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의 판타지 노트> 4주차 강의
번호 : 68
글쓴이 : 모모랑
날짜 : 2000-10-29 오후 5:40:20 조회 : 22
첨부 :
크기 : 19 KB
과목 D01409
주차 05
제목 민속 설화속의 판타지
강의개요 유럽, 이슬람의오리엔트, 우리나라 전래동화를 읽고 그와 관련된 판타지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참고도서 천일야화(아라비안나이트)(민음사,범우사등)
그림동화(김열규역: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집)
한국전래동화,불교이야기(창비사)
프로프:민담의 기원에 대하여(문학과 지성사)
제 5 강의록 민속설화속의 판타지(천일야화,그림동화,전래동화)
I. 들어가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소위 환상문학을 둘러싸고 이루어졌던 비평적 담론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물론 이론의 대부분은 주로 19세기에 일어났던 환상문학적인 경향들에 대한 정리작업이었다. 게시판에 올려진 여러분들의 열띤 논쟁과 기대와는 다르게 문학이론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매우 현학적이고 애매하다. 여기서 자연과학과도 같이 명확하고 제한적인 개념규정을 목표로 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환상성이나 환상문학이라는 개념은 시대에 따라서 내용을 얼마나 달리하고 있는 가를 확인해보았다. 우리들의 판타지문학 탐색을 위한 어떤 작은 기준점이라도 마련하고자 함이었으니 모두들 잘 읽었으리라고 본다. 뉴미디어시대의 주역인 여러분들의 욕구에 상응하는 판타지의 내용은 무엇인지 앞으로 많이 얘기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인간에게서 가장 오염되지 않아 순수하고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시기가 어린아이시절인 것처럼 인류에게 있어서도 이성과 오성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이 세계를 해석 분석하기 이전에 스스로 자연과 우주의 일부로서 우주만물을 신비스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던 순수한 시절은 신화적인 동화적인 시절이 아니었을까. 인간이 점차로 교육을 통해서 사회화되고 기존의 제도 문화권으로 유입되면서 생존의 안정성을 얻는 지는 모르겠지만, 영혼이나 정신적으로는 많은 부분들이, 특히 풍부한 상상력은 많이 상실되었다고 본다. 옛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을 파악하던 방식은 이성과 오성이라는 장비를 갖추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정말로 '환상적' 방법이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올림푸스산의 신들이 있고 게르만족은 오딘을 비롯한 북구 신들의 신화적 세계로 자신들의 가려진 신비로운 원천을 찾고, 우리들은 우리 방식대로 단군신화라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의 뿌리를 찾으려고 상상력을 동원합니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또한 문자를 깨우치지 못한 대다수의 민중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이야기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기쁨, 슬픔, 욕망 , 소망 등이 어떤 형식적, 인식론 적 틀의 제약 없이 표현하고 있다. 특정한 작가도 없이 떠도는 이야기들은 그 떠돌음으로 인해서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여기서 이야기는 말하자면 실제 현실생활이 아닌 다른 세계를 의미하지 않았을까? 지금 여기서 의 제약을 벗어나 자신의 기억이나 머리 속에서 세울 수 있는 다른 세상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줄 타인이 있어야 하기에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재미와 감동을 가져야 했다. 재미와 감동은 삶과 직결되는 내용을 무한한 상상적 그림으로 표현하는 전략을 썼을 것이다. 이것은 그 어떤 문학적 형식은 갖추지 못했지만 그야말로 판타지의 효시인 것이다. 