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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전방식으로 기도하기>의 줄거리:
'기도'란 무엇일까요? 예수님 말씀을 빌리자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어떻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느냐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숙정하십니다. 기도를 안해서가 아니라, 기도하는 방식이 틀려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전방식으로 기도하기
(마태복음 21:12~17)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전방식으로 기도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성전방식으로 기도하기’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사야 56장 7절의 “…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성전이 정화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성전을 통한 기도생활에 실패했음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선민들의 호흡과도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비유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도가 곧 추구함이라는 의미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1절에서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기도를 통해 얻는 결과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이란 우리가 왕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나는 왕이 될 운명이다”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왕은 이 세상에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오직 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왕이 되기 위한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최측근이 될 때에 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최측근이 되는 과정 없이 무조건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고집이고 완악함과 교만일 뿐입니다.
선지자나 지금 목회자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전파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을 전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의 최측근이 되면 왕으로써의 삶을 살 수 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측근이 되면 세상 그 누구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속한 직장 상사들에 대해 순종하기를 바라시기에 직장 상사들에게 순종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기도를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기도는 무척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이 기도생활에 실패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기 위해 먼저 성전구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성전의 중심으로부터 보자면 성소가 있고 물두멍과 번제단이 있었으며 제사장의 뜰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남자의 뜰과 유대인 여자의 뜰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화하신 곳이 바로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전의 구조는 하나님의 뜻이 제사장과 유대인 남자와 여자를 거쳐서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에게까지 하나님의 뜻이 미치기 위해서는 제사장과 유대인들이 먼저 철저하게 성전중심의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제사장들은 성전중심의 생활이 아닌 돈 버는 재미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뜰에 장사꾼을 들여놓고 제사에 쓸 물건들을 팔게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산 물건이 아니면 제사장들이 다 퇴짜를 놓았기에 백성들은 그것들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사에 필요한 물건의 독점권을 주는 대가로 이득을 취했던 것입니다. 당시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성전을 찾는 사람들이 약 300만 명에 달했으리라 예상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독점할 수 있었으니 그로부터 나오는 수익이 엄청났을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 내부로부터 타락이 시작되니 선민들 또한 제대로 된 기도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13절에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고 질책하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풀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의 중심이 되는 단어는 바로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기도의 집”입니다. 번역의 과정에서 “하는”이라는 말이 붙은 셈인데 이로부터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한다면 기도는 성전에서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기도는 성전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해야만 합니다. 혹은 성전에 올라가면 기도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 또한 생겨납니다. 평상시에는 일상생활 중에 기도도 할 수 있지만 성전에서는 오직 기도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의문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성전이 “기도의 집”이라는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니엘의 일화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 세 번씩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만 당시에 예루살렘성은 이미 함락 당했고 성전도 파괴된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었기에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를 했던 것일까요? 다니엘은 마음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를 기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건물로써 성전이 존재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성전방식으로 기도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성전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두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려면 하나님의 이름을 둔 성전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의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는 기도만이 참된 기도라고 강조해왔습니다. 이 십자가를 기억함 속에 성전방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 성전의 모습을 통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전의 구조입니다. 성전 안에는 휘장으로 나누어진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이 성전 건물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성전의 구조는 사람의 마음의 구조와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으로 지음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22~23절에서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크기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다만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흡입력으로 평생을 유지합니다. 마치 우주의 블랙홀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앞서 기도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추구의 과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추구하는 힘은 바로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에서 나오는 흡입력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 흡입력으로 무엇인가를 빨아들여서 기쁨과 만족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합니다. 기쁨과 만족이 유지되는 상태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빨아들이느냐가 중요해집니다. 우리는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빨아들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돈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돈 이외의 다른 무엇인가를 트럭으로 가져다주어도 마음은 전혀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돈만이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성과의 사랑으로 마음의 채움을 기대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녀의 형통으로 마음의 채움을 기대합니다.
