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레이저 헤드Eraserhead>는 <광란의 사랑>(1990) <블루벨벳>(1986) 등으로 알려진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감독이 1978년 흑백으로 만든 데뷔작이다. 린치 감독의 영화는 우아함과 아름다움 속에서 어두운 내면을 드러내고 반대로 추악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이런 독특한 시선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이미지만으로 상상할 수 있는 그의 능력과 개성에 기인한다.
그는 저예산으로 흥행의 부담을 덜고 자유롭게 감독의 세계를 추구하겠다는 독립영화작가 정신을 지니고 있다. 단돈 2만달러(1600만 원)로 5년에 걸쳐 완성한 <이레이저 헤드>는 단순한 B급 영화를 뛰어넘어 감독의 세계관과 스타일을 뚜렷이 보여주는 영화이다. 공포와 절망의 이미지로 가득 찬 이 영화의 암울한 분위기는 고통스러운 악몽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이야기는 기승전결에 따른 극적 구조를 해체하고 있다. 대신 과감한 생략에 의한 흐름의 분절과 다양한 시청각적 상징을 통해 광기의 세계를 구성해간다. 외롭게 살아가는 간장병 환자 헨리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를 만나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아기를 떠맡게 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현실과 꿈의 구분이 모호한 경계에서 돌연변이에 의한 아기를 구제하려는 헨리의 노력이 펼쳐지지만, 결국은 가정이 파괴되고 헨리는 아기에게 몹쓸 짓을 하게 된다. 폐소공포증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 공간과 암울하며 역겹기까지 한 환상이 헨리의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 악몽처럼 펼쳐진다.
린치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도스토옙스키나 카프카의 소설 주인공처럼 선과 악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드는 복잡한 캐릭터다. 감독은 언제나 캐릭터의 어두운 내면과 무의식의 세계에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얼마나 중요하며, 인간의 본성은 선악이 뒤섞여 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시각 이미지와 낯설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자극적인 음향효과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문다. 주인공 헨리의 무의식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해 들어가는 이런 표현방식은 현대인의 잠재된 소외의식과 억압된 욕망에 관한 고통스러운 절망과 공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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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트교도들의 마태복음으로 경배되는, 그런 만큼 비교도들에게는 따분하기 짝이 없거나 아니면 마치 난삽하고도 흉흉한 요한계시록 분위기 같은 영화 <이레이저 헤드>는, 바로 이런 극단적인 비교 때문에라도 수용의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게 한다. 텍스트에 대한 수용미학적 방법이나 오독의 실천이라는 비전통적인 방식을 연습해 보기에 아주 적당한 영화가 아닐까 라는 것. 그러니 정독인가 오독이니 하며 자칫 스트레스받을 일은 애당초 하지 말자. 관객에게 필요한 일은 표면의 줄거리에도 얽매이지 말고, 얄궂은 이미지의 난데없는 기습에도 놀라지 않는, 그 어떤 선입견에도 개의치 않으려는 의지의 공글림이다.
난수표처럼 얽혀 있는 이 영화의 장면과 쇼트들은 여느 난수표처럼 해법 하나만 예비돼 있는 것이 아니다. 감독의 해법, 관객의 해법, 비평관행의 해법 등 그 해법은 수다하다. 만약 이 영화를 무의식에의 탐험이라 본다면 어떤 식의 해법이 가능할까? 프로이트 식을 따르면 무의식은 절대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지 않은가? 언제나 한 번 이상 일그러지거나 굴절된 모습, 이를테면 은유로 자신의 대가리를 보여준다고 하지 않는가? 비록 초자아나 의식의 억압 때문이라 하지만 그럼에도 환유나 은유는 비열하다. 극히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의식에 복수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장면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양각점은 헨리의 머리가 떨어지고 그 머리 안의 뇌(의식의 정수?)가 연필에 달린 지우개(이레이저 헤드)가 되는 지점이다. 이는 감독 자아에 대한, 동시에 의식과 무의식 구조에 대한 두 겹의 은유로 읽힌다. 여기서 감독의 무의식적 욕망과 의식적 욕망은 우연찮게 연대한다. 무의식에 시달리는 의식과, 의식을 뚫고 올라오려는 무의식의 양단 간의 구분을 ‘지워버리려는’ 욕망이 가득하기에 그렇다. 헨리의 머리가 떨어지자 목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반인반수적 아이콘 같은 아이의 머리, 닭의 항문에서 터져 나오는 불길한 빛깔의 수액, 아이의 몸을 자르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내장의 분비물, 볼도 옷도 표정도 모두 부풀림의 이미지로 충만한 천사소녀를 한편으로 하고 심연의 공간으로, 물속으로, 꿈속으로 무상히 잠수, 유영하는 헨리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대칭도 같은 궤도다. 빛이 직접 반사되는 곳(보이는 것/의식)과 되반사되거나 그 되반사마저 미치지 못하는 곳(미지의 것/무의식) 사이의 팽팽한 대칭적 긴장을 끌어안고 있는 뚜렷한 명암 대조의 일관성도 유사한 맥락이 아닐까?
감독은 스스로에 대해서도, 주류의 영화 문법에 대해서도 메타포로 투망질하고 그물의 길이만큼 거리를 두지만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가 빌려 온 의식과 무의식의 나눔 구조도 인간의 불가해성에 부딪힌 프로이트의 건축적(지형학적) 메타포로서의 해법일 뿐이다. 영화는 결국 메타포에 대한 메타포 덧포개기! 다중적으로만 꼬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