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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성: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단순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신약성경에 약 150번 이상 언급될 정도로 매우 중요하지만, 오늘날 많은 기독교 교회들이 사탄의 영향으로 이 진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하는 4가지 요소:
왕 (The King): 장차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의 왕은 실제로 세계를 통치할 예수 그리스도이며, 구원받은 성도들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서 세상을 통치하게 됩니다
영토 (The Territory): 하나님의 나라는 추상적인 천국이나 마음에 품는 감정이 아니라, 성도들이 직접 다스리게 될 실제 지구(Planet Earth)입니다
율법 (The Laws): 하나님의 나라는 십계명을 포함한 하나님의 율법을 기초로 다스려집니다
백성 (The Subjects): 궁극적으로 전 세계의 모든 국가와 민족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게 되며,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결론: 하나님의 나라는 막연한 사후 세계가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땅에 임하여 성도들과 함께 다스리실 실제적인 왕국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기 원하는 이들은 지금부터 그분의 다스림에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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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거나 말거나, 사탄 마귀는 이 세상 대부분의 교회들을 속여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핵심인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사실상 외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어둠 속에 가두려는 사탄의 계획을 무너뜨리고 싶다면, 이번 투모로우즈 월드(Tomorrow's World) 방송이 바로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마귀가 여러분이 외면하기를 바라는 그 질문, 즉 "하나님의 나라란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오늘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성경 페이지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도록 돕는 투모로우즈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 우리는 거의 아무도—오늘날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포함하여—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인 하나님의 나라를 평이하고 단순한 용어로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과연 무엇일까요? 마음속의 따뜻한 감정일까요? 아니면 교회나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 온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일까요? 그것은 오직 저 하늘에만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애초에 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이토록 엄청난 혼란과 신비가 자리 잡게 된 것일까요?
오늘날의 교회들이 어째서 그토록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는지 설명해 주는 무료 자료도 안내해 드릴 예정입니다. 제목은 <사탄의 위조된 기독교(Satan's Counterfeit Christianity)>입니다. 무료 사본을 받는 데 필요한 정보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교회들이나 온라인 동영상 속에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예수님에 대해, 즉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그들이 이해한 대로의 그분의 삶의 이야기,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 그분이 하신 말씀이나 행동,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에 대해 설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이 그럴듯해 보입니다.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이 흘리신 피로 인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들이 전파하는 메시지가 과연 예수님이 직접 전파하셨던 그 메시지와 같은 것일까요?
잠시 후에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은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설교의 심장부이자 영혼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잘 듣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실이 어떤 분들에게는 놀랍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신약성경에 약 150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사역 여정을 짧지만 폭넓게 살펴보면서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해 봅시다.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침례 요한이 투옥된 직후에 시작된 그리스도 사역의 맨 처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4절~15절에서 마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실제로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목적과 사명, 그리고 애초에 왜 이 땅에 오셨는지에 대해 아주 명백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43절에서 우리는 이렇게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도시들에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예수님은 자신의 목적,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바로 그 이유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에게, 즉 당신과 나에게 전하신 예수님의 메시지에서 너무나 중심적인 내용이었기에, 그 나라를 구하는 것이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경의 그 동일한 장에는 흔히 주기도문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구절이 담겨 있습니다.
그 모범적인 기도에서 예수님은 시작과 끝에 두 번이나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하십니다.
사실 네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비유가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방송에서는 시간이 없어 그 모든 것을 다 읽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대신 여러분을 놀라게 할 수도 있는 사도행전의 한 구절로 넘어가 봅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올라가시기 전, 제자들과 거의 6주 동안 함께 지내셨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합니다.
그 기간 동안 그분이 집중하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도행전 1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이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유명한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행전 14장 22절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 겪어야 하는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19장 8절은 그가 유대인의 회당에서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5절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다고 증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목록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사도행전의 맨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가택 연금 상태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28장 30절~31절은 그가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렇게 말해 줍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전적으로 담대하게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치더라"
성경의 증언은 만장일치이며 귀가 먹먹할 정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그분의 교회의 메시지는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메시지의 심장부였다면, 왜 자신을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자주 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많은 이들이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보는 기독교가 마귀에 의해 오랫동안 부패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수많은 중요하고 영감 넘치는 진리들을 무시하거나 변질시키도록 영향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충격적이겠지만, 이는 의심할 여지없는 진실입니다.
현대 기독교 교회가 수천 조각으로 산산조각 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교리가 성경의 가르침과 크고 작게 다른 방식으로 가르쳐지고 실천되고 있습니다.
사탄 마귀는 기독교가 시작된 이래로 그것을 부패시키기 위해 일해 왔습니다.
인간은 성경을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말씀하실 때, 어째서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에 우리의 생각을 덧붙이지 않고 그분의 말씀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고 싶다면, 무엇이 '나라(kingdom)'를 진정한 나라로 만드는지 고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명백한 이해를 구하고 성경이 우리의 질문에 답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우리는 마귀가 만든 혼란을 뚫고 아름답고 단순한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신중하게 고찰해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포함하여 모든 나라를 구성하는 것은 네 가지 요소, 즉 왕, 영토, 율법, 백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네 가지 요소라는 관점을 가지고 성경의 통찰을 살펴보면 오늘의 질문에 대한 해답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밝혀질 것입니다.
먼저 왕을 살펴봅시다.
미래에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 예수 그리스도가 될 것이라는 점은 여러분에게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분은 말 그대로 세상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사야 9장 6~7절의 말씀에 대해 종종 감상적으로만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구절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드물게 들여다봅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잠시 멈춰봅시다. '그의 어깨에는 정사(정부, 통치권)를 메었다'는 구절을 눈치채셨습니까?
이 구절의 앞부분은 은유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통치하기 위해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계속 읽어 봅시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부터 영원토록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다윗 왕은 예루살렘에서 실제 왕국을 통치했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예루살렘에서 실제 왕국을 통치하실 것이며, 이번에는 끝이 없는 왕국이 될 것입니다.
그분은 요한계시록 19장 16절에서 부르듯 바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 혼자 통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9장 28절은 그분의 열두 사도들이 그 나라에서 그분의 아래에서 통치하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죄를 이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고난받고 애쓴 모든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 아래에서 직접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구절이 이 미래의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7장 18절과 27절은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2절로 넘어가 보면, 바울이 미래에 영광스럽게 될 그리스도인들의 통치에 대해 아주 명백하게 이야기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세상을 심판한다고요? 천사들을 심판한다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추종자들 앞에는 정말 놀라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의 보상은 천국의 요양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아래에서 영광 중에 내일의 세계를 통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왕국의 두 번째 요소인 영토를 보게 됩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아래에서 세상을 통치할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이나 마음속의 모호한 감정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입니다.
몇 가지 배운 것을 잊기가 어렵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예수님 메시지의 진정한 진리를 배우기 위해 마귀의 속임수를 박살 내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 진리는 명백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요한계시록 5장 10절의 명백한 말씀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이보다 더 직관적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땅에서 왕 노릇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요한계시록 2장 26~27절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란 이 땅 위에서의 권세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정말로 의도하지 않으신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마귀는 여러분이 그렇게 믿도록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성경이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를 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세그먼트에서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분과 나란히 세상을 통치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이라고 단순하게 기대해 왔던 많은 분들에게는 이것이 다소 놀랍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성도들이 다스릴 미래의 세계에 대한 진리는 성경 속에서 내내 여러분의 눈앞에 있었습니다.
심지어 많은 무신론자들도 마태복음 5장 5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약속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시간 관계상 건너뛰는 수많은 구절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이러한 구절들과 대목들이 이제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정말로 자신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의미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들은 문자 그대로 지구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마귀의 생각들을 쓸어버리고 성경의 명백한 진리를 받아들일 때, 너무나 많은 것들이 명확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포함하여 모든 왕국의 처음 두 가지 요소, 즉 왕과 영토를 다루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요소인 율법들의 모음을 살펴봅시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가 십계명에 체현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다스려질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진실되지만 혼란스러운 수많은 목회자, 설교자, 신부들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계명을 폐기하셨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한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해 찾아왔을 때 그리스도께서 하신 답변을 마태복음 19장 16~17절에서 직접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수많은 예언이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와, 하나님의 율법이 그 통치의 기초를 형성할 것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2장 3절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사실 이사야 2장의 더 넓은 본문을 살펴보면, 모든 왕국이 가지는 네 번째 요소인 백성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통치의 대상이 될 백성은 온 세상을 아우르게 될 것입니다.
2절부터 시작되는 더 넓은 본문을 읽어 봅시다. "말세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이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국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스가랴 14장은 이 온 지구를 덮는 통치가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일부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 왕국의 백성이 되거나 하나님의 율법 아래 들어오기를 거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들은 이 새로운 세계 통치자에 저항하는 것이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향해 예루살렘에서 성경의 초막절을 지키라고 요구하실 때, 일부 국가들은 분명 저항할 것입니다.
스가랴는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거부를 가볍게 넘기지 않으실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아 있는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땅의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자연 그 자체를 통제하시기에, 온 세상이 복종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항하는 것이 사랑의 하나님께 굴복할 때 오는 축복을 그저 연기할 뿐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전 세계와 세상 사람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의 결과는, 우리가 그토록 원해 왔던 평화와 번영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 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분—즉 그리스도—은 열방 사이에서 판단하시고 많은 백성을 견책하시리니, 그들이 그 칼을 치워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치워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와 그것이 구원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 즉 예수님의 진정한 복음의 핵심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켜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 온전하고 친밀하게 동행하는 아름다운 여정의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의 구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나 마음속의 감정이나 교회가 아니라, 왕(예수 그리스도)과 영토(지구 전역)와 율법(십계명과 하나님의 법)과 백성(전 세계의 사람들과 국가들)을 가진 실제적인 왕국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설명해 왔습니다.
사탄 마귀가 아무리 이 진리를 모호하게 만들려고 애쓸지라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가져오신 메시지의 심장부이자 영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전파하라고 위임하셨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복음이나 그분의 인품, 그분의 삶에 대한 복음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투모로우즈 월드는 바로 그 일을 하는 데 헌신하고 있습니다.
사실, 투모로우즈 월드의 사명은 마태복음 24장 14절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예언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리고 그 천국 복음은, 그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모든 뜻의 총체로서, 우리 투모로우즈 월드가 주마다 여러분에게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세우실 그리고 온 땅을 덮도록 퍼져나갈 그 세상은 참으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놀라울 것입니다.
그분의 성도들은 그분과 함께 천 년 동안 통치하며, 구세주와 나란히 권능과 영광 속에서 왕 노릇 하고, 마침내 사탄 마귀가 그동안 숨겨왔던 모든 진리들을 세상에 가르칠 것입니다.
그 진리에는 인간의 놀라운 목적과, 참으로 생명으로 이끄는 삶의 방식이 포함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주는 유익을 경험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 속 어느 정도 수준에서 그것을 누리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1 - 하나님 나라의 의미 - 스티브 그레그
동영상 정보
1. 요약 (Summary)
이 강연은 스티브 그레그(Steve Gregg)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의 참된 의미를 정의하고, 흔히 가지는 오해들을 바로잡는 내용입니다.
제목: Kingdom of God 1 - The Meaning of the Kingdom - Steve Gregg (하나님 나라 1 - 하나님 나라의 의미)
채널명: SteveGreggVideos
1. 요약 (Summary)
이 강연은 스티브 그레그(Steve Gregg)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의 참된 의미를 정의하고, 흔히 가지는 오해들을 바로잡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천국의 동일성: 마태복음에서 사용된 '천국(Kingdom of Heaven)'과 다른 복음서들의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는 완전히 동의어입니다. 마태가 유대인 독자들을 배려해 '하나님'이라는 단어 대신 '하늘(천국)'이라는 완곡어법을 썼을 뿐, 두 개념은 다르지 않습니다.
