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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석(羅景錫) 연보
나경석(羅景錫, 1890년 조선 고종(高宗) 27년 9월 27일(음력 8월 14일)~1959년 12월 31일; 향년 70세)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사회운동가•사업가•정치인
교육자•대한민국 초대 정부 문교부 편수관 역임.
한국민주당 상임위원•민주국민당 전임위원•민주국민당 최고위원
대한민국 공화국(共和國) 정체 주창자(공화국 설립에 대한 논문 발표)
191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공과대 유학생(일본 공과대 화공학 전공)
만주와 연해주의 개척자
―공민 나경석 선생은 독립운동으로 감시를 당한 이후로 연해주로 망명해서 농업을 개척하고 고려인들을 계몽했으며, 만주에서 농업 개간 사업과 공장 경영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황해도 해주에서도 과수원 등의 농장 경영을 했으며, 연해주에서 만주와 황해도 해주까지 개척 사업을 널리 펼친 민족의 개척자였다.
본관 나주(羅州) 나주 나(羅) 씨 부사공파 24세손
아명(兒名) 나두남(羅斗南)
아호(雅號) 공민(公民)
필명(筆名) 나공민(羅公民)
경기도 수원의 명문가 부호 가문 출신
조선 후기 이후 수원 지역 명문 고관(高官) 대지주
나경석의 가문은 증조부 이전부터 “나 참판 댁,” “나 부잣집”이라고 불림.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
―17세기 나주 나 씨 11대손 부사공이 수원부사로 부임해서 수원에 정착하면서 수원 나주 나 씨 부사공파 명문 부호 가문이 시작되었고, 19세기 이후가 되어서야 수원에 정착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들은 대대로 호조참판을 증직으로 받았으며, 나경석과 나혜석 오누이의 조부 나영완도 호조참판을 역임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수원 부사공파 가문은 나 참판 댁이나 나 부잣집이라고 불렸다. 『나주나씨세승』에서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빈손으로 집안을 일으켜 부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기록
여류 독립운동가•여류 서양화가•소설가 정월 나혜석(羅蕙錫, 1896년 생~1948년 몰)의 작은 오빠
여동생 나혜석의 학업과 여성 운동 및 독립운동의 후견인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한국영어영문학회 회장 나영균과 서울대 미대 교수•여류 서양화가 나희균의 아버지
우리나라 고무 산업의 선구자(고무신, 고무 타일 등 제조)
동아일보 객원기자•연해주 특파원•만주 지국장 역임.
일본 도쿄고등공업학교 졸업•중앙학교 과학 교사•동아일보 기자•사업가(간척 사업, 고무 제조업)•대한민국 문교부 편수관 역임.
증조부 증 호조참판 나○○
조부 훈련원봉사•훈련원참군•종2품 호조참판 나영완(羅英完, 1825년 조선 순조(純祖) 25년 8월 13일 생~1890년 조선 고종(高宗) 27년 4월 1일 몰; 향년 66세)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2대손, 자 영서(永瑞)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묘역.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台安面) 구봉산(九峯山)
외조부 수원 지역을 대표하는 수원 최 씨 관료 최성대(崔成大, 1834년 생~1909년 몰)
조부 나영완의 자녀 3남
―1남 나기원(羅基元), 2남 나기형(羅基亨), 3남 나기정(羅基貞) 3형제
백부 가선대부 중추부사 나기원(羅基元, 1851년 생~1907년 몰)
―중추부사 나기원의 아들 관찰사•삼일학교 설립자 종손 나중석(羅重錫, 1878년 생~1970년 몰; 자 성규(聖奎), 호 매조(梅祖), 이음당(耳音堂), 1901년 함경도관찰사, 1906년 정3품 통정대부, 삼일학교 설립자, 수원 지역 대지주, 자선사업가, 대토지 분배의 공덕으로 분천리 나중석 송덕비 건립)
―통정대부 나중석의 아들 나세균(羅世均), 나재균(나정균)
백모 철원(鐵原) 송 씨
백부 나기형(羅基亨)
부 수원면장•경기도관찰부주사•환소도감위원•친일파 시흥군수•용인군수 나기정(羅基貞, 1863년 조선 철종(哲宗) 14년 5월 20일~1915년 12월 10일; 향년 53세)
―집터.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수기리 일대
―묘역.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수기리 선영(묘역 아래에 나주 나 씨 납골당 소재)
―5남매의 아버지로서, 이복 딸 나계석을 제외하고, 두 딸 나혜석과 나지석에게 집안에서 한학 교육을 시켰으며, 나혜석에게 삼일학교와 진명여고보 그리고 일본 유학까지 신여성 교육을 시킴.
