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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 성당 2층에서 저녁 7시에 사순 특강이 시작되었습니다.
약간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정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한눈에 보이는 방학동 성당은 성전에 적합한 표현은 아니지만 참 단아한 느낌이었어요. 성모탄신 성당이라서였을까요?
신부님은 주임 신부님의 요청으로 고통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시작하셨어요.
특히나 사순 시기이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가능하면 그 예수님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동참해 보는 시간을 마련해 드리는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의 모습을 이야기하시면서,
공동체가 함께하는 십자가의 길도 좋지만 한번쯤은 혼자서 십자가의 길을 하면서 1처, 2처.. 4처 멈추어지는 어떤 순간을 오래 머물면서 봉헌하는 시간도 마련해 보라고 권고하셨는데요.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통은 좋은 것보다는 다소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데, 간혹 고통을 즐긴다는 자학적인 성향을 지니신 분도 있으시겠죠?
그것에 대해 심리학자들은 고통이라는 동전의 앞면과 그 뒷면에 있는 쾌락이 한 묶음이라는 견해로 이해한다고 해요.
동전의 양면성처럼..
쾌락이라는 의미가 나쁜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술을 한잔 준다고 가정한다면 "쓰다."라고 할 것이에요. 아마도 고통스러운 것이겠죠. 하지만 어른들은 그 쓴맛을 통해 다른 기쁨, 혹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이 고통을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본다면,
원시 종교에서 고통은 너무나 쉬운 문제였어요.
예를 들어 인간에게 좋은 일은 좋은 신이 있어서, 고통(나쁜 일)이 일어난 것은 나쁜 신이 있어서라는 단편적인 모습으로 말이죠.
그런데 구약에서 보면 하느님은 유일한 신이라고 고백해요. "우리 주 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 우리 주 하느님이 최고야!!라는 유일신관이었는데, 우리 주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라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좋은 신이 아닌가봐!!!
많은 분들이 이러한 말씀 하시죠? "만약에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좋은 신이라고 했는데, 왜 그 사람에게 그런 일이 생겨..."라고...
오늘날 신학자들이 많이 어려워하는 질문 중에 하나가 고통은 왜?라는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 이천년의 그리스도 역사 안에서 수많은 저술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신학적인 설명들은 나오지 않았다고 해요. 구약과 신약인 성경 안에서도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설명하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그 고통을 설명하는 부분을 성경에서 살펴봅니다
첫 번째 등장하는 고통이라는 부분은
창세 3,16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창세 3,17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창세 6,11 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다.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따먹어 죄를 짓게 되었는데, 신부님은 왜 그곳에 선악과나무를 두셔서 그들이 그 열매를 따먹게 하셨을까? 하고 원망을 하셨다고 해요.
성경 안에서 보면 인간은 왜?? 고통스러운가?? 인간이 지은 죄 때문에.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성서 신학적으로 죄의 정의는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
바로 거리의 문제.
그렇다면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것이란?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 일치(하느님과의 일치,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우리는 하느님에게 가까이 가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멀어지는 선택을 할 수도 있어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그 죄의 결과는 고통이라고 하였지만 성서신학적으로는 그리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것, 자체가 바로 벌이고 불행이고 그리고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것.
그것이 죄와 벌의 관계입니다.
추상적인 표현으로 이것을 설명하기보다는 "너희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가면 고통이라는 것을 겪게 될 거야."
고통에 있어서 신부님은 경험해보시지 못하신, 인간에게 주어지는 힘든 고통 중에 하나인 산고는 의학의 발달로 고통을 줄여주는 주사나 제왕 절개등으로 산모의 고통은 줄일 수 있지만 태어나는 아기의 고통은 줄일 수 없다고 해요.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에는 산고가 있고, 신장 결석의 고통등이 있는데....
남성에게는,
사는 동안 줄곧 땅을 부쳐 먹으리라는 성경 말씀이 있었죠. 아담과 하와와는 다르지만 요즘의 젊은이들은 대학입학과 동시에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그 또한 고통일 수도...
