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고운 최치원 해운대 유적 보존회를 찾아서
‘해운대’란 지명은 선생의 아호 ‘해운’에서 유래
고운최치원해운대유적보존회가 1963년 발기되며 3차에 걸쳐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다. 1차 기념비 건립(1965년), 2차 동상 건립(1969~1971), 3차 해운정 건립(1983~1984)이다.
기념사업이 추진될 무렵 한국전쟁부터 미군 전용 해수욕장으로 사용해 오던 곳이 지역민들에게 환원되자 철조망이 철거되었다. 그 이듬해(1964년) 해수욕장에 3백 년 된 거북 할매가 나타났다. 이를 발견한 지역민들은 융숭한 대접을 해서 바다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듬해(1965년)에 해운대해수욕장이란 정식 명칭을 얻게 된다. 1966년 해운대 중동엔 특급관광호텔 극동호텔이 들어서고, 1974년엔 웨스틴조선(조선비치)이 들어섰다. 그리고 1969년 동백섬 유료도로 개통과 춘천 복개 도로를 통한 인프라 구축으로 사계절 찾는 전국 일류 관광지로 정평이 난다. 2005년 APEC 정상회의가 동백섬 누리마루하우스에서 개최되면서 천년 전 선생이 이곳에서 오랫동안 소요자적 했던 곳이 세계적으로 풍광 좋은 APEC 개최지로 재조명 되었다.
(사)고운최치원선생해운대유적보존회(경주최씨 부산종친회)는 “선생의 발자취가 전국에 걸쳐 많이 남아 있지만 이곳처럼 산자수명(산색이 아름답고 물이 맑음)한 풍경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이곳에 오래 머무르시며 끝없이 펼쳐 있는 망망대양을 바라보시며 조국 신라의 운명이 경각에 있음을 한탄하시면서 망각의 창파에 던지셨으리라 짐작되는 이곳에 선생의 뜻을 되새기는 기념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사진 : (사)고운최치원선생해운대유적보존회 이사장 최규식 (부산종친회 회장)
경주 최씨의 世系는 최치원을 시조로 380여 관향으로 내려오다가 26파로 나뉘어 주축을 이룬다. 이들 가운데 사성공 최예의 후손 최제우는 동학의 창시자이며,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 그리고 한말의 巨儒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단식으로 일생을 마친 최익현(화숙공의 후손)이 있다. 경주시 교동에는 ‘최부자’로 이름난 최준의 집이 있는데 이 최부잣 집은 12대 만석 진사로 유명하다. 경주 최부자는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원칙을 세우고 소작인에게 8할을 받던 소작료를 1600년대부터 절반만 받는 등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최근 재평가 받고 있다. 해방 직후에는 독립운동가인 최준 선생이 전 재산을 털어 오늘날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최치원은 한문학의 조종(祖宗)으로서 절세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시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 등의 명저를 남겼다. 경주 최씨는 신라 말에 명성을 떨쳤고,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성종 때의 최승로(崔承老:수문하시중), 현종 때의 최항(崔沆:평장사), 충숙왕 때의 최해(崔瀣), 명종 때의 최여해(崔汝諧) 등을 들 수 있다.
해운대유적보존회(경주최씨 부산종친회)는 매년 양력 4월 17일 춘향례를 지내는데 전국에 후손과 일반 시민 600여 명이 참석한다. 그리고 해운대문화원과 공동 주관하는 전국한시 백일장이 2019년 의관 정제한 유림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운 최치원 선생을 시제로 한 행사가 개최되었다(매년 정례행사로 진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로 진행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내년에는 학술발표대회와 음악회가 계획되어 있다. 단체로는 사)고운최치원해운대유적보존회, 부산 종친회가 있다.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