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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사람들 -김동길의 인물에세이- (83)박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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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생에 만나서 가까이 지낼 수 있었던 여성들 중에 가장 훌륭한 세 사람을 택하라고 하면 나는 서슴치 않고 김활란, 박은혜, 김순애의 이름을 들것이다. 오늘 내가 거론 하는 여성은 우리 시대에 널리 알려져 있기를 설산 장덕수의 아내이고 경기여중고의 교장이었던 박은혜의 이야기이다.
박은혜는 1904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목사 박예헌의 딸로 태어났다. 평원군은 매우 자연 환경이 아름답고 과수원도 많이 있어 평원군의 군사무소가 있는 영유라는 고장은 사람 살기 좋다고 널리 알려진 고장이기도하였다. 내가 일제시대에 그 고을에 있는 국민학교에서 교사 노릇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영유읍에 대하여는 특별한 향수를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목사 아버님을 박교장의 제기동 댁에서 뵌 적이 있는데 인물이 출중하게 잘생겼고 이미 노경에 접어들어 그 잘생긴 얼굴에 흰 수염이 가득하였다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김활란은 한번 만난 사람들은 누구도 첫 인상을 잊을 수 없을 만큼 그의 두 눈에서는 총명한 빛이 그의 얼굴을 밝혀 주는 듯 했지만 오척 단구의 매우 키가 작은 여성이었다. 김순애는 여러 면에서 천재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성격이 불같아 사람들과 잘 사귀고 잘 지낼 수 있는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박은혜는 그 용모로 하나 체격으로 하나 미스코리아 경연대회도 나가면 미스코리아가 될 만한 얼굴과 몸매를 지닌 여성이었다.
박은혜는 서울에 와서 미션 스쿨인 정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시대에는 목사나 장로의 딸들은 대게 정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정신을 졸업한 박은혜는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오카 여학교에 다녔고 곧 돌아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마쳤다. 그 뒤에 곧 도미, 유학길에 올라 아이오와주에 있는 듀브케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이수하고 뉴욕에 있는 비블리컬칼리지에서 종교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바 있다.
그때 콜롬비아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고 있던 김활란은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장덕 수를 박은혜에게 소개하였다. 나는 장덕수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 다닐 적에도 유학생들을 모아 학생운동을 한 중심인물이었고 뉴욕에 와서도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인 유학생들의 명실공히 지도자역할을 하였다.
나는 장덕수가 해방 뒤에 KBS 라디오를 통해 우리나라의 정치적 현실에 관하여 강연하는 것을 듣고 감탄한 적이 있었다. 장덕수가 1936년에 콜럼비아 대학에 제출한 학위 논문의 제목이 〈영국의 산업화 정책〉이었다. 그는 귀국하여 김성수, 송진우와 더불어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나라사랑에 헌신 했지만 워낙 웅장한 나무 한 그루라 일본인들의 박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장덕수는 살아남기 위하여 일본 정부에 협력하는 듯한 자세를 여러 번 보였지만 그것이 그의 본심은 아니었다.
그런 그를 최근에 젊은 사람들이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에 있던 반민특위가 장덕수를 반민족 행위자로 규정하고 재판한 사실은 없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노무현 정권 하에서 가상의 재판을 하고 그를 민족반역자로 몰아댄 것은 큰 잘못이 아닌가!
장덕수와 박은혜는 1937년 결혼식을 올리고 그 슬하에 딸 둘,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딸 숙원과 작은 딸 혜원, 큰아들 지원과 둘째 아들 사원은 다 미국에 살고 있어서 만나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모두 어려서 나를 ‘동길 아저씨’라고 부르며 많이 따랐고 그 정은 아직도 그대로 있어 숙원과 사원은 나에게 연락을 하고 찾아오기도 한다.
그들의 어머니는 내가 그 아이들을 이뻐한다 하여 나를 특별하게 생각해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장덕수와의 결혼 생활은 10년 뒤에 설산이 제기동 댁의 현관에서 괴한들에게 총격을 받아 끝이 났지만 고한경의 뒤를 이어 취임한 경기여고 교장자리는 15년을 계속 지켰는데 그가 교장으로 있으면서 어린학생들에게 심어준 정신은 하나이다.
“경기여고 학생들은 뒤에서 보아도 경기여고 학생인 것을 알게 해야 한다. 너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존심이다” 그 시절에 경기에 다녀 오늘 80이 넘은 졸업생들은 그 시절을 가장 아름답게 기억한다.
김활란은 박은혜를 이화여자대학교의 총장이 되게 하여 뒤를 이어주기를 바랐지만 난석은 완강히 거절하고 1963년 회갑도 지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만일 박은혜가 이화대학교 총장이 되었다면 김옥길은 정성을 다하여 그 총장을 섬겼을 것이고 이화여대는 오늘보다 몇 배 더 훌륭한 대학이 되었을 것이다. 이일 저일을 생각하며 박은혜의 아들, 딸이 “동길 아저씨, 동길 아저씨” 하며 나를 쫓아다니던 그날들이 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