모 수원 최(崔) 씨 최시의(崔是議, 출생 연도 미상~1919년 11월 3일; 경기도 남양군 서여제면장(현 화성시 서신면 서부 지역) 최성대(崔成大)의 여식)
몇 명의 첩(妾)
―부 나기정은 여러 명의 첩을 들였고, 나혜석이 사춘기 시절 나혜석보다 한 살 위의 첩이 있었고(기생 출신 백홍산(白弘山)), 이복 언니 나계석의 생모가 첩이었으며, 나혜석 또래의 첩도 있었다. 나혜석이 일본 유학 중에도 또 다른 첩을 얻었다. 모 최시의가 어린 첩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자, 나혜석은 가부장제와 축첩제도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자녀 2남 3녀
―조혼한 큰누이 서녀 나계석을 제외하고 2남 2녀가 일본 유학
1남 나홍석(羅弘錫, 자 나도은(羅燾殷), 동복 형, 백부 나기형(羅基亨)의 양자로 입적, 1909년 일본 도쿄 와세다대 정치과 졸업, 1918년 수원금융조합 서기, 1920년 수원면협의원, 1923년 경성편리사이사, 조선 수원청년구락부 회장, 대화교 간부 역임. 집터. 수원면 남창리 55번지 소재)
2녀 큰누이 서녀 나계석(羅稽錫, 1883년 생~1939년 몰; 이복 큰누이, 나혜석이 태어날 무렵 13세에 수원의 영향력 있는 가문 수원 최 씨 이복 매형 최기환(崔基煥, 1884년 생~1948년 몰)과 조혼, 수원 유지 최기환과 조혼한 나계석이 서녀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3남 나경석(羅景錫, 자 나도헌(羅燾憲), 본인,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공과대 유학생)
4녀 나혜석(羅蕙錫, 1896년 4월 28일 생~1948년 12월 10일 몰, 동복 여동생, 5남매의 넷째 자녀, 딸 중의 둘째 딸,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 여류 서양화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어머니, 여류 독립운동가(2•8선언, 3•1운동, 그 밖의 독립운동 주도 및 참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단편 소설가
―묘역.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부근
―정월 나혜석의 연애 이력(일본인 청년 화가 사토우 야타, 시인 최승구, 소설가 이광수, 변호사 김우영, 독립운동가 최린 등)에 대해서 나혜석은 자신의 연애와 결혼은 “내가 여자요,” “내가 조선 사람이오”라는 여성 운동과 조선 독립운동을 위한 것이었다고 술회(1917년 『학지광』 게재 「잡감(雜感)―K언니에게」 참조)
―청년 화가 사토우 야타는 청년의 열정으로서 간절히 결혼을 요청했다고 하며,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독신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나혜석의 첫 연인으로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이다.
―시인 최승구가 요절하자, 나혜석은 매우 당황하고 아쉬워했으며, 나경석이 만주 봉천에서 고무 공장을 경영할 때 최승구의 사촌 동생 최승만(崔承萬)이 공장 지배인으로 일했다. 또한 나혜석이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한 후에 첫 신혼여행으로 최승구의 묘지를 참배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소설가 이광수와 연인일 적에 나경석이 이광수가 약해 보인다며 건강상의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 이후에도 나경석과 이광수는 친분을 두텁게 이어갔으며, 이광수는 나혜석의 절친한 친구 최초 여의사 허영숙과 결혼했고, 허영숙은 헌신적인 아내가 되었다. 이후에도 이광수는 나혜석에 대해서 회고하면서 최대의 존중과 헌사를 보냈다.
―나혜석이 3•1운동의 주모자로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에 변호사 김우영은 엄청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우울한 생활을 했으며, 본인 역시도 나중에 감옥 생활을 해야만 했다.
―프랑스 대사 시절 프랑스 유학 중이던 나혜석을 보호하다가 스캔들을 일으킨 민족 대표 33인의 1인 최린은 나혜석이 3•1운동 주모자로 옥고를 치르자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으며, 최린 역시 나중에 감옥에 잡혀가야 했다.
―나혜석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여성으로서, 조선인으로서 여권 운동과 독립운동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살았다는 입장이다.
5녀 나지석(羅芝錫, 동복 막내 여동생, 일본 음악학교 유학, 언니 나혜석보다 먼저 평안도 곽산 부호 김창곤과 결혼)
독립운동가 나경석의 처 송남(松南) 배숙경(裴淑卿, 1902년 생~1995년 몰; 1921년 겨울 결혼, 개성상인 집안 출신으로 동아부인상회 근무)
자녀 1남 3녀
1녀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한국영어영문학회 회장 나영균(羅英均, 1929년 1월 1일 생~)
―만주 출생, 경기여고 졸업, 경성여자전문대학(이화여대 전신) 수학,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 전입학, 1948년 이화여대 학사 학위(4년 과정), 이화여대대학원 영문학박사
―1950년 8월 1일 이화여대 4학년 당시 대학교수•화학공학자 전민제와 결혼, 자녀 1남 3녀
―김종필•김용권과 교유, 영국 소설 전공, 번역문학가•서예가, 호 여정(如庭), 1994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류 영문학자
2녀 서울대 미대 교수•여류 서양화가 나희균(1932년 생~)
―화가 안상철(1927년 생~1993년 몰)과 결혼, 아들 건축가 안우성(1966년 생~)
―만주 봉천 출생, 경기여고 미술반(미술교사 최덕휴), 서울대 미대 진학, 동기생 화가 안상철과 교유, 제2회 국선 입선, 중앙여고 미술교사, 파리 유학, 파리 개인전, 귀국 개인전, 화가 안상철과 결혼, 안상철 사망,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3남 나상균(1934년 생~; 서울 종로구 부암동 거주, 나혜석의 프랑스 파리 근교 마을 풍경화 소장)
4녀 나정균
조카 나사균(羅姒均, 1914년 생~)
나홍석의 손녀 여류 영화배우 겸 연기자 나문희(본명 나경자)
조카사위 전민제(딸 나영균의 부군)
재종손서 정승호
여동생 나혜석의 자녀 3남 1녀
1녀 개성 모 여학교 교사 김나열(金羅悅, 1921년 4월 29일 생~)
2남 김선(金宣, 1924년 생~사망 연도 미상, 요절)
3남 서울대 법학과 교수•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교 법학과 교수•미국 웨스턴주립대학교 법학과 교수 김진(金辰, 1926년 12월 19일 생~)
4남 한국은행 총재 김건(金建, 1929년 6월 20일 생~2015년 4월 17일 몰)
그 밖의 후손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4대손 수원 화성 지역 대지주•사업가 나창석(羅昌錫)
―나경석•나혜석 가문과 12촌이 넘는 사이
―저술가 나종혁(羅鍾赫,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6대손)의 조부
1890년 1세 9월 27일 음력 8월 14일 조선국 경기도 수원군 남부면 남수동리(현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에서 수원 나주 나 씨 명문 갑부 용인군수 나기정과 수원 최 씨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나경석 출생(출생지가 수원군 신풍동 291번지라는 설도 있다.)
