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彈劾(탄핵)’의 歷史(역사)
二. 사료(史料)를 통해서 본 탄핵
二-1-①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본 탄핵제도와 사례(事例)
탄핵(彈劾)제도는 본래 왕조국가에서 관료들의 부정부패(不正腐敗)를 막기 위해서 뿐 아니라 왕의 권력남용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로, 그 탄핵을 맡은 직책이 간관((諫官) 혹은 어사(御史) 이다. 시대에 따라 그 명칭은 달라지기도 했으나 농경문화인 황하문명권에 왕조국가가 성립하고 관료제도가 확립되면서 감찰기구는 필수제도가 되었다. 왕조국가와 현대 민주사회의 삼권분립과 단순 비교하여 논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나름대로 국가와 사회를 안정적으로 오래 유지하느냐, 아니면 정국 불안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느냐는 권력기관에 대한 견제 장치와 함께 탄핵 제도 운영의 공명정대함과 그 실효성(實效性)에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가까운 조선왕조부터 살펴본다. 『조선왕조실록』(https://sillok.history.go.kr 자료 참조, 이하 『실록』) 원문 검색 결과 ‘彈劾’이란 단어는 조선왕조 5백여 년 동안 총 463번, 줄여서 쓴 ‘劾’까지 넓혀 검색하면 5425번 등장한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은 태조실록1권, 太祖 1년(1392년, 明 洪武25年) 7월 28일 丁未일 네 번째 기사로, 그 가운데 “사헌부는 시정의 득실을 논하여 집행하고, 풍속을 교정하고, 공과를 고찰하고, 포상과 천거와 탄핵 등의 일을 관장한다(司憲府掌論執時政得失, 矯正風俗, 考察功過, 褒擧彈劾等事)” 했다.
곧 사헌부는 조선의 삼사(三司) 기관 중의 하나로 관료들의 감찰과 탄핵을 담당했고, 사간원(司諫院)에서는 왕에게 간쟁(諫爭)을 올렸으며, 두 기관 모두 정치에 대한 언론을 담당했기에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료들을 언관(言官), 혹은 대간(臺諫)이라 했으며, 두 기관을 ‘언론양사(兩司)’ 또는 줄여서 ‘양사(兩司)’라고 했다가 세종 때의 집현전(集賢殿, 세조 때 弘文館으로 개편) 또한 言官의 역할을 했기에 세 기관을 합쳐 ‘언론삼사(言論三司)’라고도 했다. 이들이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감찰하고 탄핵하며 언관의 역할을 제대로 하면 백성과 나라는 안정되겠지만 당파적 입장이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서 일을 처리하게 되면 끝없는 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조짐은 바로 나타나고 있었는데, 먼저 권한 침해에 대한 정부 기관의 탄핵이었다.
태조 4년 1월 4일 己亥 2번째 기사는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대사헌 박경 등이 상소하여 형조주사 정지(鄭持)를 죄줄 것을 청했다. 시작은 持가 예법과 관련된 일로 다투다가 잡단(雜端, 사헌부의 正五品)인 조치(曺致)를 탄핵하려고 했으나 헌사(憲司, 사헌부)에서 알고서 먼저 持를 탄핵했다. 이에 그 헌사를 능욕한 죄를 논하고, 지금부터는 형조가 헌사를 탄핵하지 못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持를 파면했다(○大司憲朴經等上疏請罪刑曹主事鄭持。初持以爭禮事, 欲劾雜端曺致, 憲司知之, 先劾持。至是論其凌辱憲司之罪, 請自今刑曹毋得彈劾憲司, 上允之, 罷持職).
요즘 시각으로 본다면 왕이 ‘헌법재판소’가 되어 각 부처의 권한쟁의를 신속히 처리해 더는 기관의 고유업무에 대한 침해가 없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일로 태조 이성계(李成桂, 등극한 뒤에 개명한 이름은 ‘아침 단’의 ‘旦’이나 諱하여 ‘조’로 읽고, ‘아침 조, 바다거북 조’를 뜻하는 ‘鼂’로 쓰기도 했음)는 삼 년 뒤에 다소 민망하게 되었다.