우리는 아라비안나이트와 그림동화가 환상문학인지 아닌지를 따진다기 보다는 바로 이런 예로부터 ( 물론 요즈음의 판타지소설들은 인류이전의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구전되어 내려오던 이야기들의 모음집인 천일야화와 그림동화 속에서 환상성 그리고 당시 인간들의 판타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이다.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이슬람 이야기모음집은 천 하루 밤에 이야기되는 천일야화로서 이슬람세계 즉 중동지방 오리엔트 적인 문화를 대표하는 이야기모음집이며, 그림동화는 유럽대륙의 전래동화모음집이다. 앞의 이론적 담론에서도 잠깐 보았지만 전래동화나 신화는 환상이나 환상문학이라는 방법적 도구를 현실과 다른 차원의 상상적 세계를 표현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세상
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II. 천일야화 ( 아라비안 나이트)
유대인의 이야기가 성서라면 아랍어로 쓰여진 이슬람세계 설화의 집대성은 아라비안 나이트이다. 흔히 아라비안 나이트, 천일야화라고 번역되지만 정확한 설화모음집 명칭은 '천하루의 밤'이다. 그 기원에 대해서 학설이 분분하지만 6세기경 페르시아 사산왕조때의 고대 설화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원래 인도에서 페르시아어로 번역된 것 있었는데, 또 다시 아랍어로 번안된 뒤에 바그다드와 이집트 카이로에서 전승되어 내려오던 이야기가 추가되고 개작과 윤색되어 13-15세기경에 현존하는 형태로 완성되었다. 여기에서는 인도뿐만 아니라 그리스 아프리키등지의
이야기가 페르시아지역으로 들어와 모두 아랍어로 기술되었고 이슬람사상을 밑바탕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도에서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의 민중구비문학을 집대성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소위 액자소설형식 ( 액자소설이란 간단히 설명하면 그림에 액자를 끼우듯 이야기들이 하나의 큰 틀의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이다. 틀 이야기의 줄거리는 페르시아의 왕 샤흐르야르가 어느 날 사냥을 나간 사이에 왕비가 흑인노예와 정을 통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격분하여 그 둘을 죽여버린다. 그후 세상의 모든 여자를 증오하여 온나라의 처녀들을 신부로 맞이하여 첫날밤을 치룬 뒤 다음날 아침이면 그 신부를 처형해버린다. 이윽고 나라안의 신부감 처녀들이 모두 죽거나 피신을 하여 대신이 고민하던 중 대신의 딸인 샤흐르자드가 자진하여 왕비가 되겠다고 아버지를 조른다. ( 물론 왕은 이미 이 대신에게 대신의 딸만은 제외시켜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서도 이야기를 통해서 자기를 주장한다. 결국 대신은 왕에게 자기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도록 한다. 샤흐르자드는 왕과 첫날밤을 치른 뒤 다음날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교묘한 말솜씨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계속되는 연속물로서 왕은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샤흐르자드를 하루하루 살려두게되고 왕비는 매일 밤 이야기를 계속하게 되어 상인과 마신 이야기, 어부와 마신의 이야기, 짐꾼과 세여인이야기, 세개의 사과 이야기 ,알라딘과 램프이야기, 알리바바와 도적이야기, 신밧드의 모험이야기 등등 이야기는 일천하고도 하루 밤이 계속되고 드디어 왕은 샤흐르자드의 재주와 이야기솜씨에 감탄하여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여 어진 정치를 베풀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안 이야기 속에는 환상적인 형상들이 많이 등장한다. 요술 램프, 병속에 갇힌 마신, 말하는 새, 노래하는 나무, 황금의 강, 나르는 양탄자, 상상을 초월한 거대한 새, 바다괴물 등등 그러나 실제로 은유적이고 비유적이며, 개념적인 이 이야기들 속에서는 이슬람문화가 승인하고 허가한 현실법칙을 의식적이며 체계적으로 위반하려는 시도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앞에서 환상상 계기의 중요한 요소로 현실법칙의 의식적 일탈을 얘기했었다.) 오히려 그 시대의 윤리적이고 미적이며 인식론적인 현실관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런데 천일야화에서의 환상성은 바로 이러한 오리엔트식 세계관 체제를 철저하게 긍정하는 데에서 나온다고도 볼 수 있다. 철저히 체제 긍정적인 체념( 예로 신밧드의 모험, 처음 도입부에서 짐꾼 신밧드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면서 하는 노래가 그러하며 이 노래로 해서 부유한 상인인 신밧드를 만나고 그의 모험담을 듣게 된다. ) 은
