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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행 선 지 | 시간 / 거리 | 비 고 |
안국역 - 가회동 - 와룡공원 | 30분 / 1km | |
와룡공원 - 말바위 안내소 | 20분 / 0.6km | |
말바위 안내소- 숙정문 - 촛대바위 | 35분 | |
촛대바위 - 청운대 - 백악마루 | 40분 | |
백악마루- 백악쉼터 - 돌고래쉼터 | 35분 | |
돌고래쉼터- 창의문 | 10분 (총 : 2시간/ 2.2km) | |
창의문 - 사직터널 | 2시간 / 3.1km | |
사직터널 - 홍난파의 집- 정동 | 30분 / 1km | |
정동회관 경당에서. 송년미사 | 트레킹 송년 미사가 있습니다. | |
부근 식당에서 송년회식 | 신부님 모시고 함께 | |
안국역에 모여 북촌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가회동 성당이 나온다. 이 본당의 주보성인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시다. 역사가 깊은 본당이었지만 6.25를 거치면서 인민군으로부터 징발 당한 후 인민일보를 발행하던 신문사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그들은 패주하면서 본당을 거의 쓸수 없을 정도로 해놓고 떠났다. 성직자들과 교우들은 미국의 물자 원조를 받아 신축하여 유지하다 여러차례 개보수를 거친 후 지금의 본당을 신축 축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북촌으로 걸어가면서 잠시 들러 성모님께 인사를 올린 후 성모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트레킹 시작 기도를 드리고 출발할 생각이다.
기득권층이 터를 잡고 살던 북촌은 지금처럼 작은 한옥들이 아니었다. 왕들이 자신의 애첩을 위하여 신축하여 준 별당도 많았고 삼정승들의 대궐같은 한옥들이 줄비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부 업자들이 경매와 구매 등등의 방법으로
사들인 후 필지를 쪼개 지금과 같은 개량 한옥을 지어 팔어 현재 형태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그나마 그래도 이런 한옥이라도 있어 우리 주거문화를 알릴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가회동 일대의 한옥을 구경하다 보면 현대문명과 결합되어 한옥 안에 치과가 개원해 있고 각종 공방도 카페도 문을 열어 두고 있어 그 적응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동양화나 한옥, 한복 등등은 모두 여백의 멋이 깃들어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참 여유롭게 한다. 직선의 날카로움과 주저없이 달려드는 강직성과 다르게 곡선은 편안하게 다가 온다. 동양화의 여백처럼 우리들의 삶 속에도 충만 보다는 여백의 공간이 많아야 한다. 조금 더 많이 라는 욕심 보다는 조금 더 적게 라는 인식이 있어야 물질이든 정신적이든 조급함을 물리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마음이란 녀석은 보는대로 느껴지고 그 느낌 여하에 따라 행동하기 마련이다. 여유로운 생각과 행동은 늘 나를 단순하게 순치할 수 있어 좋다.
단순해 지면 욕심의 근성도 버릴 수 있고 이어서 더불어 겸손에도 익숙해 진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북촌을 빠져 나오면 감사원 앞을 지나 오르막을 걷다 보면 어느새 혜화동으로 나가는 길목에 서게 된다. 그곳에서 성균관대 후문과 와룡공원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성곽을 끼고 돌아 숲속으로 걸음을 옮기면 숙정문으로 향하는 성곽을 다시 만나게 된다. 성곽과 조금 지나면서 내리고 오르면 안내소가 나온다. 신원을 확인한 후 통행증을 내 주는 곳이다. 통행증을 가슴에 달고 숙정문 안으로 입문한 후 북악산 정상을 경유하여 창의문까지 트레킹을 끝낸 다음 창의문으로 내려서기 직전 관리사무소에 통행증을 반납하고 나서야 한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창의문, 인조반정 때 이 문을 부수고 반란군은 대궐로 진입한다. 그리고 대궐에 불을 지른다. 그 때 광해군은 상궁과 내시들에게 묻는다 어느전각에서 불이 났느냐? 그리고 만약 종묘사직에 불이 났다면 이조는 끝난 일이라 한탄하듯 말한다. 그들은 종묘사직이라 거짓말로 아뢴다. 그들도 반정군들과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궁궐 담을 넘어 민가에 숨어 있던 광해군은 붙잡혀와 실각을 당한 후 모진 세월을 지내다 죽어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부근 산기슭에 묻히고 만다. 그 곳에 잠시 들러 비운의 왕의 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곳 창의문 바로 아래까지 공비들이 침입하여 최초로 총격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종로서장이었던 최규식경무관은 여기서 순직하여 지금도 그곳에 그분의 동상이 서 있다. 창의문 옆 길을 건너 인왕산 방향으로 나가면 서시로 유명한 윤동주 동산이 있다.
창의문을 돌아 아스팔트 길로 내려 서려 하면 만나게 되는 빈의자 하나가 있다. 그리고 그 옆에 흩어 놓은 양귀비 조화꽃이 이채롭게 다가 온다. 잠시 앉아 앞을 보면 대원군이 아끼고 아꼈던 석파정이 의자하고는 지척에 있다. 이 부근에는 서울에 숨어 있는 비경이 많은 곳이다.
