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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편 2절-4절: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셀라).
2절: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사람이 살다보면 가정에, 또는 사업에, 또는 개인에게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이 때 자기 마음 속에서 사람에 목적을 두고 기도하기 전에 부딪히는 사건 환경 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생각을 하라. 우리가 사건 환경에 부딪힐 때 자기가 어리석거나 몰라서 그 사건을 잘못 처리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자기 얼굴이 부끄러워지는 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에 더러운 칠이 되지 않게 하려는 방향을 생각을 하라.
다윗의 경우를 보면 아들 압살롬이 상당히 애를 먹였는데, 이럴 때 ‘압살롬을 바로 서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하면 꼭 압살롬을 위하는 것 같은데 아버지로서 자식을 사랑하는 이것이 아버지의 사적인 중심일 수 있는 거다. 사적인 마음이 안 되려면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이름을 먼저 생각을 하고 그 면에 맞춰서 기도를 해야 한다.
자기 가정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아버지 하나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욕을 먹지 않도록 이 일을 대처하고 처리할 수 있게 지혜를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한다면 이 기도 속에는 신앙회복도 들어있고, 사람의 얼굴에 더러운 칠이 안 되는 것도 들어있는 거다. ‘너희는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나는 통통 망하고, 알거지가 되고, 비참하게 죽어도 괜찮고 하나님 당신에게만 영광이 되면 그만이지’ 이게 아니라 나의 영광도 들어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높이는 자를 하나님께서 발로 차버리겠느냐, 높이겠느냐? 높인다. 이치를 생각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이치를 놓고 보면 학생들이 공부를 할 때 ‘내가 공부를 잘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주십시오’ 라는 식으로 자기중심으로 기도하지 말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에게는 하나님이 얼굴이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도록 내가 놀지 않고 힘쓰고 애써서 최대한으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붙들어 주십시오’ 이래야 한다. 모든 면에서 언행심사가 항상 하나님 앞에 바로 놓여질 수 있도록 기도를 하라. 자기의 마음이 잡아지면 정신과 마음이 정립이 되어서 엉뚱한 생각을 갖겠느냐?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예루살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어떻게 되겠느냐? 아버지로서 자기의 아들이 왕이 되면 좋은 거겠지만 이스라엘에서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되어있다. 그래서 아무리 큰아들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왕으로 세우시지 않는다. 비록 첩으로 난 자식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솔로몬을 왕으로 세운 걸 보면 이걸 알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자타의 구원을 위해 전체를 놓고 해석할 수도 있고, 부분을 딱 잘라서 해석할 수도 있다. 솔로몬을 어떻게 낳게 되었느냐? 어머니가 우물곁에서 목욕을 하고서 낳았다. 밧세바가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다윗이 위에서 봤느냐, 아래서 봤느냐? 위에서 봤다. 그런데 밧세바는 이 사실을 몰랐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사상은 자기를 항상 정결케 하고 있으면 인간은 모를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내려진다는 거다. 우리가 이 장면만 빼서 보면 이런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다윗이 밧세바에게 들어간 후에 아들이 잉태가 됐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그 다음에 생명잉태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윗이 자신을 배반한 압살롬을 보면서 걱정을 하는데, 첫째는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예루살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걱정이다. 그 다음에는 왕이요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교육을 잘못시켰으니 아버지의 얼굴이 뭐가 되겠으며, 백성들 보기에 면목이 없고, 만물을 보기에 면목이 없고.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고, 아들을 통해 구원계대가 내려가야 할 텐데 이 면이 안 되니 면목이 없다.