오해의 교정: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죽어서 가는 물리적인 '하늘나라(Heaven)'나, 미래에 이루어질 '천년왕국(Millennium)'과 동의어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통치와 주권의 개념입니다.
영적 본질: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지상적 왕국이 아니라 영적 실체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이스라엘과 교회: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백성)로 부름을 받았으나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거부한 하나님 나라가 이제 그 열매를 맺는 새로운 백성(교회, 영적 이스라엘)에게로 넘어갔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결론: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미 그 나라로 옮겨졌으며, 현재 왕의 통치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2. 본문 전체 번역 (Full Translation)
이 주제,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이 자리에 계신 것을 보니 여러분이 이미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신 것 같아 기쁩니다. 물론 참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를 공지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지 저는 항상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이 개념이 다소 막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이 막연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제 생각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정확하지 못한 특정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제 생각 자체가 부정확할 수도 있으며, 그것은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 판단하셔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신약성경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이며, 적어도 이스라엘 국가가 세워진 이후의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핵심적인 주제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상고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실 때 그것이 정확히 무슨 뜻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가까이 왔는지를 이해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주제의 중요성을 우리가 먼저 인식할 수 있도록 저는 세 가지 요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이미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셨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잘 모르시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이 주제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직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일깨워드리자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인용할 모든 성경 구절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에 띄워두겠습니다. 성경을 일일이 찾아보는 것은 시간이 걸리고 지체되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 주기도문에서 가장 첫 번째이자 전체를 지배하는 탄원은 바로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여러분도 이 기도를 드리고 계실 것입니다. 물론 로마서 신자들처럼 한 번에 10번이나 15번씩 반복해서 드리지는 않을지 모르지만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은 확실히 매일 이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는 저의 아침 경건 생활에서 일반적인 기도의 뼈대가 됩니다. 저는 각 줄을 하나씩 묵상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뼈대 같은 것이지만,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말할 때 제 생각 속에는 그 기도를 뒷받침하는 많은 정보와 의미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의 기도를 드릴 때 저는 그 내용을 구체적인 것들로 풀어내곤 합니다.
그렇다면 "나라가 임하옵시며(Your kingdom come)"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Kingdom come'이라는 표현은 세속 사회의 속어로까지 흘러들어 갔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때때로 어떤 일이 폭발해 박살이 났을 때 'kingdom come'으로 날아갔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 표현을 처음 만든 사람이나 사용하는 사람들이 'kingdom come'을 인생의 끝에 다다르는 어떤 궁극적인 운명 정도로 생각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셨는지,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온전히 답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어떤 종류의 정보적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지적으로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끊임없이 기도하지만,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언제 임하기로 되어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임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기도하고 있는 오늘 임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미 이전에 임했고 앞으로 더 임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도대체 그것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기도뿐만 아니라 우리의 설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설교자가 아닐 수도 있지만, 대개는 교회에 출석하거나 라디오나 교회 등에서 설교를 들을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 스스로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설교에 있어서도 이 주제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음, 우리 대부분은 그 끝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처럼 나이가 든 사람들은 말이죠. 살 날이 너무 많이 남기 전에 끝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어쩌면 저와 여러분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예수님을 뵙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으며, 끝이 올 때 제가 기대하는 바가 바로 예수님을 뵙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해 온 세상에 전파되기 전까지는 그 끝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선교사들과 전 세계의 교회들을 통해 어떤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의 복음'이라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가르쳐지고 있는 메시지가 맞는지 알기 위해 천국의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물론 그렇겠죠, 아니 이 선교 운동들 속에 얼마나 많은 성경 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그것에 대해 틀릴 리가 없잖아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천국의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혹은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서로 다른 당파적인 견해들이 아주 많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복음주의 진영에서 매우 저명한 한 신학 학파는 두 가지 복음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는 천국의 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은혜의 복음은 지금 우리가 전파해야 할 것이고, 천국의 복음은 교회 휴거 이후에 전파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시기가 되기 전에 우리는 이 땅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셨고 제자들도 천국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바로 우리가 전파해야 할 복음입니다. 그리고 우리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이 메시지로 온 세상에 도달했을 때, 예수님은 그때서야 끝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학수고대하고 있으며, 저에게는 그것이 꽤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적절성을 인식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추구(pursuing)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알듯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즉 먹을 것과 입을 것 등 필요한 육체적 필요를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꽤나 광범위하고 정말 놀라운 약속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이 약속이 사실이라면, 여러분은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과정에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더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다른 것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들 중 일부는 특정한 생활 수준이나 교육적 목표, 혹은 경력 목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그들의 꿈입니다. 특정한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획득하는 것이 그들의 꿈이며, 그것이 바로 그들이 쫓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알다시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정의상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추구하고 있으며, 특히 그분의 나라를 추구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여러분은 교파나 교단의 발전, 혹은 무언가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여러분이 그것을 알 수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우리의 설교, 그리고 우리의 추구에 있어서—이러한 것들은 매우 실제적인 영역들입니다. 마지막 영역은 모든 사람에게 실제적입니다. 모든 사람은 인생에서 무엇을 추구할 것인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인생에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목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이 구하고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와 설교 또한 중요한 일이며,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 표현을 사용하실 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면, 이 모든 일들은 올바르게 행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 나라를 정의해 봅시다. 사실 우리는 이 세션의 남은 시간 대부분을 이 작업을 하는 데 할애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주제는 논쟁의 여지가 많고 복잡하며, 정의하기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이 용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사용 방식들은 서로 일관성이 전혀 없을 정도로 제각각인 것은 아니며, 전체로서 이해가 되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기본 어휘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가 '천국(Kingdom of Heaven)'과 동의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이라는 용어를 여러 번 발견할 수 있지만, 성경의 그 어디에서도 그 표현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마태만 그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둘러싼 많은 논란 많은 주제들 중 하나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 서로 다른 개념이라고 믿습니다. 저도 신학자들이 쓴 책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런 뜻이고 천국은 또 다른 미묘한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유일한 저자는 자신이 그것들을 혼동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그 용어들을 동의어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상호 교환가능하게 사용한 저자가 바로 마태입니다. 화면에서 보실 수 있듯이 마태복음 19장 23절과 24절은 마태복음에서 그 용어들이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본문일 뿐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하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가사니라."
예수님께서 단순히 같은 말을 두 번 하셨다는 것이 명백하기를 바랍니다. 그가 "다시 말하노니"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은 명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시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는 같은 말을 두 번 하셨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재물을 가진 사람이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극도로, 엄청나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마태의 버전에서는 그것을 한 번은 '천국'이라 불렀고, 다른 한 번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보시다시피 그는 그 용어들을 상호 교환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조차 명확하지 않다면, 다른 복음서들에 나오는 본문들을 살펴보아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마태는 마가와 누가의 본문들과 평행을 이루는 많은 본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마태가 '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많은 본문들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평행 본문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평행 본문들에서는 '천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고, 대신 동의어인 '하나님 나라'가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장 14절과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그러나 마태복음 4장 17절에 나오는 마태복음의 평행 진술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했고, 본질적으로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는 마태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느 쪽으로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셨을까요, 아니면 천국이라고 하셨을까요? 아마 둘 다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태만이 —그리고 오직 마태만이— '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다른 복음서들이 오직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만 사용하는 특정 곳에서 apparently(명백히) 그것을 '하나님 나라' 대신 대체하여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제가 생각하기에 타당한 저명한 이론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에 따르면, 마태복음은 유대인 청중을 대상으로 쓰여진 유일한 복음서입니다. 마가는 —일반적으로 로마에 있는— 이방인들을 위해 쓰여졌다고 여겨집니다. 누가는 이방인, 아마도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그리스인 남성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에베소에서 썼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 즉 대다수가 이방인인 이들에게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유대인 청중을 향하고 있다는 많은 흔적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 그 모든 흔적들을 일일이 짚어보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초기 교부인 파피어스(Papias)에 따르면, 마태복음에는 실제로 더 이른 초안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진 형태의 마태복음은 그리스어로 쓰여졌지만, 분명히 아람어나 히브리어,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언어로 쓰인 더 이른 마태복음의 초안이 존재했습니다. 파피어스라는 1세기 말의 교부가 전하기를, 마태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실제 언어인 아람어로 예수님의 어록을 모은 가장 이른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그의 증언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는 권위 있어 보입니다. 그 후 나중에 마태복음은 그 이른 문서를 더 살을 붙여 그리스어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후자의 것, 즉 그리스어 마태복음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가 원래 그것을 히브리어로 썼다는 사실은, 마태가 아람어를 구사하던 유대인 청중 —다른 이들은 아람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에게 글을 쓰고 있었다는 다른 증거들에 무게를 더해 줍니다.
우리가 유대인들에 대해 아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독실한 정통 유대인들은 '하나님(God)'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God'을 쓸 때 'G' 다음에 대시('-')를 넣고 'D'만 쓰는 유대인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O'를 생략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너무 자주, 너무 경솔하게 사용하지 않으려는 거부감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너무 자유롭게 사용하여 캐주얼하게 만들고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될까 봐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신중을 기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 대신 '하늘(Heaven)'이라는 단어를 대체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잘 알려진 탕자의 비유에서 한 유대인 소년이 묘사됩니다. 그는 집을 떠나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 절반을 가지고 떠나서 그것을 허비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며 회개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 젊은이가 뭐라고 말했다고 하십니까? 그 청년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하늘'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 죄를 지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훌륭한 유대인으로서 그는 '하늘'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당신을 축복하시기를(God bless you)"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늘이 당신을 축복하시기를(Heaven bless you)"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글을 쓰고 있었고, 그 자신도 유대인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썼습니다. 예수님 자신에게 이러한 꺼림칙함이 있었는지,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천국'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셨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을 수도 있으며, 이방인 청중들이 히브리적 관용구를 알지 못하므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도록 다른 복음서들이 '하나님 나라'로 대체했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는데, 유대인 청중에게 글을 쓴 마태가 그들의 예민한 정서를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천국'으로 대체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천국'과 '하나님 나라' 두 용어 모두가 발견되며, 우리가 마태복음 19장에서 보았듯이 그것들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명백히 유대인들은 그 용어가 절제되어 사용된다면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에 대해 그렇게까지 반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마태 —혹은 예수님, 혹은 둘 다— 가 '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유대인 청중이나 독자들을 불필요하게 불쾌하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국과 하나님 나라가 같은 것의 서로 다른 용어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라는 용어의 의미와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의 의미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데이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마태가 '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모든 본문들에 대응하는 마가와 누가의 평행 본문들은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저자가 예수님께서 하신 동일한 말씀에 대해 단순히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 점을 명심하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다음으로 중요한 요점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나라는 천국과 동의어이지만, 하늘(Heaven)과 동의어는 아닙니다. 이것은 제 삶의 초기 시절에 저를 정말로 헷갈리게 만들었던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말씀하실 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을 듣고 저는 그것이 단순히 그가 '하늘나라(Heaven)'에 가기 어렵다는 뜻이라고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Kingdom of'라는 표현이 스페인의 왕국(Kingdom of Spain)이나 프랑스의 왕국(Kingdom of France)처럼 수식어구처럼 사용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Kingdom of'는 단순히 스페인이나 프랑스라 불리는 왕국을 의미하는 방식이었고, 'Kingdom of Heaven'은 단순히 우리가 하늘이라고 부르는 그 왕국, 즉 하늘(Heaven)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천국(Kingdom of Heaven)'이라는 용어는 'Heaven'이 단순히 'God'이라는 단어를 대신하여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와 천국에 대해 말해지는 것들 대부분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죽을 때 가는 곳에 결코 적용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때로는 나라의 미래적 측면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아주 잘 아시는 마태복음 6장 10절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이것은 사실 비록 그리스어로 쓰였지만 히브리 시(Hebrew poetry)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히브리어로 말씀하셨고 히브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평행법(parallelism)입니다. 예언자들은 시로 말했고, 히브리 시는 운율이나 박자가 아니라 평행법으로 유명했습니다. 히브인들은 산문과 시를 구별하는 다양한 방식을 가졌습니다. 시편, 잠언, 욥기, 그리고 예언서들의 대부분의 페이지를 읽어보면 모두 히브리 시로 쓰여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산문과 히브리 시를 구별 짓는 것은, 히브리 시가 단순히 강조를 위해 서로 다른 용어로 동일한 내용을 두 번 혹은 세 번 반복해서 말한다는 점입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한 번 말씀하신 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것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평행된 진술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을까요? 하늘이 여기에 임하기로 되어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여기에서도 무언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땅에서는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아닌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땅에서도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여기에 당신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뜻하는 바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가 가는 곳인 하늘(Heaven)이 아니라, 여기에 임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하늘에 갈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나라가 하늘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더 많은 성경을 살펴보면서 보게 되겠지만, 그것은 다른 개념입니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요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천년왕국(Millennium)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라디오에서 저를 들으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어떤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천년왕국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그것이 쟁점은 아니며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토론해야 할 사안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세우실 다가올 천년왕국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것은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가장 흔한 견해이며, 많은 이들이 그 천년왕국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라라고 부르신 그것이라고 느낍니다.
