 간병인 안미자를 부른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관계는 엄마/딸 그리고 간병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다. 딸에게 엄마는 더 이상 자신을 성장시키는 양육의 주체가 아니다. 엄, 마, 엄마…. 자식이 알기 전부터 자식을 알고 있었고, 자식을 무한히 사랑해주던 엄마는 이제 딸에게 자신의 욕망을 충족해줄 무한한 가능성이 아니라, 자신을 속박하는 굴레로 인식된다. 딸은 간병인과 짝패를 이룬다. 간병인 안미자는 딸 은화에게 치매 노인을 돌보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은화는 간병인에게 치매 노인을 떠맡김으로써 돈을 제공한다. 이 이해관계에서 엄마는 이용 가치가 없는, 혹은 쓰다가 버려지는 사물에 불과하며, 따라서 처절하게 고립된다. 적막한 방안에 혼자 남은 엄마에게 유일한 놀이가 있다면, 그것은 TV를 보는 일. 이후에 가게 될 곳은 요양병원이다. 그녀가 이 비관적 현재를 벗어날 방법은 시간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 그곳은 결국 시간의 소멸인 죽음이나 시간의 정지인 영원일 것이다.
홍혜문의 서술자는 이러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눈)물의 이미지와 직조하여 역사의 뒤안으로‘사라져간/사라져갈’여성을 위한 진혼곡을 부른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복된) 죽음은 곧 딸의 죽음. 어머니를 떠나보내면서도 어머니를 살려내는‘여성적 승화’의 역설에 이르는 길은 없는 것일까. 서술자는 그 한 가능성을 「워터 히아신스」의 몸을 빌려 들려준다. 이 작품의 서술자는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미얀마의 여인과 그녀의 아들을 이끌어내어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경제적 카스트에서 비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계층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품 무대에 등장하는 ‘진’은 비좁고 누추한 공간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미얀마인 여성이다. 주인공 만희는 임신한 배를 불룩하게 내미는‘진’과 달리, 임신할 수 없는 몸. 그러나 진의 그늘진 얼굴은 만희를 고스란히 되비춤으로써 상동 관계를 형성한다. 만희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충격을 받고, 그/녀의 아기를 유산했다. 그녀는 남편의 외도 대상인 빨간 반바지와 몸싸움을 하다가, 살인미수로 징역 일 년에 집행유예 이년을 선고받은 이력이 있다. 이후, 그림을 그리며 홀로 살았던 만희는 우연히 동영상에서‘띤잔 축제’를 보고 미얀마로 온 상황이다.
축제가 시작되기 전, 만희가 진의 아들을 따라 늪지대를 여행하면서 발견한「워터 히아신스」는 만희를 비추는 또 하나의 몸이다. 히아신스의 빈 공기주머니는 만희의 빈 몸(자궁)을 되비추는 산물이며, 그 보랏빛 꽃빛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만희의 상처를 치유하는 한 계기로 작용한다. 특히 띤잔 축제의 물은 빈 몸이 충만하게 채워질 한 가능성으로 암시된다. 축제는 춤과 음악, 이야기가 하나의 신체 속에서 통합되는 일종의 종합예술이며, 이 예술적 축제에서 소외된 자들의 억압된 감정은 표출되고, 또 새로운 기운으로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다. 무엇보다‘띤잔 축제’에서 뿌려지는 ‘물’은 생명을 낳고 기르는 근원적 모성과 관련된다. 삶과 죽음, 소멸과 생성을 동시에 포괄하는 어머니의 몸/물은 흐르면서 뭇 생명에 깃들고, 다시 사라짐으로써 존재(存在)한다. 띤잔 축제에서 뿌려지는 물은 ‘어디에나 임하시는 어머니’라는 상징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며, 이 물세례를 맞음으로써 만희의 삶은 새롭게 거듭날 것으로 암시된다.
