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동 공동 주교좌 성당
광주대교구 첫 번째 주교좌 성당입니다.
1933년 전라남도 광주시(光州市)에 창설된 광주 대교구 소속 본당. 전(前) 광주대교구 주교좌 본당. 주보는 예수 성심. 광주지역은 1920년대까지 천주교의 불모지였으나 1926년 박재춘(朴在春, 요한)을 비롯한 3가구 10여명의 교우가 생기게 되어 이해 12월 3일 노안(老安)본당 주임 박재수(朴在秀, 요한) 신부에 의한 노력과 당시 대구 교구 당가 무세(G. Mousset, 文濟萬) 신부, 그리고 목포(木浦)본당 주임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 등의 노력으로 1930년 북동에 300여평의 성당부지가 매입되었고, 이어 공소강당의 건립과 함께 1932년 가을 100여명의 영세자가 나오게 되자 이듬해 5월 25일 본당으로 창설되었다. 민정호(閔正鎬, 마르코)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사목하던 중 1933년 10월 아일랜드의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가 한국에 진출, 전라남도 지방을 관할하게 되고 이듬해 4월 전라남도가 대구교구로부터 분할되어 감목대리구로 설정되자 마리난(G. Marinan, 梅) 신부가 부임, 이후 성골룸바노회 신부들이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기 시작하였다. 1934년 건평 37평의 성당이 신축되고 1935년 빈민아동을 위한 학교가 개설되었으며, 1937년 전라남도 지방이 지목구로 설정되면서 북동본당은 광주지목구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때 현 성당이 건축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광주교구 내의 외국인 골룸바노회 신부들이 일제에 체포 구금되고 결국은 추방당하게 되어 북동본당은 전라남도의 다른 본당들과 함께 발전이 정체되었으나 1949년 광주 시내에 남동(南洞)본당을 분할, 창설시켰고, 6.25전쟁 뒤 다시 성 골룸바노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광주교구를 맡게 되자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1954년 힐리(M. Healy, 許) 신부가 부임, 6.25 전쟁으로 흩어졌던 교우들을 모아 본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여 1957년 1월 21일 광주교구가 지목구에서 대목구로 승격되었을 때 북동본당은 주교좌 본당이 되었다. 그 후 1958년 모란(T. Moran, 安) 신부가 부임, 1961년까지 사목했고, 매귀어(D.F, Maguire, 梅) 신부가 1961년에서 1962년까지, 티어니(P. Tierney) 신부가 1962년에서 1964년까지, 1964년 모란신부가 재부임하여 1968년까지, 1968년 마과이어 신부가 재부임하여 1969년까지, 오닐(N. O'Neil, 千) 신부가 1969년에서 1974년까지, 모리시(M. Morrisey, 牟) 신부가 1974년에서 1978년까지, 정규완(鄭圭完, 토마스) 신부가 1978년에서 1981년까지 사목했으며, 김종남(金鐘南, 로마노) 신부가 1981년 부임하여 현재까지 사목하고 있다. 1983년 광주 시내의 임동(林洞)본당이 새로이 광주 대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축성되어 현재 북동본당은 대성당의 지위만 갖고 있다. 1983년 말 교우수는 2,860명이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어 있어 이미 오래 전부터 본당사목을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