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율법은 ① 초등학문으로서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이 있고, ② 인간의 악함과 행동을 억제하는 역할이 있으며, 그에 더해진 ③번째 목적이자 용도는 신자들에게 성화(sanctification)의 길과 방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루터교(Lutheran) 전통은 율법의 ①•② 용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개혁파(Reformed) 신학자들은 율법의 ③번째 용도에 자리를 제공하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성장하는 개념인 성화를 더욱 강조합니다. 이러한 율법의 용도에 대한 이해는 개혁주의의 원조인 칼빈의 주장을 벤치마킹 한 것입니다. 구분선 아래에서 칼빈이 말한 율법의 3번째 용도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이전에 올린 초판이 아니라 1559년판 기독교강요).
【율법의 세 번째 기능: 신자들을 가르치며 권고함】
12. 신자들에게도 율법이 필요합
율법의 세 번째 기능은 - 이는 율법의 가장 주된 기능이요 또한 율법의 고유한 목적에도 더 가까운 것이다 - 이미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마음에 거하시고 다스리시는 신자들과 관련된 것이다. 이미 율법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그들의 마음에 기록되고 새겨져 있지만 (31:33 히 10:16),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감등을 받고 새로워져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사모하는 상태에 있지만, 율법은 그들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유익이 된다.
율법은 그들이 사모하는 바 주의 뜻의 본질을 날마다 더 철저하게 배우게 해주며 또한 그 뜻을 깨닫고 있음을 확증하게 해주는 최고의 도구가 된다. 이는 마치 마음을 다하여 주인을 섬길 자세를 갖춘 종이 주인의 뜻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맞추기 위해서 주인의 이모저모를 살피고 관찰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 가운데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날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더 순전하게 아는 일에 새롭게 전진해 나갈 필요가 없을 만큼 지혜가 많았던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가르침만이 아니라 권고도 필요한데, 하나님의 좋은 이 점에 있어서도 율법에서 유익을 얻는다. 곧, 자주 율법을 묵상하여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깨움을 받으며, 그 안에서 강건해지며, 미끄러운 범죄의 길에서 다시 돌이킴을 받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렇게 율법을 통해서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아무리 성령에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해도, 냉담한 육체가 언제나 그들을 짓누르기 때문에 정상적인 열의를 갖고 전진하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육체에게 마치 게으른 나귀를 때리는 채찍과도 같아서, 육체를 일깨워서 행하게 한다. 신령한 사람이라도 아직 육체의 무게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지 않으므로 율법이 그 사람을 끊임없이 찔러서 그냥 나태하게 있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율법을 찬양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율법의 이러한 기능을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 19:7-8). 또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를 비롯하여 같은 시편의 여러 말씀들도 마찬가지다(예컨대, 시 119:5), 이 말씀들은 바울의 진술들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진술들은 중생한 사람들에게 율법이 행하는 기능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 그 자체가 사람에게 제시할 수 있는 바를 거론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선지자가 율법의 위대한 기능들을 선포하는 것이다. 곧, 주께서는 율법을 읽는 자들을 권고하심으로써 신자들 속에서 순종하고자 하는 기꺼운 마음을 불러일으키신다는 것이다. 선지자는 율법의 계명들뿐만 아니라 거기에 수반되는 은혜의 약속을 붙잡는데, 그 은혜의 약속만이 쓴 것을 달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만일 재촉하고 위협하는 것만 있어서 영혼을 공포에 몰아넣어 괴로움을 주기만 한다면, 율법처럼 끔찍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윗은 특별히 율법에서 자신이 중보자를 감지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가 없이는 즐거움도 기쁨도 없는 것이다.
13. 율법을 폐지하는 것은 그릇된 처사임
그런데 일부 무지한 사람들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솔하게도 모세의 글 전체를 내어던지며, 율법의 두 돌판을 없애버린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죽게 하는 직분"(참조, 고후 3:7)을 포함하고 있는 가르침을 붙든다는 것은 분명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악한 생각은 머리에서 제거해야 한다! 모세는 율법이 죄인들 가운데서는 죽음 이외에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지만, 성도들 가운데서는 더 낫고 훨씬 탁월한 용도가 있다는 것을 훌륭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 생명이니"(신32:46-47).
