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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횃불교회 설교]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김대성 목사
이 요한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살았던 제자입니다.
그래서 이 요한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달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아요.
요한은 심지어 예수님의 품에 누워서 말씀도 들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래서 이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 이 요한이 기록한 이 책들은 아주 심오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요한의 이 사상의 핵심에는 계속 반복 말씀드리는 대로 사랑이라는 것이 있어요.
사랑 제가 이제 검색을 해보니까 성경 전체에 사랑이라고 하는 단어가 한 520번 정도 나옵니다.
근데 그중에서 요한복음에 49번 그리고 요한 1 2 3서에 합쳐서 51회 한 100번 정도는 요한이 기록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특별히 요한일서에 사랑이라는 말이 40권 정도 나옵니다.
가장 많이 나옵니다. 작은 책인데 저는 최근 얼마 전부터 이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이 요한 1 2 3서를 이제 먼저 듣습니다.
들을수록 새로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래서 제가 그것을 여러 번 듣다가 오늘 이 설교 제목을 정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 두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는 말 그렇게도 기독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혹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 사랑을 일종의 감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감정 물론 감정도 포함되지만 성경에 나오는 사랑은 감정 이상의 아주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지난번 설교에서 제가 용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은 이 사랑에 대해서 좀 깊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참 자주 많이 들으셨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거 사도 요한이 한 말인데 그냥 한 말이 아니고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요한복음 13장 23절에 보면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여러분 상상해 보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품에 누워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가까이 듣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요한처럼 체득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누워서 그분의 숨결까지 느꼈던 제자예요.
그가 내린 결론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라가 아니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했습니다.
의미가 다른 겁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사랑을 안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때에 따라서
그러나 사랑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에요.
그분 자체가 사랑이니깐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려고 노력하는 분이 아니고 그분 존재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태양 자체가 빛이고 여리고 에너지이듯이 하나님은 그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범죄하고 탈락해서 죽게 되었을 때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즉각적으로 반응해서 나타나는 장면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잠깐 보았던 그림이지만요. 또 다른 각도에서 좀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죄책감, 두려움, 수치심 이런 것들 때문에 일단 자기를 가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모아가 나무 입사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옷을 무시하셨습니다. 너 그것 가지고 해결될 것이 아니야 그래서 창세기 3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러분 이 가죽이 지금 에덴동산에서 어디서 나옵니까?
가죽 가게가 없을 때 아직 한 마리의 짐승도 죽지 않았습니다.
왜 가죽은 짐승에게서 나오는 것인데, 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쥐어 입힌 것은 그 가죽은 성경 전체를 보면 양가죽입니다.
양입니다. 이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양 몇 마리가 죽었다는 것은요. 예수님이 미리 죽으신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거예요. 인간이 범죄에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이 사랑은 아무 주저함 없이 망설임 없이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양이 찢겨지고 피 흘려 죽었을 때에 예수님 이미 돌아가신 것입니다.
사랑의 증거는 희생입니다. 사랑은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겁니다.
어느 정도의 희생입니까? 희생은
사랑의 대상을 위해서 생명까지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희생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본능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입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셨습니다.
모성애, 부성애 이런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임을 희미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죄로 인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 우리에게 부여하신 그 사랑의 본성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부모의 사랑,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제 잘 아시는 뉴스가 하나 있죠? 작년 12월에 방학동에서 화재가 나서 33살 먹은 이제 약사가 안타깝게 죽은 스토리를 여러분이 아십니다.
아파트에서 화재가 났을 때 아내가 먼저 2살 된 큰 아이를 안고 밑으로 떨어졌는데 재활용 그 포대 재활용 물건을 쌓아놓은 포대 위에 뛰어내리게 하고, 본인은
7개월 된 아이를 이불과 포대기로 둘러싸고 4층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불행하게도 사람이 떨어지면 머리가 무겁기 때문에 머리부터 떨어집니다.
그 머리가 콘크리트에 떨어져서 본인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살았습니다. 포대기로 쌌으니깐요.
이 아빠가 우리 재림교회의 신실한 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보고 한 소설가가 조선일보에다가 기고를 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따라 내가 살아서 너무 기뻐. 아빠는 하늘에서 웃을 것이다 이런 제목이에요.
거기 기사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불을 피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단순히 생존 본능으로 설명한 게 부끄럽다.
아빠가 4층에서 뛰어내린 이유는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살려야 한다였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인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아빠는 대뇌로 판단한 게 아니다.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를 살려야 한다는 본능이었다.
