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 : 樂書齋偶吟遊甫吉島 (낙선재우음유보길도)
- 보길도의 낙선재에서 읊다.
眼 在 靑 山 耳 在 琴 (안재청산이재금) 눈앞은 청산이요 귀에는 가야금 소리
世 間 何 事 到 吾 心 (세간하사도오심) 세상 그 무엇에 내 마음이 끌리겠는가
滿 腔 浩 氣 無 人 識 (만강호기무인식) 온 몸에 넘치는 기상 남들은 모르지만
一 曲 狂 歌 獨 自 吟 (일곡광가독자음) 내 멋에 따라 부르는 노래 홀로 즐긴다
<어 휘>
世 間 : 이 세상
滿 腔 : 온 몸(全身)
浩 氣 : 큰 기상, 당당한 기백
狂 歌 : 큰 소리로 제 멋대로 부르는 노래
<지은 이>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자는 약이(約而), 호는 孤山(고산) 또는 海翁 (해옹), 본관은 해남(海南)이고,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서울 東部 蓮花坊(연화방)집에서 태어나, 8세에 觀察公(관찰공) 尹惟幾(윤유기)의 後嗣(후사)로 입양되어
經史(경사)는 물론, 醫藥(의약), 卜筮(복축), 陰陽(음양), 地理(지리) 등의 서적을 두루 공부하였다. 17세에
南原尹氏(남원윤씨)와 혼인하고, 진사 초시에 합격한 뒤에, 26세 봄 진사시에 합격, 30세에 進士(진사)로서
상소하여 예조 판서 李爾瞻(이이첨)의 주벌과 柳希奮(유희분) 朴承宗(박승종)의 죄를 청하였다가 함경도의
慶源(경원)으로 귀양가다.
37세에 인조 反正을 맞아 귀양에서 석방 후 義禁府(의금부) 都事(도사)가 되었으나, 몇 달후에 파직되면서
전라도 海南(해남)으로 돌아갔으며, 41세에 호란이 일어나 司圃署(사포서) 別提(별제)가 되었으나 병으로
물러나고, 이듬 해 봄 별시 초시에 장원(壯元)하여 두 大君(대군)의 師傅(사부)가 되었다.
47세에 增廣覆試(증광복시)에 對策(대책)으로 장원, 곧 예조정랑, 시강원 문학이 되었으나 스스로 물러 나
해남으로 다시 내려갔으며, 50세에 아들 尹義美(윤의미)와가 사별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56세에 〈山中新曲/산중신곡〉 18章과 이후에〈山中續新曲/산중속신곡〉 2章, 〈古琴詠/고금영〉 1章을 지었
으며, 65세에는 〈漁父四時詞/어부사시사〉 4篇을 지었다. 72세 3월, 공조 참의가 되었으나 사직을 청한 뒤,
驪州(여주) 孤山(고산)에 머물렀고, 이듬 해〈格物物格說/격물물격설〉을 지었으며, 효종이 昇遐(승하)하자
闕下(궐하)에서 奔哭(분곡)한 뒤 孤山(고산)에 머물다가 다시 敍用(서용)되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74세에 상소하여 慈懿大妃(자의대비) 服制(복제)의 三年說을 주장하고서 宋時烈(송시열)이 宗統(종통)을
부인한 죄와 山陵(산릉)을 잘못 쓴 죄를 논하였으나, 오히려 이 일로 인해 함경도 三水로 귀양가서, 겨울에
〈禮說/예설〉 2편을 지었다. 79세 3월에 전라도 光陽(광양)으로 귀양지가 옮겼고, 2년 후 공의 나이 81세에
겨우 특명으로 석방되어 海南(해남)으로 돌아 와 甫吉島(보길도) 芙蓉洞(부용동)에 寓居(우거)하였다.
84세 義穀(의곡)을 설치하여 宗黨(종당/집안 일가)의 貧乏者(빈핍자) 등을 구제하고, 이듬 해의 6월 11일에
85세를 일기로 보길도 낙선재에서 별세하였다.
공은 다재다능한 문재(文才)를 지닌 분으로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한시는 물론, 여러 편의 고시조를 남긴
분이다. 고시조에 있어서는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여러 편의 작품을 만들어, 평시조의 표현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는 평을 받는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오우가(五友歌), 어부사시사(漁夫四時辭) 등은 이 분의 대표
적인 작품으로써, 우리나라 단가문학(短歌文學)의 최고봉(最高峰)이라는 절찬(絶讚)을 듣는 분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행로는 험난하여 함경도 경원, 경상도 영덕, 함경도 삼수, 전라도 광양 등 지를 전전하면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이미 81세 라는 고령의 몸이 되어서야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
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분망한 벼슬 길에서 물러 나 있는 시간이 많았기에 주옥같은 작품들을 창작하였
으니, 대체로 개인이 처한 역경속에서 오히려 탁월한 저작물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역사적 사실은 후세
인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오늘 소개하는 시는 선생이 해남(海南) 보길도(甫吉島)에 마련한 거처인 낙선재(樂善齋)에서 살면서 느끼는
감회를 칠언 절구로 표현한 시이다. 자연과 시와 음악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시인의 풍모가 새삼
돋보이는 작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