동산으로 오르기 전 윤동주 시인의 기념관 들러 그에 시적 감각과 체취를 느껴 보는 것도 이 길에 매력이다. 이 기념관 사잇길로 올라서면
동산으로 오르는 길을 만나게 된다. 이 동산에 오르면 서울의 서촌이 한눈에 들어 온다. 세종대왕이 태어난 동네이면서도 중인들이 몰려 살던 곳이 바로 서촌이다. 인왕산 치마바위 아래 동내가 서촌의 일대다.
윤동주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선천적으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무렵 우리 일과는 대충 다음과 같았어.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했어. 세수는 골짜기 아무데서나 하고, 방으로 돌아와 청소를 하고 조반
을 마친 다음에는 학교로 나갔지. 하학 후에는 소공동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를 타고 나가 충무로 일대의 책방들을 순례했어. 至誠
堂(지성당), 日韓書房(일한서방), 마루젠(丸善), 群書堂(군서당)과 같은 신간서점과 구서점들을 돌고 나서 음악다방에 들러 차를
마시며 새로 산 책들을 펴보곤 했지. 가끔은 극장에 들러 영화를 보기도 하고, 다시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를 거쳐 청계천을 건너
관훈동 헌책방을 순례하고 돌아오면 이미 어둑해져 거리에 전기불이 환하게 밝혀졌지.」 연희전문 4학년이 되면서 기숙사를 나온
윤동주와 함께 누상동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생활을 했던 연희전문 2년 후배 정병욱의 회고다.
1941년,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그동안 썼던 시 19편을 묶어 자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3부를 만들었다. 한
권은 자신이 갖고, 한 권은 연희전문의 영문과 교수이던 이양하에게, 또 한권은 정병욱에게 주었다. 이 시고를 받아 읽은 이양하는
출판을 보류하도록 권했다. 「십자가」「슬픈 족속」「또 다른 고향」… 등 여러 편의 시가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
며 일본 유학을 앞두고 있는 윤동주의 신변에도 적지 않은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윤동주는 이양하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 이후 윤동주 자신의 시고와 이양하의 시고는 사라져 행방을 알 길이 없게 되고, 정병욱에게 주었던 시고만 그의 모친이 명주 보
자기에 싸서 장롱 속 깊이 감춰두었던 덕분에 해방 후인 1948년 1월30일 정음사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나와 빛을
보게 되었다. <詩人(시인)>이란 슬픈 天命(천명)>을 안고 살았던 윤동주의 시 세계를 지배하는 정서는 부끄러움과 죄의식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척박한 식민지 현실이라는 테두리와 내면세계 사이에 있는 모순과 부조화는 식민지의 지식인 청년 윤동주
를 심각한 자기혐오와 수치심에 빠뜨렸다.
윤동주의 귀향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쿄오토경찰서에 검거되어 수감된 것이다. 사상범으로 피체된 그
들의 죄명은 일본 형사의 취조서에는 <독립운동>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후 윤동주는 2 년, 송몽규는 2 년 6 개월의 언도를 받
고 후코오카(福岡)형무소에 수용되었다. 명동촌의 집으로 윤동주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전보통지서가 날아들었다. <2 월 16 일 동
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 부친 윤영석이 당숙 윤영춘을 대동하고 윤동주의 시신을 인수하러 후코오카 형무소로 떠난 며칠 뒤
에 다시 <동주 위독함, 원한다면 보석할 수 있음, 만약 사망 시에는 시체를 인수할 것, 아니면 큐우슈우 제국대학 해부용으로 제공
할 것임>이라는 때늦은 우편물이 도착했다. 윤동주의 죽음은 후코오카 형무소의 施藥室(시약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
은 때문이었다. 다름아니라 일제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세균실험용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윤영석이 후코오카 감옥에 갔을 때에도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 50여명이 강제 주사를 맞기 위해 줄 서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윤영석은 그 행렬 속에서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발견했다.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그 모양으로…』 송몽규는 말
을 끝맺지 못하고 흐느꼈다. 23 일 후 송몽규도 죽었다. 윤동주의 시신은 큐우슈우 제대(九州帝大)에서 방부 처리를 해놓은 탓에
말끔했다. 윤동주의 시신은 만주의 용정 동산에 묻혔다. 그의 장례는 3월 초선 어느 날 심한 눈보라 속에서 치러졌다. <어느 隕石
(운석)밑으로 홀로걸어가는/슬픈 사람>처럼 그는 갔다.