실제로 어떤 학파에서는 예수님께서 초림 당시 이스라엘에게 천년왕국을 제안하셨으며, 만약 그들이 더 수용적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거절하고 그가 제안한 나라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것은 연기되었고 예수님은 떠나시며 나라의 제안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재림하셔서 그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라디오나 많은 기독교 교회, 대중적인 책들에서 들을 수 있는 아마도 가장 저명한 견해일 것입니다.
음, 우리는 그 이론을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초림 당시에 천년왕국을 제안하셨고 유대인들이 그것을 거절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자, 천년왕국이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묘사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천년왕국은 메시아가 예루살렘의 다윗 왕자에 앉아 온 세계를 다스리고 모든 민족이 그에게 복종하는 때를 말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백성이고, 나머지 세계는 메시아에 따라 유대인들을 존중합니다. 천년왕국의 소망에 따르면 이것이 랍비들이 가졌던 소망이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랍비들이 옳았다고 믿는 소망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스라엘에게 정치적 통치자로서 자신을 제안하러 오셨고, 만약 그들이 그를 영접했다면 그가 예루살렘에서 다윗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자신의 왕좌를 세우고 이스라엘과 궁극적으로는 그 시점부터 세계를 다스렸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유대인들은 그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음, 만약 여러분이 요한복음 6장 15절을 살펴보신다면 그것은 정확히 사실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오만 명을 먹이신 후에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강제로 붙들어 킹(왕)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런 식의 왕으로 자신을 제안하신 적이 없으며, 그들이 그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반대였습니다. 그들은 강제로 그를 그런 식의 왕으로 만들고자 했고, 그분은 그 일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프로그램이 아니었으며, 그분이 제안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 17장 4절 —제 기억이 맞다면— 에서 예수님은 사역의 끝에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무것도 미완성으로 남겨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분이 다윗의 왕자에 앉아 세계를 다스리는 정치적 왕국을 세우기 위해 내려왔다가 그것이 무산되어 연기되어야만 했다면, 사실 그분이 여기 와서 하라고 보내신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일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여기서 하라고 주신 모든 일을 다 이루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자신을 이곳에 보내신 모든 일을 실제로 완수하셨고,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것을 정확히 다 해내셨다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분은 생의 마지막에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모든 일을 내가 이뤘습니다"라고 말씀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정치적 왕국을 제안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바였고, 랍비들이 기대했던 바였으며, 부활 직후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그들의 관점이 재형성되기 전까지는— 제자들조차도 처음에 그렇게 믿었던 바였습니다.
그것이 1천 년의 천년왕국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은 여러분에게도 친숙할 많은 수많은 성경 구절에서 명백합니다. 이사야 9장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 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천년왕국에 관한 본문이라고 가정하지만, 그곳에는 그의 이름을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이것은 1천 년짜리 통치가 아니라, 끝이 없는 영원한 통치입니다. 1천 년은 매우 긴 통치 기간이지만, 그것은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는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말하는 성경이 이것 하나뿐인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구약성경의 거의 모든 관련 구절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에 있는 구절을 보여주신다면요, 다니엘 2장 44절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원히 멸망하지도 아니할 나라를 세우시리니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1천 년짜리 나라가 아니라 영원히 서며 다른 누구에게도 양도되지 않고 끝이 없는 나라입니다. 다니엘 7장에도 이것에 대한 매우 유명한 예언이 있습니다. 이 슬라이드는 다니엘 7장의 두 가지 다른 본문, 즉 13-14절과 27절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들을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예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리고 2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넘겨지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
조금 반복적으로 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압니다만, 솔직히 구약성경이 이 점에 있어서는 그러했습니다. 반복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적어도 매우 반복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나라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고 예언될 때마다, 그것은 항상 영원하고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졌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인 누가복음 1장에서도 천사가 마리아에게 그녀가 아들을 가질 것이라고 알리며 그 아이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보시다시피 이것은 구약성경의 언어, 즉 우리가 이미 살펴본 수많은 본문들의 언어 그대로입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가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언된 예언 속에는 분명히 나라가 있었습니다. 천사는 예수님께서 그 예언의 성취가 되실 분이며, 그 나라에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명확히 말했습니다. 천 년이 아니라 영원히 영원토록 말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이 다시 오신 후 1천 년의 통치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동등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동의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포괄적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중요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많은 논쟁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도행전의 초기 시절에도 논쟁거리 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될 것이며, 따라서 메시아가 모든 나라를 뛰어넘어 이스라엘을 높이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메시아가 모든 나라를 다스리게 될 때, 열방들은 이스라엘을 메시아의 백성이자 지배하는 민족으로 인정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나라가 의로운 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메시아에게 순종하는 한 모두 번영 속에서 살아가겠지만, 이스라엘은 지배 계층이 될 것이라고 그들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제자들과 40일을 보내시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 그들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 여쭙습니다. 사도행전 1장 6-8절은 말합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시기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분의 대답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첫째, 그분은 "예" 혹은 "아니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 내가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겠다"고도 하지 않으셨고, "아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셨고,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씀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질문을 비껴가셨습니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일어나게 될 일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는 점이며, 너희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결국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문구인 "땅 끝까지"는 시편 2편 8절에서 온 구절입니다. 시편 2편 8절은 메시아 시편입니다. 사실 구약 학자들이 '대(大) 하나님 나라 시편'이라고 부르는 네 편의 시편이 있습니다. 시편 2편이 그 첫 번째이고, 시편 45편이 또 다른 하나이며, 시편 72편과 시편 110편이 그렇습니다. 이 네 편의 시편은 다양한 방식으로 메시아의 나라를 묘사합니다.
그리고 시편 2편에서는 메시아의 나라를 언급하며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것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 메시아가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메시아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메시아에게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인을 네 유속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자, 땅 끝까지라는 구절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에게 주어진 약속은 아버지가 그에게 땅 끝까지 소유로 주실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함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습니다, 이 모든 것의 타이밍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맙시다. 그냥 이 프로그램에 참여합시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할 때 너희는 내 증인이 되라.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증언하게 될 것이다.
당시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들도 그 순간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들이 남긴 기록들이 말해주듯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가 확장되는 방식이었고, 시편 2편 8절에 따라 메시아가 나라의 메시지가 땅 끝까지 선포되고 사람들이 그 메시지에 복종함을 통해 땅 끝을 자신의 유산으로 소유하게 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곧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제자들은 여전히 "이 모든 것은 오직 이스라엘에 관한 것이다"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9장 6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어떤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겠다는 그분의 말씀 —구약이 약속한 그것— 이 폐하여졌습니까? 바울은 결코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자, 이 복잡하게 들리는 진술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을 하실 때, 그 약속은 유대인 피를 가진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실체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라고 해서 다 결정적인 의미의 이스라엘이 아니며,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오직 '남은 자(Remnant)'만이 약속이 성취된 그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이 다른 말로 표현했듯이,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라를 세우는 데 실패하지 않으셨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데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해해야 할 것은, 그것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이 다 그 문제의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스라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시 제자들과 깊게 다루지 않으셨던 부분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이 특정한 개념에 대해 배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날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에도 베드로 —사도들의 지도자— 조차도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의 지도자인 베드로조차 오순절 수년 후 옥상에서 특별한 환상을 보기 전까지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갑자기 계시를 받았습니다. "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구나!"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아무것도 몰랐던 것일까요?
글쎄요,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불과 몇 날 밤 전에 다락방에서 요한복음 16장 13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할 일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다시 말해, 내 가르침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3년 반 동안 너희를 가르쳐 왔지만, 내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아직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너희는 아직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거나 감상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을 갖춘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희를 압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자신의 속도대로 너희를 진리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순절이 지난 지 수년이 지나서야 그들이 마침내 "아, 이방인들도 구원받을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을 봅니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보다 이것을 훨씬 더 깊이 깨달았던 것으로 보이며, 우리는 대부분 바울의 글을 통해 그것을 배웁니다. 하지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제자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단순히 "지금은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자,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는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자"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너희가 묻고 있는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곧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의역하고 있는 셈인데, 항상 안전한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자, 이것은 뉴에이지(New Age) 추종자들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혹시 그들과 대화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뉴에이지 추종자들은 종종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실은 그리스도이며, 단지 '그리스도 의식(Christ Consciousness)'으로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양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데, 그들이 매우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 17장 20-21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나이까 물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within you) 있느니라"
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말씀 이전에 그분이 하신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임할 때 사람들은 "오 저기 있다, 오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그분은 결코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청중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으며, 나중에 그분의 죽음을 공모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의 나라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 —그들을 포함하여— 안에 있는 어떤 본질이나 영적 신비주의적 자질을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르고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분이 여기서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그분이 그 주제에 대해 하신 다른 모든 말씀들과 명백히 모순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의도하신 바는 무엇일까요? 여러분도 아실지 모르고, 번역본마다 다를 수 있지만, 많은 번역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중에(among you) 있느니라" 혹은 "너희 가운데(in your midst) 있느니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도된 바임에 틀림없습니다. 'within'은 너희의 대열 안에, 혹은 이 군중들 가운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향한 지칭일 수도 있습니다. 그분이 그들 사이를 거닐고 계셨기 때문이며, 이것이 그분이 의도하신 바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혹은 그분이 이미 제자가 되어 있던 사람들, 즉 하나님의 나라의 씨앗 같은 멤버들, 그 무리 속에 이미 존재하던 왕의 백성들을 가리키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분이 무엇을 의미하셨든 간에, 그것은 모든 남녀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떤 신비로운 본질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은 바로 "너희의 한가운데, 이 자리에 나라가 이미 도달해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오 저기 있다, 저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의 기대였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것은 그런 식으로 임하지 않는다. 그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이미 여기에 와 있고, 너희는 그것을 파악조차 하지 못했고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것은 이미 너희 중에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인 듯합니다.