그 다음에 아들도 하나님 앞에 이룰구원을 이뤄가야 하는데 이룰구원으로 살지 않고 있고,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존재가치를 생각할 때 구원을 많이 입어서 신령천국에서 영원히 존귀 영광자 능력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걸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가슴을 칠 일이냐?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그래서 이런 면을 생각할 때 아들만 나무랄 일이 아니고, 또한 자신이 왕 자리에서 쫓겨나서 아들을 피해 도망을 다니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 의식주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이것도 문제가 아니고, ‘세상을 어떻게 편하게 살다 가나?’ 이것도 문제가 아니다. 진리성도 다윗의 기도는 이런 것을 놓고 염려 걱정하는 것보다 더 깊다.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서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땅 끝에서 부르짖는다고 했는데, ‘땅 끝’이란 가장 밑바닥으로 낮아진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아들로부터 쫓겨서 달아나려니 한없이 낮아진 자리에서 아들을 원망하는 대신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먼저 살피겠다는 거다. 고약한 아들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이런 지경에까지 내려간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봐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일반적으로 원인과 바탕은 생각지 않고 현재 자기의 어려움만 자꾸 해결해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건 아직 안 내려갔구나. 이 땅에서 자기의 큰 꿈이 이뤄져야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구나. 이런 사람은 응답을 받겠다고 밤이 맞도록 목이 쉬도록 죽자 사자 매달렸는데도 응답은 없고, 잠을 못 자서 눈알이 십리나 들어가고, 다리도 아프고, 배는 배대로 고프고 하면 ‘하나님이 정말 계실까? 성경말씀이 거짓말은 아닐까? 응답이 없는 것을 보면 나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건가?’ 이런 마음이 든다. 사람의 마음은 비슷하다.
기도를 하면서 ‘믿습니다’ 라고 한 번 하는 사람보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두 번 하는 사람이 믿음이 조금 더 있는 거냐? ‘믿습니다’를 백 번 하는 사람보다 수백 번을 하면 굉장히 믿음이 깊은 거냐? 기독자들이 기도의 응답을 사람의 말에 달린 것으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은 자기에게 능력이 안 생기면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안수를 받으면 능력이 확 확 들어오는 것으로 안다. 이건 이방신관이다.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글자대로 보면 우리 한국의 땅 끝이 어디냐? 해남이냐? 여기 ‘땅 끝’이라고 하는 것은 지역을 말하는 게 아니라 최대로 낮아진 자신을 표현하는 말이다. 자기가 완전히 내려간 사람은 누가 탁 쳐도 꿈쩍도 안 한다. 말하자면 자기는 없다. 그래서 누가 쥐어뜯던, 꼬집어 뜯던, 대패로 얼굴을 깎던 상관하지 않는다.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마음이 눌려진다는 것은 세상 아래로 내려갔다는 말이요,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올라가야 한다는 거다. 올라갈 때는 그냥 펄떡 뛰어서 올라가는 게 아니라 ‘나보다 높은 바위’ 라고 했는데 ‘나’는 사람이니까 사람보다 높은 바위, 즉 다윗 자기보다 높은 바위로 올라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세상에 속한 존재이니 세상보다 높은 바위로 자기를 올려달라는 거다. 이 기도가 참 깊다. 이 말씀을 인격성적 관계성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무슨 뜻인지 모른다.
그러면 이 바위란 뭘 말하는 거냐? 주님은 바위시라. 주님을 ‘바위’ 라고 하는 것은 주님 안에는 모든 것이 보존되고 움직임이 없다는 거다. 이게 바위다. 주님에게 놓여지는 것은 바람에 날려갈 일이 없고, 흔들림이 없고, 튼튼하고, 영영히 보존이 된다. 즉 영적 진리의 세계는 인간의 그 어떤 수단 방법으로도 정복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무슨 세계가? 진리로 된 영적 세계는 인간의 그 어떤 고등학문이나 철학으로도 정복할 수 없는 세계다. 이 수준에 미칠 수 없다. 왜냐? 진리세계는 하늘이고 인간세상은 땅인데, 땅의 것이 어떻게 질적으로 하늘의 수준으로 올라가겠느냐? 못 올라간다. 생각을 할 수도 없거니와 생각도 안 되는 거다. 근본적으로 질적으로 안 된다.
다윗의 이 기도를 그냥 문자적으로만 보면 무슨 뜻인지 모른다. ‘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라고 했는데, 다윗보다 높은 바위가 많이 있지 않느냐?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 왜 ‘바위’ 라는 용어를 쓰면서 자기를 올려달라고 하는 거냐? 바위 위라면 남이 올라가서 밀어버리거나 아래에서 끄집어 내리면 떨어지는 곳인데 왜 떨어질 곳에 올려달라고 하는 거냐?
다윗이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은 인간의 그 무엇으로도 눌림을 받지 않고 정복이 되지 않는 세계로 오르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를 진리의 생명세계의 높은 차원으로 인도해 달라는 거다. 이 일은 하나님이 아니시면 안 된다는 거다. 참으로 고상하다. 이치적으로 생각을 해 봐라. 정말 값진 기도가 아니냐? 정말 고상한 기도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버리고 싶지 않은 다윗이로구나.