오히려 인간존재의 허무함을 더해주며 이 <허무함>이야말로 판타지의 원천이 되지 않을까? 이야기 속의 인물들의 운명은 미리 알라신의 주권으로 정해져 있고, 그 운명의 지도에 따라 만남, 이별, 기쁨, 슬픔 그리고 성공의 행복한 결말로의 우여곡절을 경험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 속에서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기이한 형상들의 등장보다는 오히려 최고의 선남선녀들로 승화된 주인공들, 그들이 겪어 가는 사건들의 필연적인 우연성 그리고 해피엔드로 단순화된 이야기 구조들이 너무나 '비현실적'(환상적?)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부단히 강조되고 있듯 아라비안 나이트는 동화가 아니라 성인들을 위한 이야기로 진한 성애묘사가 주류를 이룬다고 하듯, 그렇게 세밀하고 감각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첫날밤 사랑의 구체성도 열다섯번씩이나 계속되었다는 과장과 허풍으로 그만 환상적( 허구적 )이 되어버린다. 사건의 전개에서도 인과성이라는 논리로 설명되기보다는 정해진 운명이라는 비논리성이 우선한다. 이 세상에서의 존재한다는 것이 그 어떤 합리적인 근거를 가진다기 보다는 절대적인 힘인 알라신의 뜻대로 이다. 그들의 운명은 스스로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신의 뜻은 어떤 합리성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자의적이다. 논리와 합리성의 관점으로 불 때는 그것은 우연의 장난이고 초자연적이거나 미지의 힘이 작용하는 것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커다란 틀이 되는 바깥이야기는 이 시대의 오리엔트 특유의 종교관과 철학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 수많은 셀 수없이 많은 동화, 소설, 단편, 사랑과 악한과 뱃사람들의 이야기, 교훈적 이야기, 전설, 성담, 유머레스크, 일화 등등은 역설적으로 아주 짧은 시간동안에 이야기로 꾸미고, 상상하고 여러 가지로 고안된 것이다. 끝없는 이미지, 꿈, 소망들, 인물, 모험들은 다시 말해서 화자인 샤흐르쟈드왕비의 제한된 시한부인생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다. 여자라는 종족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매일 밤 여자와 결혼하여 첫날밤을 지낸 뒤 그 다음날 아침 죽여버리는 왕 샤흐르야르의 왕비인 샤흐르쟈드는 수천번 반복하여 흥미진진한 연속이야기를 말함으로써 그 운명의 시간을 연기시키며, 드디어 매번 이야기에 감동 받은 여자혐오자인 왕이 드디어 그녀에게 생명을 선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짜여진 이세상 이야기 속에서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들의 모델들을 본다.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속박 받는 존재와 막강한 독재자의 의지 사이에서 충돌(대립) 특히나 여성의 대표자로서 왕비와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사회질서의 표상으로서 왕으로 그려지고 있는 오리엔트 적인 세계상을 보게 된다. 틀 이야기에서뿐만 아니라 안 이야기에서도 언제나 공포, 주인과 종복관계 혹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권력자의 막강한 의지에 그대로 처분될 개인의 공포들이 이야기되고 있다. 대추씨를 잘못 뱉어서 마신에게 목숨을 내 놓을 수밖에 없는 상인, 왕비가 될 노예와 사랑을 했기에 죽을 목숨인 철부지아들, 언니들의 모함으로 세자녀도 잃고 동물밖에 낳지 못했다는 누명으로 감금당한 왕비 등등 모두가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극한 상황의 모델들이다. 여기서 절대적인 권력자 - 그가 마신이건 군주이건 간에 -의 손에 달린 죽음의 공포와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판타지 - 사랑, 지혜, 모험 등등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을 감동시켜 마음을 움직여서였다.