그분이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는 어떤 신비로운 본실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은, 다음과 같은 수많은 성경 구절들을 통해 명확히 드러납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힘써 침입하느니라(pressing into it)." 하나님 나라는 여러분의 내면에 거주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여러분이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무언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안으로 들어간다면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들어가는 이들은 힘써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수동적으로 우리 모두의 내면에 품고 있어서 그저 그리스도 의식을 깨닫기만 하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며,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힘써 그리로 들어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안에 있게 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리즈의 나중 부분에서 다른 요점을 증명하기 위해 이러한 성경 구절들 중 일부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예수님께서 나라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은 여러분이 들어가야 할 무언가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의 무리들 가운데, 군중들 중에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합니다. 그분은 청중들이 지니고 있던 내면의 어떤 자질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신약성경이 구약에서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던 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 실체가 아니라 영적 실체라는 점입니다. 아까 제가 그것이 각 사람 안에 있는 신비로운 실체가 아니며 여러분의 외부에 존재하되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적 운동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새로운 왕을 다윗의 왕자에 앉히고 모든 이방인들을 정복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는 등의 문제였다면, 그 나라로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시민이 되거나 그 운동 또는 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단순한 정치적 상황이 되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인 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생인 니고데모에게조차 하나님 나라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시키는 데 큰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만약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었다면 육체적인 출생 외에 다른 출생을 겪지 않고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이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우리는 이 요한복음 3장 3-7절의 본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여기서 '볼 수 있다(see)'는 말은 어쩌면 영적인 눈을 가지고 영적 실체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보다'라는 단어가 단순히 '경험하다'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사실 같은 장의 끝부분에서 요한은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본다는 것은 생명을 경험한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도 그것을 경험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인지의 의미에서 보시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경험하는 의미에서 보시는 것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분은 거듭나지 않으면 그 일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만약 그것이 물리적이고 정치적인 왕국이었다면 육으로 태어나는 것, 즉 자연스럽게 태어나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태어나기 마련입니다. 만약 그것이 물질적인 왕국이었다면 한 번 태어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영적인 왕국이므로 육으로뿐만 아니라 영으로도 태어나야 합니다. 물로만 아니라 성령으로도 태어나야 한다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로마서 14장 17절에는 성경에서 가장 간결한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가장 유사한 유일한 본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곳은 오직 이곳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그가 그것으로 의미하는 바는, 유대교 종교는 여러분이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 무엇을 마실 수 있는지, 무엇을 만질 수 있는지 등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입니다. 정결하고 부정한 것들에 대한 수많은 규례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러한 전체 시스템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만약 그가 여기서 "성령 안에서"라는 부분을 빼놓았다면, 그는 단순히 구약 예언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했던 것들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의의 나라입니다. 구약에서 의와 공의는 그리스어에서 같은 단어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는 의로운 메시아 통치 아래의 의와 공의의 나라로 묘사됩니다. 그것은 평강의 나라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사야 2장과 미가 4장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해주는 바입니다. 그것은 기쁨(희락)의 나라입니다. 나라에 관한 많은 본문들은 기쁨,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와 늙은이가 함께 기뻐하며, 기쁨과 노래를 마음에 품고 돌아올 것이라는 점 등을 이야기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묘사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나 의의 나라, 평강의 나라, 그리고 기쁨의 나라였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확히 그 모든 것들이되, 성령 안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묘사될 때, 이것은 세상에 편만해 있는 정치적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영으로 거듭나야만 그것을 볼 수 있고 그것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실체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 나라의 주요 특징들을 가져와서, 영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인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이 나의 왕이시고 주님이시라면— 나는 그분의 백성이며 그분의 나라의 일부이고, 의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그것을 모른다면 여러분은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의로운 자로 여겨지며,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오셔서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 두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그분의 의를 나누어 가집니다.
또한 여러분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따라 '평강'이라 불리는 성령의 열매와 '희락'이라 불리는 또 다른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영적인 것들입니다. 지금 제 주변의 상황 속에서 저는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확실히 우리의 세상도 현재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만약 징집령이 떨어진다면,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라크로 가게 되거나 관속에 실려 돌아오게 될지도 모를 나이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다락방 강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분은 자신이 세상을 이긴 정복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수천 년 뒤의 먼 미래의 어느 시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서 있던 그곳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마치 메시아가 세상을 정복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이 여전히 반역 속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분이 세상을 정복하셨다는 말씀이 그다지 실감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씀이 어떻게 진리인지에 대해 더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그분이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하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평안이 없을 수도 있으며 환난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 두 개의 영역(Realms)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전처럼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이제는 이전에 살지 않던 또 다른 영역,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지만, 그분 안에서 여러분은 평안을 누립니다. 성령 안에서 그것은 성령의 열매이자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입니다.
구약의 저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했던 것들은 당시 영적이지 못했던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주어졌습니다. "아, 멋진 일이겠구나. 메시아가 오시면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실 거야. 그것 참 좋겠네." 음, 실제로 그분은 자신을 영접한 이들에게 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를 영접하지 않은 유대인들은 그 중 많은 부분을 받지 못했습니다. 뉴스에서 보시듯 그들은 지금도 그곳에서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효력을 잃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실제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가져다주셨지만, 그분이 그 나라를 가져다주신 그 이스라엘은 믿음을 가진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순절 날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이었으며,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고 그들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닿을 수 있는 다른 모든 유대인들에게 퍼뜨리러 나아갔습니다. 모든 유대인이 그것을 영접한 것은 아니며, 물론 오늘날까지도 대다수는 영접하지 않지만 일부는 영접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그 남은 자들은 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이것은 과거 시제입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이 이미 여러분과 저에게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얽매여 있던, 우리가 노예가 되어 있던, 우리가 포로로 잡혀 있던 흑암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취하여 재배치하셨으며, 그리스도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심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기대할 것이 더 이상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연구의 다른 주들을 통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경험되지 않은, 보편적인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실현이 존재합니다. 세상은 아직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보게 될 하나님의 나라의 온전한 발현의 실현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당장 나라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나라 안으로 옮겨졌으며,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기 위해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에게는 성령 안에서 그러한 것들이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거짓말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까이 있었고, 그분이 그것을 선포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참된 이스라엘, 즉 메시아를 영접했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임했습니다. 엘리야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대부분 배교했으나 하나님께 충성된 이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을 굽히지 않은 자 7천 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나라에 비하면 꽤 작은 남은 자들이지만, 그래도 존재했습니다.
모든 선지자의 시대에도 이스라엘에는 항상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배교했을 때마다 늘 찾아왔지만, 언제나 신실하게 말씀을 듣고 선지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며 메시아를 영접한 남은 자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가 '제자들'이라 부르는 이들이 되었고, 나중에는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에 보면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남은 자들과 함께 세워졌습니다. 자, 우리 대부분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니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그 남은 자들의 일부가 아닙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그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올리브 나무(감람나무)와 같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예레미야 11장에서 그 비유를 가져왔는데,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푸른 감람나무라고 부르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나무의 가지 일부가 꺾였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일부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감람나무였고, 그 가지들 중 일부가 꺾여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레미야의 그 이미지를 이어받아 말합니다. "만약 그 나무의 뿌리가 거룩하다면, 그 나무의 가지들도 다 거룩하다. 하지만 가지들 중 일부가 꺾여 나갔다." 당연히 그들은 더 이상 나무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거룩하지 않습니다. 꺾여 나간 가지들은 누구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유대인들이 그 감람나무에서 꺾여 나간 가지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너희 이방인들은 원래 야생 감람나무의 가지였으나,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가지들 사이에 꺾여 접붙여졌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원래 그곳에 있었던, 여전히 남아 있는 가지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안에서 믿음을 유지하던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불신앙의 이스라엘인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처럼 꺾여 나갔고, 믿음을 가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이 가지치기 이후에도 여전히 그 나무의 일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를 믿는 이방인들도 그 나무에 더해졌습니다.
그 나무란 무엇입니까? 그 나무는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거기에는 유대인 가지들 —즉 이스라엘 내의 믿는 남은 자들— 이 있고, 이방인 가지들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감람나무는 이제 다민족적(multi-racial)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조상이 누구였는지, 증조부나 고조부, 선조가 누구였는지를 가지고 심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여러분이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서 있는지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은 하나님에게는 손주가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증손주나 고증손주도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오직 자녀들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거듭났다면, 여러분은 그분의 나라로 태어난 것이며 이스라엘이라는 그 나무에 접붙여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아주 빠르게 앞으로 나아갑시다. 시간이 50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백성(People)의 관점에서 이야기해 봅시다. 제가 아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무리 속에 있던 제자들이 군중들 가운데 존재하던 나라의 대표자들이었다는 뜻일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출애굽기 19장 5-6절에 비추어 볼 때 확실히 들어맞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나라를 가지고 계시다는 최초의 언급은 출애굽기에서 나옵니다. 출애굽 이전에는 하나님에게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아벨은 확실히 그분의 친구 중 한 명이었고, 에녹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이삭과 야곱, 요셉도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400년 동안 이집트로 내려갔고, 그때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분의 친구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 안에서 친구를 찾으셨고, 모세를 사용하여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들은 시내산으로 갔고, 거기서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친구들과 —아직 그분에게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하여— 시내산 기슭에 모인 이들과 함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이 제안을 하고 계시다고 전해야 했습니다. 너희가 그분과 언약을 맺을 수 있으며, 만약 그 언약에 신실하다면 너희는 그분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그분이 그들의 왕이 되실 것임을 의미합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종교적 전문 용어들이 쌓여서 이런 단어들이 그저 우리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고, 그것이 함의하는 바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게 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내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당시는 세상의 모든 나라가 왕을 가지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민족에게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민주주의란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군주제뿐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에는 저마다의 왕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바로 왕국(Kingdom)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왕과 그의 백성들이 바로 왕국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약 너희가 내 언약에 신실하고 내가 하는 말에 순종한다면 —다시 말해, 사람들이 왕에게 반응하는 것과 같이 너희가 내게 반응한다면— 내가 너희의 왕이 되고 너희는 나의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그분을 왕으로 모시는 것에는 엄청난 이점이 있습니다. 주위의 가장 크고 험악한 왕을 가진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주변의 어느 이방 민족과 문제가 생기더라도,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토록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지구상의 어떤 다른 왕도 불가능한 방식으로 자신의 나라가 된 모든 이들을 번영케 하고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언약을 지키면 네 광주리가 축복을 받을 것이며, 네 창고가 축복을 받을 것이며,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상과 네 가축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 언약을 어긴다면 —신명기 28장 15절에서 말씀하셨듯이— 이 모든 방식으로 저주를 받을 것이다."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이 나라의 관계는 조건적입니다. "내 언약을 지키고 내 목소리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내 나라가 될 것이다."
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그다지 잘 해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매우 자비로우셨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불과 며칠 만에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자리에서 바로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싹 쓸어버리려 하셨지만, 모세가 중보했고 하나님은 "좋다, 기회를 한 번 더 주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사 시대 수백 년 동안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주기와 그렇지 않은 주기를 반복했습니다.