3절: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피난처는 하나님에게 있는 건데, 우리 입장에서 말씀의 도의 봉우리가 우리의 피난처다. 살려면 이곳으로 가야 하고, 이곳으로 들어가면 산다. 몇 사람이던 숫자와 관계가 없이 들어가기만 하는 사는 곳이다. 하나님에게로 피하면 죽는 것이 없고 사는 것밖에 없다. 죽음이 산 것에 삼켜지는 곳이다. 하나님에게는 죽는 게 없지 않느냐? 그러니 그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영원한 존귀와 영광이 되는 거다. 영원히 살려면 그 신앙의 본질 안으로 들어가서 안 나오면 된다.
원수가 따라올 수 없는 곳, 원수가 들어올 수 없는 곳, 세상근심 걱정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 성도의 피난처다. 이런 것들이 따라 들어올 수 있는 곳이면 성도의 피난처가 아니다. 여러분들은 피난처에 한 번이라도 들어가 봤느냐, 한 번도 안 들어가 봤느냐? 피난처의 수준, 즉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따라올 수 없는 지혜지식의 수준을 가지면 안전하다. 침범이 안 된다 그 말이다.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가 이 세계로 들어가야 하고 이 세계를 가져야 한다. 이게 신앙의 세계다. 여기에는 ‘예수를 잘 믿겠습니다’ 이 말이 필요가 없다. 이 말보다 자기가 그곳으로 한 발 한 발 가는 게 잘 믿는 거다. 성품이 예수님으로 닮아지는 게 잘 믿는 거다.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견고한 망대’란 질적으로 아주 튼튼하게 지은 망대를 말하는데, 사람이 망대 위로 올라가면 아래를 멀리까지 살필 수 있다. 망대에서 원수의 공격을 미리 막을 수 있게 준비할 수 있고,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 수 있고, 성을 침범해 오는 자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있고, 기어 들어오는지 서서 들어오는지 알 수 있고, 무슨 무기를 가지고 오는 건지 알 수 있고, 사람인지 짐승인지 다 판단과 구별과 분별을 할 수 있다. 이걸 신앙 면으로 보면 ‘견고한 망대’란 신적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으로 된 영능의 실력을 말한다. 이 영능의 실력은 세상 일반적인 차원보다 질적 근본적으로 다르고 높다.
우리교인들이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그동안 들은 진리지식이 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서 그들의 얘기를 듣고서 내 쪽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은 못할지라도 그들의 말이 잘못됐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사실 그들의 의사성이나 소원 목적성이나 신앙의 질은 우리와는 대화가 안 되는 거다. 우리는 그들의 신앙성과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같은 성경을 들고 말을 해도 대화가 안 된다. 이럴 때 그들이 성경을 펴놓고 어느 구절을 읽어보라고 하면 ‘당신이나 보시오’ 라고 하면 된다.
우리가 말씀을 깨달을 때 문자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은밀계시적 차원으로 올라가면 판단과 분별이 민감하고 빠르고 쉽다. 계시적 신앙사상으로 올라가면 판단 분별이 쉽고 빠르다. 우리 기독자는 일반차원인 하나의 종교적인 지식에 머물고 있으면 안 된다. 선악과 따먹은 지식의 차원에 머물고 있으면 원수가 덤벼드는 것이니 꼼짝없이 당하고 만다. 이렇게 되면 성화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사람이 깨달음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원리적으로 안 된다. 진리지식의 이치라야 올라가는 거다.
4절: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셀라).’ 1, 2, 3절을 보면 다윗의 마음이 여러 가지로 표현이 되어있는데, 어떤 표현을 했던 읽다보면 다윗의 신앙사상이 살살 올라온다.
장막은 천막이다. 장막은 광야생활을 하는 데 필요하다. 장막은 광야에서 비바람이나 눈보라나 뜨거운 햇빛을 피할 수 있다. 장막은 쉽게 옮기면서 생활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에 장막이 있으면 옮겨 다니면서 생활하기가 좋다.
앞으로 결혼을 하는 신랑 신부는 집을 살 때 큰 집을 사지 말아라. 둘이서 누우면 딱 맞는 집을 사라. 처음부터 큰 집에 살고 부유하면 살다가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쳐도 주저앉아 버린다. 살면서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마련해 가다보면 재미도 있고 살아갈 힘도 생긴다. 그냥 살만 하면 되고, 예수 믿을 수 있으면 된다. 이러면 아무 문제가 없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