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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20장 1-10절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한 것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그들은 분명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분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신앙을 드러내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유대 사회 안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로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빌라도에게 요구하여 장사함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 수 있는 그때 자신들의 신앙을 드러낸 두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저들의 신앙을 드러내면서 저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장사하게 하신 목적에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유대인 관점에서 죄인으로 죽었습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십자가 형벌 자체가 죄인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죄인의 죽음에 대하여 누가 화려하게 장례를 치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통해 장사되시고, 새 무덤에 놓이셨습니다. 죄인의 죽음으로 볼 수 없는 값진 장례를 치르신 것입니다. 죽음 자체는 죄로 인해 죽은 것이지만 그의 죽음은 자신의 죄가 아닌 자기 백성의 죄로 인한 것이고, 그런 죽음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이런 방식으로 드러내셨던 겁니다.
특히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통해 장사되신 것은 그분의 죽음이 향기로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분의 향기가 그의 죽음 이전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지 않았던 자들에게 미치게 하시고 그리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드러내게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은 자로 하여금 살아나게 하는 향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생명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은 그의 부활을 통해 더욱 증명됩니다. 죽었지만 그가 부활하심으로 자기 안에 생명이 있음을 증거 하신다는 겁니다. 성경은 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결코 시간적인 차원으로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시간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보다 앞서 그가 죽을 때 무덤이 열리면서 죽은 자들이 살아난 사건도 있었고, 또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도 있었고, 구약에서도 죽은 자롤 살리시는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앞서 부활을 경험한 자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부활로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지난 시간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런 부분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앞서 부활한 자들은 부활 이후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다 죽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로 있습니다. 그 말은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그런 부활은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고 있는 부활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2-4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런 차원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부활은 이런 차원의 부활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마지막 부활체를 입는 그 부활만이 아니라, 사실은 중생부터 시작되는 모든 부활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자신의 신앙을 숨기던 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드러냈다고 할 때 그들은 분명 중생한 자들입니다. 그들의 중생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신앙을 드러낸 것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이후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금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부활, 생명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처음이 되시고, 우리의 과정이 되시고, 우리의 마지막이 되십니다. 칼빈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무덤에 놓이신 것은 그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해석하는데, 마지막 부활만이 아니라 시작부터 그러한 분으로 계십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1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요11:25). 생명의 시작부터 마지막 부활이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죽음 이후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리시는데, 부활하셔서 자신을 나타내신 내용은 다음 주부터 보게 될 것입니다. 일단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시면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라고 기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정확하게 ‘안식 후 첫날’입니다. 다른 복음서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다만 복음서들을 비교해 보면 시간과 대상과 관련해서는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의 진술은 이렇습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마28:1) 마가복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막16:1-2) 누가복음에서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눅24:1-3)고 적고 있습니다.
시간과 관련해 오늘 본문은 안식 후 첫날 일찍, 아직 어두울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마가복음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도 마태복음과 동일하게 안식 후 첫날 새벽이라고 말하는데, 종합해서 보면 안식 후 첫날 새벽입니다. 먼동이 터올 즈음인데,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는 않았을 때입니다. 그때 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는가? 요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두 사람을 기록하고 있고, 마가복음은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야고보의 어머니임을 기록합니다. 여기에 다른 한 사람을 더 기록하는데, 살로메입니다. 누가복음은 방금 읽은 내용으로는 ‘여자들’로만 기록하고 있지만, 이후에 보면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눅24:1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종합해 보면 적어도 여자들 최소 3명 이상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경우도 막달라 마리아만 기록하고 있지만, 2절에서 ‘우리가’라고 표현함으로 막달라 마리아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은 왜 막달라 마리아만 기록하고 있는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이 막달라 마리아를 언급하는데, 요한복음은 그의 이름만을 기록하여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 주에 보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본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장 9절에도 보면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는 것을 증거 하는데, 이 사람은 전에 일곱 귀신이 들렸던 사람입니다. 남자가 아닌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처음 본 자로 있다는 것, 그런데 이 여자는 전에 일곱 귀신이 들렸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회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사도입니다. 요한복음에 이어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의 복음 전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 그의 부활을 처음 알리신 대상은 사도들이 아닌 한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전에 일곱 귀신이 들렸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시고 회복케 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에게 먼저 보이셨는데, 지금 사도 요한은 그것을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 그의 이름만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장 27절 이하의 말씀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하는 사람은 사도들입니다. 그들이 이 일을 위하여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첫 목격자로 하나님은 남자가 아닌 여자로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한때 일곱 귀신이 들렸던 사람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여자라는 존재는 오늘날 우리 시대처럼 대우를 받는 그런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귀신을 들렸다는 것은 더욱 하찮은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첫 부활을 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냐?