사사 시대에 기드온이라는 사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미디안 사람들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했습니다. 기드온이 백성을 구원한 후, 백성들은 기드온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즉, 여기에 왕조를 세우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의 첫 번째 왕조를 시작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기드온은 여기서 단순히 유독 경건한 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왕을 모시고 있는 마당에 사람이 다스리게 하는 것은 신성 모독임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왕으로 둔 다른 민족들과 같지 않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왕이시다. 내가 너희의 왕이 되지 않을 것이고, 내 아들도 손자도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이 너희의 왕이시다. 그런 제안은 다시는 꺼내지도 말라."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사 시대의 끝 무렵인 사무엘상 8장 6-7절에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모든 사사들 중 마지막이었던 사무엘에게 나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모든 나라처럼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이것은 꽤 합리적인 제안처럼 들립니다. 다른 모든 나라에도 왕이 있는데 왜 우리에게는 없단 말인가?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다른 나라들처럼 되기를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특별한 백성, 거룩한 나라이며, 자신들이 직접 왕을 모시는 분리된 백성이 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무엘에게 와서 "우리에게 왕을 주어 모든 나라처럼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사무엘이 그들이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말했을 때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사무엘이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이것은 매우 강력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전에 이미 수많은 차례 하나님께 불순종했었지만, 하나님은 "이제 그들이 나를 버렸다. 나는 그들에게 내 나라가 될 기회를 주었고, 내가 그들의 왕이 되어 다른 어떤 왕도 그 백성에게 해 줄 수 없는 약속을 했고, 그 어떤 왕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것을 성취해 줄 수 있었건만,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버려 자신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왕을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중에 호세아서 13장 11절에서 하나님은 이 사건을 회상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하나님은 그들이 원한 것을 주셨지만, 영혼의 곤고함(leanness of soul)을 함께 안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셨으나 진노 중에 하신 것이며, 그들에게 버림받은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자, 사울을 왕으로 잠시 둔 후에 하나님은 사울 대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며, 하나님이 그 백성을 통치하실 수 있도록 —비 이전처럼 직접 통치가 아니라, 인간 왕이라는 대리 기관을 통하여 조금 더 가까운 방식으로— 순종할 만한 선한 왕을 세우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사울은 불량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사무엘상 15장 26-28절에 기록되기를,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무엘이 돌이켜 가려 할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지니라.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그 이웃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사람이었으며, 적어도 통치 초기에는 그러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통해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하 7장 12-13절에서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익숙하게 들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히 지속될 메시아의 나라에 관한 예언들의 시작입니다. 다윗의 씨 —보시다시피 하나님은 다윗으로부터 왕조를 세우셨고 그것은 다윗의 집(House of David)이라 불렸습니다— 와 관련하여, 다윗의 집에서 난 왕이 영원히 그 왕좌에 앉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다윗의 자손 중 한 명이 그의 왕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세울 수 있는 존재가 있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솔로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왕인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윗 이후에 그의 왕좌에서 통치한 20명의 왕으로 이루어진 전체 왕조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바벨론 포로기(BC 586년)가 찾아왔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유대 백성을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잡아갔고, 그들은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는 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속국이었고, 나중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면서 그 지배를 받았으며, 더 나중에는 폼페이가 그리스 지배 아래 있던 영토들을 정복하면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BC 63년 무렵 그 지역은 로마의 권세 아래 놓였고,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상황은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로 끌려간 왕 여고니야의 시대부터 그리스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윗 계열의 실제 이스라엘 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하여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다윗 계열의 왕이 실제로 영원히 친히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다윗의 계열이 영원히 다스리기로 되어 있었지만, 처음에는 사람이 영원히 살 수는 없으므로 대를 이어 다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다윗의 계열에서 나와 통치하며 영원히 다스릴 왕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포로기 동안 그리고 돌아온 이후의 시대에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오실 이 메시아 아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자신의 나라를 다시 세우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메시아가 어떤 분일지에 대해 같은 의견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랍비들은 그가 다윗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되 단지 위대한 인물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적인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랍비들 사이에서는 —매우 널리 퍼진 견해였는데— 두 명의 메시아가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왕적 메시아인 '다윗의 아들 메시아(Messiah ben David)'와 고난받는 메시아인 '요셉의 아들 메시아(Messiah ben Joseph)'가 있다는 식이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종류의 서로 다른 이론들과 많은 혼란이 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알고 있던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메시아 아래서 자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며 이스라엘이 다시 두각을 나타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우리는 그분이 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에 의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약속이 성취될 참임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예수님은 갈릴리 주변을 다니시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똑같이 선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나라를 전파하셨고, 사람들은 처음에 이 소식에 매우 흥분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진정으로 메시아의 도래라고 생각했습니다. 백성 중 많은 이들이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비전에 협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비전은 많은 경우 군사주의적인 것이었습니다. 수년 동안 로마의 압제 아래 겪어왔던 억압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강력하고 군사주의적인 유형의 지도자를 바랐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지만, 그분은 그런 종류의 왕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빌라도 앞에 섰을 때 그가 왕이었습니까? 빌라도는 "네가 왕이냐"고 물었고,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흥미롭습니다. 다윗이 다스렸던 것과 같은 종류의 나라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그런 나라로 만들어 주기를 바랐던, 즉 강력한 왕 아래서 열방을 정복하고 조공을 받게 하는 영광스러운 지배 국가 말입니다— 를 가진 왕들은 확실히 싸웁니다. 그들은 군대를 가지고 있고, 블레셋을 정복하고, 모압 사람들을 정복하고, 주변 사람들을 정복합니다. 그들은 군사적 정복을 통해 거대한 제국을 건설합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 자신이 아닌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of this world)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내 나라는 이 세상 안에(in this world) 있지 않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야기하게 될 매우 중요한 구별점입니다. 그분은 "내 나라는 이 세상의 영과 이 세상의 본성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랬다면 내 종들이 나의 왕이 사로잡히는 것을 막기 위해 싸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싸우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내 나라는 그런 종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그런 종류의 나라가 아닌 나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분이 제안하고 계신 나라가 도대체 어떤 종류의 나라인지 전혀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에 대해 실망하기 시작했고, 우리도 알다시피 그들은 그분을 등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사야도 이사야 5장에서 포도원에 관한 비유를 가르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비유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마치 포도원처럼 심으셨고, 포도원을 심은 누구나 포도를 거두어 빈티지(소산)를 얻고 싶어 하듯 그 포도원에서 열매를 찾고 계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5장 7절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오셔서 찾으신 열매가 공의와 의였으나, 대신 압제와 불의를 발견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가 이사야 5장에서 가르쳤던 그 비유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표현들을 가져와서, 마태복음 21장에서 유사한 비유를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굽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당시에 만약 누구나 자기 소유의 땅이 없다면, 자기가 관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땅을 가진 지주에게서 땅을 임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임대하여 농사를 짓는 농부는 지주에게 내는 소작료로 포도 소산의 일부나 작물의 일부를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산을 거둘 때가 이르매 지주가 농부들에게 종들을 보내어 자신의 몫, 즉 포도를 달라고 요구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농부들은 그 종들을 때리고 포도원에서 내쫓았고, 지주가 더 많은 종들을 보냈지만 그들도 역시 때리고 일부는 죽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주가 말했습니다. "내 아들을 보내리라. 그들이 내 아들은 존경하겠지."
하지만 농부들은 포도원의 상속자인 아들을 보자마자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종들을 죽였던 것처럼 아들을 죽였습니다.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것은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하신 후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청중들은 대답했습니다.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세를 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다"고 하셨고, 이어 마태복음 21장 43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것은 구약성경의 모든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 이스라엘과 연관되어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내 언약을 지키고 내 목소리에 순종하면 내 나라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기회를 주 또 주고 또 주셨습니다. 그분은 약 1,400년 동안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보낸 모든 선지자들을 죽였고, 결국 마지막에는 그분의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그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낸 것이다. 그 이후에 보낼 더 나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에게서 빼앗기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 역사 전체에 걸친 엄청난 전환점입니다. "열매 맺는 다른 민족에게 주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나라를 빼앗으신 것이 아니라 단지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빼앗아 새로운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그분은 그들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다른 민족(another Nation)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민족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정치적인 민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인 왕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 베드로는 —유감스럽게도 저에게 이 구절에 대한 슬라이드가 없습니다만— 베드로전서 2장 9-10절에서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전에는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은 누구입니까? 이방인들은 전에는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했던 자들은 누구입니까? 이방인들은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얻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긍휼을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전서 2장 9-10절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우리가 거룩한 나라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나라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쓰인 서신서들을 읽거나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이 직후에 마태복음 22장 초두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또 다른 비유가 있습니다. 그 비유에서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풀고, 먼저 친구들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모두 핑계를 대며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장의 7절에 보면, 그 왕은 친구들이 오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왕이 그 종들에게 말합니다.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도로 가로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해 오라." 여러분은 이 비유가 정확히 앞선 비유와 평행을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미지는 포도원이 아니라 혼인 잔치이지만, 역사는 동일합니다. 왕 —포도원 주인— 이 있고, 그는 종들을 보내며, 종들은 그 백성들에게 학대를 받습니다. 그리고 왕은 진노하여 자신들의 종들을 거절한 자들을 벌하고 그들의 도시를 불사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루살렘 성은 AD 70년에 로마인들에 의해 불살라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아들의 혼인 잔치 초대를 거절했기 때문에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합당하지 않았으므로, 종들에게 "나가서 사방에서 사람들을 데려오라, 큰길가에 나가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라"고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바깥인 이방 땅에서 사람들을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포도원 비유와 혼인 잔치 비유 두 가지 모두 동일한 요점을 전달합니다. 유대 민족은 종족으로서 처음에는 하나님의 포도원이 되도록, 그분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도록, 그분의 나라에 거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 민족 세대는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 대다수의 세대들이 마음을 열지 않았고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이것이 한계다. 나는 이제 너희에게서 나라를 빼앗는다. 너희가 가장 먼저 초대받았지만 합당하지 않았고 올바르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메시지는 큰길과 곁길로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데려오라는 것으로 향할 것이며, 나는 나라의 열매를 맺을 새로운 민족을 창조할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순종을 조건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될 특권을 제안받는 것으로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아니다, 이제 너희에게서 빼앗겼고 다른 이들에게로 넘어간다"고 선언하시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너희의 것이 아니며, 이제 다른 무리의 사람들, 다른 민족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이 세상의 위대한 종교들 중 하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물론 '참된'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지만 말입니다. 세상에는 위대한 종교들이 있고 모든 종교에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의 종교가 그저 '올바른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것은 올바르고 참되지만, 그것은 단순한 '종교'라기보다는 나라(Kingdom)에 가깝습니다. 기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나라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차이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모레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와 온전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왕의 통치 아래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이 나의 주님이 되시는 문제는 나중에 협상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면, 여러분에게는 지금 당장 왕이 계십니다. 왕과 주님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이해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의 복음(Gospel of the Kingdom)"이 무엇인지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그것이 전파되고 있는가? 복음이란 무엇인가? 천국의 기쁜 소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하고 이해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루어야 할 내용입니다. 자, 이것으로 여러분을 마치고자 합니다.
요청하신 영상 "The Kingdom Of God Is NOT What Most Christians Think"(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흔한 오해)의 핵심 내용 요약 및 전체 번역입니다. 시간대 표시는 생략하였습니다.