신밧드의 모험에서는 상상적 형상들이 모험여행기마다 등장한다. 첫 번째 여행에서 파선하여 표류하다가 겨우 닿은 섬은 알고 보니 무지무지 커다란 바다 동물 레비아탄이었다. 하늘을 날며 태양을 덮는 거대한 새 루흐, 코끼리도 한입에 삼켜버리는 구렁이, 거인등. 이 과장법으로 그려지고 있는 환상적 형상들은 사실상 두가지 상반되는 것을 함축한다.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상상적인 허구를 아주 구체적이며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성은 외견상 모든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오성적 문화와 추상성과 일반성이라는 지배논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존재형상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잴 수 없도록 거대하고 강하고 외양으로 기이하고 보인다. 그리고 그것들을 묘사하는 데에는 시간적인 계승과 공간적인 확장의 문법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주관적인 자의로서 일종의 유한한 것의 확장이며, 무대의 확대이고 동시에 갑작스레 일어난 사건의 시간적으로 연속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평범한 것을 열정적으로 과장 확대하는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대상세계를 그대로 답습하는 상대화된 긍정인 것이다. 모험담에서는 목표나 목적지가 아닌 출발의 모티브가 중요하듯, 모험장르에서는 주제와는 상관없이 위험, 산, 바다, 신대륙등 외적인 이야기 모티브는 새롭고, 다르고, 돌연히 출현하는 것으로 개인에 대해 매력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이런 모티브들이 여러 가지 형형색색의 이미지들의 구별도 없이 일어나고, 비록 이상한 사물과 사람들이 함께 자연스러운 관계로 나타날지라도 이 모든 사건과 줄거리의 모험담들은 동일한 틀로 수렴된다. 다시 말해서 서로서로 좇고 쫓기는 형상들, 모티브. 이야기들인 이 복잡한 것들을 바로 철저하게 인위적으로 (환상으로) 꾸며낸 이야기, 즉 판타지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환상성은 분명히 이야기 속에서의 초자연적이고 우연적인 사건 그리고 기이한 형상들의 등장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과 오성적 인식으로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의 그러한 도식적인 환상성의 발굴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주어진 운명적 상황을 벗어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바로 환상 속에서 찾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샤흐르자드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샤흐르야르왕은 배반의 분노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바로 솜씨 좋게 꾸며진 이야기, 판타지를 통해서 였다. 샤흐르야르왕뿐만아니라 우리들을 사로잡아 독서 삼매경에 빠지게 한 것도 바로 결코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의 허
황됨(=환상성)이 아니었을까? 사하라사막은 알라신의 정원이며,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인공적인 미로보다도 더 뛰어난 최고의 미로는 그 속에서 헤매다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드넓은 황야라고 생각한 아랍인들의 환상적인 반전의 판타지를 자연적-인공적, 자연적-초자연 등으로 구분하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끝없이 펼쳐지는 오묘한 무늬의 연속인 아라베스크처럼 수 겹의 양파껍질처럼 이야기에 이야기가 꼬리를 물며 끝없는 이어지는 천일야화는 끝없는 사막의 현실을 감내할 수 있는 오아시스요 덧없고 허망한 신기루가 아니었을까?
천일야화와 관련해서 사막의 풍경을 보고 싶다면 TV 문화기행에서 1999년 10월 12일에 방영한 프로그램을 참조할 것.
III. 그림동화
아라비안 나이트가 성인들의 이야기라면 그림동화는 그림( Grimm)형제가 전래동화, 민담 등을 수집하여 설화모음집을 만든 뒤 부친 이름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집>에서 보듯 아동문학 동화적이다. ( 왠 일본인이 새롭게 해석한 성인용 그림동화가 요즈음 판을 치기도 하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삶의 나락을 탐구하다가 뭔가 손에 잡히고 구체적인 것에서 낭만성을 찾고자 했던 독일 후기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그림형제는 인간영혼의 끝없는 심연에서 눈을 돌려 독일어와 독일 민속전래 이야기에서 민족적 그리고 인간 영혼의 뿌리를 찾고자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방대하나 그림 독일어사전과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집을 위시한 민담모음집들이다. 그가 수집한 것은 잊혀져 가는 민속적인 서정과 상상력이 넘치는 민담, 민요, 성담, 전설, 우화, 소담 등 민중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이야기였다.
동화집은 1812년 처음으로 1권이 출판되었으며 1815년 2권이 나왔다. 처음 이야기를 수집할 무렵 그림형제는 독일 헤센주 카셀지방에서 살고 잇는 사람들과 베스트팔렌의 뵈켄도르프모임에 속한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그곳의 젊은이들로부터 수 많은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대부분 구전과 문헌자료들을 중산층과 귀족층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입수했다. 정보제공자는 대부분 여성이었고 그림형제가 여행을 다니면서 수집한 것은 아니었다.