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한 마디로 아무도 주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연약하고 가장 보잘 것 없다고 여길 수 있는 그를 통해 하나님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들, 스스로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자랑을 꺾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원리를 따르자면 우리가 그러한 자들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는 사회적으로 인정 받을만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좀 더 나은 환경에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앞에 서면 그런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앞에서는 누구도 예외 없이 자신의 죄인 됨을 보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더하면 더할수록 자신의 죄인 됨을 더욱 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미련한 자요, 약한 자요, 천하고 멸시를 받고 없는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택하신 것은 지혜 있다고 여기는 자들, 강하다고 여기는 자들, 뭔가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우리가 주 앞에서 자랑한다면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나는 좀 더 일찍 믿었다. 나는 믿음 생활을 오래 함으로 좀 더 하나님 지식이 있다. 나는 주일을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그만큼 주일성수에 있어서 열심이다. 물론 좀 더 일찍 믿은 것도 잘한 것이고, 믿음 생활 오래 함으로서 하나님 지식을 갖추고 있는 것도 잘하는 것이고, 주일에 빠지지 않는 것, 그만큼 주일성수를 하는 일에 있어서 열심을 다하는 것도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고전10:12). 잘 하다가도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자랑은 우리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뭔가 잘 하고 있을 때 잘 하고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지만, 그것이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어디에 있는가? 앞서 언급한 고린도전서 1장의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게 알립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1:30-31) 한 마디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자랑이어야 합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 없는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리 됨, 우리가 지혜롭게 된 것, 우리가 의롭게 된 것,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 우리가 구원함에 이르는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기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이지, 주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지만 사도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을 중심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첫 목격자이기 때문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첫 목격자로 있게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교훈한다는 측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첫 목격자이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의 남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어리석고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여 세상의 강하고 지혜롭고 영광된 자들을 뒤엎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이것을 위함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도 세상의 것으로 우쭐된다면 그것은 아직도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전 자신들의 신앙을 숨긴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면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는데, 마가복음에 의하면 죽은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막16:1). 그러나 이들이 왔을 때 무덤의 돌은 옮겨져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 여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가 없는 것을 보았다고 증거 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순서와는 다르게 기록하는 것이 있는데, 천사를 통해 부활 소식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요한복음에서는 오늘 본문 이후에 나옵니다.
일단 요한복음의 순서를 따르자면,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을 때 돌이 옮겨져 있었고 예수님의 몸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여인들의 말로 시몬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무덤으로 달라 가는데, 3절 이하 8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실 때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도망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물론 사도 베드로의 경우 예수님의 심문하는 과정을 보러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사도 요한은 그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른 모든 제자들에게도 들려졌습니다. 그들이 따르던 스승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말씀하셨던 부활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 의하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고, 죽음만이 아니라 제 삼일 만에 살아나실 것도 예고하셨습니다. 한번만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2절과 23절입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20장 18절과 19절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이런 말씀에 근거하자면 안식 후 첫날이 죽음으로부터 제 삼 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이 말씀이 전혀 생각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물론 저들의 믿음이 사라졌는가?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참된 믿음이 분명하고(마16:16-16), 참된 믿음이 분명하다는 것은 그 믿음이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저들의 믿음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연약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기보다는 죽은 것과 방불한 것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여인들의 말을 들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무덤으로 쫓아갔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것 자체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씨앗이 저들 안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라, 상관있는 자로서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들의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믿음의 불일 듯 일어났다면 좋았겠지만, 지금 저들의 행보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저들은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자신들에게 나타나시기까지, 아니 나타나셔도 믿음의 확신 가운데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6절과 17절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님의 승천에 앞서서도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부활 이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 난 뒤 승천하시는데, 부활 이후 40일 동안 집중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침 받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부활 이전 그만큼 그들의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이고, 믿음의 거의 사라져버린 것처럼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살폈던 내용과 조금 비교해 봐야 하는데,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자에게 생명이 됩니다. 죽었던 신앙을 살리는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만 보고 있으면 살아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전에는 자신들의 신앙을 숨겼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자신의 신앙을 더욱 드러냈다는 것은 단지 그의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소망의 빛이 비췄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사도 요한의 경우 직접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세 번이나 들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경우는 듣지도 않았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은 자들에게는 부활의 빛을 비춰주시고, 들은 자들에게는 오늘 본문의 시점으로 그러한 빛이 전혀 비춰지지 않은 것처럼 있게 하시는 것은 앞서 언급한 고린도전서 1장의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 특별히 사도로 부름을 받은 자들에게도 부활을 보게 하시고 알게 하심으로 더욱 믿음을 강하게 하시지만, 사도이기 때문에 저들이 남다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저들은 넘어진 자로 있습니다. 넘어져서 아직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버릴 것이라고 말했지만, 말과는 달리 주를 버리고 도망했던 자들로 멈춰 서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강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강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주 살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어떠한가? 죽음 이전에는 자신의 신앙을 숨겼지만, 죽음 이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자로 있게 됩니다. 연약한 자를 세워 강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주 안에 있는 것으로 자랑해야지, 주 밖에 있는 것으로, 주를 떠나서도 자랑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데,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2권 2장 11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어느 수사학자는 웅변의 규범들 가운데 첫 번째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화술’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두 번째도 ‘화술’, 세 번째도 ‘화술’이라고 대답했다. 만약 당신이 기독교의 규범들에 관해서 묻는다면 나는 항상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이라고 대답하기를 좋아했을 것이다.”
