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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공중화장실 입식 변기 위에 붙은 이런 문구를 보고 엉겁결에 앞으로 다가선 일이 있다.
그런데 남자는 태어날 때와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나라에 큰일이 났을 때, 딱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데 나는 요즘 들어서 부쩍 눈물이 잦다.
주말드라마, 영화, 책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눈물샘에 조금만 자극이 가해져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와칵 쏟아진다. 나이가 들면 살아온 경험에 의해 공감 능력은 높아지고, 뇌의 억제하는 능력은 약해져서 빚어지는 현상이라지만 민망스러울 때가 많다.
“김 과장, 요번 건강검진에는 위와 대장내시경 검사를 같이 한번 해보지 않을래?”
오랫동안 공직 생활을 함께 해 온 지청장이 건강검진을 같이 받고 싶어 한다. 사실 요즘 건강 상태가 스스로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얼마 전 서울서 찾아온 친구와 태종대공원을 한 바퀴 돌다가 전망대 2층 계단을 올라가는데, 식은땀이 비 오듯 하고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던 적이 있다. 또 변이 가늘고 피가 한 번씩 묻어 나오고 있어 치질로 고생 중이긴 해도 좀 수상쩍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평소 동료들이 기본 검사만 하듯이 돈을 더 들여서 내시경 검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나 대장 내시경은 여러 가지 사전 준비할 것도 있고, 정작 암이라고 하면 주눅이 들어서 더 빨리 퍼지지나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어차피 병이 나서 죽을 것 같으면 모르고 편하게 살다가 한순간에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건강검진을 같이하자고 하니까 반갑기도 하고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이런저런 안면이 있는 병원을 예약하고 검진을 받으러 갔다. 지청장이 앞에서 검사를 받고 내가 뒤따라 진행하는 방식이다. 드디어 수면으로 위부터 내시경을 시작한다. 그리고 한참 후…. 몸은 꼼짝을 못 하는데 의식은 깨어나서 사람들 목소리가 또렷이 들린다.
“이거 용종이 엄청 커서 제거술을 하다가 급하면 개복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족은 불렀는데 급하다면 제가 동의를 하지요.”
뒤에 들리는 투박한 말투는 분명히 지청장의 목소리다. 그렇게 해서 시술을 하는 모양인데, 또 의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햐, 이거 대장암 초기처럼 보이는데….”
“엄청커서 잘라내다가 창자에 구멍이 나서 집게로 집어야겠네.”
꿈결처럼 들리는 소리에도 상황이 좀 심각해 보인다. 그런데 마취 상태라서 그런지 걱정보다는 오히려 마음의 준비가 된 것처럼 편안해진다.
회복실에서 바로 입원실로 옮겨진다. 지청장도 위에 조그만 혹을 제거하고 입원실에서 하루를 지내다가 퇴원했다. 결국, 둘 다 몸에 이상을 느꼈으나 혼자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군중 심리에 편승해 검진을 받은 것이다.
부산서 아내가 급히 올라왔다. 1주일에 한 번씩 보다가 이런 일로 같이 있게 되니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아내가 미는 휠체어를 타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여러 가지 검사가 계속되었다. 휠체어에 붙은 링거 걸이에는 링거액이 삶의 훈장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병원 내에 휠체어를 탄 환자가 제법 보이지만 링거 달린 숫자만 놓고 보면 내 계급이 상당히 높다.
의사 말로는 며칠 후, 큰 것 제거한다고 손을 못 댄 작은 용종 몇 개를 더 떼어내야 한단다. 앞에 제거한 용종은 조직검사 중이며 눈으로 보기에는 악성은 아닌 것 같다고 안심을 시킨다. 그리고 구멍이 난 창자를 집어 놓은 집게 몇 개는 조금 있으면 변에 섞여 나온단다.
마취제의 영향으로 머리가 안개 낀 듯이 흐릿하더니, 이제야 조금씩 정신이 맑아지고 있다. 주말에 아들과 딸이 문병을 왔다. 큰놈은 이런저런 일로 입학이 늦었고, 딸내미는 한 번에 붙어서 둘 다 대학생이다. 옆에서 재잘거리는 걸 보다가 병원에 오래 있게 하는 게 안쓰러워서 등을 떠밀어 부산으로 보냈다. 그리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눈물이 갑자기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끄윽 꺽” 소리도 절로난다.
“지현이 아빠, 왜 울어요? 애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럼 다시 부를까요?”
간호사가 링거를 갈러 왔는데, 창피하게도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다.
아직 뒷바라지를 많이 해야 할 애들에 대한 걱정인지, 죽다가 살아난 데 대한 안도의 눈물인지 알 수가 없다. 오랜 공직생활을 대과 없이 나름 명예롭게 마감했다. 퇴직금과 적금 들었던 것 이러저런 돈에, 융자받은 자녀 학자금과 상환 완료 직전의 아파트 대출금 잔액까지 싹 다 갚고 나니, 빚 없이 칠천만 원 정도가 수중에 남는다. 물론 선배들 이야기를 듣고 얼마 되지 않은 돈을 비자금으로 다른 주머니를 찼다. 아내도 알면서 모른 체하는 것 같았다.
서른 살 아들과 스물일곱 살 딸내미를 불러 가족회의를 했다. 다행히 둘 다 취업이 되어서 제 앞가림 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얘들아, 내가 가진 재산은 빚 없이 이 집 24평 아파트와 퇴직금으로 받은 칠천만 원이 전부다. 그래서 너희들에게 각각 이천만 원씩, 엄마도 고생을 했으니 천오백만 원, 아빠도 천오백만 원 이렇게 나눌 테니까 더 이상 바라지 마라.”