이러한 본능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배운 것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사도 요한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6절 말씀을 다시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니라가 아니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이렇게 사도요한이 표현을 한 겁니다.
그런데 신명기 30장 20절에 보면 내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정하라.
이 부종이라는 말은 좀 어려운 말인데 이게 딱 달라붙어 있으라는 거예요.
부종하라는 것은 그 말씀을 순종하며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내 생명이시오. 내 장수시니. 지금 이 두 성경절은요.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그랬고, 다시 하나님은 생명이라고 했어요.
이 말은 사랑은 생명이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이해하셔야 돼요.
사랑은 생명이라고 그랬어요.
우리 실물 교훈에 상당히 이 말씀과 연관해서 아주 귀한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은 곧 생명이다. 사랑은 생명이다.
사랑은 그리스도인 나무에 맺히는 열매이며, 이 열매는 생명나무의 잎사귀처럼 열방을 치유하는 치유제이다.
사랑은 치유제이다. 그리스도께서 온 몸을 통하여 나누어 주시는 사랑은 하나의 생명력이다.
여러분 사랑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생명이에요. 이 사랑이 생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제가 한 가지만 소개를 다시 하겠습니다.
이것은 호주에서 일어났던 기적 같은 일인데 이것이 영국 신문에 이렇게 기록이 됩니다.
2010년 8월 26일 자 영국 데일리 메일 신문에 이렇게 이 기사가 나왔어요.
호주에서 하는 아기가 27주 만에 태어났습니다.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지 20분 만에 목숨이 끊어졌습니다.
의사는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서 죽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망했습니다.
이 아이가 죽었지만 이 아기 엄마는 죽었다고 그냥 내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게이트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엄마가 이 죽은 아이를 2시간 동안을 애정을 가지고 그 아이를 품고 있었어요.
죽은 아이를요. 2시간을 품은 거예요. 그런데 아이의 호흡과 맥박이 돌아오고 죽었던 아이가 살아났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사랑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이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겁니다.
사랑은 생명이에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생명이십니다.
이렇게 정리를 다시 하겠습니다. 태양으로부터 빛과 열과 에너지가 발산됩니다.
태양이 그것을 만들어서 보낸 것이 아니라 태양 자체에 빛과 열과 에너지가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고 생명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이고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말씀에 기초적인 말씀이에요.
그러므로 죄인이 멸망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받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생명을 얻지 못하여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멸망하시는 게 아니에요.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의 사랑을 주셨는데 그 사랑을 받지 않기 때문에 생명이 없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생명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믿음으로 받는 선물이에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식물이 태양을 받지 못하면 시들어 죽듯이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면 그것은 생명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래서 죽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믿음이에요.
이 믿음은 그냥 막연한 믿음이 아니고 단순하지만 무엇을 믿어야 되는지 히브리 11장 6절에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상이 무슨 상일까요? 이것이 바로 사랑과 생명과 영생의 상구입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정말 믿음을 가지고 생명을 얻었는지 못 었는지 확인할 수 있어요.
제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확실하게 믿으십니까?
1차 시험 통과 그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그리고 찾는 자들에게 사랑과 생명과 영생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생명을 얻은 겁니다. 이게 진리예요. 이제 조금 구체적으로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좀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말씀 마태복음 22장 37절로 40절 말씀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면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갈라사되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오 둘째는 그와 같으니, 여기 그와 같다는 말은 그 중요성에 의해서 첫째 번의 사랑과 다를 바 없이 중요하고 똑같다는 거예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이 말씀하시면서 온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는 말씀은 그 당시 존재하고 있던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구약 성경이라는 이름이 없기 때문에 그냥 율법과 선지자만 구약 성경이에요.
구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되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요약한 거예요.
한마디로 하면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랑과 관계되어서 나오는 중요한 단어가 성경에 여러 차례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게 무엇이냐 출기 20장 6절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나를 사랑하고 무엇을 지켜요? 계명을 지키는 자 요한일서 5장 3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즘 이게 기독교인들이 주로 생각하는 것은 계명은 인간이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폐지되었다 이런 말들을 참 함부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하고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계명을 너무나 즐겁게 또 쉽게 지킬 수 있다는 말씀이에요.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했거든요. 어떻게 그런지 설명을 제가 계속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이거 얼마나 확실합니까? 나의 계명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너희가 구원을 받았고 그 받은 구원으로 인해서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말대로 순종하고 살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 지켜서 하나님 덕 볼 곳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자꾸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그 인간이 정말 마음의 평강을 가지고 영생하려면 그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잘 살아야 되거든요.