여인이 아이를 낳는 것은 단지 고통일까요? 축복일까요?
누군가가 열심히 땅을 일구어 가을에 결실을 맺는다면, 그것은 고통일까요? 축복일까요?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시는 벌이 어찌 보면 아담과 하와를 축복해 주시는 것일 거고.
진정한 벌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일 겁니다.
하느님과의 거리가 멀어졌으니까요. 하느님은 빛이세요.
빛으로부터 멀어지면 점점 어두워지죠. 아담과 하와 이후에는 카인과 아벨이 등장해요.
카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그 카인에게 하느님이 벌을 주시는데 그 벌은, 바로 "내 땅에서 떠나라."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에서 노아의 홍수(창세 6,11)까지 인간이 죄를 지어 커다란 고통이 찾아오게 되었어요.
구약에서 등장하는 타락은?
인간이 하느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 인간이 죄스러운 선택을 하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를 통칭하는 것을 의미.
반면에 폭력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저질러지는 죄를 통칭하는 것을 의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타락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폭력
우리도 때때로 폭력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지만 폭력의 가해자가 되어 후회하기도 합니다.
신부님도 폭력의 가해자가 되신 적이 있으셨을까요???라는 질문에
"네!!!(바로 대답한 교우들)
너무 빠른듯한 대답은 ㅎㅎ
의도치 않은 폭력의 상황들이 우리에게는 누구나 있었을 겁니다.(하느님께 각자가 용서를 청해야....)
교회사를 찾아보면 교회도 또한 그런 폭력적인 상황이 있었기에 20년 전에 교황님이 남미에 찾아가서 사과를 하신 적도 있었고요.
그런 타락과 폭력!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죄의 결과로 하느님으로 멀어진 것인데 성서의 텍스트들은 가끔 그 자리에 고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더라.
고통에 대한 첫 번째 설명으로, 고통은 죄의 결과다!
구약 성경 안에서 고통의 문제까지는 아니지만 갈등의 문제가 등장해요.
아브라함과 롯이 그리고 사라와 하가르의 갈등에서는 결국 하가르가 이스마엘을 데리고 떠나가는 모습.
이스마엘과 이사악의 갈등, 이사악의 아들인 에사우와 야곱의 갈등.
야곱의 두 부인인 레아와 라헬의 갈등.
요셉과 다른 형제들 사이의 갈등이 있었어요.
인간의 역사는 그런 고통 · 갈등으로 점철되는 듯합니다.
창세기 12장인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창세기 50장의 요셉의 이야기까지로 그 주제로 텍스트를 읽어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요.
그와 같은 갈등 구조는 꼭 나쁜 것일까요?
우리가 일부러 갈등을 조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에게 놓이는 갈등들을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 지방 어디에서부터 미꾸라지들을 이동시킬 때 메기 한 마리를 집어넣으면 더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이는 경우처럼, 우리나라 역시 북한과의 갈등과 긴장감의 구조에 있죠?!
갈등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경쟁과 비슷한 모습인데, 그런 경쟁구조가 건강한 모습일 때 유익할 수 있어요.
좋은 경쟁자는 나를 더 발전시켜 주는 존재이기도 하고 갈등 구조 안에서 지속적인 고통은 때론 우리를 성장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환대받으며 이집트로 간 이스라엘이 요셉을 모르는 파라오의 등장으로 억압당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탈출 3,7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것. 그 고통에 대한 해답처럼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하느님은 해방자의 모습이신데, 그 해방자의 모습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 그리스도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 우리를 죄와 죽음의 사슬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분!
따라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체험을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했고 신약인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체험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으로서 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체험이란? 그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해방)인데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체험을 하시기를 권하신다고 하셨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깨달아가고, 나를 짓누르며 괴롭히는 것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들이 나를 더 이상 짓누르지 못하게 되는 해방의 체험을 하는 것이죠.