1896년 7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류 독립운동가•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단편 소설가 둘째 딸 나혜석이 부 나기정의 큰대문집 수원시 팔달구 일대에서 출생
1900년 11세 광무 4년 대한제국 시대 부 나기정 경기도관찰부주사
1901년경 12세 나경석 경기도 수원공립보통학교 졸업
1902년 13세 광무 6년 대한제국 시대 부 나기정 경기도관찰부 주사 판임관 6등(재판주사). 사촌형 나중석이 사립삼일여학당(1909년 삼일여학교로 개명, 현 매향중학교)을 설립(수원 보시동 북감리교회 내 소재)
1904년 15세 대한제국 시대 부 나기정 환소도감 위원
1909년 20세 융희 3년 대한제국 시대 3월 20일 부 나기정 시흥군수 임명. 부 나기정 정3품 승진. 4월 부 시흥군수 나기정이 충렬공 하위지(河緯地)의 제문(祭文)을 씀(진주(晉州) 하(河) 씨 지봉주손가(砥峯冑孫家) 소장)
1910년 21세 9월 여동생 나혜석과 나지석이 서울 진명여학교 진학(기숙생). 10월 한일 병합 조약. 부 나기정 조선총독부 시흥군수 연임. 나경석 일본 유학. 나경석 일본 세이소쿠영어학교(정칙(正則)영어학교) 입학
1911년 22세 나경석 일본 세이소쿠영어학교(정칙(正則)영어학교) 2년 과정 졸업. 나경석 도쿄고등공업학교 화공학 전공 입학(일제 강점기 조선의 대표적인 공학자로 유학 교육)
1912년 23세 부 나기정 경기도 용인군수
1913년 24세 부 나기정 용인군수. 여동생 나혜석이 서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제3회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자,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드물던 당시에 『매일신보』 등 신문에 하이틴 스타 나혜석의 수석 졸업이 보도됨.
나경석 일본 유학(도쿄고등공업학교, 일본 유학 중에 사회 빈민 운동, 일본의 사회주의자 및 무정부주의자와 교유). 나경석이 여동생 나혜석에게 일본 유학 권유(일본 도쿄여자미술학교 추천). 나경석이 일본인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와 교유
1914년 25세 7월 나경석 일본 도쿄고등공업학교(현 도쿄공업대학) 응용화학과 전문학사(3년 과정 졸업). 행정 개편으로 부 나기정 용인군수 사임(추정).
1915년~1918년 26세~29세 나경석 일본 오사카 재일동포 빈민굴에서 필명 공민으로 활발한 사회 빈민 운동
1915년 26세 1월 나경석이 일본 오사카 최초의 재일 조선인 단체 재판조선인친목회 총간사 담당. 나경석이 최승구에게 보낸 편지가 2월 『학지광』에 「低級의 生存欲」이라는 제목으로 게재. 12월 10일 부 용인군수 나기정 서거(향년 53세). 나경석이 제약업 경영에 실패
1917년 28세 나경석이 교토제국대학 법학과 친구 김우영을 나혜석에게 소개. 여동생 나혜석이 춘원 이광수와 사귀자, 나경석이 반대. 2월 8일 나경석이 종로 기독청년회관에서 윤치호를 만났고, 윤치호가 도요나가(豐永) 박사를 소개해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공장 경영 추천
1918년 29세 6월 공민 나경석 선생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 이후 신익희, 윤홍섭 등과 비밀 독립운동 모의. 나경석이 일본에서 귀국해서 인촌 김성수가 세운 서울 중앙학교 물리 교사 1년 봉직(제자 이희승)
1919년 30세 공민 나경석 선생이 중앙학교 과학 교사 재직 중에 3•1운동의 모의에 참가했고(교장 송진우, 교사 나경석, 현상윤, 교주 김성수 등이 학교 구내 사택에서 야간 회의), 나경석 선생이 2월 28일자 인쇄 「독립선언서」 1천 장을 만주 길림성에서 활동하던 손정도(孫貞道, 1872년 생~1931년 몰) 목사에게 전달하고, 만주에서 총기 10정을 구입해 귀국하다 안동현에서 체포되어 3개월 감옥 수감 생활(경성지방법원에서 강도, 보안법 위반 등 혐의)
1920년 31세 나경석 선생이 감옥에서 석방 후에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의 추천으로 러시아 연해주 동아일보 객원기자 임명. 논문 「사계사조와 조선농촌」, 「로서아의 교육과 열강」을 『공제』 창간호에 게재
1921년 32세 나경석 동아일보 객원기자. 동아일보에 「만주로 가는 길」, 「로령견문기」 게재. 나경석 선생이 원산을 거쳐 두만강을 도강해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 1월 27일 나경석이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 러시아음악단의 조선 방문 추진(음악 단원 활동설). 나경석 선생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인촌 김성수의 권유로 수원의 부동산 절반을 팔아 조선인을 위한 원동수농주식회사를 창업하고 연해주에서 논농사 사업 시도. 나경석 선생이 3년간 연해주 교포 2세들에게 조선어 교육. 나경석은 일본 니카타현 조선인 학살 사건 당시 동아일보사 위촉으로 김약수(金若水, 1892년 생~사망 연도 미상)와 같이 진상조사위원 활동 및 동경 소재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보고 연설회 개최. 겨울에 나경석 선생과 배숙경 결혼
