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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다윗 Ⅹ (삼상 23:29-24:22)
영적적용 : 은사충만론
요약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음에서 참된 신앙이란 죄를 두려워 하는 경건임을, 다윗에게서 감화를 받은 사울의 변화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이루어짐을, 두 사람의 불가해의 언약은 곧 육신은 변화를 받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육신 자체는 존속됨을 가르쳐 준다.
설명
본문은 육체의 영성 즉 은사의 원리를 보여준다.
1. 은사는 하나님과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온다.
23장 29절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거하니라"
☞ 엔게디 요새는 성령 은사를 부어주심의 예표이다(엡4:7-12).
2. 은사는 기도함으로 주어진다.
1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 블레셋과 전쟁은 강한 기도로 은사 받음을 보여준다(고후12:9, 마7:6-12).
3. 은사는 전 인격을 그 대상으로 한다.
2절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 온 이스라엘은 전 인격을 상징한다.
4. 은사충만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2절 하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 들염소 바위는 은사충만에는 피나는 노력과 위험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5. 은사를 구하는 목적은 변화를 위해서이다.
3-4절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 발을 가리움은 회개를 그 날이란 죄악을 소멸받는 성령의 날이다.
6. 은사의 목적은 육신 자체를 멸함이 아니다.
6절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 즉 육신적인 것을 멸함이지 육신 자체를 멸함이 아니다.
7. 은사로서 육신적인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한다.
9절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 은사를 주심은 잘못된 사고방식을 고치시기 위함이다.
8. 은사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신케 한다.
10-11절 "사울의 뒤에서 외쳐 가로되 ‥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 옷자락을 보여 주듯 은사를 통해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한다.
9. 은사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다.
12절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 여호와께서란 하나님 주권을 암시한다.
10. 은사는 성도로 신분에 맞는 삶을 살게 합니다.
14절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과 세상 앞에서의 신분이 있다.
11. 은사는 사람을 감동을 시키지만 영원한 것은 아니다.
16절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 사울의 감동이 그러하듯 육신도 감동을 받으나 지속적이지 않다.
12. 은사는 영에 속한 사람이 되려는 데 있다.
20절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 육신이 순종해야 영에 속한 사람이 된다.
강해
오늘 본문의 줄거리는 사울이 엔게디에 있는 다윗을 잡으려고 올라가다가 도리어 상황이 역전되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윗이 사울을 살려주어 큰 감동을 받고 사울이 퇴각하는 내용입니다.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극적인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 속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살려준 다윗의 아름다운 경건된 신앙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정신은 바울에게도 있었습니다(행23:3-5).
그러나 신령한 측면에서 우리는 이 본문에서 육체의 영성의 초기를 발견합니다. 즉 육체의 영성이란 하나님께서 은사를 육체에 입혀주시므로 우리가 육신적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울이 엔게디에서 다윗에게 감동을 받고 일시적이나마 다윗 쫓기를 중단했듯이 우리 육신이 성령의 은사의 도움을 받으면 세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는 방향으로 나가려는 감동이 생기게 됩니다.
☆ 은사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은사는 하나님과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옵니다.
23장 29절에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거하니라" 했습니다.
여기 엔게디 요새가 갖는 신령한 의미가 귀합니다. '엔게디'란 '염소의 샘'이라는 뜻으로 사해 부근 광야의 황량한 곳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곳에는 유일하게 샘이 있어 포도원이 있는 등(아1:14) 참으로 특이한 곳입니다.
그런데 염소의 샘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 곳에는 들염소들이 많이 모여드는 고지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염소들이 모여들어 이 곳에서 물을 마십니다. 오늘날도 많은 염소들이 그 곳에서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엔게디는 성령의 예표입니다. 즉 성령의 강림으로 엔게디 포도원 즉 교회가 생겨났고, 이 성령은 염소와 같은 사람들에게 부어져서 회개하여 새 사람을 만듭니다. 이 성령은 죄악으로 적막하고 황량한 이 세상 사람들에게 귀한 생명의 샘물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높이 계신 하나님과 또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오십니다.
엡 4:7-12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의 정통적인 정설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 입니다. 먼저 개념 정리할 것은 성령과 은사는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즉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삼위일체의 한 위의 하나님이시지만 은사란 그 분이 주시는 선물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기 은사에는 넓게는 물질적 우주적인 것까지 다 은사에 포함되나 좁게는 성령의 9가지의 은사를 포함하여 사도 등 직분화되어 있는 것과 섬기는 자 등 비직분화되어 있는 것 등 학자들의 분류에 따라서는 성경에 나타난 것만 해도 30여 가지나 됩니다.
