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마음은 늘 고향을 그리며
~~~戊戌(2018)年 고향(紫陽)의 풍광 담아~~~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조상이 있고, 그 조상의 얼이 담긴 고향이
있기 마련인데, 나의 고향, 내가 살던 옛 가옥은 수중에 잠겼으니 그나마
선대의 흔적인 정자가 이건되여, 매년 몇번씩 찾아가 옛 선조의 정취를 느껴보며
여기 몇장의 풍광을 옮겨(삼체계카페에서)본다.
==11월 6일 영천댐둑==
영천(자양)댐 광경~~
댐둑에 떨어진 단풍
**하천재 정을식 작품**
하천재사앞
하천재(夏泉齋)
하천재(夏泉齋)는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는, 오천 정씨 집안의 묘와 강의공 정세아의 무덤가에 세운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지은 집과 비각이다.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었다
개요=오천 정씨 집안의 묘와 강의공 정세아의 무덤가에 세운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지은 집과 비각이다. 조선 인조 15년(1637)에 진주목사 정호인이 처음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후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이며, 영천댐 건설로 인하여 1976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어졌다.
강의공 정세아는 임진왜란(1592) 때 의병대장에 추천되어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공으로서 상을 바라지 않고 관직을 떠나 시골에서 제자를 기르며 학문을 닦은 덕망이 높은 선비였다.
경내에는 하천재, 신도비각 등이 있는데 모두 단순하고 소박하게 지은 건물이다.
삼휴고택 앞
오회당 북편 담에서
오회당[五懷堂]
요약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는 조선시대 누각.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었다. 정용목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오회당 정석현(鄭碩玄)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영조 3년(1727) 관찰사 권대규(權大規)의 후원으로 도내의 인사들이 건립한 것이다. 영천댐 건설공사로 인하여 1977년 3월 현위치로 이전·복원하였다.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소박하게 짜여진 목조기와집이다. 주초는 자연석을 다듬어 사용하고, 지붕의 형태는 맞배지붕 좌우에 눈썹지붕을 덧달아 마치 팔작지붕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런 형태는 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다. 규모는 정면 4칸에 양쪽에 각각 퇴 1칸을 달았다. 오른쪽 한칸은 꾸밈이 없이 기둥만 세웠고, 전면에는 좁은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기둥은 모두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문화재 주변 간벌 직전==
하천재, 삼휴고택 같이 담고
<참고로 사의당에 대한 설명도 곁붙이고>
사의당
[四宜堂]
정의=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형식을 한 강학 공간.
개설=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4호.
◈예시=호신(好信;삼휴공18세) 1子;시우,2子;시희,3子;시찬(19세) 中
2子;시희;자;석항(碩恒<20세>)의 四형제= 사의공(四宜公) 정중호(鄭重鎬), 정중기(鄭重岐), 정중범(鄭重範), 정중락(鄭重洛) 형제가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세웠다. 안채인 수의헌(守宜軒), 사랑채인 사의당, 고방채 그리고 문간채 등 모두 4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강학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건물의 규모를 살펴보면 당호(堂號)로 사용된 사의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이고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왼쪽 2칸은 누마루, 오른쪽 3칸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수의헌은 맞배지붕에 정면 6칸, 측면 1칸이며 고방채와 문간채는 모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써 역시 맞배지붕이다. 이러한 건물들은 모두 강학공간에 어울리는 소박한 형식을 하고 있고 누마루와 온돌방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으며 고방채는 방앗간, 곳간, 도장방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건물을 구성한다.
1726년(영조 2년) 삼귀리에 있던 것을 건물이 쇠락하여 1802년(순조 2년)용산리로 이건하였다. 이후 영천댐 건설로 수몰 지역이 되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조용한 명상음악으로**
첫댓글 아름다운 내고향사진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