1922년 33세 10월 21일~27일 사이 나경석 기자가 『동아일보』 5회분 연재 기사 「시베리아 동포의 살아갈 길」 게재(공산 치하 러시아령 시베리아에서 해외 동포가 가야 할 길 제시)
1923년 34세 1월 20일 나경석 선생은 조선물산장려회 창립총회에서 신임 이사회 20인의 이사 1인으로 선출. 나경석 선생이 조선물산장려회에서 활동하며 조선물산장려회 회지 『산업계』에 여러 차례 글 기고. 나경석 선생이 민족주의 진영의 물산장려운동에 참가하자, 사회주의 진영에서 전향자라고 비판. 2월 24일~3월 3일까지 나경석 기자가 『동아일보』에 7회에 걸쳐서 「물산장려운동과 사회문제」라는 제목으로 논설 기고. 9월 일본 동경 지역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인 대량 학살과 일본인 사회주의자 학살 자행(일본인 사회주의자 39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1885년 생~1923년 몰) 사망, 아내 이토 노에와 어린 조카 다치바나 소이치 사망). 11월 나경석 선생 조선물산장려회 소비조합 설립위원
―물산장려운동 논쟁에서 볼셰비키적 변혁을 주장하는 서울청년회계 사회주의자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생산력 고양을 주장하는 상해파 간의 대립에서 나경석은 상해파 국내 책임자였다.
1924년 35세 3월 정치인 겸 저술가 나경석이 천도교 잡지 『개벽』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화국 체재에 대해 기고―「사상의 귀추와 운동의 방향」(나경석은 조선의 전제정치가 무너지고 입헌군주제를 추진했으나 조일 병합 이후에는 근대정치의 이상을 “공화대의제”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미래 조선의 정체라는 것이 일반인들의 의견이라고 주장했다. 1919년 이후로는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제가 전 국민이 생각하는 정치 체재라는 주장―박명수, 「[한국기독교학술원 발표논문] 3•1운동, 기독교, 그리고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기독교적 기원에 대한 소고」, 『미래한국』, 2018-11-01 참조)
6월 나경석 선생 조선물산장려회 이사 사임. 나경석 선생은 중국 만주 봉천으로 이주해 주식회사 민천공사를 조직하고 간척 사업과 고무 공장 경영으로 기업가 활동. 나경석 기자 만주 동아일보 특파원 및 봉천지국장. 사업가 나경석은 경상도와 평안도 농민 20여 가구를 만주로 이주시켜 농업회사 경영
1930년대 41세 사업가 나경석의 만주 농업회사 폐쇄. 사업가 나경석은 삼창고무공장을 건립해 60여 명의 조선인 직공으로 성공(고무창을 단 양말형 신발 지까다비 생산; 최승구의 사촌 동생 최승만(崔承萬)이 공장 지배인)
1934년 45세 나경석 선생 만주 봉천 지역 조선인 친목회 공영회(共榮會) 회장
1936년~1940년 47세~51세 나경석 선생은 만주 봉천 서탑에서 화학공학 전공을 살려 삼창고무공장 경영인으로 성공한 조선인 사업가가 되어 만주 망명 독립지사들에게 도움을 줌. 나경석 선생이 만주 봉천 지나 사변 국민대회 조선인 대표와 협화회 봉천성본부 위원 등으로 친일 활동을 했고, 독립 단체 관계자들과도 긴밀한 교유
1941년 52세 봄 나경석 선생 서울 청운동 한옥으로 이사. 사업가 나경석 황해도 해주 농장에서 과수원과 정미소 경영. 사업가 나경석 건설회사 삼건사 설립 및 경영. 나경석 선생은 창씨개명으로 성을 나전(라뎅)으로 개명. 나경석 선생이 춘원 이광수 일가와 친분이 두터워 같이 휴가 여행을 감. 나경석 선생이 대종교 관계자들과 교유. 나경석 선생은 사직동 집터를 빈민들에게 희사하고 구제 사업 실천
1945년 56세 8•15 해방. 10월 2일 『매일신보』에 사업가 나경석이 조선전재기술자협회를 결성했다는 소식 보도(우리 공업은 우리 손으로 건설하자는 취지). 남북한 분단으로 사업가 나경석이 해주에 투자한 재산 손실. 사업가 나경석 서울 공장 경영 실패. 정치인 공민 나경석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상임위원으로 활동
1948년 59세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정치인 공민 나경석 민주국민당 전임위원,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1950년 61세 6월 25일 새벽 4시 6•25사변 발발. 나경석 선생은 가족을 먼저 피란 보내고 서울에 잔류하다가 전향자라는 사유로 체포되어 총살형 직전 탈출
1951년 62세 5월 30일 공민 나경석 선생 대한민국 이승만 초대 정부 문교부 편수관(백낙준 문교부 장관)
1952년 63세 2월 29일 공민 나경석 선생 문교부 편수관 임기 만료
1954년 65세 봄 사업가 나경석 고무 타일 사업(고무로 만든 타일, 수놓은 한복 치마저고리, 연결 무늬 날염 옥양목, 구두 모양 개량 고무신, 흑인 고수머리 펴는 약 등 다양한 아이디어 창안)