이 해방자라는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1.2. 3.4.... 등의 서술이 있었을 때 그중에 해방자 예수라는 신앙의 체험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가끔 교회 안에서 "신앙인은 이렇게 해야 해!"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굴레처럼 느껴질 때도 있는데,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요? 신부님들 성직자분들의 잘못이라고 하셨어요.
하나의 산을 넘었을 때 있게 될 그 놀라운 것들에 관해서, 신부님들이 신자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지 않은 채 단지, 오르는 일에 마음을 쓸 때 그러한 일이 생기는 것 같다고.......
교회 안에서 "이것은 하면 안 돼!"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산을 넘었을 때,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것을 보게 되는가? 하는 것이 신앙의 체험에 있어서 중요한데....
신부님도 본당 신부님이셨을 때를 기억해 보면 머리로는 이해되는 것들을 실제로 대했을 때 어떠했는지, 간혹 부끄러운 마음이 드실 때가 있는 것 같다고..(제 생각에 전혀 그런 일이 없으셨을 겁니다^^)
신명 26,7절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저희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께 부르짖자, 주님께서는 저희의 소리를 들으시고, 저희의 고통과 불행, 그리고 저희가 억압당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억압과 착취만이 고통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두려움이 있어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해요. 그리고 갈대 바다를 건너 광야로 나서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고 약속의 땅으로 가죠.
그 과정 안에서 이스라엘은 불평을 합니다.
" 아... 차라리 이집트에 남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이집트에 남아 파라오의 노예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약속의 땅으로 가 그곳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자유롭게 살 것인가?라는 두 선택 앞에서, 오늘날 탈출기를 읽은 우리에게는 너무도 당연하게 보이지만 그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에게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왜냐면 그들은 불안했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함을 느낄 때, 어디에 갑니까?
성당에 갑니다^^ 정말 당연히 훌륭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점 보러~~~~~
내가 선택할 수 있는데 그 선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신부님이 지금의 대통령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물론 그곳도 포함해서^~*)
요즘의 젊은이들이 자주 가는 타로카페나 사주카페등..
신부님이 고해소에 자주 듣는 고해 중에서 "신부님, 저는 안 가려고 했는데, 옆집 사는 친구가 같이 가자고 해서... 봤어요"
"그래서 뭐래요?"😏
그렇듯 장난처럼 시작된 것이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어렵습니다. 그 장난으로 시작된 것이 어떤 분을 정신병원으로,
그리고 알고 계시는 무속인이 말했다고 해요. 우리나라 상류층이 정말 많이 온다고, 변호사들은 방향을 찾아서(동쪽으로 갈까요? 서쪽으로 갈까요?), 기업가들도 마찬가지로 선택을 포기하면서 '내 인생을 결정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신부님에게 어느 젊은이가 찾아와서 "신부님, 저는 이러이러한 사업을 하고 싶고, 또 오라는 기업도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는다면 신부님의 대답은?
"음, 완전 빵으로 기업에 가서 충분히 경험을 쌓고 그리고 사업을 해도 늦지 않을까?" 이런 대답을 하셨을 거라고.
우리는 누구나 자유로운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는 것 같아요.
하느님은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지만, 신앙인인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고백하지만 우리는 어떤 이유를 들어서 그 자유를 자주 포기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사순 시기에 부활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성찰해야 할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는?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가는가? 세상이 나에게 주는 죄의 유혹과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나의 자유를 포기한 적은 없는가?"
신명 11,26을 보면,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신명 28,2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신명 28,15 그러나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을 듣지 않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계명과 규정을 실천하지 않으면, 이 모든 저주가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축복과 저주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라는 의미, 이것을 그리스도 교리 안에서는 상선벌악
중요한 가톨릭 사대 교리에는,
천주존재 :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함께 계신다.
강생구속 :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세상을 구원하셨다.
상선벌악 : 하느님은 착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신다.
삼위일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로서 하나이고 세 위격이시다.