윤동주 시의 세계를 거닐다 보면 마음이 고요해 짐을 알 수가 있다. 애잔한 마음을 달랜 후 인왕산을 기슭을 거슬러 남으로 걸음을 옮기면 사직터널 윗길이 나온다. 그 곳을 건너 마을 골목길을 돌아 나가면 멋진 성곽이 마중한다. 기초석은 묵은 돌이지만 그 위에 차곡차곡 쌓올린 성벽돌은 새돌이다. 그래도 묘한 조화로 시선을 끈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홍난파 살던 곳, 동판에 악보들을 새겨 놓았다 잠시 쉬어가며 그가 작곡한 가곡 몇곡을 불러보면 줄곧 걸어와 생긴 성곽 길 여독이 발에서 떠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난파 홍영후는 경기도 화성군 수원에서 남양 홍씨 토홍계 대호군공파 24세손으로 8남매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2]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어서 집안 식구들이 거문고나 퉁소 등 전통 악기를 연주했는데 홍영후는 그 중 앙금을 연주했다고 한다.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많았던 관계로 아들에게 금파(錦坡), 난파(蘭坡) 등의 별호를 지어 주었다. 형 금파 홍석후는 구한 말의 양의사이기도 했다. 홍영후의 남동생 민후는 해방 후 30여년간 경남 합천군 삼가면에서 '백중약국'을 경영하며 인술을 베풀어 약사로서 평생 선업을 쌓아 지역민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약사 홍민후는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은 약값을 받지 않았고, 공짜로 약을 지어주며 '웬만하면 약 먹지 마셔요'로 처방하여 유명하였다. 또한, 홍난파는1933년 형 금파와 함께 난파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했다. 트리오중 일찍 요절한 조카 홍성유(1922 ~ 1936)는 형 홍석후의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 친일과 관련하여 그에 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제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 나던 날, 저의 아빠는 종로경찰서에 갇히셔서 옥고를 치르고 계셨습니다. 이름을 지어줄 아빠가 안 계신 저는 姙 (임) 자돌림에다 丁축년에 태어났다고 丁 (정) 자를 붙여서 丁姙(정임)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감옥을 드나드시면서 아버지께 흰 옷을 넣어드리는 어머니는 번번이 피투성이 되어 나오는 아버지의 옷을 받아들면서 이렇게 애청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분은 몸이 약하신데 제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면 안 되느냐고." 일본 경찰은 조롱된 어조로 "당신도 콩밥이 먹고 싶어?" 하며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감옥살이에 시달리신 저의 아버지는 '늑막염' 이라는 무서운 병을 재발 시키면서 72일 만에 석방이 되셨습니다. 석방을 시킨다는 조건부로 "일본에 협조한다는 글과 곡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 압력의 쇠사슬에 묶이신 나의 아버지는 최후의 3년을 (석방이후) 병마에 시달리면서 강제에 못 이겨 한 두 차례 일본에 협조하는 글을 쓰셔야만 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으시는 어머니의 가슴 아픈 사연들 이었습니다...(이하 생략)... 국가를 빼앗긴다는 일은 슬픈 일이다. 용서와 화해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걷는 다는 일은 바로 삶의 동선을 걷는 일이다. 걸으며 듣는 자신의 호홉, 그것은 생명의 숨결이며 삶의 의지이며 자유로움이다. 그런 자유로움이 좋아 속도를 줄이고 느릿한 걸음으로 송월동까지 온 것이다. 언덕길을 내려 서면 돈의문이 있던 곳이다. 원래 동대문과 서대문은 마주 보이는 일직선상에 있었다 일제수탈 이후 도시계획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 비원과 종묘 사잇길도 그렇고 그들이 자기 마음대로 원형을 변형시켜 놓은 것이 한 둘이 아니다. 돈의문 터 곁을 지나 길을 건너면 정동 교육회관이다. 이제는 다리품을 내려 놓고 경당에 들러 모든 것을 잠재우고 스스로 나를 찾아야 한다. 일년 동안 살아 오며 걸어왔던 뒤 안을 살피며 회개한 후 반복해서 만드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자신의 모든 죄의 가능성을 내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호홉을 가다듬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
참석자 명단:
날씨가 춥고 도시락을 먹을 장소가 마땅하지 못해 점심을 자하문부근 트레킹 길과 연결되는 순서울식(궁중식이나 다름없습니다) 만두국 유명한 집이 있습니다. 점심 예약이 필요하여 참석인원 점검은 필수입니다. 찹석여부 확인 꼭 해주시기 바랍니다. 총무님 부탁드립니다.
이국희 모니카 | 장은기데레사 | 박순옥 수산나 | 유남수 헬레나 | 장화숙세실리아 | 영보신부님 | |
김경량베로니카 | 강지양글라라 | 김영선세실리아 | 성인신모니카 | 김성애데레사 | 박기상안토니오 | |
김성곤요셉 | 김문규도미나 | 이향임그라시아 | 장숙인 안젤라 | 박은정 알폰사 | 안동훈 세베리노 | |
김연옥골롬바 | 김정자아네스 | 임정원유스티나 | 황영진세례자 | 이근숙 마리아 | ||
김종식파스칼 | 정정임 아네스 | 정경숙실비아 | ||||
박해경 카타리나 | 위선화요셉피나 | |||||
이영숙데레사 | ||||||
김용권에로니모 | 현재30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