자 이 계명은 뭐 우리가 여러 각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마는 성경 전체를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볼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또 계명이라고 볼 때 그 계명을 말씀을 압축해 놓은 것이 십계명이에요.
그래서 이것은 절대로 빗나가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돌 위에 써서 내려주신 겁니다.
한번 보십시다. 2 돌비가 있어요. 한쪽 돌리비에는 하나님 사랑에 관련된 계명이고 또 다른 한쪽 돌비는 사람 사랑과 관련된 계명입니다.
자 저 하나님 사랑과 관련된 계명 중에서 폐지될 것이 있습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나를 사랑하면 정말 나를 사랑하면 그 우상 같은 거 만들어서 저라고 하지 말아라.
정말 나를 사랑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내 이름을 망령 때에 일컫지 말아라.
그리고 나를 사랑하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라.
왜 사람들이 자꾸 계명이 패했다고 말하려고 합니까?
안식일이 걸리는 겁니다. 안식일이 폐지됐다고 그러므로 계명도 폐지됐다.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이웃 사랑 계명 중에서 폐지될 게 있습니까?
부모 공경해라 살인하지 말아라. 가늠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거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어느 것이 폐지될 수 있습니까? 저는 폐지될 수 있는 계명이 아니에요.
자 이 계명을 어떻게 할 때에 정말 즐겁게 쉽게 지킬 수 있는지 이제 좀 더 나아가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점검을 해보겠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너를 살리기 위하여 내 생명까지 줬다. 그런데 너는 말로는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썩어 없어질 세상 사물에 너무 관심이 많고, 나보다는 가족을 재물을 친구를 더 사랑하니 내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슬프구나.
내 계명은 너희의 행복과 건강을 위한 것이니,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에 순종하거라. 나는 너희가 건강하게 살기를 원해.
나는 너희가 행복한 마음으로 살기를 원하는 거야.
그런데 너희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계명 속에 들어있으니 그것을 지켜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 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걸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웃과 형제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과 21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너 나 사랑해 그럼요 나에게 구원을 주셨는데 사랑하지 내 옆에 있는 형제, 너를 해코지하고 너를 힘들게 하는 형제도 사랑해 그거는 그렇게 쉽지 않네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에요. 보는 바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지금 이 시간에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해롭게 하고 나에게 손해를 끼친 내 이웃을 내가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요한일서 3장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이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왜 사랑은 생명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생명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 생명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인간이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러나 우리가 정말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 저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정말 솔직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그 미워하던 마음이에요.
눈처럼 녹아지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뭐 시간이 없어서 그 이야기는 못 했겠습니다마는 아버지를 평생 동안 미워하던 그 이유가 다 있었어요.
한 집사님이 아버지를 사랑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러 요양원에 들어가서 한 주일을 기도한 거예요.
한 주일을 6일을 기도했는데도 별로 변함이 없었어요.
마지막 일곱째 날 기도드리는데 그 아버지를 미워하던 마음이 이상하게 눈처럼 녹아지고 1단계로 아버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사랑의 첫 단계는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의 이 생명적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이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참 아주 심오한 말씀들을 많이 썼어요.
요한복음 15장 5절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라.
여러분 이 관계는 상당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이 무엇이냐 이거예요.
설명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그다음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한다는 말을 다시 바꾸셨어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은 말씀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시작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선언할 때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가슴속에 깊이 받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예수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진리라고 말씀하셨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냥 말씀을 아무렇게나 받아들여서 예수님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생명이신 진리의 말씀이 내 속에 거할 때에 주님이 내 속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사는 방법이에요.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그래서 내가 저 안에라고 하는 말은 내 말이 너희 안에 뭐 그런 뜻입니다.
진리가 너희 안에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요한복음 15장 9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씀이에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분명하죠.
그러니까 이런 관계입니다. 그분의 생명의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오고
이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에 이게 열매로 나타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요한복음 15장이 가르치는 교우는 그 하나님의 주님의 말씀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에 그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그것이 원리예요. 그래서 저가 내 안에 산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증거는 그분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여러분 성경은요 다 앞뒤가 맞게 돼 있어요. 이것저것 끌어다가 자기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다른 방법으로 한두 가지씩 성경을 다르게 해석하면요.
전체가 틀어져서 다 답이 거꾸로 가는 겁니다. 에이 계명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실제적인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뭐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한 부자 관원이 이제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의 도리를 묻습니다. 제가 이야기 다 아시기 때문에 자세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이 부자 관언은 상당히 그 외형적인 행위로 볼 때에 별로 나무랄 것이 없는 아주 신실한 유대인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가 별로 없는 그런 아주 신실한 사람이었어요.