「바아하」는 특히 눈길을 끈다. 이 작품의 서술자는 선대에서 후대로, 다시 그 후대로 이어지는 인류의 유구한 역사적 연결고리를 ‘솟대’에서 찾아낸다. 여기서 솟대의 발음은 한국의 역사가 시작되는 고조선의‘소도’와 연쇄된다. 작가는 솟대와 발음이 유사한 소도를 작품에 소환하여 현재에서 먼 과거로, 다시 현재로 내려오는 인류의 계보학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인공 이안은 한국에서 터키를 여행하다가 거기서 정착한 조각가다. 터키는 한국인의 조상이기도 한 흉노족이 세운 나라. 우리의 먼 조상 가운데 일부는 몽골의 사막과 추운 시베리아를 넘어 터키로 향해가다, 시베리아의 한 지역에 정착하여 부라트라는 부족을 만들었을 것이다. 터키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안은 어머니에게서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목각새 바아하를 팔았다가, 다시 그 목각새를 찾아 한국에 와 부라트족 여성 샤를을 만난다. 이때 두 인물이 이야기하는‘목각새-솟대’는 고대 한국과 러시아, 터키인의 영혼을 하나로 잇는 산물로서, 주인공 이안에게 뿌리를 찾아 머나먼 과거로 여행하는 꿈을 꾸게 한다.
이안의 꿈속에 소도의 제사장이 나타났다. 샤를이 삼신할매에게 무릎을 꿇고 빌자 이안을 오라고 했다. 제사장은 샤를과 이안에게 부부의 연을 맺어주었다. 이안이 샤를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 이안은 샤를의 깊은 눈 속 너머 바이칼호수를 바라보고 샤를은 이안이 자라온 벽암골의 고향을 보고 있었다.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풍선처럼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낮에는 솟대의 새가 되어 해바라기를 하고 둘이서 말다툼을 할 때는 각자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바아하」에서
여기서 별은 형언할 수 없이 신비로운 대상으로 현현된다. 제사장이 있고 삼신할매가 있고 사랑의 자유가 있는 이 신비한 별에는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수와 한국의 벽암골이 동시에 공존한다. 이러한 별에 대한 동경은 근대의 파편화된 세계를 넘어 고대의 신비한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 보려는 작가의 염원과 닿아 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적 형태로 근대를 재건할 수 있는 존재를 시인으로 보았던 독일의 낭만주의적 세계관과 통한다. 그러나 홍혜문의 서술자는 신과 영웅이 존재했던 그리스적 서사시의 세계와 자신이 속한 시대의 거리를 인식하면서, 두 인물이 만나는 계기를 비엔날레라는 세속의 명칭으로 설정한다. 이를 통해 비속한 현재에 고대의 신화를 불러들이고, 환인-환웅-단군왕검에서 시작되는 고조선의 소도를 조각해 넣는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서술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남성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그 이전, 그러니까 삼신할매와 같은 여성(적) 신화를 더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상적 별을 상징하는 삼성궁은 우주적 어머니(자궁)의 상징물로서, 이안(남성)과 샤를(여성), 동양과 서양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계를 지향하는 작가 의식을 보여준다.
물론 실제 현실에서 이러한 세계의 실현은 거의 불가능하다. 초국가적 자본과 기술과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별의 신비한 비밀은 영상매체를 통해 투명하게 밝혀지고, 별을 향한 우리의 동경은 그야말로 몽상이 되어버렸다. 지상에 유배된 우리는 갈등과 불안을 경험하면서 비루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별의 신화를 사유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할지 모른다. 사라져가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과거를 사유하는 것, 비루한 현실을 신화로 바꾸는 것, 욕망의 잔해더미 속에서 신화적 시간의 영원성을 발견하는 일은 비속한 현실에 대응하는 힘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홍혜문의 서술자가 신화적 시간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특히 소도는 자본의 경쟁 논리에 물들기 이전, 우리의 시발점 아닌가. 이 맥락에서 홍혜문의 서술자는 훌륭한 이야기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야기꾼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수되는 관습, 자료에 관심을 가진 역사가이며, 훌륭한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신화와 역사를 보존하고 그것을 다른 세대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03.