그림형제는 동화를 신화에서 추론하고자했다. 인도 게르만 신화가 침몰하면서, 다시 말해서 원시사회의 신화가 무너지면서 동화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용과 용퇴치자, 곰의 아들, 거인, 난쟁이, 요정, 기이한 출생, 죽은 자의 소생 등등 신화와 동화가 가지는 공통적 요소이다. 그러나 신화는 사물을 이해하는 세계상을 대변한다고 한다면 동화는 현실생활에서 기반을 두고는 그것을 미화시킨다는 데에 구별된다. 동화는 사회 비판적이고 이상향적인 요소를 가지게 된다. 동화와 전설은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사물, 인물, 사건 등 그리고 유령, 난쟁이, 마녀와 마법사 등 유사한 등장형상들을 가진다. 그러나 동화 자체 내의 시공간을 설정하고 있는 반면에 전설은 지리적으로 확정된 장소와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건의 일부로 펼쳐진다.
그림형제는 두 장르의 차이를 전자는 좀 더 시적이고 후자는 더 역사적이라고 말했다. 전설은 기적적인 것을 믿을 수 있는 현실적인 것과 연관 시키고자하는데에 비해서 동화 속의 기적은 단지 동화 안에서만 유효하며,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성담은 전설에 가까워 종교적 성인들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어서 사실로 간주되길 바란다. 우화도 말하는 동식물이 등장하는 등 초자연적이나, 교훈적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다. 우화가 전달하려는 진실은 비유 속에 함축된 교훈적 진실이지 그것의 겉모양인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성인들의 이야기로서 비극의 발단이 주로 부인의 배반 등의 치정관계에서 시작되는 것과는 달리 그림동화는 제목이 암시하듯 주로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모음으로 구체적인 성애 적인 요소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주로 가정에서의 불화와 비극이 계모, 배다른 형제 등의 가족관계에서 비롯된다. 신데렐라( 재투성이부엌데기), 백설공주, 헨젤은 그레텔에서의 사건의 발단이 모두 계모의 질투와 음모에서 시작된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비록 왕자, 공주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외롭고 가난하고 천대받지만 심성이 착한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적으로, 가정에서
소외되기에 흔히 꿈꾸며 공상하기를 좋아한다. 자의든 타의든 가출하여 위험한 여로 속에서 온갖 시험을 거친 뒤 집으로 돌아온다. 시련과 위험의 공간은 그러나 대개는 숲으로 마녀나 악마와 대립하게 된다. 그들은 지혜를 짜내어 시련을 극복하며 그 모든 것이 인과 응보적으로 해결된다. 그
리고 대개는 가난한 사람과 약한 자 편에서 이야기된다.
동화의 일반적인 특징은 시간과 공간적 제약을 초월하며 자연법칙과 인과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인간이 동물로 변신하며 동물로 변신하고 동물, 식물, 사물들이 사람처럼 말한다. 거인, 난쟁이, 마녀등 상상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줄거리와 사건의 진행에 있어서도 거의 틀에 박힌 줄거
리로 일관한다. 주인공이 집을 나가거나 길을 떠난다. 그리고 온갖 멸시를 받으면서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거나 수수께끼 등을 해결하여 그의 능력을 검증 받는다. 결말 역시 대개는 정의와 선의 승리로 끝나며 모든 질서는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무대와 배경이 되는 것