근데 예수님께서 너가 부족한 게 하나 있다. 누가복음 18장 22절에 내가 오히려 하는 것이 부족한 것이 있으니 내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내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거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근심만 한 게 아니라 가버렸습니다. 이건 성경에 나오는 매우 불행한 이야기 중에 하나예요.
생명을 얻을 길이 있었습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를 만나서 생명을 얻을 기회가 있었는데 재물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는 아주 슬픈 이야기예요.
그리고 이것은 수많은 인간들을 대표하고 있는 겁니다.
실물 기원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 자신도 그리스도를 훌륭하게 보았고, 그의 마음도 그리스도께로 이끌렸으나 그리스도의 자아 희생의 원칙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자아 희생의 원칙 그는 예수님보다 재물을 선택했다.
그는 영생을 원했으나 그의 심령의 생명이 되는 이기심이 없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에도 생명은 사랑과 연관되어서 나오죠. 그리하여 그는 근심하면서 그리스도를 떠나갔다.
참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마는 우리 모두가 다 이 청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을 수 있어요.
한가지 비유를 더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부자가 소출이 많아 가지고 수확을 해보니까 뭐 엄청난 겁니다.
창고를 지어서 여기저기 다 집어넣고 굉장히 이제 만족한 마음으로 야 이제 뭐 이 정도면 내가 충분히 먹고 살겠다.
충분히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먹고 살고 남고도 남죠.
주님께서 이 비유 속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니가 아무리 그래봐야 오늘 밤에 내 생명이 없어지면 그게 다 누구 거냐 그러니까 욕심 부리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줘.
이 어리석은 부자에 대해서 실물교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이러한 때에 자기에게 가장 요긴한 것을 갖지 못했다.
그는 자기를 위해 삶으로 자기 동포들에게 흘러갈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그는 생명을 거절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은 곧 생명인 까닭이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십니까? 사랑은 생명이에요.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생명을 얻고 영생을 얻기를 원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식물 교원 책을 좀 더 읽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면 우리는 우리의 동료 인간들과도 사랑의 금고리로 연결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동료들과 사랑의 금고리로 연결되면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긍휼과 동정심이 우리의 생애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궁핍한 자들과 불행한 자들이 우리를 찾아오기까지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삶의 불행을 동정해 달라는 간논을 받을 필요가 없다.
이 마지막 문장은요 누가 도와달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는 거예요.
살펴보고 도움이 필요하면 손을 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시던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궁핍한 자와 고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내가 주님 안에 있으면 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돕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기뻐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원리예요. 주님께서 오실 때
이런 말씀을 하실 것이라고 마태복음 25장에 양과 염소의 비유 속에 이런 말씀이 나오지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가로사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제가 오래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전에 여기에 글자 하나를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여기 예수님께서 내 형제라고 하셨는데 나는 내 형제로 알고 있었습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까 내 형제가 아니고 내 형제예요.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류를 자기의 형제로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거예요.
자기 형제를 돕지 않으면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니까.
십자가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를 사랑하라.
너희 모두는 내 형제들이다. 너희가 함께 살아가는 동료 인간을 비유하면 그것은 내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다.
내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주변에 힘들고 가난한 자들을 돌봐주면 그것은 바로 내 형제를 도와주는 것이다.
내 형제를 도와주는 것은 곧 나를 돕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함께 형제라는 사실을 늘 생각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도우면서 살다 보면 나중에 하늘에서 우리 모두 같이 살게 될 것이다.
이게 주님의 말씀이에요. 이게 주님의 마음이에요.
끝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이 말씀 우리가 잘 압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지금까지 여러분은 이 사랑이라고 하는 이제 추상적 관념적 의미를 들으셨습니다.
그러면 사랑은 실제로 무엇이냐 이제 여기에 답이 나오는 거예요.
마태복음 22장 37절로 40절, 마태복음 7장 12절 같이 보겠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구약 전체의 가르침은 사랑하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마태복음 7장 12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똑같은 결론이에요.
그러니까 구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하면 사랑하라는 것이고 다른 말로 표현하면 대접하라는 것이에요.
이것이 구약 사상, 하나님의 사상 전체를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사도행전에 보면 정말 귀한 말씀이 있어요.
거룩한 은혜로 새롭게 된 마음속에서 사랑은 행동을 지배하는 원칙이다.
사랑은 충동적인 감정이 아니에요. 사랑은 행동을 지배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이것은 이 원칙대로 살면 품성을 수정하고 충동을 지배하고 감정을 억제하고 애정을 고상하게 한다.