모세오경을 넘어서 이스라엘 역사서로 넘어오면 다른 관찰을 해 볼 수 있어요.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가,
룻기 1,20-21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셔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너무나 쓰라기게 하신 까닭이랍니다.
나 아쉬움 없이 떠나갔는데, 주님께서 나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찌 그대들은 나를 나오미라 부르나요? 주님께서 나를 거칠게 다루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불행을 안겨 주셨답니다.
룻기에 나오미는 달다는 의미고 마라는 쓰다는 의미인데 이 마라에서 마리아가 나왔고,
마리아를 히브리어로 하면 미르얌.
미르(쓰다)+ 얌(물) = 쓴 물
남편이 죽은 후에 아들들 마저 죽은 나오미가 불행을 겪으면서 모든 것이 다 불행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룻이라는 며느리가 있었고, 그 룻이 시어머니가 떠나라고 얘기했을 때, 룻이 나오미에게 이야기해요(룻기 1,16-17)
룻기 1,16-17
내게 당신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는 길에서 돌아가라고 다그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이 가는 곳으로 나는 갈 것이고, 당신이 머무르는 곳으로 나도 머물 것이고,.......
당신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을 것이고, 또한 그곳에 나는 묻힐 것이에요.
부디 YHWH께서 내게 그렇게 하시고 몇 번이고 죽음이 당신과 나 사이를 갈라놓을 때까지.
룻기의 끝은,
나오미의 친척 중에 하나인 보아즈와 룻이 결혼하였고, 나오미도 보호받으며 살 수 있게 되었다.
룻은 이방민족 여인이었지만, (결혼하여 예수님의 한 15대 즈음 할머니?)
이렇게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든 그렇지 않던 하느님께서는 그를 보호해 주시고 축복해 주신다는 것.
하지만 나오미가 그와 같은 축복을 경험하기 전에 받는 그 고통.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기도 하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 인간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에요.(우리가 겪는 사춘기의 성장통처럼)
요즘에는 결혼연령이 늘어나 자녀의 사춘기와 부모의 갱년기가 겹치는 경우를 보는데, 생물학적으로 어려움이 많기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서로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셔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욥기에서는 해석이 좀 달라지는데요.
하느님으로 인해 고통스러워졌다는 것을 바뀌고 싶어 해요. 그래서 등장하게 사탄
하느님이 잔치를 벌일 때 사탄(신학자들은 사탄을 타락한 천사다!라고 말함)이 나타나 욥이 가진 것을 다 빼앗아 보고 그래도 하느님을 따르는지 보자고 하였다. 그것을 하느님을 허락하셨는데..
그때 욥이 노래합니다.
욥기 1,21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신부님은 감정을 잘 다스리는 타입이신데 이 부분과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는 부분(룻기 1,16-17)을 읽으시고는 눈물을 흘리셨다고.
최근에 눈물이 더 많아지신 신부님은 어린아이들과 영화를 보시다가 더 많은 눈물을 ㅠㅠ
사탄이 욥에게 가려움을 느끼게 하는 병을 주고, 욥이 고통을 느끼게 되자 욥의 부인이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고 하였고 그때에 욥은 말합니다.
욥기 2,10
당신은 미련한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욥이 갖고 있는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있는 부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것, 나쁜 것들이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을 우리가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욥기에는 이와 같은 산문문학의 부분과 시문학을 느끼게 하는 부분도 있다고 해요. 그 시문학 부분에서는 욥이 하느님께 불평하는 장면이 등장.
욥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서도 하느님께 소회와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욥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거두시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일 뿐이라며 그 고통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간에게는 사탄(유혹자, 고발자)이라는 존재 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겪게 되는데,
그것들은 하느님께 인간을 고발하거나 유혹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싶어 한다.