그렇다고 홍혜문의 이야기가 먼 과거로만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끓어오르는 존재의 내면을 또 다른 방으로 변주하여, 자본-문명의 그늘 아래에서 모두가 치닫게 되는 비극적 파국을 날카롭게 파헤쳐 보인다. 「트임벨」에서 작품을 진행하는 서술자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심리적 상처를 해소하게 돕는 심리상담사다. 수화기에 대고 자신의 우울한 속내를 털어놓는 사람들은 익명의 은둔자적 존재들이다. 그러나 주인공 역시 익명의 운둔자적 존재이긴 마찬가지. 산동네의 제일 마지막, “고려고시원 203호”라는 비좁은 방 안에서 혼자 잠들었다 깨는 나는 세계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물론 간간이 동료를 만나고 타인과 대화를 나누지만, 마음을 나눌 대상은 없다. 한때 번성했던 사업은 실패하고 아내는 떠났다. 폐쇄된 공간에 홀로 남은 나는 타인의 우울한 이야기를 지속해서 들어야 하며, 이 순간 나의 현실적 시간은 중지된다. 그 점에서 우울증을 앓는 익명의 타인은 나를 되비추는 거울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트임벨」은 소통의 트임을 위해 비상벨을 울리는 ‘나’의 고통스런 비명으로도 들린다. 세계 및 타인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는 순간은 곧 고통을 경험하는 순간이며,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아픔은 나를 죽음이라는 개별적 운명에 몰아넣는다. 오래된 전언처럼, 나의 감기가 당신의 중병보다 아프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홍혜문의 작품에 등장하는 서술자가 고통에 침윤되어 있는 까닭은 타인을 향한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내가 타인의 우울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듣는 행위는 나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 그런데도 그 행위를 멈추지 않는 것은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산다는 강박증적 의식과 등을 맞대고 있다. 이 의식적 행위에 내장된 인내와 견딤, 그리고 책임 의식은 나와 너 사이를 잇는 사랑의 윤리와 연결된다. 이 윤리적 행위에 의해 익명의 그녀와 나는 만남의 가능성을 얻게 된다. 홍혜문의 서술자들은 이 가능성을 뒤늦게 고백하는 자들이다. 앞서 말했던 문장을 수정하자. 당신의 감기가 나의 중병보다 더 아플 수 있다. 결국 소설가는 자신의 운명보다 타인의 운명을 읊을 때, 더 아름다운 목소리를 드러내는 자 아니었던가.
홍혜문의 소설은 야만적 자본-문명 세계를 암시적으로 비판하면서도 이 세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내 마음의 렌즈」에 등장하는 나는 SNS 투자회사에서 투자고객을 관리하는 담당자다. 나의 내면은“큰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일하고 싶다는”타자 인정 욕망으로 들끓는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음으로써 사회적 성공을 성취하려는 나의 조바심은 투자자 제임스 김을 만나러 길에서 강박증적으로 드러난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부산을 경유, 밀양까지 가야만 제임스 김을 만날 수 있는 나는 앞서 출발한 열차의 사고로 인해, 자신이 탄 열차가 지체되는 상황을 경험한다. 열차는 도무지 움직이지 않고, 때로는 과거로 움직인다. 조바심은 극대화된다. 이 과정에서 강박증적 심리를 보이는 나는 동일한 집합에 속한 다른 대상들보다 상대적으로 격하된 존재론적 지위를 함축한다. 나는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다른 대상을 (자본의)‘아바타’로 인식하고, 자신 역시 또 다른 아바타가 되고자 한다. 작품의 말미는 이 허위적 아바타, 즉 사회의 암묵적 규범과 그에 따른 욕망을 지녔을 때, 더 이상 화해의 웃음만을 지을 수 없다는 개인의 각성을 우회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버킷」,
산산조각 나, 바닥에 주저앉은 건물의 잔해더미를 봤다. 웅장해보였던 빌딩은 깨진 시멘트 덩어리와 철골과 가루가 전부였다. 나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마우스를 쥔 내 손이 신이라도 된 듯 긴장했다. 나는 강철 손을 웅장하고 대단하게 변형시킬 수도 점처럼 보잘것없게 조작할 수도 굴착기의 모습을 확대하여 괴력의 중장비를 신처럼 표현할 수도 있었다. 나는 화면을 되돌려 박살난 시멘트 덩어리와 가수를 원래의 모습으로 붙여 보았다. 건물은 천천히 하나씩 붙더니 원래의 푸릇한 빌딩으로 되돌아갔다.