[동영상 한글 요약]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라는 개념을 단순히 '사후에 가는 천국', '마음속의 영적인 평안', 또는 '먼 미래의 일' 등으로 축소해서 이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사후 세계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 (통치와 권위): 하나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의미합니다. 창조 세계의 정당한 왕이신 하나님께서 죄와 반역으로 망가진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되찾으시고 권세를 회복하시는 과정입니다.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 (Already, Not Yet): 하나님 나라는 먼 미래에만 속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이 땅에 시작되었으며(초림), 그분의 재림을 통해 완전히 완성될(완성) 긴장 속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구원 변화: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이해할 때 구원, 제자도, 교회, 그리고 소망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구원은 단순히 지옥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며, 제자도는 그분의 권위 아래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본문 전체 한글 번역]
만약 하나님 나라가 언젠가 천국에 가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그분께서 다시 찾아오시는 것에 관한 것이라면 어떨까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기독교 언어에서 가장 익숙한 표현 중 하나이지만, 많은 신자들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모호하게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설교, 찬양, 성경 공부, 복음서, 그리고 오래된 교회의 언어 속에서 이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그 대답은 순식간에 얕아집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천국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교회를 의미한다고 말하며, 어떤 이들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계신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주로 미래의 일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구원을 일반적으로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대답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을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이 주제가 지닌 성경적 무게를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너무 작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 중 하나이자 가장 오해받는 주제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논의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잘못 이해하면, 성경에서 가장 거대한 가르침들 중 일부를 오독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왜곡하고, 복음을 축소하며, 성경의 거대한 스토리라인을 평평하게 만들고, 우주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왕의 것을 감정적인 것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것을 모호하고 내면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물려받은 모습입니다. 그들이 부주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 단편적인 조각들로 자주 언급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축소된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물려받았습니다. 일단 그 축소된 관점이 자리 잡고 나면, 다른 많은 왜곡들이 자연스럽게 뒤따릅니다. 가장 흔한 오해는 아마도 가장 단순한 것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주로 죽음 이후의 천국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생각은 전혀 근거 없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실제로 미래의 소망에 대해 말하고, 신자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최종적인 임재와 악의 패배, 육체의 부활, 그리고 새롭게 된 세상을 갈망하도록 촉구합니다. 이러한 내용 중 그 어떤 것도 부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미래의 소망이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오직 '미래의 목적지'로만 환원해 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일단 그렇게 해버리면 예수님의 언어는 낯설고 어긋난 것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마치 역사 저 너머 먼 곳에 위치한 멀리 떨어진 장소인 것처럼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고, 침투해 들어오며, 대항하고, 반응을 요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몸소 실현해 보이시며, 그 징조들을 보여주시고, 비유로 말씀하시며, 그것을 구하라고 명령하시고,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후의 지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현재 속에서 권세와 의미를 가지고 도래하는 신성한 통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 이후의 천국'이라는 정의가 너무 협소한 이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나중에 찾아가는 장소로 전락시키지만, 성경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먼저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 '하나님의 권위의 가시화', '하나님께 속한 것을 다시 차지하시는 것', 그리고 '인류가 충성의 여부를 질문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주요 오해는 첫 번째 오해와 밀접하게 이어집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를 오직 미래의 것으로만 취급합니다. 이것은 주제가 왜곡되는 가장 흔한 방식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중요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거의 완전히 이야기의 마지막 장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악이 마침내 심판을 받을 때, 죽은 자들이 부활할 때, 모든 것이 새롭게 될 때 비로소 중요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미래적 차원은 절대적으로 실존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충만함은 아직 앞에 놓여 있으며, 성경은 이에 대해 조금의 의구심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미래의 것만'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충만함에 있어서는 미래의 것이지만, 도래함에 있어서는 현재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필수적입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오직 미래의 것에 불과하다면, 예수님의 사역 중 엄청난 부분은 설명하기 몹시 어려워집니다. 그분은 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며, 왜 결정적인 무언가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시며, 왜 그분의 기적들은 신성한 침투의 징조처럼 기능하며, 왜 그분의 비유들은 역사 속에서 이미 움직이고 있는 실재에 대한 묘사처럼 들리며, 왜 그분의 메시지는 그토록 즉각적인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하나님 나라가 단순히 연기된 것이 아니라 시작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완전히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진정으로 현존합니다. 왕이 오셨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그분 안에서 선포되고 실현되고 있습니다. 최종적인 충만함은 아직 앞에 있지만, 그 도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성경적인 긴장감을 잃어버립니다. 그들은 "아직(not yet)"은 알지만 "이미(already)"는 잊어버리거나, 나중에 임할 천국에 대해서는 말하면서도 지금 여기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이로 인해 그들의 기독교 신앙은 복음서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빈약해집니다.
그 다음에는 영적으로 들리지만 여전히 성경적 비전의 규모를 놓치는 또 다른 흔한 축소주의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내면의 느낌으로 환원합니다. 이는 종종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통치하실 때가 곧 하나님 나라"라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이 역시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인간의 마음을 건드립니다. 하나님 나라는 욕망, 충성, 회개, 믿음, 순종, 그리고 내면의 변화에 도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어떠한 성경적 관점도 마음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그러한 내면적 용어로만 정의한다면, 우리는 거대한 것을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축소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 나라는 사적이고 내면적인 경험보다 훨씬 큽니다. 그것은 내면의 변화보다 더 큽니다. 그것은 '누가 통치하는가'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이 어떤 세상을 회복하고 계신가에 관한 것이며, 악한 세력의 패배에 관한 것이며, 고대의 약속들의 성취에 관한 것이며, 신성한 통치 아래 모인 백성의 형성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공의, 회복, 충성, 소망에 관한 것이며, 하늘과 땅, 약속과 성취, 왕과 왕국, 권위와 순종, 죄와 갱신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 마음속의 하나님"이라는 공식 그 자체만으로는 너무 협소한 이유입니다. 그것은 왕의 통치를 감정으로 전락시키고, 언약적인 것을 느낌으로 축소하며, 역사적이고 우주적인 것을 사적인 영성으로 쪼그라뜨립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내면의 자아를 위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 세상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이로 인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를 그 진정한 힘을 느끼지 못한 채 교회의 용어로만 받아들입니다. 어떤 표현이 너무 익숙해지면 그 무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다른 종교적 문구를 쓰듯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하고, 결국 그것은 엄숙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그다지 구체적이지 않은 표현, 설교와 성경 공부에는 적합하지만 왕의 긴박함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장식적인 무언가로 변해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나라(Kingdom)의 언어는 장식적인 종교 용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왕의 언어, 정치적 언어, 언약적 언어, 세상을 규정하는 언어입니다. 그것은 보좌, 통치, 권위, 다스림, 충성, 심판, 구원, 원수, 회복, 그리고 평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는가뿐만 아니라 당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묻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소망하는가뿐만 아니라 당신이 누구의 통치 아래 살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당신이 종교적인가 아닌가를 넘어 당신의 삶이 참된 왕의 권위 아래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로 인해 전체 주제는 더 무거워지며, 실제로 그래야 마땅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놓치는 가장 깊은 진실 중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질문이 주로 "내가 나중에 어디로 가는가?"가 아니라 "지금 누가 통치하는가?"라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 나라 언어의 중심에는 왕권(kingship)이 있고, 왕권의 중심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속한 것들에 대해 정당한 권위를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성경에서 그토록 거대한 주제인 이유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영적인 평화를 찾으려는 종교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되신 하나님, 참된 왕, 그 피조물들의 반역, 세상의 부패, 그분이 맺으시는 약속들, 그리고 자신의 통치를 회복하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그분이 움직이시는 방식을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어온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틀입니다.
일단 그것을 보기 시작하면 하나님 나라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죽음의 문턱에 놓인 위안을 주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통치, 갈등, 충성, 그리고 회복에 관한 살아 있는 성경적 실재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가장 깊은 오류로 이끕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성경의 전체 이야기로부터 분리해 버립니다.
이것이 아마도 혼란이 계속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접하지만, 그것을 그 이전의 내용과 깊이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온 성경이 향해 나아가던 어떤 것의 도래라기보다 신약성경의 슬로건처럼 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성경의 전체 이야기 속에서 읽힐 때 비로소 명확해집니다. 이 문장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뜬금없이 소개한 무작위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창조, 반역, 언약, 약속, 왕권, 유배, 예언, 그리고 소망으로부터 자라난 것입니다. 그것은 전체 이야기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창조 세계 전반의 참된 왕이셨습니다. 인간의 반역은 다른 무엇보다 정당한 통치에 대한 반역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의로운 왕권에 대한 갈망을 심화시킵니다. 지상 왕들의 붕괴는 새롭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소망을 고조시킵니다. 예언자들은 지평을 넓힙니다. 그들은 공의, 평화, 회복, 귀환, 거룩함,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공히 드러날 날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도착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야기의 전환점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모든 배경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분리해 버린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오해하게 됩니다.
그분의 언어는 성취, 도래, 그리고 직면처럼 들려야 할 때 감상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으로 변해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듣고 종교적 격려를 떠올리지만, 성경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통치가 역사 속으로 결정적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이것은 훨씬 더 폭발적인 주장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부수적인 주제가 아니라 성경 전체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말해주는 핵심 통로 중 하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왜곡들을 나란히 놓고 보면 문제는 훨씬 더 명확해집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의 너무 작은 버전을 물려받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주로 사후의 천국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거나, 거의 전적으로 미래로 밀어 넣거나, 내면의 영성으로 축소하거나, 왕의 권세가 빠진 교회 용어로만 듣거나, 그것이 근간이 되는 성경 전체의 이야기로부터 분리해 버립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날 때, 예수님의 메시지는 조용히 축소됩니다. 그분의 선포는 마땅히 가져야 할 긴박함을 잃고, 그분의 기적들은 그 본래의 의미보다 덜 나라(Kingdom)다운 모습으로 보이며, 제자에 대한 부름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덜 정치적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복음은 작아지고 성경의 극적인 긴장감은 약화됩니다.
이러한 교정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다면,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쉽거나 더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더 큰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더 크고, 구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더 크며, 소망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더 크고, 하나님이 세상에서 행하고 계신 일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더 큰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를 영상의 다음 부분으로 이끌어 주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단순한 나중의 천국이 아니라면, 미래만의 것이 아니라면, 내면의 느낌이나 교회의 어휘만이 아니라면, 성경 속에서 그것은 실제로 무엇일까요? 일단 성경이 그 자체의 용어로 그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하면, 주제 전체가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호하게 들리는 것을 멈추고 성경을 조직하는 위대한 실재 중 하나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부수적인 교리나 장식적인 표현이 아니라, 성경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고 계신 일을 묘사하는 주요 방식 중 하나임이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The reign of God)입니다. 우리가 시작해야 할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장소에서부터 시작해서도 안 되고, 미래의 목적지에서부터 시작해서도 안 되며, 사적인 내면의 경험에서 먼저 시작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다스림, 통치, 왕권, 권위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현대의 청중에게 '나라(Kingdom)'라는 단어가 종종 '영토'를 먼저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땅의 경계와 영역, 지리를 상상합니다. 물론 그것이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실제로 영역과 백성,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새롭게 된 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개념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됩니다. 왕국이란 왕이 통치하는 곳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영역이 중요한 이유는 통치가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별은 필수적입니다. 만약 우리가 장소에서부터만 시작한다면 우리는 복음서들을 즉시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통치에서부터 시작한다면 예수님의 메시지는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그분은 신자들이 나중에 들어갈 장소만을 선포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권위와 요구, 약속과 능력을 가지고 도래하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다스림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해지면, 다음으로 중요한 사실이 똑같이 부각됩니다. 이 하나님 도성은 신약성경의 아이디어로 시작되지 않고, 더 거대한 성경의 스토리라인 속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많은 오해들이 한꺼번에 바로잡힙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 전체의 드라마 속에서 읽힐 때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갖게 되며, 그 드라마는 '창조'로 시작됩니다. 성경의 첫 페이지들은 이미 우리에게 가장 기초적이고 결정적인 무언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정당한 왕이십니다. 그분은 창조하시고, 질서를 부여하시고, 이름을 지어주시고, 축복하시며, 다스리십니다. 세상은 스스로 존재하거나, 스스로 소유되거나, 스스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께 속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가 인간의 종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서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기 전에도 왕이셨고, 이스라엘이 존재하기 전에도 왕이셨으며, 예언자나 언약, 유배, 혹은 복음이 있기 전에도 왕이셨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 나라가 비상용 예비 계획이 아니며, 창조자이자 주님이신 그분의 본질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고 나서 반역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옵니다. 일단 반역이 들어오자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는 훨씬 더 극적으로 변합니다. 인간의 죄는 추상적인 도덕적 실패일 뿐만 아니라 정당한 통치에 대한 저항입니다. 그것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요, 백성이 왕을 거부하는 것이며, 인류가 자신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규정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이야기는 단순히 일반적인 깨어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권위에 대한 반란에 관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질문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누가 통치하는가? 누가 현실을 규정하는가? 누구의 말이 최종적인가? 누구의 질서가 버텨낼 것인가? 이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질문들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전체 성경 이야기는 바로 그 긴장감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세상은 여전히 그분의 것이지만, 이제 반역, 무질서, 우상숭배, 폭력, 그리고 거짓 통치로 얼룩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기를 멈춘 적이 없으신 고로 하나님 나라가 부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의 통치는 인간의 죄와 세상을 왜곡하는 어둠의 세력들에 의해 저항받고, 부정되며, 가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이야기가 파멸뿐만 아니라 회복의 이야기도 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세상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며, 반역을 영원히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이야기는 '약속'을 통해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여기서 언약이 그림 속으로 들어옵니다.