1957년 68세 공민 나경석 선생 천주교 입교(세례명 요셉)
1959년 70세 12월 31일 공민 나경석 선생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 자택에서 서거. 향년 70세
묘역
경기 양주 광전리 천주교 묘지 안장
생가
부 나기정의 수원 큰 대문집 집터
―수원 남수리,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45번지) 소재
사당
나주 나 씨 부사공파 종중 사당
―전남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 141-1번지 소재
1980년 나경석 저, 『공민문집』, 정우사 간(유고 저서)
1997년 12월 유시현, 「나경석의 ‘생산증식’론과 물산장려운동」, 『역사문제연구』 제2권, 역사문제연구소, 293~322. (논문)
2001년 12월 심원섭, 「1910년대 “여로구조”형 서사와 낭만적 서정시에 나타난 일본유학생 문인들의 대 한(韓)•일(日)의식에 대하여―주요한, 나경석의 산문과 김여제, 김억의 서정시를 중심으로」, 『한림일본학』 제6권,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18~35. (논문)
2004년 9월 7일 나경석 선생의 첫째 딸 이화여대 영문과 명예교수 나영균 저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황소자리 간)에서 아버지 나경석을 “좌절한 사회주의 지식인,” 고모 나혜석을 “좌초한 여권 운동가”로 기술(원대연 기자, 「독립운동가 나경석... 한국 최초 여성화가 나혜석...」, 『동아일보』, 2004-09-07 참조)
―나영균의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 일본어판 2003년 발행
2006년 10월 박성래, 「식민지 조선의 못다 핀 과학기술자 ‘나경석’(羅景錫 1890~1959)」, 『과학과 기술』 10월호, 108~109. (논문)
2008년 부 나기정이 민족문제연구소 간 『친일인명사전』 관료 부문 친일파로 수록
2011년 박성래 저, 『인물 과학사』, 책과함께 간
2012년 한동민, 「수원 나주나씨와 나혜석의 부모 형제들」, 『나혜석연구』 제1권 제1호, 나혜석학회, 177~224. (논문); 김성연,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의 아인슈타인 전기와 상대성이론 수용 양상」, 『역사문제연구』 통권 16권 제1호, 역사문제연구소, 33~62. (논문)
2019년 윤덕영, 『1920년대 전반 조선물산장려운동 주도세력의 사회운동론과 서구 사회주의 사상과의 비교―‘국내상해파’와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중심으로」, 『동방학지』 통권 187호, 연세대 국학연구원, 1~41. (논문)
저서
『공민문집』(公民文集, 1980년 10월 15일)
―나경석 저, 정우사 간, 273쪽, 양장본 하드커버 세로읽기
―목차(서문/송남 배숙경, 공민 나경석 선생을 추억하면서/김두종, 공민 나경석 형을 생각함/최승만, 아버님 문집을 내면서/나상균, 아버지와 나/나영균, 제1부 수상과 기행(저급의 생존욕, 양혜와 시가, 석왕사에서, 과학계의 일대혁명), 제2부 만주 가는 길, 제3부 노령견문기(합이빈에서 해삼위까지, 해항 로만쓰, 노령 견문기, 서백리 동포의 살아갈 길), 제4부 물산장려와 사회문제(포목사아 제씨에게 간고함, 물산장려와 사회문제, 사회문제와 물산장려), 제5부 너를 찾아라, 제6부 우리들의 살 길(어농세민을 구호할 시안, 육당의 ‘인생과 종교’는 조국구제방편의 개혁), 연보 나씨 세승, 편집후기/한희균)
『경보첩』(敬寶帖)
―수원의 대표 성씨 나주 나 씨 조상들의 서신과 서화 모음 첩
―성재공 필적, 나홍석 서신, 나경석 서신, 소봉 나수연 축수시와 묵란 등 수록
―수원박물관 소장
논문•서신•기사
1915년 2월 나경석, 「低級의 生存欲」, 『학지광』(나경석이 최승구에게 보낸 편지). (서신)
1920년 나경석, 「사계사조와 조선농촌」, 『공제』 창간호. (논문); 나경석, 「로서아의 교육과 열강」, 『공제』 창간호. (논문)
1921년 나경석 기자, 「만주로 가는 길」, 『동아일보』. (기사); 나경석 기자, 「로령견문기」, 『동아일보』. (기사)
1922년 10월 21일~27일 나경석 기자, 「시베리아 동포의 살아갈 길」, 『동아일보』 5회분 연재(공산 치하 러시아령 시베리아에서 해외 동포가 가야 할 길 제시). (기사)
1923년 1월 20일 나경석 조선물산장려회 이사, 조선물산장려회 회지 『산업계』에 여러 차례 글 기고; 2월 24일~3월 3일 나경석 기자, 「물산장려운동과 사회문제」, 『동아일보』 논설 7회 연재. (기사)
1924년 3월 정치인 겸 저술가 나경석, 「사상의 귀추와 운동의 방향」, 천도교 잡지 『개벽』. (논문)
―나경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화국 체재에 대해 기고
―나경석은 본 논문에서 조선의 전제정치가 무너지고 입헌군주제를 추진했으나 조일 병합 이후에는 근대정치의 이상을 “공화대의제”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미래 조선의 정체라는 것이 일반인들의 의견이라고 주장했다.