2. 은사는 일반적으로 기도함으로 주어집니다.
1절에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사울을 침략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안전 장치인 사단의 사자 즉 육신적인 고통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바울도 이 사단의 사자와 싸우다가 하나님의 능력을 입는 결과를 얻었습니다(고후12:9).
그러므로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지만 이 시험이 곧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영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신기한 것은 사울도 블레셋과 싸운 후 누군가의 제보에 의해 엔게디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상황이 있어 기도했든 없어도 기도했든 열심을 내어 기도하면 나도 모르는 순간에 은사가 입혀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육체의 영성은 기도와 관계가 큽니다(마7:6-12).
3. 은사는 전 인격을 그 대상으로 합니다.
2절에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그랬습니다.
이 번에 사울 군대는 다른 때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확한 인적과 수효가 나타난 점입니다. 여기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은 비유적으로 하나님께서 입혀 주신 마음입니다. 즉 "온 이스라엘"이란 전 인격을 가리키고 "택한"은 구별된 거룩한 어떤 것을 암시하고 "삼천"은 하나님의 완전 수 3에 제한 충만 수 1000이니까 하나님께서 입혀 주신 마음입니다.
이 은사에도 생명적인 은사와(롬 6:23) 능력적인 은사가 있습니다(고전 12:8-11). 생명적인 것은 영혼에 입혀지고
능력적인 것은 육체에 입혀집니다. 이것은 죄인 그 자체가 변화되었다기 보다는 그에게 입혀진 은사의 성격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떨어지면 인간의 본 바탕이 늘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항상 거룩한 성령의 은사로 덧입힘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4. 은사충만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2절 하반절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했습니다.
여기 들염소 바위란 엔게디 고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곳을 들염소 바위라고 한 것은 염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고지를 향해 올라가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습성을 그 동안 우리는 교만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번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사를 덧입기 위해서는 그 과정이 염소가 고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은 피나는 노력과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노력에 대해서는 이미 이해할 것이고 위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위험 중에 가장 위험한 것은 잘못 구하면 신비주의의 함정에 빠진다는 점입니다.
신비주의에 빠지면 악한 이리 떼 같은 사단의 미혹에 빠져듭니다. 우리는 많은 교회가 신비주의적으로 은사운동을 하다가 실족한 것을 보아 왔습니다.
5. 은사를 구하는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화입니다.
3-4절에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했습니다.
마치 사울이 다윗을 찾으러 가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의 거룩한 창조적인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은사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덕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란 용변을 보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직역하지 못하고 완곡한 어법으로 발을 가리운다고 표현했습니다.
당시 용변을 볼 때 옷을 일부 벗었기에 발이 가려졌습니다. 흔히 옷을 벗음은 신령한 의미에서 변화의 상징으로 쓰였고(엡 4:22-24) 또 발을 가리움은 겸손과 함께 수치를덮는 것을 뜻했습니다(사 6:2).
이를 직역한다해도 인간의 배설물은 신약에서 바울에 의해 무가치한 세상의 것들의 비유이므로(빌3:8) 일맥상통합니다. 즉 회개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그 곳은 양의 우리간 안의 굴로 양은 참된 성도의 예표요, 다윗이 그의 옷자락을 벤 것은 비록 일부였지만 그의 전체를 벤 것과 같은 상징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이 기름부음 받은 자임과 아울러 그 상징성 때문에 더욱 마음이 찔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겉옷의 손상은 곧 새 사람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4절에 다윗의 사람들이 "원수를 손에 붙이시는 그 날"이라고 했는데 물론 이것은 그들의 주관적인 확신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비유의 형식은 마치 구약 선지서에서 반복되는 여호와의 날과 같은 형태의 말입니다.
선지서에서 반복되는 여호와의 날이란 종말론적인 심판의 날로서 하나님께서 자기 남은 백성은 사랑하시나 죄에 대하여는 극렬한 노가 드러나는 날입니다. 이 날은 1차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성취되었고 2차로는 성령강림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목적은 먼저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도록 돕고 다음은 악한 죄악을 회개시켜 소멸시키며 거룩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토록 함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 달란트적인 의미는 생략토록 하겠습니다.