마음속에 간직된 이 사랑은 생활을 유쾌하게 하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품위 있는 감화를 끼친다.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돕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다 보면 주변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품위 있는 가마를 끼친다.
이거 얼마나 멋있어요 사람을 이렇게 살라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겁니다.
산상보원의 이 말씀과 관련해서 정답이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은 대접하라는 것은 그 말이에요. 또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대접하라는 것은 사랑하라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다.
같은 표현이라는 말씀이죠. 이것은 대접하는 것은 하늘의 원칙이므로 하늘의 거룩한 교재에 합당한 모든 사람에게서 개발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늘에 가서 살기를 원하면 사랑하고 대접하는 것을 이 땅에서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하늘에 가봐야 불편해서 못 산다는 거예요.
하늘에 가면 모두가 다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하여 대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거기서 혼자서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면 본인도 불편해서 못 삽니다.
이것이 원리예요.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생각이 이런 것입니다.
형제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시기 질투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고 형제를 존중하며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요.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고 행동이 아니고 마음의 동기예요.
왜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그래요 마음은 미워하면서도 겉으로 멋지게 할 수 있어요.
베풀고 나눠주고, 속은 비워하면서도 생각이 중요한 것입니다.
언어 형제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험담하거나 모함하지 않고 언제나 친절하고 좋은 말로 희망과 용기를 주며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에요. 그다음에 나누는 거예요. 언제나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형제의 유익과 행복을 위하여 나누며 사는 것이 이게 사랑입니다.
더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자신이 먼저 받은 생명의 복음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천국에서 함께 살기를 원하면서 일하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이에요. 구체적인 사랑이에요. 구체적인 표현이에요.
요한복음 3장 17절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먹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장로회 계단에 이런 귀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확인하는 단서입니다.
남을 위하여 사욕이 없는 노력에 몸을 바치는 자들은 확실히 저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구원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불안할 때가 많죠.
이게 그것을 시험하는 시금석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타심을 가지고 남을 위해서 살고 있느냐, 이기적으로 살고 있느냐 이것이 그 시금석입니다.
남을 위하여 사육이 없는 노력에 몸을 바치는 자들은 확실히 저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선행은 친절을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게 다 같이 유익을 줌으로 이중의 축복이 된다.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병든 몸과 마음을 치료해 주는 가장 좋은 약 중에 하나이다.
의무를 잘 감당했다는 생각과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제공해 준 데 대한 만족감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가볍고 기뻐질 때 즐겁고 향상시키는 힘이 온몸에 새 생명을 가져다 준다.
여러 번 경험하셨죠? 내 돈, 내 시간, 내 가진 것 남에게 나누어주면 분명히 나에게서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은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어요. 저희 집사람이 열애 전에 제가 연합회에 있을 때 목에 좀 이상이 와가지고 굉장히 위태로웠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치료를 하고 뭐 상당히 기도도 하고 뭐 또 녹즙도 마시고 해가면서 오랜 세월 투병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병이 아직 온전히 회복이 안 됐는데 어머니가 고관절이 이제 상하셔서 휠체어를 타고 사실 수밖에 없게 됐어요.
딸들이 이제 당번을 정해서 가서 도와야 되는 거예요.
우리 집사람 본인의 몸도 편치 않았지만 어머니를 도와야 되니까 가서 더운 것입니다.
일주일에 이틀 온종일 자기도 안 좋은데 더 안 좋은 어머니를 위해서 봉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봉사하는 기관을 통해서 몸이 거의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그 원리예요.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병든 몸과 마음을 치료해 주는 가장 좋은 약 중에 하나이다.
이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만든 그 원리입니다.
요한일서 1장 5절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하나님은 생명이시라 사랑이시라 빛이시라. 요한일서 2장 9절로 11절 빛 가운데 있다 하며 하나님 안에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고 있다면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길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진리요 빛이요 사랑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요한일서 4장 21절에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제가 고등학교 때 저희 학교의 교훈이 36고등학교 교훈이 진리 사랑 봉사였어요.
그때는 그냥 막연하게 외웠는데 지금 제가 조금 철이 들고 나니까 그 말이 그렇게 중요한 말이에요.
그래서 끝으로 이렇게 정리하고 끝나겠습니다. 진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원리이고, 사랑은 구원받은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이고, 봉사는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 말씀을
삼육학교 교훈이 아니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평생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진리 사랑 봉사를 교훈으로 삼고 사시면서 하늘까지 안전하게 돌아가시게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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