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3장 통일교, 세계로 뻗어나가다 3. 그들은 왜 통일교를 믿을까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통일교에 깊이 감응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한다. 한때 식민지였으며, 경제적, 기술적으로 뒤떨어진 한국에서 탄생한 종교에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또 이단이라 불리는 신흥종교에 왜 그렇게 엘리트들이 공감하는지 궁금해 한다. 이제 그 이유를 알아보자.
일본 신도들의 말에 따르면, 통일교 원리가 현대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삶의 진리를 정확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진리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공산당이 버젓이 활동하는 일본에서 공산주의의 폐해를 소리 높여 외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좌익의 사주를 받는 몇몇 단체들에게 테러도 당하고, 부모에 의해 감금도 당하고, 법적 소송도 많이 당했으나 통일교는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1958년 첫 선교사가 파견된 이후 명문대학을 졸업한 일본의 수많은 엘리트들이 통일교 신도가 되었고 그들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의 장벽을 허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본협회 초대 회장을 지낸 구보키 오사미를 시작으로 카미야마 타케루, 후지이 미치오, 여성으로서 7대 회장을 맡은 에리카와 야수에 등을 거쳐 12대 회장을 맡고 있는 카지쿠리 겐타로까지 많은 사람들이 핍박과 박해를 이겨내며 흔들리지 않는 신앙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그들이 통일교를 지켜나가면서 겪은 삶의 굴곡과 서러움, 통한을 이야기하자면 책 10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는 통일교 평신도들의 사연을 들려주어 통일원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삶의 나침반이 되고 있는가를 이야기한다.
일본에는 종교단체가 18만 개가 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숫자다. 그렇게 종교단체가 많은 이유는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이지만 마음의 공허함이 그만큼 깊다는 뜻도 된다. 그 18만 개의 종교단체 중에서 통일교는 단연 으뜸 그룹에 속한다. 그 이유는 '통일원리'에 있다.
1931년 오카야마에서 태어난 스도 켄은 원래 무신론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 무렵에 의과대 학생이던 시절에 친구가 교회에 가자고 권유하자 "하나님을 나에게 보여주면 교회에 가겠다"고 당돌하게 대답했다. 친구가 당황하자 묘한 승리감을 느꼈을 정도로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그런데 일주일 후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오사카 병원에 입원했는데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동네 사람이 문병을 와서 "종교를 가지라"고 또 권유하자 "종교를 갖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하면서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병원에서 불치병을 이겨낸 사람들의 간증록을 우연히 읽었고 그때 처음으로 희미하게나마 신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는 허상으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 자신을 저버리지 않는 신을 찾기 시작했고 병이 차차 나아지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성경을 읽어도 구원과 성령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고 목사의 설교를 들어도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오사카 역에서 노상 전도를 하던 통일교 신도를 만났다. 어쩌면 여기에서 구원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정작 통일교회에 나온 것은 3개월이나 지난후였다. 그는 통일원리를 듣는 순간 '내가 그토록 찾던 인격신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감복을 한 뒤 통일교인이 되었다.
그날 이후부터 스도 켄은 평생을 통일교 전도와 원리교육에 헌신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했다. 또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일본 여성 신도들을 교육했다. 가히 일본 통일교의 살아있는 증인이라 말할 수 있다. 그가 통일교를 받아들인 이유는 그의 말처럼 "메시아가 자신 앞에 현신"했기 때문이다. 또 그 메시아가 들려주는 「원리」의 창조론, 타락론, 복귀론이 인간에게 삶의 진리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었다.
도쿠노 에이지는 1954년에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종교에 관심이 많았으며 슈바이처 위인전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고등학교 때 가톨릭 교회에 다녔는데 완벽한 신앙심이 생기지 않아 통일교회도 몰래 다녔다. 그러던 1970년 어느 날 통일교 전도사가 집으로 찾아와 리틀엔젤스 공연 티켓을 주고 갔다. 시골 마을에서 그러한 공연을 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인데 에이지는 운이 좋게도 공연을 본 것이다. 그 공연에 감동받은 후 신앙의 길을 정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자신이 원하는 인생의 답을 통일교에서 발견하자 통일교 신도가 되었다. 공부도 열심히 한 에이지는 일본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인 도야마(富山) 국립대학에 입학해 본격적인 학업과 전도의 길에 나섰다. 그는 원리연구회 회원이 되어 도쿄대학을 비롯해 명문대의 엘리트들을 전도했다. 대학 졸업 후에도 통일교에 남아 교육과 전도를 했다. 도쿄대 등 일본 명문대 청년들이 1970 ~ 80년대에 대거 통일교인이 된 데에는 원리에 담겨 있는 내용이 허황되거나 종교적 교리만을 설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야마다 히데오는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 신자였으며 고교 졸업 후 신학대학을 가기로 인생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신학대학에 가기 일주일 전에 우연히 통일교 교육을 받았다. 그 순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으며 신학대학을 가지 않고 통일교 공직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3년 동안 전도에 매진했는데 훗날 "기독교도로서 21년의 삶보다 통일교인으로서 3년의 삶이 훨씬 더 가치 있었다"고 술회했다. 히데오는 통일교인이 된 이후 세계 각지를 다니며 눈부신 활동을 했다. 일본에서 대학원리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한일승공대회를 비롯해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수많은 행사에 참여했고 1992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으며 문선명의 고향인 정주에 공원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중국에서도 많은 활동을 했으며 80년대부터 남미로 건너가 통일사상을 전파하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브라질에서 40일 원리교육을 할 때는 일본 신도 1만 명씩을 보내 브라질 당국을 놀라게 했으며 144부족이나 되는 원주민들을 하나하나 방문해 하나님의 사랑을 들려주는 일에도 앞장섰다.
요시노 가츠꼬는 1945년 아키타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한국 교포들이 많이 사는 곳인데 가츠꼬는 외모가 꼭 한국인을 닮아 '한국 사람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원래 종교가 없는 그녀는 21살에 결혼을 하고 27살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뜻밖에 아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은 800여 명 중에서 1~2등을 다투던 수재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성적이 급속도로 추락했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백방으로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었는데 하루는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놀랍게도 "당신의 아들은 33살이면 죽을 운명"이라고 말했다. 가츠꼬는 당황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그 남자는 교회를 찾아가 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가츠꼬는 '하나님에게 기대는 것은 약한 사람이다'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하지만 아들이 찾아가 보기를 원하자 며칠 후 아들과 함께 교회를 방문했다. 그곳은 통일교 전도센터였는데 그곳에서 통일 사상과 원리에 대한 비디오를 보았다. 10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아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후 어머니와 아들의 운명은 180도 변했다.
아들은 그때까지 해왔던 인생의 고민을 완전히 떨쳐내고 건강한 사람으로 거듭났으며 어머니 역시 행복한 어머니로, 주부로, 아내로 돌아왔다. 아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천리대학에 진학했다. 그가 천리대학에 간 이유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신앙의 조국인 한국어를 배우지 않고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한국의 선문대에서 더 공부를 하여 정통 통일교인이 되었다.
이외에도 감동 깊고, 놀라운 사연들을 엄청 많다. 일본인들이 통일교에 감명 받는 이유는 하나같이 "통일원리가 인생의 진리를 들려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통일교를 믿으면 재산을 전부 빼앗기고, 자식들을 나 몰라라 하고, 가정이 황폐화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러나 통일교인 그들의 말에 따르면, 한국도 그렇고 일본에서 통일교인이 된 사람들은 모두 예전보다 더 잘살고, 자녀들은 더 훌륭하게 성장하고, 가정은 더 화목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