신부님은 욥기를 읽으면서 그런 사탄이 조금은 모자란다고 느껴진 게, 욥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면 욥의 것을 뺏고 병들게 할 것이 아니라 욥에게 금 아흔 아홉 덩이를 주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인간은 고통으로 인해 하느님을 떠날 수도 있지만, 인간을 탐욕스럽게 해서 하느님을 떠나게 하는 것이 더 잘 먹히는 방법인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물질주의 세상 안에서 우리가 신앙을 지키는 것은 어려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아흔아홉 덩이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것을 백덩이로 만들고 싶어 하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을 유혹할 때는 영악해진 사탄이,
세례를 받고 영의 이끌림으로 광야에 가신 예수님이 사십일을 지내면서 배고픔을 느끼실 때 말하는 사탄.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십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부분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우리들도 매일 겪게 되는 질문이기도 해요.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면."
두 번째로 사탄은 예수님께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유혹하는데요. 우리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한 시간 내에 무엇을 물어볼까요?
"몇 살이세요?"
신부님들도 마찬가지라고... 30분 정도가 지나면,
"신부님은 몇 년도에 서품 받으셨어요?"
또 신자들이 레지오를 하면서 "내가 레지오 한 지 몇 년인데... 내가 꾸르실료한 게 몇 년인데....."라는 말로 욕망의 불을 지피지 않았으면 한다고 하셨어요.
우리 그리스도의 삶은 낮은 곳으로 향해요. 하느님께서는 점점 커지셔야 하고 우리는 점점 작아져야 하는 것으로.
그리고 세 번째로 사탄은 예수님에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뛰어내려보라고 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십시오."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도와주신다고 되었있으니까. 하느님을 시험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세 번째 예수님을 향한 유혹이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 나타날 때가 있어요.
"하느님, 이것만 해주시면 더 잘할게요."
그렇다면 신부님은 이렇게 하느님께 하신 적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우리는 모두 참 나약한 존재이기에, 신자분들이 사제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혹받으실 일이 없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셨지만 인간과 똑같이 그 유혹을 견뎌내시는 거예요.
따라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다는 것을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하느님이 인간과 연대하셨다.라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이 겪는 모든 것들을 함께 겪으신 거예요.
그리고 그 부분의 복음에서 사탄은 그냥 떠나지 않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라고 나오는데 그 부분을 그리스어로 직역한다면
"적절한 때까지 예수님 곁을 떠났다." 하고 되어있어요.
후에 루카 복음서에 가면 그 사탄의 마음이 유다에게 들어갑니다. 사탄은 어떻게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막고 싶은데 그것에 실패하니 유다에게 들어가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 예수님이 인간을 구하는 구세사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목적인데, 그렇지만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마지막 수난과 죽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오늘날 조금은 다른 형태로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가서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였고, 사울에이어 다윗 왕조 때 전체 이스라엘이 통일 왕국이 되었는데, 다윗과 솔로몬을 지나서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어집니다.(북이스라엘과 남유다)
그러자 주전 8세기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그때 등장한 예언자는 이사야 예언자.
제1이사야의 구조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의 내용은 주로 이스라엘에 대한 내용과 주변 민족에 대한 내용이에요. 그리고 보도가 1부에서 반복되고 2부에서 반복됩니다.
● 전반부
- 1-12장 : 주로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
- 13-23장 : 주로 주변 민족에 대한 예언
- 24-27장 : 묵시적 보도(이사야 묵시록)
● 후반부
- 28-32장 :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내용
- 33-35장 : 이스라엘 및 세상을 향한 내용
- 36-39장 : 보도(열왕기)
이사야 예언자는 실존 인물이었고 이사야 예언자의 행동을 보면 그는 아하즈라는 남유다의 임금을 먼저 찾아갔는데, 그 아하즈에게는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를 쳐내려 오는 상황이었고, 그 아하즈(남유다)에게 자신들과 힘을 합쳐 아시리아와 싸울 것인가? 아시리와 힘을 합쳐 북이스라엘과 맞설 것인가? 하는 선택해야 했어요.