-「버킷」에서
주제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단락은 당신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가? 웅장한 빌딩, 시멘트 덩어리, 철골, 굴착기는 인류가 도시를 건설해온 대상들의 이름이다. 작중인물은 기업의 선전용 광고를 디자인하는 그래픽디자이너. 컴퓨터-기계를 통해 광고 시안을 디자인하는 나는 이미지를 합성하고 해체함으로써 그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 이때 마우스를 쥔 나의 손은 세계를 창조하는 신의 손, 혹은 근대문명을 추동해온 상징적 아버지의 손과 닮아있다. 주지하듯, 근대 아버지들의 손은 굴착기의 손과 한 몸을 이루며, 낡은 건물을 부수고 (모성적) 산과 바다를 개간하면서, 도시 문명을 건설해온 주체(I)의 손이다. 그러나 이 손에 의해 희생된 것은 자연-여성만이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의 아버지를 통해 드러난다. 굴삭기로 산을 깎던 아버지는 굴삭기에서 추락하여 지체장애인이 된다. 아버지가 근무하던 L 건설사는 이 사고를 개인의 실수로 단정 짓고, 사건의 전모를 은폐한다. 이는 근대성과 친체제적 관계를 맺는 가부장적 사회 아래에서 희생되는 존재가 남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L 사의 이미지도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점. L 사는 재기를 위해 AI중장비를 만들고, 장비 선전을 위한 광고를 나에게 의뢰한다. 이 순간, L 사의 재기 여부는 나의 손에 달려 있다.
여기서 나의 손은‘굴착기의 버킷’이라는 금속과 ‘아버지의 손’이라는 핏줄과 ‘마우스’라는 컴퓨터 기계-기술력을 동시에 가진 복합적 손으로 의미화된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의 손/육체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손/육체가 아니라, 세계를 변형 ‧ 수정할 수 있는 손/육체인 것이다. 내가 마주한 일은 나의 손/육체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되고 수정된다. 그리고 그 결정은 소설의 말미에서 L 사 부사장의 급소를 찌르는 도발적 상상으로 환기된다. 이 상상을 통해 작가는 문명-자본이라는 스펙트럼에 의해 굴절된 현실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그 환상을 주입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 의식을 보여준다. 어쩌면 작가는 또 하나의 입술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부모에게서 자기 말의 근원을 보듯이, 그 말을 조금씩 수정해가듯이, 아버지의 언어(육체)는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언어(육체)에 의해 결정되고 수정되는 것이라고. 신산했던 당신들, 당신들이 나를 통해 세상에 애착을 얻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또 다른 의미 성장을 거치듯이, 나 또한 다른 의미의 성장을 위해 또 다른 언어(육체)가 필요하다고. 사실 인류의 역사란 그런 수정 ‧ 변형의 반복을 통해 변화해가는 과정 아닌가.
