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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암은 1940년대에 편찬된 봉은말사지」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원효대사가 처음 세웠다고 한다. 이후망해암에 관한 기록은 조선 전기부터 나타난다.
용화전의 석불입상에 '성화 십오년 사월 일조성(成化十五年四月造成)'이라고 새겨져 있어서 이 불상이 성종 10년(1479)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영조 때에 펴낸 「여지도서」,18세기에 신경준이 쓴 「가람고」, 그리고 『승정원일기」 헌종 9년(1843) 기록에도 '관악산 망해암)' 등의 내용이 있다.
망해암은 순조 3년(1803), 철종 14년(1863)에 중창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지음 하였으나,1922년 화재로 모두 불타 다시 건립하였다.
현재의 망해암은 한국전쟁으로 불에 타버린 것을 천불전과 지장전등을 추가하여 중창한 것이다.
망해암에는 세종대왕(1418~1450 재위)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세곡 나라에 조세로 바치는 곡식을 실은 배가인천 앞바다 팔미도 근처를 지나는데, 풍랑이 심하게 일어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었다.
뱃사람들이 당황해할 때 한 스님이 나타나 그들을 안심시키고 배를 무사히 인도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풍랑이 가라앉은 뒤한 선원이 그 스님에게 어느 절에 사는지 묻자 그는 관악산 망해암에 있다고 대답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들은 한양에 도착한 뒤 이 일을 고맙게 여겨 은혜를 갚고자 망해암을 찾았으나 그 스님은 없고 그와 닮은 불상만 법당에 모셔져 있었다.
선원들은 부처님의 법력(法力)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음을 깨닫고 이 일을 세종 대왕께아뢰었다.
세종 대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망해암 불전에 해마다 공양미를 한 섬씩 올리게 했다.
한편 망해암은 산 정상부에 자리 잡아서 안양시가지와 함께 서쪽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등 경관이 빼어나다.
특히 여기서 보는 해넘이는 안양 9경중 제4경으로 꼽힐 만큼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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