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와 독도의 역사와 사람들의 발자취
시기 | 내용 |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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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000 | 청동기 시대 울릉도 거주 흔적발견(현포, 남서 지석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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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년 | 신라 이사부 장군, 우산국 신라 영토 편입 | 신라 |
930년 | 우릉도(芋陵島)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어 토산물을 바침 | 고려 |
1018년 | 우산국이 동북 여진의 침입을 받아 농업을 폐하므로 농기구를 하사 |
1032년 | 우릉성주가 아들을 보내 토산물을 바침 |
1379년 | 왜구가 무릉도를 침략하여 보름이나 머물다 감 |
1412년 | 무릉도에 60여명이 거주함 | 조선 |
1417년 | 우산도에 15가구 86명 거주, 주민 쇄출 정책추진 |
1425년 | 안무사 김인우가 울릉도에서 20명을 육지로 데려옴 |
1438년 | 무릉도에서 66명을 육지로 데려옴 |
1693년 | 안영복 사건 발생 |
1769년 | 울릉도에 상인들이 몰래 들어가 산삼을 채취하다 |
1787년 | 울산 어민 14명이 울릉도에 몰래 들어가 전복, 향나무 등을 채취하다 |
1882년 | 이규원 감찰사, 울릉도에서 140명의 조선사람을 만나다, 울릉도 재개척 시행 |
1900년 | 강원도 평해군 소속에서 울도군으로 독립(10.25) |
대한제국 |
1905년 | 독도, 일본 시마네현에 의해 일본영토로 강제 편입 |
1906년 | 강원도 관할에서 겨상남도로 편입 |
1914년 | 경상남도 관할에서 경상북도로 편입(3월) | 일제강점기 |
1954년 | 울릉도 주민, 독도의용수비대 활동(1954.5~1954.12) | 대한민국 |
1963년 | 포항~울릉간 정기 교통선, 청룡호 취항(7월) |
1995년 | 포항~울릉간 쾌속여객선, 썬플라워호 취항(8월) |
토두( 土頭 ) : 고려 태조 때 울릉도의 수장관련기록
『고려사(高麗史)』에는 “930년(태조 13)에 우릉도(芋陵島)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으므로 백길은 정위(正位), 토두는 정조(正朝)로 각각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거의 동일한 기록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도 있다. 『고려사』와의 차이는 우산국에서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고, 토두(土豆)가 아닌 토두(土頭)를 정조로 삼은 점이다.
양자의 차이는 두 가지이다. 첫째, 『고려사』에는 고려에 백길과 토두를 보냈다고 했으나, 『고려사절요』는 사자를 보냈다고 했다. 둘째, 토두에 대해서 『고려사』에는 ‘토두(土豆)’로, 『고려사절요』에는 ‘토두(土頭)’로 각각 두(豆)와 두(頭)의 다른 글자로 표기하였다.
이 양자를 종합하면, 『고려사』의 백길과 토두는 두 사람의 사자가 아니라 사자는 1인의 백길뿐이며, 토두(土豆)는 토두(土頭), 즉 우산국의 수장(首長)을 뜻한다. 따라서 우산국의 수장이 고려에 공물을 바치기 위해서 사자로 직접 왔던 것이 아니라, 사자 백길을 보내어 방물과 함께 귀순의 뜻을 밝히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백길은 우산국수장의 아들이거나 최측근의 한사람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우산국수장의 성씨는 백씨(白氏)였을 것이다. 위 기록을 통해 우산국을 수호하고 있었던 수장은 정조로 삼고, 사자로 온 백길은 정조보다 1급 하위인 정위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토두는 우산국의 수장을 뜻한다. 930년에 우산국의 수장은 고려에 공물을 바치기 위해서 사자로 직접 왔던 것이 아니라, 사자 백길을 보내어 방물과 함께 귀순의 뜻을 밝혔다. 이것은 고려 초까지 우산국은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토두 [土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고려왕조의 동계 우릉도 : https://blog.naver.com/kytong3202/221677949395
우산국
한반도 동쪽 바다의 울릉도에 있었던 작은 나라
요약 삼국 시대에 울릉도에 있었던 작은 나라이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처럼 체계를 갖춘 큰 나라로 성장하지는 못했고, 512년에 신라에 정복당했다.
울릉도는 한반도 동쪽 바다에 있는 섬이다. 높은 산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지만, 물이 많고 농사도 지을 수 있는 데다 해산물이 풍부해 사람들이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언제부터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삼국 시대에 이미 우산국이라는 이름의 나라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제22대 임금인 지증왕 때 우산국을 정벌해 복속시킬 계획을 세웠다. 당시 하슬라주(지금의 강원도 강릉 지방)를 맡아 다스리던 이사부가 512년에 정벌군을 이끌고 우산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사부는 우산국 사람들과 전면전을 치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전쟁보다는 항복을 받아낼 생각으로 뱃머리에 나무로 깎은 사자상을 세운 뒤 우산국 사람들을 위협했다. 이사부가 “항복하지 않으면 사자를 풀어 우산국 사람들을 밟아 죽이겠다.”고 하자 우산국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항복했다고 한다.
우산국 사람들은 신라에 항복한 이후 해마다 공물을 바치며 평화롭게 살았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울릉도와 그 주변의 섬들에 공도 정책을 펼쳐 예전처럼 많은 사람들이 살지는 않았다. 고려와 조선 조정은 울릉도가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관리하기 어려운 탓에 주민들을 육지에 와서 살게 했다. ‘공도’란 말도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섬을 뜻한다.
오늘날의 울릉도는 경상북도에 속한 섬으로서 동해의 풍부한 해산물을 거두는 어업 전진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울릉도에 살고 있는 주민들도 1만 명이 넘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산국 - 한반도 동쪽 바다의 울릉도에 있었던 작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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