「해저터널」을 채우는 물의 이미지는 세계에 내려진 홍수를 환기한다. 서술자는 첨단기술로 구현된 해저터널을 소멸과 죽음의 공간인 병원과 대위법적으로 배치하면서 현실과 그 이면의 서사를 구성한다. 한국(통영)과 일본(시모노세키)을 잇는 해저터널은 첨단기술과 국가의 율법이 결합하여 추진하는 눈부신 문명의 발전을 표상한다. 이 작업을 추진하는 주인공 태국은 사회적 성취를 위해, 밤낮 컴퓨터 앞에 머물며 시뮬레이션 작업을 하고, 점검을 통해 업무를 지시한다. 이 순간, 그의 아내는 난소암 판정을 받고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다. 이때 병원은 현실의 사각(死角)지대를 가시화하는 기능을 한다. 태국은 작업 과정에서 정희라는 여성과 만나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물론 아내를 온전히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의 태국은 아내를 아프게 기억해낸다. 우리가 나로 인해 즐거워하는 자보다 나로 인해 고통받는 자를 더 치명적으로, 아프게 기억하듯이. 그렇지만 성공을 향한 태국의 열망은 쉽게 중지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 작품의 비극을 구성하는 또 다른 요인은‘수장제의’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작업 현장에 사고가 발생한다. 산소통을 메고 수중작업을 하던 외국인 노동자 짜이또가 의식불명의 상태에 이른 것. 그러나 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사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짜이또는 지구촌 또는 세계화라는 미명 하에 자본이 그려놓은 시장의 지도를 따라 한국에 온 미얀마인이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노동력을 팔아 얻은 돈,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외국인으로부터도 철저히 소외된다. 회사의 부사장은 짜이또의 사건이 기사화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함께 일하던 작업반장은 자기 욕망의 실현을 위해 입술을 다문다. 그리하여 짜이또의 사건은 현실의 거대한 바다에 수장되고 만다. 주인공 태국 역시 사건을 은폐하고 마침내 해저터널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갑자기 전기가 나가버린 것처럼, 태국은 돌연한 종말을 맞는다.
‘선희가 갔어. 먼 길을… 이제 막 떠났어’
가슴이 아리다. 태국은 스펀지처럼 온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채 파도에 쓸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걸음을 옮기는 데 무릎이 꺾인다. 허탈감에 목이 멘다.
태국은 병원으로 가기 위해 승용차에 오른다 새로난 해저터널에서 아내가 손짓하며 그를 기다릴 것만 같다. 엑셀레이터를 밟자 엔진 소리가 철벅거리며 바닷물에 섞인다.
-「해저터널」에서
이 마지막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태국이 향하는 곳은 병원일까, 바다일까? 병원으로 가는 태국이 정작 향하는 곳은 바다처럼 보인다. 왜 하필 바다일까. 그것은 사각(死角)지대로 환기되는 병원이 곧 죽음의 바다라는 사실과 관계한다. 태국에게 아내는 자신을 지탱하는 한 우주다. 이 우주가 사라지면 자신의 세계도 사라진다. 온몸에 뚫린 구멍은 그 죽음의 표지이다. 그러나 그것(구멍)은 동시에 안의 것이 바깥으로 흘러나오게 하는 열린 통로이기도 하다. 그 하나가 눈이라고 할 때, 눈은 울음이 흘러나오는 처소가 된다. 자기 안의 소리와 물을 동시에 흘려보내는…. 감정이 최고조에 달해서 내면의 폭풍을 격발하는 울음은 경직된 주체의 눈(시선)을 해체, 분산시킨다. 철벅거리는 물은 얼어붙은 존재가 부서지면서 내는 일종의 존재론적 해빙처럼 보인다. 어쩌면 작가는 이 (눈)물-울음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는지 모른다. 왜 ‘사(쓰)’는가? 아니 왜 ‘일하(읽)’는가? 사람이 무엇이며, 무엇이 사람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주저하는 동안, 태국은 우리 곁을 떠난다. 안과 밖도 없는 시간의 뫼비우스를 따라, 우리가 알 수 없는 그곳으로….
04.
작품의 그/녀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생각한다. 24시간 가동되는 공장에서 찍혀나오는 상품처럼, 거리에 떨어져 함부로 밟히는 광고지처럼 생산되는 글을. 자본의 네트워크라는 하나의 회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텅 빈 현재를. 당신과 나,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음으로써 또 다른 조우를 예상하고, 거기서 낯섦과 새로움을 경험하는 기쁨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소설의 서술자들이 비루한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우울증적 존재의 삶에 물/숨결을 불어 넣듯이, 작가 홍혜문이 제공하는 이 소설이 가사(假死) 상태의 우리에게 숨/물결을 불어 넣어 또 다른 공명을 가능케 하는 따스한 물길이 되기를, 그리고 언젠가 다르게 씌어질 당신의 글이 우리를 또다시 전율하게 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걷는다. 나를 부르는 물결, 그 갈피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에 이끌려 생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 보려 한다. 수많은 인류가 흘러가는, 이따금 나와 당신이 난파되어 표류하기도 하는 이 물길의 끝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