* 독립운동가 나경석: 독립운동가 나경석에 대한 일제 총독부 신상 조사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성명은 나경석이며, 인상 특징은 신장 5척 3촌으로 입이 큼. 경성지방법원에서 실정법 위반으로 징역 3개월의 처벌을 받음. 성품은 집요하고, 사업에 종사했으나 실패. 사상 행동은 치열한 배일사상을 소유했다는 등의 기록이다.
나경석 선생의 맏딸 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 나영균이 회상하는 아버지 나경석의 회고담은 이렇다. 일제 형사들에게 밤낮으로 쫓기던 이야기, 러시아로 망명해 도망간 이야기, 일본 당국에 항의하기 위해 일본 당국자를 만난 이야기 등을 담담하게 여러 차례에 걸쳐서 가족들에게 말해주었다. 또한 나경석 선생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이광수와 최남선 등이 일제 말기 친일파로 돌아서야 했던 사실을 인간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 자신도 만주에서 고무 제조 사업을 하면서 독립지사의 지원과 친일 사업을 겸해야 했었다. 어쨌든 독립운동가 나경석은 당시 일본 경찰에 의해서 배일선인으로 지목되었다.
중앙학교 과학 교사 시절 송진우 등과 3•1운동 모의에 가담하였고, 「독립선언서」를 만주로 전달했으며, 총기를 반입하다가 안동현에서 일경에 적발되어 3개월 옥에 갇히기도 했다. 석방 후에는 동아일보 기자로 임명되어, 연해주와 만주 등지로 망명 생활을 하면서, 동아일보 특파원과 지국장으로 활동했다. 일제 때에는 연해주와 만주에서 농업 사업과 고무 제조 등의 공장 경영에 주력했고, 북한 지역 해주에서도 농업 사업을 하다가, 남북한으로 분단된 이후에는 한반도 이남 지역으로 활동이 한정되었다. 일제 강점기 주요 활동은 농업 간척 및 개간 사업과 고무 제조 등의 공장 생산 경영과 사업에 치중했으며, 동아일보의 기자, 특파원, 지국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한민당과 민국당의 발기인,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다.
덧붙여, 물산장려운동과 관련하여 나경석 선생이 책임자였던 국내상해파와 조선청년회연합회의 대립은 생산론과 계급론으로 구분되었으며, 당시 세계 사회주의의 조류와 당면 사회주의 혁명의 전제와 관련하며 생산론을 주장한 국내상해파의 논지는 동아일보의 논지와 일치했다고 한다(윤덕영, 「1920년대 전반 조선물산장려운동 주도세력의 사회운동론과 서구 사회주의 사상과의 비교―‘국내상해파’와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중심으로」, 『동방학지』 제187집, 연세대 국학연구원, 1~41. (논문) 참조).
* 과학자 나경석: 일본 도쿄고등공업학교(도쿄공업대학)는 화공학을 전공한 나경석이 졸업한 이후에 노벨상을 두 명이나 배출한 명문 공과대학이 되었다. 나경석 선생은 인촌 김성수가 설립하고 송진우가 교장으로 있던 중앙학교(중앙중등학교) 과학 교사로 물리와 화학을 담당해서 가르치다가, 3•1운동을 모의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총기를 국내로 반입하다가 적발되어 옥고를 치른 후에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의 추천으로 동아일보 기자가 되어 여러 기사를 동아일보에 보도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도입되던 때였으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글은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생들 주축 공우구락부의 잡지 『공우』 1920년 10월 창간호에 게재되었고, 1921년 5월 19일 동아일보에 아인슈타인에 대한 최초의 기사가 실렸다.
1922년 11월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나경석 기자는 1922년 2월 23일부터 7회에 걸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본격 소개했다. 일본 명문 도쿄공과대학에서 화공학을 전공한 재원으로서 아인슈타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 상대성 이론의 중요성 등 총 5부에 걸쳐 상대성 이론에 관한 기사를 게재했다(김상훈 기자, 「100년 전 조선은 왜 아인슈타인에 열광했을까?」, 『부산일보』, 2023-08-10 참조).
화학공학 전공자 나경석은 사업가로서 고무 재료를 활용한 고무신과 고무를 활용한 제품 생산에 몰두했고, 고무 제조업으로 어느 정도 사업가로서도 번창했다. 그는 여러 가지 생산품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갖고 있었고, 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실제로 생산으로 실현되기도 했다고 한다.
나경석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공대 유학생으로서 실제 제품을 개발해서 생산하고 경영했던 진정한 의미의 과학자였다.
* 나경석 가문: 나경석 가문은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로서, 17세기 조선 시대 나주 나 씨 부사공파 중시조 나성손이 수원부사가 되고 나성손의 처 함평 이 씨가 수원 지역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공격을 피해 나주 나 씨 부사공파 입향조 나성손의 손자 나한수가 나주에서 화성으로 피신하면서 수원 지역에 나주 나 씨 부사공파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나주 나 씨 11대손부터 수원 지역에서 부사공파 가문이 이어지며, 19세기 조선 말기까지 ‘관료형 대지주 부호’로 특성화되었다. 전통적으로, 수원에는 수원 최 씨, 남양 홍 씨 등 여러 성씨들이 있었고, 이들도 관료형 가문의 특성을 보였지만, 나주 나 씨는 대지주로서 농업 산업에 기반한 수원 지역의 대표적인 부호로 명문 가문을 떨치게 되었다.