하나님은 한 백성을 부르시고, 약속을 하시며, 언약의 자비로 자신을 묶으시고, 이스라엘을 형성하시며, 율법을 주시고, 백성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라는 질문이 역사적 형상을 띠게 되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분의 왕권 아래 거룩함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분의 율법 아래 공의란 어떤 모습일까요?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거부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분의 독특한 통치 아래 살기보다 주변 민족들처럼 되고 싶어 할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전개 과정들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는 왕권 자체를 통해 한층 더 날카로워집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이 그토록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단순히 배경 지식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대를 고조시킵니다.
다윗 왕조의 부흥, 의로운 통치에 대한 소망, 지상 왕들의 실패, 왕국의 분열, 그리고 유배로의 몰락 —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군주제가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에 대한 갈망을 심화시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성경이 모호한 영적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의로운 왕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날 것이라는 소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실패는 부수적인 메모가 아니라 빌드업의 일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타락한 통치자도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소망을 짊어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보좌의 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남고, 유배의 문제도, 공의의 문제도, 백성의 문제도 미해결 상태로 남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적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놓치는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하나입니다. 예언자들은 단순히 단절된 미래의 예언들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소망을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의, 회복, 평화, 거룩함, 귀환, 새로운 언약, 새로워진 백성, 패배한 원수들, 의로운 통치자,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공히 입증될 그날에 대해 말합니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좁지 않고 왕실적이고, 언약적이며, 우주적이고, 회복적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분은 완전히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구축되어 온 성경적 기대를 초점으로 모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선포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사실상 "나에게 몇 가지 유용한 영적 아이디어가 있다"고 말씀하시며 오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며 오십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역의 핵심 선포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부수적인 메모도 아니요 사소한 주제도 아니며, 그분이 행하시는 일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서 속의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어떤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체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왕처럼 말씀하시고, 왕의 권위로 행동하십니다. 그분은 죄를 용서하시고, 귀신들을 명하시며, 병자를 고치시고, 혼돈을 잠잠하게 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밝히는 비유로 말씀하시고, 거짓 통치에 맞서시며, 하나님의 통치가 원수가 장악한 영토로 침투해 들어가고 있다는 징조들을 제정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분명하게 보일 때 복음서들이 그토록 전율을 일으키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사적인 영감을 제공하는 분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결정적으로 도래하고 있음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윤리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윤리를 가르치시며 그것도 아주 깊이 있게 가르치시지만, 단순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법은 이렇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통치가 내 안에 도래해 있다. 회개하라, 믿으라, 따르라. 기존의 질서는 도전받고 있으며 새로운 실재가 도래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회개함이 하나님 나라 설교의 중심에 있는 이유입니다. 만약 참된 왕이 도래하고 있다면 중립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반응을 요구합니다. 충성을 요구합니다. 재조정을 요구합니다. 항복을 요구합니다. 믿음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핵심적인 특징이 명확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악에 대항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느낌이나 나중의 천국으로 환원할 때 가장 흔하게 놓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죄와 억압으로 왜곡된 어둠, 육체, 마음, 시스템, 그리고 영혼들과 충돌합니다.
귀신들이 쫓겨나고, 질병이 직면하며, 무질서가 도전을 받고, 죄책감이 다뤄지며, 배제가 뒤집히고, 거짓 종교가 폭로되며, 악의 요새들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동으로 옮겨지는 하나님 나라의 언어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곳에서 어둠은 도전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충만함이 이미 온 것은 아닙니다. 악이 마침내 제거된 것도 아니고, 죽음이 최종적으로 파괴된 것도 아니며, 세상이 완전히 치유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가올 시대의 권능들이 역사 속으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분의 기적들은 메시지와 분리된 무작위적인 동정심의 발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징조들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깨어진 세상에 침투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서에서 기적들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신호들이며, "왕이 여기 계시다, 기존 질서가 도전받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가 묘사되는 것을 넘어 가시화되고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고 나서 또 다른 필수적인 조각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한 백성을 모읍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사적인 용어로만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내면의 영적 경험을 하는 고립된 개인들만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한 백성을 형성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분의 권위 아래 공동체를 창조하시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법을 가르치시고,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충성, 새로운 윤리, 새로운 소속을 부여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가 개인의 변화보다 적지 않지만, 그 이상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공동체적이며, 언약적이며, 가장 깊은 의미에서 사회적입니다. 왕 아래 한 백성이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도가 하나님 나라의 형태를 띠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오는 것이요, 그분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 주변으로 삶을 재조정하는 것이요, 비록 충만함이 오기를 여전히 기다리면서도 지금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 나라가 단순한 방식으로 교회로 환원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모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시적인 교회보다 더 큽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통치는 우주적 범위에 걸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왕에 의해 형성되고 그분의 권위 아래 살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혼란을 막는 데 도움을 줍니다. 교회는 단순한 인간의 종교적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형상을 띤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보이지 않는 교회적 실재에 그치지 않고, 어떤 인간적 제도도 담아낼 수 없을 만큼 멀리 뻗어 나가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은 이 전체 주제에서 가장 중요한 긴장감 중 하나로 이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여기에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already here but not yet complete). 이 긴장은 한꺼번에 많은 혼란을 해결해 줍니다.
만약 누군가 하나님 나라는 오직 미래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를 놓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하나님 나라가 무조건적인 의미에서 지금 완전히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악, 고통, 죽음, 그리고 기다림이라는 눈앞의 실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진실을 함께 붙잡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으나 완성되지 않았고, 진정으로 도래했으나 최종적인 충만함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깝고, 여러분 가운데 있으며, 조용히 일하는 누룩이나 씨앗처럼 지금은 숨겨져 있지만 충만함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이미 현존하지만 아직 최종 완성이 아닌 능력과 같습니다.
이 '이미-아직'의 긴장은 신약성경을 올바르게 읽는 데 필수적입니다. 그것은 왜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하나님 나라에 진정으로 속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것은 왜 악이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으면서도 현세에서는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것은 왜 최종적인 회복이 완성되었다고 위장하지 않으면서도 치유와 공의, 갱신이 지금 실제적인 징조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것은 왜 소망이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적이고, 적극적이면서도 기다리는 것일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이러한 긴장이 없다면 전체 주제는 왜곡됩니다. 모든 것이 연기되거나, 혹은 모든 것이 현재 속으로 납작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도피주의자가 되거나 비현실적이 되거나, 하나님 나라가 너무 멀어지거나 너무 완성된 것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더 균형 잡히고 더 강력한 비전을 제공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진실로 여기에 있고, 충만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왕은 오셨고 최종 승리는 아직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지금 활발히 움직이고 있으며, 그 통치의 완성은 마지막에 공히 도래할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본질적인 진실, 즉 하나님 나라와 복음이 함께 속해 있다는 사실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진실이기는 하지만 규모 면에서 너무 협소한 복음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주로 개인이 죽을 때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죄를 용서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용서는 실재하며, 영생은 실재하고, 하나님과의 화해는 실재합니다. 그러나 만약 복음이 하나님 나라와 분리된다면, 그것은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것보다 더 좁아지게 됩니다.
기쁜 소식은 개인의 구원보다 적지 않지만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하여 용서하고, 회복하고, 되찾고, 악에 대항하며, 참된 왕의 구원하는 다스림 아래 사람들을 이끌어 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나 칭의, 자비를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놓여 있는 틀을 넓혀줍니다.
죄는 왕권과 분리된 채 고립되어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과정의 일부로서 용서받습니다. 구원은 심판으로부터의 도피일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의 이전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충성, 새로운 백성, 새로운 미래, 그리고 그리스도 아래의 새로운 질서 안으로의 구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축소하는 것이 곧 복음을 축소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오직 나중의 천국에 불과하다면 복음은 주로 대피 작전이 됩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오직 내면의 느낌에 불과하다면 복음은 사적 영성이 됩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오직 미래의 것에 불과하다면 예수님의 통치가 갖는 현재적 의미는 희미해집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해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라면, 복음은 성경이 제시하는 만큼이나 거대해집니다. 죄인들을 위한 좋은 소식, 어둠에 맞서는 좋은 소식, 깨어진 세상을 위한 좋은 소식, 구원하고 다스리기 위해 오시는 왕의 좋은 소식입니다.
일단 이것이 분명해지면 전체 성경적 비전은 더 깊은 곳에서 아귀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창조가 더 중요해지고, 이스라엘이 더 중요해지며, 다윗이 더 중요해지고, 예언자들이 더 중요해지며, 복음서가 더 중요해지고, 기적들이 더 중요해지며, 제자도가 더 중요해지고, 교회가 더 중요해지고, 소망이 더 중요해집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모든 것들을 관통하고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누군가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란 실제로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대략 이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고, 악에 맞서며, 자신의 통치 아래 백성을 모으고, 자신에게 속한 것을 회복하기 위해 역사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부분이 빌드업해 온 대답입니다. 모호한 장소도 아니고, 단순한 내면의 느낌도 아니며, 오직 미래의 소망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역사 속으로 도래하며, 어둠에 맞서 능력을 발휘하고, 백성을 형성하며, 최종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일단 그것을 보게 되면, 다음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왜 이 더 거대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까요? 하나님 나라가 정말로 이렇게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 구원, 제자도, 교회, 그리고 미래 자체를 읽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해 도래하여 약속을 성취하고, 악에 맞서며, 백성을 모으고, 그에게 속한 것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통치라면, 왜 이 더 거대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모든 것을 바꿀까요? 왜 하나님 나라가 단순한 사후의 천국이 아니라, 단순한 미래의 소망이 아니라, 단순한 내면의 영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 속으로 도래하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통치라는 사실이 중요할까요?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보게 될 때, 여러분은 거의 모든 것을 다르게 읽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다르게 읽고, 구원을 다르게 읽으며, 제자도를 다르게 읽고, 교회를 다르게 읽으며, 소망을 다르게 읽고, 심지어 성경 전체를 다르게 읽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주제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인의 삶에 약간의 색채를 더해주는 부수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삶에 형태를 부여하는 위대한 실재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먼저 바꾸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읽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전체 논의에서 가장 깊은 보상 중 하나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참되게 믿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너무 좁게 평가합니다. 그들은 그분을 주로 개인 영성의 교사, 영혼의 위로자, 도덕적 지혜의 수여자인 분, 혹은 사람들이 천국에 가도록 돕는 분으로 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중 어떤 것도 거짓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중심이라면 예수님은 훨씬 더 거대한 틀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적 종교의 교사만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하는 바로 그 왕이십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바꿉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메시지를 듣는 방식을 바꿉니다. 그분의 설교는 더 이상 단순히 "친절해라, 사랑해라, 진실해라, 영적으로 되어라"가 아니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가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기적들을 읽는 방식을 바꿉니다. 그것들은 그분이 능력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야기 곳곳에 흩뿌려진 무작위적인 초자연적 경이로움이 아니라, 참된 왕이 원수가 장악한 땅을 되찾기 시작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징조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비유들을 읽는 방식을 바꿉니다. 그것들은 단순한 도덕적 예화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신비, 성장, 가치, 그리고 놀라운 본질에 대한 폭로들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그분의 권위를 읽는 방식을 바꿉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권위로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권위로 귀신들을 명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권위로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권위로 제자들을 모으시며, 하나님 나라의 권위로 충성, 위대함, 권력, 그리고 순종을 재정의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시야에 들어올 때 복음서들이 훨씬 더 날카로워지는 이유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다면 예수님은 도덕적 목소리로 축소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있을 때 그분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체현하시는 왕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이것이 훨씬 더 거대한 기독교론(Christology)이며, 텍스트 자체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 나라가 바꾸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깊은 교정을 필요로 하는 지점 중 하나입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축소되면 구원 역시 축소됩니다. 구원은 대략 이런 식이 됩니다. "나중에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내 죄가 용서받았다."