6. 은사의 목적은 육신 자체를 멸함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5-7절에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경건한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다윗은 시종일관 사울을 죽이지 않고 보호하기를 원합니다. 나중에 사울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죽었을 때도 가장 슬퍼한 사람도 다윗이었습니다. 이처럼 은사는 우리의 육신적인 것을 처리하는 방향이지 육신까지 멸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적인 것과 육신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육신적인 것은 곧 육신의 탐욕적인 속성을 이용한 죄를 뜻하는 것이고 육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가 보살펴야 할 부분입니다. 도리어 은사의 나타남은 우리의 육신의 질고나 미련 부족 등을 해결해 줍니다. 그래서 건강하게 해 주고 부족함을 채워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육신적인 것과 육신 죽임의 구분을 몰라서 무조건 금식시킵니다. 물론 금식을 하면서 육신적인 요소를 회개하는데 도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육신만 죽이는 의미없는 금식이라면 과연 육신만 죽일 뿐입니다.
7. 은사는 육신적인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합니다.
8절에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가로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사울에게 이르되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했습니다.
물론 다윗을 의심하기 시작한 장본인은 사울입니다. 그러나 누구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사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완곡한 표현입니다. 완곡한 표현이란 부드럽게 표현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 그 누구란 사울의 주요 신하들로 구성된 베냐민 지파가 될 것입니다.
여기 베냐민은 육신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주신 목적은 우리의 육신적인 고정관념을 파괴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만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육신적인 소리를 듣고 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안된다 불행하다 어렵다 도울자 없다 행복하지 않다 복이 없다 등등.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셔서 깨닫게 하시므로 이 잘못된 사고방식을 고치는 작업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8. 은사는 표적으로 통해 말씀을 확신케 하는 선물입니다.
10-11절에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했습니다.
여기 다윗은 자신의 결백을 말씀과 증거를 통해서 증거합니다. 은사의 목적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막 16:20에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했습니다.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이처럼 명백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옷자락은 사울에게서 말고는 어디서 취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더구나 사을은 잘려나간 자신의 옷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오늘도 복음증거를 위해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선교사역의 현장에 은사가 더욱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9. 은사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입니다.
12절에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했습니다.
다윗이 한 말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그 절정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은사 주심은 우리를 하나님 주권에 서게 하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함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 맘대로 행했던 자아를 죽이고 주의 뜻대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영광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하여 쓰임받는다는 개념이어야지 우리가 능력을 받아서 은사를 행한다는 개념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은사를 받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구 삼으사 쓰시는 것이기 은사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10. 은사는 성도로 신분에 맞는 삶을 살도록 돕습니다.
14절에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했습니다.
다윗은 이 비유에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자신을 개나 벼룩으로 적용시킴으로 사울을 훨씬 존귀한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을 쫓는 것은 무익한 일임을 강조하므로 적의를 해소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윗이 사울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주는 영적인 원리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통하여 성도로 하여금 신분에 맞는 삶을 살도록 도우신다는 점입니다. 성도의 신분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녀 백성 양 신부 제사장 성전 왕 섬기는 자 등이고 세상 앞에서는 소금 빛 선지자 전도자 등의 많은 신분이 있습니다.
11. 은사는 사람을 감동을 시키지만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16-19절에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여기 사울의 변화된 마음을 보십시오. 사울은 다윗의 선대함을 듣고 그만 감동되어 자신의 악함을 고백하고 다윗을 칭찬하며 그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육신도 항상 악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 속에서 육신도 이렇게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그랬던 것처럼 이 감동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흥회가 끝나면 그 감동도 식어버립니다. 우리는 이 육신의 특징을 사울에게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감동의 요소를 가까이하며 살아야 합니다.
12. 은사의 목적은 영에 속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0-22절에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간접적으로 들려진 적은 있었지만 사울에게서 직접 듣기는 이 번이 처음입니다. 이처럼 육신도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육신에 속한 삶을 내려 놓고 영에 속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끊임없이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혹시 다윗을 죽이려던 사울처럼 육신적인 것만 따르는 추한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가 세상적인 것을 따름이 곧 영적인 것을 죽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감동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도 늘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여러 면에서 진실로 변화되는 것이 은사를 주시는 첫째 목적입니다. 부디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사충만하여 날마다 성장해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