나경석 가문은 수원 지역의 대표적인 명문 가문으로서 나 참판 댁이나 나 부잣집이라고 일컬어졌다. 과거에 대대로 호조참판을 증직하던 집안의 관례가 있었다고도 한다. 증조부가 호조참판을 증직했다는 설도 있고, 조부 훈련원봉사•훈련원참군 나영완(羅英完)은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2대손으로서 종2품 호조참판을 했다는 설과 아들 중추부사 나기원의 덕택으로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으로 증직되었다는 설이 있다. 묘역은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台安面) 구봉산(九峯山)이다. 나경석의 외조부는 수원 지역을 대표하는 수원 최 씨 관료 최성대(崔成大, 1834년 생~1909년 몰)이다. 조부 나영완에게는 자녀 3남이 있었으며, 1남 나기원(羅基元), 2남 나기형(羅基亨), 3남 나기정(羅基貞) 3형제이다.
나경석 선생의 백부 가선대부 중추부사 나기원(羅基元, 1851년 생~1907년 몰)에게는 아들로 함경북도관찰사•정3품 통정대부•삼일학교 설립자 등을 역임한 종손 나중석(羅重錫, 1878년 생~1970년 몰)이 있고, 나중석의 아들로 나세균(羅世均), 나재균(나정균)이 있다. 통정대부 나중석은 봉담 분천리 일대에서 대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배분하고 공유 농지를 제공함으로써 마을 주민들이 나중석 송덕비를 세워서 그의 송덕을 기렸으며, 자선사업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경석 선생의 아버지 수원면장•경기도관찰부주사•환소도감위원•친일파 시흥군수•용인군수 나기정(羅基貞)은 일본 총독부 치하에서 시흥군수를 연임한 친일파로 분류되었다. 묘역은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수기리 선영이다. 5남매의 아버지로서, 이복 딸 나계석을 제외하고, 두 딸 나혜석과 나지석에게 집안에서 한학 교육을 시켰으며, 나혜석에게 삼일학교와 진명여고보 그리고 일본 유학까지 신여성 교육을 시켰다. 4형제 자매를 모두 일본에 유학 보내고, 조선 최초의 신학문(공학, 미술, 음악 등)을 도입한 대표적인 명문 유학 가문이다. 모 수원 최(崔) 씨 최시의(崔是議)는 경기도 남양군 서여제면장(현 화성시 서신면 서부 지역) 최성대(崔成大)의 여식이다.
용인군수 나기정의 1남 나홍석(羅弘錫)은 백부 나기형(羅基亨)의 양자로 입적했으며, 일본 와세다대에 유학했다. 집터는 수원면 남창리 55번지에 소재한다. 2녀 큰누이 서녀 나계석(羅稽錫)은 이복 큰누이로 알려져 있지만, 나혜석이 태어날 무렵 13세에 수원의 영향력 있는 가문 수원 최 씨 이복 매형 최기환(崔基煥)과 조혼함으로써, 수원 유지 최기환과 조혼한 나계석이 서녀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3남 본인 나경석(羅景錫)은 독립운동가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공과대 유학생으로 화학공학을 전공했으며, 일제 때 과학기술자•사업가로서 독립운동에 기여했고, 중앙학교 과학 교사와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했으며, 나용균과 함께 민주당 계열의 정치인이었고, 대한민국 이승만 초대 정부에서 문교부 편수관을 지냈다. 4녀 나혜석(羅蕙錫)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어머니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자 여류 단편 소설가이다. 여류 독립운동가로서 2•8선언과 3•1운동, 그 밖의 독립운동에 주도 및 참가했다. 묘역은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부근이라고 알려져 있다. 5녀 나지석(羅芝錫)은 막내 여동생으로서 일본 음악학교에 유학했으며, 평안도 곽산 부호 김창곤과 결혼했다.
독립운동가 나경석의 처 송남(松南) 배숙경(裴淑卿)은 개성상인 집안 출신으로 동아부인상회에 근무했다. 나경석 선생과 배숙경 부부 사이에 자녀 1남 3녀를 두었으며, 1녀는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한국영어영문학회 회장 나영균(羅英均)이고, 2녀는 서울대 미대 교수•여류 서양화가 나희균이다. 이들 두 딸은 모두 나혜석의 여조카이며, 나영균은 후에 대학교수가 된 부유한 사업가 전민제와 결혼했고, 나희균은 화가 안상철과 결혼했다. 나영균 교수는 이화여대 교수를 지내고, 한국영어영문학과 회장을 역임했으며, 이화여대 명예교수이다. 나희균 교수는 당시에도 여전히 드물던 프랑스 파리 미술 유학을 했으며, 귀국해 중앙여고 미술교사와 서울대 미대 교수를 역임했고, 여러 차례의 개인전과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3남 나상균은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거주하며, 잘 알려지지 않은 나혜석의 프랑스 파리 근교 마을 풍경화를 소장하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나경석과 나혜석 오누이는 둘 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이다. 덧붙여, 나기정의 큰아들 나홍석의 손녀로 여류 영화배우 겸 연기자 나문희가 잘 알려져 있다.