“그리고 아들은 서른세 살까지, 딸내미는 서른 살까지만 같이 있고, ,그 이후에는, 결혼을 하든지 집을 얻어서 나가든지 알아서들 해라!”
나는 자식들에게 큰일이 닥치면 이 돈을 마중물 삼아 슬기롭게 헤쳐나가리라 믿고 강행했지만, 아내는 생각이 달랐다. 애들이 결혼을 하면 얼마간 돈을 보태야 하는데, 지금 미리 주면 나중에 줄 돈이 없어서 입장이 곤란해지니까 그때 주라고 말리던 일이었다. 퇴직과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라 나의 이런 객기가 먹혀든 것이다. 목에 힘이 빠지자 이 일로 구박을 많이 받았다.
그로부터 꼭 3년이 흐른 올해 초. 딸내미는 서른 살이 되자마자 거짓말같이 내가 준 이천만 원에 한 푼도 더 보탬이 없이 결혼을 했다. 그것도 33평짜리 아파트를 떡하니 신혼집을 꾸린 것이다. 아빠로서 한 일이라고는 축의금에서 딸 명의로 들어온 건 한 푼도 손을 대지 않고 딸 몫으로 챙겨 준 것뿐이다.
“딸이 아빠 사정을 잘 알고 준비를 철저히 한 효녀다.”
이렇게 지인들에게 자랑도 많이 하고 다녔다. 그러고 나니 이제 서른세 살 먹은 아들이 걱정이다. 아들은 애초에 결혼할 생각이 없어 혼자 살겠다고 선언한 지 오래다. 아들은 우리 부부에게 시위라도 하듯 거실에서 같이 밥을 먹을 때도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 〈미운 우리 새끼〉 이런 프로만 찾아서 봤다. 언젠가는 광고 영상에서 카드로 뭔가를 산 남편이 아내에게 심하게 핍박받는 장면을 보고, “자기가 고생해서 벌은 돈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나, 내가 저래서 장가 안 간다니까.” 하며 혼자 사는 걸 정당화하기도 했다.
퇴직자 모임에 가니 각별한 동료가 신세 한탄을 한다.
“김 과장은 좋겠소, 그래도 딸이라도 하나 치워서, 우리 집에는 아들 두 놈이 다 장가를 안 간다고 하니, 이거 뭐 소처럼 고삐를 잡아끌 수도 없고….” “어디 보자, 이 과장은 큰 아들이 우리 아들보다 한 살 많으니 서른넷이네, 작은아들이 동갑이고, 걱정이긴 하겠소. 하지만 우리 아들도 혼자 산다고 하니 아직 시름이 반 남았소이다.”
이렇게 말로는 걱정을 하지만, 속내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때가 되면 고삐를 바짝 당기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던 아들에게서 갑자기 뒤통수를 맞는 일이 벌어졌다. 아들이 연말이 다가오자 방을 얻어서 나가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다. 내가 장가 안 가면 나가라고 한 말도 있고, 아들이 장가 안 가고 혼자 살겠다고 한 말도 있으니 방을 얻어 나가겠다는 데에는 말릴 재간이 없다.
아내는 아들이 집 나가면 끼니를 제때 못 챙겨 먹을까 봐, 또 딸도 없는데 아들까지 나가면 너무 허전할 것 같아, 은근히 같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눈치 빠른 딸내미가 엄마 편을 들어서 말려도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이제 나가서 독립할 때도 됐다고 생각해서, 아내와 달리 내보내기로 결심을 굳혀가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는데, 휴일을 이용해서 회사 근처에 원룸 전세를 얻어 짐을 몇 번 실어 나르더니 요번 주 월요일에 출근하면서부터는 아예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금요일인 오늘, 그동안 모인 우편물을 가지러 와서는 간다고 정식으로 인사를 하면서 집을 나선다.
“아들, 건강 조심하며 잘 살아라.”
승강기 앞에 서서 무덤덤하게 작별을 하고 들어왔다. 그런데 거실에서 혼자 텔에비전 방송을 보다가 밤늦게 잠자리에 누우니, 눈물이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흐른다. 베갯머리가 흥건할 정도다.
딸이 시집을 가고 그 방이 비었을 때는, 허전하기는 해도 눈물까지 흘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방이 좁아 침대도 놓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게 했던 게 늘 미안했는데, 큰 집으로 이사를 가서 침대를 놓고 산다니까 좋기만 했다. 그렇지만 아들이 독립한다는 데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서른에 장가들어 딱 1년 만에 큰 애를 봤다. 그런데 초보 아빠가 되다 보니 자식을 어떻게 키우는 게 옳은지를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결국은 아버지로부터 직접 체험한 방식으로 애를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회초리도 들고 무척 엄하게 키웠다. 그에 반해 세 살 터울인 딸은 스스로 깨친 덕분인지 아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애지중지했다.
요즘에는 텔레비전 방송에서 아버지가 아이들을 돌보고, 같이 놀아주는 내용의 프로그램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러면 ‘아, 저렇게도 아이를 키울 수 있구나!’ 하며, 내가 아들한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를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렇다고 해서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지 않은가. 만회할 방법이라곤 속죄하는 마음으로 순주에게 정을 듬뿍 주는 것인데, 이놈의 아들이 결혼을 안 한다고 하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안타까워서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눈물병이 도져서 그런 것도 같고, 아내가 잔다고 몰랐기 망정이지 아무튼 좀 창피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