언제가 겸손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는데, 고린도전서 4장 7절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왜 기독교의 규범으로 겸손을 말할 수밖에 없느냐?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의 자리에 있는지, 아니면 지난 주 살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자리에 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을 드러내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우리 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우리의 우리 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백이면 백 지금 사도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설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우리의 실상입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분명 말씀을 들었지만 죽음이 마치 부활을 삼킨 것처럼 있어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여자들이 말에도 불구하고 부활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달려갑니다. 확인하기 위해 달려갑니다. 둘이 같이 달려가지만 도착은 요한이 먼저 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무덤 안으로까지 들어가지 않습니다. 밖에서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기만 합니다. 이런 요한을 제치고 베드로는 무덤 안에로 들어가 세마포가 놓인 것과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떨어져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이 들어와 그 모든 것을 확인하게 되면서 믿게 되는데, ‘보고 믿더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과 관련하여 마가복음은 이렇게 증거 하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16:14) 누가복음도 동일하게 증거 하는데, 앞서도 말했지만 오늘 본문의 순서와는 약간 다릅니다. 일단 누가복음의 경우 무덤에서 천사들을 통해 여자들이 이런 말씀을 들었다고 증거 하는데,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눅24:5-6)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하여 열 한 사도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눅24:11-12) 누가복음의 경우 베드로가 무덤으로 달려 간 것 자체가 뭔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놀랍게 여길 뿐 집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성정이라면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 여기면서 그냥 집으로 갈 뿐입니다.
요한복음 자체도 증거 하지만 부활에 대한 소식은 오늘 본문 이후에 접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8절 ‘보고 믿더라’는 말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기보다는 예수님의 몸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한 정도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오늘 본문 9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그리고 10절에 보면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부활의 소식을 들은 여자들이 그 사실을 말했지만, 열 한 사도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뭔가 하고 달려가 확인하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는가? 오늘 본문 9절은 성경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가르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요나의 표적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39-40) 단지 사흘 동안 땅 속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요나가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나오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역시 부활할 것임을 이런 말씀으로 알리셨던 것입니다. 시편 16편 10절에서는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는 말씀을 통해서도 부활에 대하여 알리십니다. 그러나 이런 성경에 대하여 베드로와 요한은 아직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부활에 대한 세 번의 말씀도 그들 안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구약과 동떨어진 말씀이 아니라 구약의 말씀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들 믿음의 연약함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에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무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주를 찾는 데 있어 나태하게 만들 뿐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믿음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는 참된 믿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함께 부활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그러한 지식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저들 마음 가운데 심겨지지 않으면, 그래서 그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예수님의 몸이 사라졌다고 할 때 무덤에 가서 찾아보는 정도로만 나타나지, 부활하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주를 찾지는 않습니다. 무덤까지 가는 믿음의 씨앗은 있었지만 거기까지만 나아갈 뿐,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대한 무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어도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바가 없다면 그런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지식을 말할 때는 단순히 아는 정도만이 아니라 그 말씀에 대한 깨닫는 것까지를 내포합니다. 그런 측면에서의 말씀에 대한 지식, 하나님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우리 편에서 시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비록 참된 믿음의 고백을 했지만, 뿐만 아니라 사도로 부름 받기도 했지만 그 지식에 있어 부족함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 보자면 사도로 부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지식에 있어 부족함을 나타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저들을 낮추고 계시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종합해서 우리에게 적용해보자면 하나님 지식을 갖추어야 할 우리가 하나님 지식에 있어 부족함으로 있다면 부끄러운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께 구하고 또한 지식을 가지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라가야 합니다. 자라가지 않는 신앙,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신앙은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주신다면 주께 구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또한 구하는 만큼 주의 말씀을 살피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더불어 실제로 자라가는 일이 우리에게 있을 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