결론적으로, 나경석 가문은 전통적인 관료형 대지주 부호였으며, 조상 대대로 참판공으로 이어지는 증직을 받아 나 참판 댁이나 나 부잣집으로 수원 지역을 대표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 이후 대한민국 공화국 체재로 전환되면서 공학도 사업가 나경석은 고무와 유리 산업을 선도하기도 했다. 나경석 선생은 독립운동 이후에는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만주 그리고 북한 해주 지역에서 농업 간척 및 농장 경영을 하거나 공장 경영으로 사업을 했다. 인촌 김성수와 송진우의 영향으로 중앙학교 교사와 동아일보 기자를 지내기도 했다.
* 독립운동가 나경석과 나혜석: 나경석 선생과 나혜석 선생은 수원 부호 나 부잣집 오누이로서, 조부 참판공 나영완과 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 나기정의 자녀들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을 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공학도이자 미술학도이다. 이들은 둘 다 독립운동에 관계했으며, 나경석 선생이 사회운동가와 사업가로 활동했고, 나혜석 선생은 서양화가와 작가로 활동했다. 둘 다 3•1운동에 깊이 관여하거나 주모했으며,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나경석 선생은 대한민국 공화국 정치체를 주장한 논문을 쓴 저술가이며, 나혜석 선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어머니이다.
한 가문의 오누이가 둘 다 일본 유학으로 신학문을 도입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한 경우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도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
*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 17세기 나주 나 씨 11대손으로 수원부사를 역임한 나성손(羅誠孫)을 중시조로 한다. 수원부사 나성손의 처는 함평 이 씨 병조판서 이극명(李克明)의 여식이다.
이극명은 함평 이 씨 중시조로서, 함평군으로 봉해져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에 세거했다. 나성손과 이극명의 분묘는 전남 나주에 소재하며, 이극명의 손자 삼도수군통제사 함천군 이량(李良)의 분묘가 경기 화성 봉담읍 분천리에 소재하며, 이때부터 함평 이 씨의 분천리 세거가 시작되었다.
나주 나 씨 수원 입향조는 중시조 나성손의 손자 나한수(羅漢守)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피해 나주에서 수원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조부 중시조 나성손이 수원부사를 역임했었고, 조모 함평 이 씨 집안이 분천리에 입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17세기에 비롯된 수원 출신 나주 나 씨 부사공파는 중시조와 입향조를 거쳐 19세기에 부사공파 22대손 참판공 나영완 시절부터 경제적 기반을 장악하면서 지역적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때부터 나 참판 댁이나 나 부잣집으로 불리게 되었다. 참판공 나영완의 아들 중추부사 나기원과 용인군수 나기정, 중추부사 나기원의 아들 종손 통정대부 나중석으로 가문이 계승되었다. 용인군수 나기정의 아들 나홍석은 일본 와세다대를 유학했고, 아들 나경석과 딸 나혜석은 독립운동가가 되었으며, 나경석 선생의 두 딸 나영균과 나희균은 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와 서울대 미대 교수 및 여류 서양화가가 되었다. 경기 화성시 봉담면 분천리 입구에는 대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거나 공동 경작지로 제공한 통정대부 나중석을 기리는 “나중석 송덕비”가 당시 마을 주민들에 의해서 세워졌으며, 도로 공사로 송덕비를 새로 세우게 되면서 옛 송덕비는 수원박물관에 기증되었다. <끝> <1차 2024년 2월 11일, 수정 2024년 2월 13일,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6대손 나종혁 글>
* 참고 자료: 「나기정」, 『위키백과』; 「나경석」, 『위키백과』; 「나혜석」, 『위키백과』; 「나영균」, 『위키백과』; 원대연 기자, 「독립운동가 나경석... 한국 최초 여성화가 나혜석...」, 『동아일보』, 2004-09-07; 박성래, 「식민지 조선의 못다 핀 과학기술자 ‘나경석’(羅景錫 1890~1959)」, 『과학과기술』 10월호, 108~109. (논문); 한동민, 「[나경석 上] 일제때 활발한 사회•계몽활동」, 『수원일보』, 2010-05-13; 한동민, 「물산장려운동 이끌며 ‘독립•사회주의’ 꿈 꾼 혁명가」, 『경기일보』, 2009-10-30; 한동민, 「나혜석(1896~1948)―불꽃같은 삶」, 『기록인』 가을 통권 24호, 44~49; 이한우 기자, 「日警에 쫓겼어도 유머 잃지않던 아버지」, 『조선일보』, 2004-09-06; 한동민,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 ‘나는 나혜석이다’―나혜석 탐구생활④, 수원박물관 e야기, <http://blog.naver.com/>; 윤덕영, 「1920년대 전반 조선물산장려운동 주도세력의 사회운동론과 서구 사회주의 사상과의 비교―‘국내상해파’와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중심으로」, 『동방학지』 제187집, 연세대 국학연구원, 1~41. (논문); 김상훈 기자, 「100년 전 조선은 왜 아인슈타인에 열광했을까?」, 『부산일보』, 2023-08-10; 한동민, 「[나경석 下] 민족자본 육성 물산장려운동 이끌어」, 『수원신문』, 2010-05-13; 박명수, 「[한국기독교학술원 발표논문] 3•1운동, 기독교, 그리고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기독교적 기원에 대한 소고」, 『미래한국』, 2018-11-0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