그때 이사야 예언자는 아하즈를 찾아가 "임금님은 지금 당신은 북이스라엘과 연합할 것인가?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을 것인가?로 혼란스러워하는데 그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그저 야훼 하느님께 충실하십시오."
그 말을 아하즈가 들었을까요? 듣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사야는 아하즈에게 하느님께 표징하나를 청하면 하느님께서 무슨 표징인지 보여주실 것이라고 하였어요.
아하즈는 그때에 "나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소." 하고 말해요.
그 말의 의미는 "나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고 내 뜻대로 하겠소." 하고 인간적인 지혜로 해결하겠다는 것.
그때에 이사야가 화가 나서 아하즈에게 말해요.
이사 7,13-14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사가는 이 부분을 예수에 대한 예언으로 재해석합니다만,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할 당시에는 아하즈가 아들을 하나 낳는데 그 아들이 채 크기 전에 쳐내려 오는 북이스라엘과 아시리아가 멸망할 것이니, 아시리아와 동맹할 필요가 없고 하느님께 충실하면은 된다는 것인데 아하즈는 그 말을 듣지 않는 것이죠.
이사야 예언자에게 이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었을 거예요. 자신에게는 그 길이 보이는데 유다의 임금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거죠. 운전자가 모르는 길을 가는데 GPS를 따르지 않고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경우처럼.
조수석의 신부님은 운전대를 뺏고 싶은 마음이 들겠죠? 하느님의 말씀이 있는데 인간의 지혜를 따르려는 모습을 보면.
히즈키야는 아하즈의 아들인데, 히즈키야 시절에도 아시리아가 쳐내려 오는데 이사야 예언자는 히즈키야에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왕기를 읽어보면 히즈키야는 바빌론과 동맹을 맺습니다.
아하즈는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고, 히즈키야는 바빌론과 동맹을 맺는 답답한 모습.
만약에 우리에게 친일을 할 것이냐? 친미를 할 것이냐? 친중을 할 것이냐? 어느 나라를 가까이할 것이냐? 하는 경우에 처해있다면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우리나라 역사의 모습처럼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는 것에 대해서 과연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인지, 새롭게 해석해야 하지 않는지, 그 긍정적인 평가로 인해 외세의 힘을 빌려 권력을 갖으려는 사람들이 계속되는 것은 아닌지...
결국 이사야의 시기에 남유다는 멸망하지 않고 자신의 명맥을 이어가요.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 몇몇 왕들의 시기를 거쳐 남유다는 멸망합니다. (히즈키야의 친바빌론 정책 이후 다른 요소들을 택하다가 바빌론에 의해 주전 587년에)
그때에 활약한 예레미야, 그 예레미야 예언서를 보면 주로 심판과 구원에 관한 내용이 있고 예레미야의 수난에 대한 것이 있어요.
예레미야서의 구조
1- 25장 : 심판(주로 이스라엘: 25,15-38 주변 민족)
26-29장 : 예레미야의 수난
30- 35장 : 구원
36- 45장 : 예레미야의 수난
46-51장 : 심판(주변 민족)
52장 : 역사적 부록
비운의 예언자였던 예레미야.
왜냐하면 바빌론이 남유다를 공격해 내려오는데,
만약
신부님이 강론을 하시는데 어떤 나라가 쳐들어 온다면 어떤 강론을 하실까요?
"신자 여러분, ** 나라가 우리에게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맞서 싸웁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겁니다."라고 해야겠죠?
하지만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가 유다를 쳐들어왔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하느님 없이 사는 모습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겁니다." 이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좋아했을 리가 없겠죠. 백성 모두가 그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따라서 우리는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 하고 이야기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죠.
권력자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까지 미움을 받게 되는 예레미야.
결국 바빌론이 남유다를 멸망시키고나서 남유다의 지도층들과 함께 예레미야는 이집트로 끌려가요.