물론 그것이 허락하는 한 영광스럽게도 진실입니다. 죄는 실제로 용서받고, 심판은 실제로 피해지며, 영생은 실제로 약속됩니다. 그 어떤 구원의 성경적 설명도 이 중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구원의 전부라면 그 틀은 너무 협소합니다. 성경에서 구원은 단순히 형벌로부터의 구출일 뿐만 아니라 통치 안으로의 구출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복음은 단순히 개인들을 위험으로부터 구출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왕의 구원하는 다스림 안으로 그들을 이끌어 들입니다. 충성을 이전하고, 정체성을 재배치하며, 사람들을 한 도메인에서 다른 도메인으로 옮겨놓습니다. 단순히 미래의 목적지를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삶을 재조정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구원이 결코 단순히 사적이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이지만, 깊이 개인적이지만, 결코 사적인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통치 아래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요, 죄와 어둠, 반역의 지배로부터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구출되는 것이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고 계신 새로운 질서 안으로 모아들여짐으로써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비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왕권이 깃든 자비이며, 충성이 동반된 은혜이며, 통치의 이전이 동반된 사면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축소하는 것이 곧 복음을 축소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구원이 오직 내세에 관한 것뿐이라면 제자도는 선택적인 장식이 되어 버립니다. 만약 구원이 오직 용서에 관한 것뿐이라면 그리스도의 주권은 상상 속에서 부차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구원이 하나님 나라와 분리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종의 영적 소비주의로 쉽게 전락합니다. 혜택을 받고, 종교적으로 머물고, 천국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비전은 그보다 훨씬 큽니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의 진입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실재 안으로의 구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를 읽는 방식을 바꾸는 이유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왕이시라면 제자도는 단순히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에 동의하며, 그분으로부터 일시적인 영감을 얻는 것을 의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통치 아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 제자도의 의미입니다.
이 주제가 아주 실용적이고 아주 빠르게 다가오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과는 편안함을 느끼지만, 다스리시는 예수님과는 덜 편안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구원하시는 분이 바로 다스리시는 분이며, 용서하시는 분이 바로 명하시는 분이요,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 바로 온 사람에 대해 권위를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가 추상적으로 올바른 신념을 갖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충성, 순종, 충실함, 재조정된 우선순위, 그리고 왕의 권위 아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기독교인의 삶에 도덕적 진지함을 부여하면서도 기독교를 율법주의로 전락시키지 않는 이유입니다.
순종은 하나님 나라에서 자리를 얻기 위해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은혜로 여러분을 불러들인 왕의 통치 아래 살 때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무작위적인 종교적 노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형상을 띤 삶입니다. 회개는 일회성 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는 충성심들을 지속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맹목적인 정신적 동의가 아니라 왕을 향한 신뢰의 충성입니다.
이것이 제자도에 훨씬 더 많은 무게를 실어줍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삶이 단순히 예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분으로부터 통치를 받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교회를 이해하는 방식도 바꿉니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란에 빠질 수 있는 또 다른 영역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제가 거대해짐에 따라, 어떤 이들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여 융합해 버리고, 다른 이들은 이 둘을 너무 날카롭게 분리해서 거의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의 그림은 그 어떤 극단보다 더 신중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무후무한 총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가시적인 교회보다 더 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창조물, 모든 권위, 모든 역사, 그리고 그리스도 아래 모든 것의 최종적인 갱신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 실재를 다 소진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절대적으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왕에 의해 모여 그분의 주권 아래 살며 현시대에 그분의 통치를 증언하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교회 단순히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종교적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 즉 그리스도의 통치에 의해 삶이 빚어진 백성, 다른 충성을 보여주는 백성, 다른 주님 아래 사는 백성, 그리고 그들의 윤리, 예배, 관계, 사명이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도록 의도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물려받은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비전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다면 교회는 종교적 활동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쪼그라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시야에 들어올 때 교회는 시작과 완성 사이에 살며 참된 왕이 오셨고 다시 오실 것이라는 실재를 증언하는, 신성한 통치 아래 놓인 공동체가 됩니다.
이것은 교회를 겸손하게 만드는 동시에 더 무겁게 만듭니다. 겸손하게 만드는 이유는 교회가 그 자체로 완성된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무겁게 만드는 이유는 그것이 캐주얼한 클럽이나 단순한 주간 이벤트가 아니라 왕의 모인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소망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꿉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보았을 때 얻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결과 중 하나일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죽음 이후의 천국으로 환원된다면, 기독교적 소망 역시 환원됩니다. 소망은 주로 도피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세상을 떠나고, 현재를 견디며, 나중에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안에는 진정한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신자들은 죽음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고통의 최종적 종식을 갈망하며, 그리스도와 함께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소망은 도피보다 더 큽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며,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단순히 떠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최종적이고 공공연한 승리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악이 심판받고, 죽음이 전복되며, 창조 세계가 새로워지고, 공의가 확립되며, 평화가 온전해지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가시적이고 반박할 수 없는 주권 아래 이끌려 들어오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작은 미래가 아니라 우주적인 소망입니다.
신자들이 단순히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통치 아래 모든 것을 공히 올바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창조(new creation)라는 언어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혼들의 생존에만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상의 회복에 관한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에 관한 것이며, 왕이 자신의 세상을 죄에 영원히 내어주지 않으시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공의, 거룩함, 아름다움, 평화, 그리고 생명의 최종적인 공공연한 승리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소망은 모호한 천국 언어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그것은 도덕적 힘을 가지고 있고, 우주적 폭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 진지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미래가 무작위적이지 않고, 순환적이지 않으며, 어둠에 항복하지 않고, 반역의 세력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규정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미래는 왕의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미 도래한 그 하나님 나라는 언젠가 공공연히 완성될 것입니다. 지금은 도전받고 있는 것이 그때에는 해결될 것이고, 지금은 부분적인 것이 그때에는 온전해질 것이며, 지금은 탄식의 대상인 것이 그때에는 회복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형태를 띤 기독교적 소망이며, 그것은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를 바꿉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이미 여기에 있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특정한 긴장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이미 완전히 치유되었다고 위장하지 않고, 고통이 사라졌다고 위장하지 않으며, 악이 현재의 힘을 잃었다고 위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둠이 최종적인 발언권을 가졌다는 듯이 살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시작되었고 반드시 완성될 통치 아래 살아갑니다. 이것은 용기를 주고, 인내를 주며, 절망 없는 현실주의를 줍니다.
이것은 왜 기도가 더 의미 있어지고, 선교가 더 의미 있어지며, 거룩함이 더 의미 있어지고, 인내가 더 의미 있어지며, 예배가 더 의미 있어지고, 갈망이 더 의미 있어지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또 다른 중요한 함의가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가 선교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꿉니다. 만약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을 통해 도래하고 있다면, 교회의 선교는 단순히 개인들이 죽음을 준비하도록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왕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며,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체현하고, 현재 속에서 하나님의 미래를 증언하며,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에 더 깊은 깊이를 부여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당신의 내세를 확보하고 싶으십니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오셨다, 회개하라, 믿으라,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오라, 자비를 받으라, 기존의 지배 영역을 떠나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하라"는 선포가 됩니다.
이것은 구원을 덜 개인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성경적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또한 기독교 선교가 단순한 치료적 활동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줍니다. 교회는 단순한 내면의 평화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합니다. 그 통치는 치유하고, 용서하며, 해방시키고, 회복하며, 부릅니다. 그것은 상한 자를 위로하고 교만한 자를 대적합니다. 회개한 자를 환영하고 경쟁하는 충성심들을 대체합니다. 은혜를 선포하고 온 사람에 대해 권리를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그토록 파괴적인 이유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위로의 언어가 아니라 통치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놓칩니다. 그들은 왕의 권위 없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원하고, 항복 없이 구원을 원하고, 거룩함 없는 소망을 원하며, 충성 없는 은혜를 원하고, 제자도 없는 용서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러한 것들이 그토록 쉽게 분리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왕은 은혜로 구원하시지만, 동시에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분의 주권 아래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모든 것을 바꾸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이 모든 가닥들을 하나의 일관된 성경적 비전으로 엮어냅니다.
예수님은 왕이시고, 구원은 그분의 통치 안으로의 구출이며, 제자도는 그분의 권위 아래 삶을 사는 것이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수이며, 소망은 하나님의 통치의 최종적인 공공연한 승리이고, 선교는 왕의 선포와 회개 및 믿음으로의 부름입니다.
일단 이 모든 것을 함께 보게 되면, 이 전체 비디오가 구축해 온 핵심 교정이 훨씬 더 명확해집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놓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주로 멀리 떨어진 장소가 아니라, 삶을 되찾고, 악을 무찌르며, 백성을 모으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역사 속으로 도래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체 비디오의 중심에 놓인 문장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나중의 천국이 아니며(비록 미래의 영광을 포함하지만), 단순한 내면의 영성이 아니며(비록 마음을 변화시키지만), 단순한 교회 용어가 아니며(비록 교회는 그에 속하지만), 단순한 미래의 소망이 아닙니다(비록 마지막에 완성되겠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일단 그것이 분명해지면 전체 성경은 더 깊은 방식으로 하나로 엮어지기 시작합니다. 창조는 정당한 통치를 향해 가리키고, 타락은 그 통치에 대한 반역을 드러내며, 언약은 약속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이스라엘은 갈망을 고조시키며, 다윗은 왕권을 가리키고, 예언자들은 기대를 심화시키며, 예수님은 도래를 선포하고, 십자가는 세력들을 무찌르며, 부활은 왕을 입증하고, 교회는 그 통치 아래 살아가며, 최종적인 미래는 그분의 공공연한 승리에 속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수많은 주제 중 하나가 아니라 전체 이야기를 묶어주는 위대한 실 중 하나인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왜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을 바꾸는가?"라고 묻는다면, 가장 깊은 대답은 대략 이렇습니다.
"일단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보게 되면, 당신은 기독교가 단순한 개인 영성이나 사후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도래하여 우리가 구원, 제자도, 교회, 그리고 소망 자체를 읽는 방식을 재조정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것임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 대답입니다. 그리고 이 비디오 전체를 마무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도 이것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란 주로 신자들이 죽음 이후에 어디로 가느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도래하여 모든 것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이요, 그분의 기적들이 계시한 것이며, 그분의 십자가가 확보한 것이고, 그분의 부활이 입증한 것이며, 성경이 내내 향해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단순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장 오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국, 제자도, 복음, 아니면 그리스도의 통치일까요? 아래 댓글로 공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비디오가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더 분명하게 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구독하고 함께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더 커질 때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훨씬 더 큰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한국의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이렇게 위대한 놀라운 공부로 초대해 주시니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이 먹고 마시고 사는 문제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놓고 씨름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게 하시니 찬송을 드립니다. 이 공부를 주님의 사랑으로 인도로 할 때 담대한 믿음을 주시고 더욱 더 순종하게 하시고 잘 배우게 좋은 동료도 허락하시고 필요한 모든 시설, 장비, 그리고 물질도 허락해 주시기 기도합니다. 주여! 한국에 사는 모든 백성이 위대한 주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울 너무나 좋은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은혜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모든 한국인이 주님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모든 한국의 믿는 이들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배우고 밝히고 그 나라를 이 땅에 세우고 온 세상에 전파하게 하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