태조 7년(1398년 明 洪武 31년) 4월 17일 癸巳日 2번째 기사로, 다음과 같다.
○간관인 박신 등이 상소하기를, “겸 서운주부(서운주부, 書雲觀의 종6품 벼슬. 書雲觀은 태조 원년에 설치한 관청으로 天文・災祥・曆日과 인재 발탁인 하나인 推擇을 담당. 書雲觀은 世祖 때 觀象監으로 개칭. 禮曹 소속) 김서가 월식을 추산하여 예조에 고했는데 끝내 월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恕의 직책이 추보(推步, 천체 운행 관측)를 전문으로 함에도 이제는 천상(天象)에 어두워 나라 사람들을 속였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원하옵건대 그 관청에 명하시어 그 임명장을 거두고, 법률에 의거 처벌하도록 하소서” 했는데, 이때 상소문만 올렸고, 직접 아뢰지 않았기에 임금이 간관과 헌사와 형조를 불러 꾸짖으면서 “일관이 추보를 잘못하여 마땅히 그 죄를 논해야 하는데, 살펴야 할 법관이 내버려 두고 묻지 않았으니, 죄 또한 같도다. 김서의 잘못은 사람들이 함께 본 바인데도 오히려 또한 말을 하지 않았으니, 과인의 실덕과 재상의 과실을 어찌 능히 말하겠는가?” 하셨다. 잡단인 전시(田時)가 대답하기를, “장무시사(掌務侍史) 신 윤창이 견책을 당해 집에 있기에 신 등이 아직 일을 보지 못해서 감히 아뢰지 못했나이다” 했고, 형조 정랑(正五品) 유영문은 대답하기를, “형조에 일찍이 교지가 있었기에 감히 탄핵하지 못했나이다” 했으며, 보궐(補闕, 門下府의 正五品. 太宗 1년에 郞舍가 司諫院으로 독립하면서 獻納으로 바뀜)인 허지는 “소는 이미 올렸나이다”고 답했다. 왕은 오히려 간관의 죄를 청함이 늦었다면서 박신과 허지로 하여금 일을 보지 말게 했고, 소를 보시고는 서(恕)를 죄주기를 상신(上申)대로 했다(○諫官朴信等上疏曰 兼書雲注簿金恕推算月蝕, 以告禮曹而卒不食。恕職專推步, 今乃昏迷天象, 以誣國人, 不可不懲。 願令攸司收其職牒, 依律科罪, 至是, 疏上未啓, 上召諫官, 憲司, 刑曹, 責之曰 日官失於推步, 當論其罪, 所司法官, 置而不問, 罪亦均矣。 金恕之謬, 人所共見, 尙且不言, 寡人之失德, 宰相之有過, 詎能言乎?" 雜端田時對曰 掌務侍史臣尹彰, 被譴在家, 臣等皆未視事, 不敢以聞。" 刑曹正郞柳榮門對曰 刑曹曾有敎旨, 未敢彈劾。補闕許遲對曰 疏已上矣。上猶以諫官請罪爲晩, 令朴信許遲毋視事, 及見疏, 罪恕如申).
봉건시대에 월식(月蝕)은 통치자의 부덕(不德)으로 말미암는다고 여겼기에 태조는 ‘과인의 실덕과 재상의 허물’을 얘기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월식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는 군주와 백성을 기망(欺罔)한 것으로, 태조가 간관과 사헌부와 형조를 불러 화를 낼 만도 했다, 하지만 형조의 관리는 3년 전의 교지를 들먹이며, 감히 탄핵하지 못했다고 항변까지 하니, 더욱 화가 나 간관들에 대한 업무 배제 명령을 내렸지만, 잘못을 깨닫고, 다음날 다시 업무복귀 명령을 내렸다. 바로 위의 기사 아래로 딱 한 줄 “○甲午 命憲司視事(갑오일, 사헌부에 명해 일을 보도록 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朴信(1362년~1444년)은 世宗 때까지 벼슬한 인물로 대사헌을 거쳐 호조와 병조와 이조 판서를 두루 역임한 인물이다.