이처럼 삶의 모든 순간에 믿음은 작용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어떤 대상의 이름을 붙잡고 추구하게끔 합니다. 이 믿음으로 붙잡은 것들이 마음의 지성소에 놓이게 됩니다. 성전의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들어있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말씀의 돌판이 있었고, 언약궤 덮개를 속죄소라 부릅니다. 말씀의 돌판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상징합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을 상징합니다. 속죄소는 바로 이 지성소에서 죄가 발생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을 온전히 채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돈이나 자녀의 형통과 같은 세상의 가치들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지 않고 다른 이름을 붙잡음으로써 죄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돈이 없어서 혹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돈이 있고 건강이 있어야 기쁠 수 있다는 반증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지성소에서 성전의 구조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났듯이 제사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선민들의 마음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야 할 제사장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아닌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발생을 문제시하지 않고 묵인합니다. 그 결과 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장사꾼들에게 이방인의 뜰을 개방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준비해온 제사물들은 모두 거부하고 성전의 장사꾼에게서 산 제사물만을 허용해주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제사장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원죄를 가지고 있기에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을 담지 않습니다. 건강, 장수, 돈, 형통, 권력, 인기, 명예, 명품 등과 같은 세상의 가치들을 마음에 담고 기쁨과 만족을 얻으리라 믿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제사장들이 하는 일은 이러한 상태를 문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대신 번제단에서 죽어가는 어린 양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만이 마음의 지성소에 담겨야 함을 가르쳐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들여놓음으로써 타락하게 되었고 그들을 따르는 선민들 또한 타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강경한 태도로 성전을 정화하셔야만 했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로써 자녀의 일을 바라보면서 염려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한 마음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해야만 합니다. 부활은 마음의 지성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만 계시는 상태입니다. 즉, 나의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은 하나님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믿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의 가치들을 마음의 지성소에 담은 상태에서는 입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써 성립조차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항상 마음의 지성소를 염두에 두고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내가 지금 마음이 불편하고 근심걱정이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몸이 안 좋고, 자녀가 말썽이고, 돈이 없고, 일이 안 풀리고, 합격이 안 되는 등의 세상의 일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면 마음의 지성소에 이것들이 담긴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번제단을 대신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만을 기쁨과 만족으로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지성소와 휘장으로 구분된 성소에는 분향단과 떡상과 금촛대가 있었고 그 바깥에는 물두멍과 번제단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분향단은 하나님에 대한 추구함을 상징합니다. 분향단은 말 그대로 향을 살라서 향기로운 연기를 하늘로 올려 보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8절을 보면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분향단은 사람들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본능적인 욕구의 표현을 상징화 한 것입니다. 문제는 분향단에서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붙잡은 이름을 추구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제각각 세상의 가치들을 붙잡고 살아가지만 선민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도록 선택된 자들이었습니다. 분향단에서의 추구함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번제단 앞의 물두멍은 의식적인 회개를 의미합니다. 의식적인 회개란 다른 말로 하자면 깨달음이 있는 회개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있지 않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을 추구하면서 마음이 근심걱정에 휩싸이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물두멍은 씻는 장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더러운 상태이기에 회개를 통해서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제단은 십자가의 죽음과 의미가 일치합니다. 더러워진 마음은 회개하고 번제단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이름만 붙잡는 깨끗해진 마음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만으로 채워지기를 추구하는 분향단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떡상이 의미하는 것은 기도의 목표입니다. 떡상은 배부름의 상징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돈으로 만족하고 했던 사람이 성전구조를 따라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지성소의 의미를 생각하며 돈이 기쁨과 만족이 된다고 믿었던 것이 죄임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번제단 즉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그러한 마음을 죽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은 마음이 되었을 때에 또한 마음은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하나님을 추구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떡상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되 돈 문제가 전혀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될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가 근심걱정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마음의 상태에 달렸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근심걱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목적은 문제를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어떠한 문제의식도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건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돈이 없어도 문제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시편 46편 2~3절에서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돈이 없는 것, 건강이 나쁜 것, 자녀가 말썽인 것은 명백한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되면 그 사실들이 더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떡상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세상의 일들이 더는 문제로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금촛대는 밝음 즉 마음에서 하나님이 보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우선시함을 의미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사실보다 마음으로 보는 하나님을 우선적 현실로 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상처를 받거나 억울한 심정에 화가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을 붙잡았다면 세상의 일들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난에 상처를 받거나 화가 났다면 마음에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은 명예나 자존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죄임을 알고 하나님을 밝히 보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금촛대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떡상과 금촛대는 동시에 이루어지는 양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배가 부르면 하나님이 더 크게 보이는 상태가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 우선적으로 느껴질 때에 하나님으로 배가 부른 것입니다.
이 상태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우선시할 때에 하나님의 주권이 삶에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 문제보다 하나님을 더 우선시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돈 문제는 하나님이 주관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 또한 이러한 성전의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지성소의 문제로부터 분향단까지 이어지면서 아버지로 만족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떡상 즉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에서 금촛대의 의미가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다스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제일 먼저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돈 문제를 제일 크게 보는 동안에는 돈 문제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돈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지성소의 단계와 분향단을 거쳐서 떡상을 목표로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과정 끝에 돈 문제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볼 수 있을 때에 실질적인 하나님의 다스림은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금촛대가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을 우선시할 수 없다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주권은 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나를 돌이키는 것에 집중되게 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방해하는 장본인은 하나님을 제일 먼저 제일 크게 바라보지 못하는 나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의 삶의 방해꾼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전구조로부터 드러나는 올바른 기도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지성소에서 시작되어 물두멍과 번제단을 거쳐 분향단과 떡상과 금촛대까지 이어지는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제일 먼저 제일 크게 보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왕 노릇하며 살아가는 삶이기도 합니다. 또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하나님의 장갑으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마음에 성전을 떠올리며 하루에 세 번 기도했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며 때때로 마음으로 하나님 이외에 다른 이름들을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걱정과 불안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러한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하나님을 우선시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쉬지 않고 기도하기입니다. 또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하나님이 제일 크게 보이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지성소에서 시작되어 물두멍과 번제단을 거쳐 분향단과 떡상과 금촛대까지 이어지는 이 기도를 지속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가족을 대할 때에도 일을 할 때에도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로 드리는 주기도는 성전구조를 마음에 떠올리면서 하는 기도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하되 성전구조의 모습을 떠올리며 기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진짜 기도의 힘을 경험하고 느끼게 하여 주셔서 항상 기도하며 살다 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