그랬을 때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자인 하난야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난야, 잘 들으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오. '내가 그 땅 위에서 치워 버리리니, 올해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너는 주님을 거슬러 거역하는 말을 하였다.' "
(예레 28,15-16)
예레미야가 하난야를 비난했던 이유는 "하느님께서는 바빌론에 의해 유다를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짓 예언"(오늘날의 표현으로 가짜 뉴스) 때문이었어요.
자신의 이익에 맞추어 거짓을 말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는 오늘날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듯해요.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역사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었고 때로는 권력자와 맞서고 때로는 수난을 당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고 살아갔다.
그렇다면 이사야나 예레미야가 대한민국의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요?
지난번의 계엄령은 잘못된 것이고 지금 헌법 재판소에의 일에 있어서 대통령이 헌법을 어긴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 같은 역사의 흐름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질문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또한 이러한 부분에 관해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면 좋겠고, 가족 모임과 같은 경우에도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해서 수용하는.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생각이 있지만 극좌나 극우로 치닫는 것은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같아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기에.
좋은 경제는 중산층이 두꺼운 것이듯, 정치 안에서도 중간층이 두터운 것이,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중도가 되기를!
"사람들에게는 백 점짜리도 없고 빵점짜리도 없어! 상대평가니까 나는 좋은 점수를 얻는 사람에게 다음번에 투표할 거야!"
누가 선이고 악이 아니라 법을 어겼다면 법의 심판을 받고 정치적 판단이 미숙했다면 선거에서 표를 받지 못하는...
그렇게 우리 국민들이 정치에 관해서 많은 목소리로 서로 다른 생각들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
오늘과 내일 대한민국에서 집회에 나오는 숫자가 백만 명이라고 해요.
한편으로는 걱정되지만 한편으로는 기쁘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사랑하고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 가운데에서 늘 하느님의 뜻은 어떤 것인지 질문하는 모습도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제2 이사야서(40장~55장까지)를 만나게 되는데, 이 부분을 알지 않고서는 구약의 예언서를 공부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중요.
그 부분에서 "야훼의 종"에 대한 네 노래가 나오는데, 그 종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세상은 오히려 그를 핍박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가 전한 말이 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 감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용이 나와요.
야훼의 종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고난을 겪을 때,
첫 번째로는 죄에 대한 벌로 이해.
두 번째는 사탄에 의한 고통으로
세 번째로는 인간은 누군가를 대신해서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대속)
사도신경 안에서도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그렇게 모든 성인이 공덕을 쌓고 있는 것이 나의 부활에 도움이 된다는 것으로 말씀하시는데...
내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생각하며 덕을 쌓는 것이 세상의 구원에 도움이 된다는 의미로 이해돼요.
그 제2 이사야서에서 대속 사상이 신약으로 넘어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는 기초가 된다는 것을 이 부분이 아니면 왜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셨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제2 이사야 신학이 있었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다."말할 수 있어요.
신부님은 돌아가신 가족들이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해요.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연미사 같은 것을 말씀하시나요?"
"그것도 중요하지만 다음과 같이 해보십시오. 가족들이 무언가 하느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짤막한 기도를 하십시오. '하느님 제가 오늘 하느님을 기쁘게 한 일이 있다면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 저희 어머니 구원을 위해서 봉헌하겠어요.' "
신부님도 부모님께서 돌아가실 때 "주님, 제가 사제로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한 일이 있다면 저희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 당신께 봉헌하겠습니다. 저희 부모님이 살아가시면서 하느님을 슬프게 한 일이 있다면 제가 보속 하게 해 주십시오."
신부님의 부모님은 행복하실 겁니다.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고통을 넘어서는 순간 하느님을 깨달을 수 있겠고, 그 고통을 수용하고 봉헌하는 순간 이 세상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가는 것! 또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하셨어요.
영광송으로 마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래 사진은 방학동 성당 홈페이지에서 참조해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
네, 감사합니다^^
아멘!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화체로 죄다 입력하시느라...얼마나 수고가 크셨을지.
다시 반복하고 읽게 되어 배움이 더 큽니다.
수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