으로는 성, 작은 집, 동굴, 숲, 샘물 등이며, 상징적인 숫자를 사용한 구조도 특이하다. 동화의 모든 사건은 3회적 반복 과정을 거친다. 혹은 일곱 난쟁이나 7년이라는 기간처럼 7의 숫자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동화에는 왕, 공주, 사악한 여형제, 남형제, 계모에게서 박해받는 주인공등등 유형화된 인물들이 등장하며, 대부분 이름이 없거나 흔한 이름들(한스 등) 이다. 인물들을 규정하는 데에도 가난함-부유함, 착함-악함, 아름다움-추함 등 이분법적이며 긍정적인 속성은 대개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몫이다. 가난한자가 착하고 아름답고 용감하다. 이렇게 틀에 박히고 도식적인 이야기 전개에도 불구하고 동화 속에는 무한한 상상력이 동원되고 있다. 현실적 시공간을 뛰어넘어 불가능한 세계가 구현된 동화는 그러나 언제나 민중들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 도식적인 이야기 줄거리와 비현실적인 세계는 우리의 경험세계를 초월하여 이야기(판타지)속에 유토피아를 정립하려는 시도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사회정의를 이야기를 통해서 엮어내며, 자신들의 억울함을 보상받는 것이다. 재투성이 부엌데기가 마술의 힘을 빌어서 왕자님 잔치에 가게되고 아름다운 미모와 착한 심성으로 왕비가 되는 것이나, 계모에게 쫓
겨난 헨젤과 그레텔이 깊은 숲속 마녀에게서 죽을 고비를 지혜롭게 넘기고 오히려 보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나, 어린 소녀가 할머니를 삼켜버린 늑대의 배를 갈라 할머니를 구하는 것등 모두 막강한 힘의 억압에 대한 보상의 표현이다.
그림동화 중 몇 편의 간단한 줄거리를 요약했습니다.(요약자;이연수외3인)
라푼첼, 개구리왕자,백설공주, 룸펠스틸첸, 재투성이부엌데기,헨젤과 그레텔,늑대와 일곱 마리새끼염소,
IV. 우리 나라 전래동화
여러분들이 판타지소설에 대해서 많은 의견을 제시하면서 동양적 혹은 한국적 판타지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많이 읽고 좋아했던 판타지 소설들은 주로 일본식으로 각색된 서양적 이야기나 북구신화나 유럽 중세 영웅담에서의 형상들이 등장하는 서양식 판타지였다. 귀신 잡는 퇴마록을 한국적 판타지라고도 했습니다. 작년 개천절날 김지하씨는 우리의 환단고기등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젊은이들의 상상력이 일본이나 서양 아류 적인 판타지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 우리 나라 고대 역사의 발굴과 연구를 통해서 한국적 상상력과 판타지를 무한대화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판타지에 민족적 국경을 이야기하는 것이 우습지만 그렇다고 서양, 그것도 우리가 덜 익숙한 북구 신화나 설화적 형상들이나 일본식 화된 몬스터의 영역이 판타지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용(드래곤, 드라헌)은 상상적 동물형상으로 동양적 사고와 서양적 사고 속에서 용의 역할은 구별됩니다. 서양에서의 악마, 마녀, 마신과 우리의 귀신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선의 영역과 대치되는 악의 영역에 군림하는 권력자이지만, 우리의 귀신은 선악의 이분법적 구분보다는 저마다 한을 품어 황천길로 들어서지 못한 한 맺힌 귀신들입니다.
마술에 걸려서 개구리로 변한 왕자나 마법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서양적 사고와는 달리 우리는 구렁이나 곰 그리고 구미호등 은 정신적 수양과 구도를 통해서 인간화를 꾀합니다. 나무꾼과 선녀, 칠월 칠석 오작교에서 만나는 견우와 직녀,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이야기는 서양과 아라비안 나
이트에서의 사랑이야기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렇다고 한국적 인물들과 귀신들이 등장해야 한국적 판타지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사실 참 어려운 이야기예요. 기독교의 순교자적 구도자의 길을 그린 많은 중세 성담과 영웅담들을 우리는 주몽이나 신라 화랑도들의 구도자적인 수양기보다 더 먼저 그리고 더 많이 접했기에 친숙합니다.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양복보다는 한복이 더 이질적이고 낯설어 보이는 것처럼요. 천국과 지옥, 아담과 이브의 낙원의 서양식 판타지 상보다는 극락세계와 염라대왕의 지옥 그리고 신선들의 무릉도원이라는 동양적 판타지가 적어도 내게는 더 체감도가 높고 유효한 것 같습니다.
from 동덕여자대학교 이유선교수의 판타지소설의 이해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