요즘 정치권처럼 당리당략에 따라 자질구레한 일들을 갖고 큰일 양 부풀려 탄핵하는 일이 조선 시대에도 비일비재했던 듯하다. 太宗 3년(1403년, 明 永樂1年) 6월 17일 癸亥日의 세 번째 기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의정부에서 대간이 탄핵의 그릇됨을 금하도록 청하니 따랐다. 아뢰기를, “대간은 전하의 이목(耳目)의 기관으로, 백관들을 규간(規諫, 법도대로 간함)하고 규탄하여 무릇 국가의 이로움과 해로움, 민생의 기쁨과 슬픔에 마음을 함께 하면서 힘을 합해 바로잡아 바른길로 돌아서게 하고 보좌함을 전담하나이다. 근년 들어 대성원(臺省員, 兩司의 規諫과 彈糾를 맡은 이들)이 자잘한 일로 서로를 탄핵하고 그 보복을 두려워하여 모든 사법기관이 서로를 해치는데 빠졌으니, 이목의 기관으로 소임이 해이해졌을 뿐 아니라 위태롭고 저속하게 되어 정치가 불미스러워졌나이다. 이전에 의정부에서 수판(受判, 임금에게 上申하여 판단을 얻음)하여 금지했사온데, 지금 간관들은 대체를 돌아보지 않고, 겨우 작은 일로 헌사를 전부 탄핵하고 있나이다. 청컨대 그 관청에 통렬히 징계하여 이후로는 금하도록 하명하소서! 또한 재상은 작위가 높고 현달하며, 고굉(股肱, 股肱之臣으로 임금의 팔다리와 같은 신하)으로 임금과 같은 몸이고, 대사헌은 가장 무겁게 발탁되어 무리가 공경하면서도 꺼리는 바임에도 근간에 작은 일로 가볍고 쉽게 탄핵하여 임금과 신하가 존경받지 못하니, 그 잘못이 작지 않나이다. 이제부터는 재상이 국가 대사에 관계되고 탐관오리로 불법을 저지르며 풍속을 무너뜨리는 일을 제외하고는 자질구레한 일로 가볍게 탄핵하지 못하도록 하소서(○議政府請禁臺諫彈劾之失, 從之。啓曰臺諫, 殿下耳目之官, 專掌規諫及彈糾百官, 凡國家利害、民生休戚, 幷心協力, 匡救輔翼職也。近年以來, 臺省員, 以細事, 互相彈劾, 畏其報復, 全司陷害, 非唯耳目之官所任廢弛, 傾危俗成, 政治不美。前者, 府受判禁止, 今諫官, 不顧大體, 乃以小事, 盡劾憲司。請下攸司痛懲禁後。又宰相爵位尊顯, 股肱同體, 大司憲最爲重選, 衆所敬憚。近間卽以小事, 輕易彈劾, 堂陛不尊, 其失非小。今後宰相, 除關係國家大事及貪汚不法, 敗毁風俗事外, 細碎之事, 不得輕劾)!”
국회를 장악한 다수당이 무차별적 탄핵 공세를 펴는 우리의 정치권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절대왕정(絶對王政)의 봉건(封建)시대나 民主主義를 표방하는 대의제(代議制) 사회나 권력을 독점하려는 인간의 心思는 얄궂게도 時空間을 초월하는가 보다. 아니, 시대가 변하고 문명의 利器가 발달하면서 수명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권력욕은 더욱 커지는 듯하다. 조선의 탄핵 유형과 관련해 『실록』을 통해 몇 차례 더 살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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