만일 의의 완전한 모범이 율법에 제시되어 있다는 것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올바르고 정의로운 삶에 대한 규범이 우리에게 필요가 없든지, 아니면 율법에서 떠나서는 안 되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규범은 여러 가지가 아니고, 오직 한 가지 영구하고 불변한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인의 삶이 끊임없이 율법을 묵상하는 삶이라는 다윗의 진술(시 1:2)이 어느 한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모든 시대마다 적용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한에는 율법이 요구하는 도덕적 순결에 결코 이를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끔찍하게 여겨 멀리하거나 그 교훈을 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율법은 지금우리를 향해서 마치 모든 요구 사항이 이행되지 않으면 결코 만족하지 않는 엄격한 사법 시행관처럼 행하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완전한 삶을 권고함으로써 평생토록 우리가 열심히 지향하여야 할 목표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율법은 우리의 의무와도 일관성이 있으며, 또한 유익하기도 한것이다. 그렇게 잘 나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좋은 일이다. 사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의 경주)다(참조. 고전 9:24-26). 달려갈 길을 다 달린 후에, 지금 우리가 멀리서부터 바라보며 애를 쓰며 나아가고 있는그 목표에 마침내 도달하게 되도록 주께서 역사해 주실 것이다.
칼빈, 『기독교강요』, 2.7.12.∼2.7.13.
첫댓글 칼빈, 율법의 용도(초판 기독교강요)
https://cafe.daum.net/1107/Y4cZ/82
다시 잘 읽어 보았습니다. 초판에 비해 1559념판늬 내용이 더 많고 풍성하군요.
@노베 공감합니다.
하나님의 법: 도덕법, 의식법, 재판법
https://cafe.daum.net/1107/Z4mc/24
네, 이 글을 함께 보면 종합적인 이해가 되겠습니다.
이단과 극단적 세대주의자는 율법폐기론으로 가지만... 건전한 신앙은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인정하고 개혁주의는 율법의 3번째 용도를 인정합니다. 이방종교의 풍습에서 유래하고 종교개혁 기념일을 디스하기 위해 만들어진 할로윈 데이는 성경적으로 복음적으로 반대와 비판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https://cafe.daum.net/1107/Y657/315
할로윈 논란과 분열의 시기에 좋은 분별도 주시는 좋은 내용입니다 👍
@노베 공감합니다.
종교개혁의 후예와 구원파&세대주의자의 차이 중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에 대한 이해입니다. 개혁주의는 율법의 3번째 용도를 주장하며 율법폐기론을 반대하고, 루터교회도 아래 글에서 보다시피 십계명을 신약 성도들도 지키기를 주장하며 율법폐기론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파와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시키고 분리하여 율법폐기론으로 갑니다. 이러한 율법폐기론을 경계하고 십계명이 신약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최고 규범임을 인정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https://cafe.daum.net/1107/YrXT/13
잘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강요. 2.7.13과 특히 연관되는 내용 같습니다.
[율법의 세 번째 용도] (third use of the law):
하나님의 율법은
첫째, 초등학문으로서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이 있고,
둘째, 인간의 악함과 행동을 억제하는 역할이 있다.
그에 더해진 셋째 목적이자 용도는 신자들에게 성화(sanctification)의 길과 방향을 제공하는 것이다. 루터교(Lutheran) 전통은 율법의 처음 두 용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개혁파(Reformed) 신학자들은 율법의 세 번째 용도에 자리를 제공하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성장하는 개념인 성화를 더욱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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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그렌츠 등, [신학용어사전], p.47.
https://cafe.daum.net/1107/YY6J/11
네, 이 카페에서 많이 본 내용이라서 더욱 이해가 잘 됩니다 😀
칼빈이 말한 율법의 세번째 기능을 잘 이해하면 현실적이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잘 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포스팅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율법의 세 번째 용도인 성화의 길과 방향을 제공한다는 칼빈의 이 글이 어느 때보다 정확하고 깊이가 느껴집니다.
세상에서도 법규가 있고 관습이 있고 도덕이 있어서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성장시키는 기능이 작동을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을 이끌어가고 지침을 주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법규 같은 것이 없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이며, 매우 불쌍한 일이고, 엉터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인 답게 키워내려면 합당한 계명과 지침이 반드시 필요한데 율법이 그 기능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 하면서 율법을 무시하면 망나니 밖에 안 되겠죠. 율법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정에서도 부모의 가르침이 제대로 없거나 그것을 무시하는 자녀는 방종하고 범죄자로 빠지기도 하듯이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좋은 하나님의 법을, 사랑의 정신이 녹아 든 말씀을 왜 무시하며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들을 하게 되었는지...세대주의의 악영향의 결과가 참혹한 것 같습니다.
깊고 좋은 댓글에서 배우고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