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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방송을 개인사정으로 토요일로 하루 앞당깁니다.
인류의 거대한 착각
1. 자전거는 달려야 선다.
2. 자전거는 서야 달린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보면 저절로 똑바로 선다. 과학자들은 착각한다. 똑바로 세워서 균형을 맞춘 다음에 페달을 밟아야 한다고 믿는다. 일본 전고체 배터리는 똑바로 세우려다가 달리지 못하고 있는데 한국은 NCM 배터리는 일단 달리다보니 저절로 똑바로 서고 있다. 문제는 과학의 비과학이다.
플러스법 - 자석으로 지푸라기 속의 바늘을 찾아낸다.
마이너스법 - 선풍기로 지푸라기를 날려버리면 바늘이 남는다.
에디슨과 테슬라의 대결이다. 에디슨은 시행착오의 반복을 통해 정답을 찾는다. 테슬라는 완벽한 이론이 있다. 테슬라가 에디슨을 비난했다. 에디슨은 헛간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찾으려고 지푸라기를 일일이 들춰보는 사람이다. 과학적이지 않다. 그런데 에디슨이 선풍기로 날리면 그게 더 빠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완벽한 기술은 일본에 있지만 가성비 높은 기술은 한국에 있다. 완벽주의가 일본의 발목을 잡는다.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계속 잘못되고 만다. 일본의 완벽주의는 자전거를 똑바로 세운다며 페달을 밟지 않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라이다는 완벽하고 카메라는 엉성하지만 인공지능과 결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엉성한 카메라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완벽해지고 갑자기 내린 폭설에 라이다가 무용지물 된다. 랭글리 박사의 이론은 훌륭했고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는 엉성했지만 우리가 다 알듯이 라이트 형제가 이겼다.
1. 비행기는 떠야 난다.
2. 비행기는 날아야 뜬다.
상식적으로 공중에 뜨는게 우선이고 조종은 그 다음이다. 라이트 형제는 조종술에만 관심이 있었다. 연을 날려본 경험 때문이다. 비행기도 연날리기 하듯 일단 공중에 날리기만 하면 된다고 순진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 순진함이 이겼다. 이쯤 되면 과학의 방법론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세상은 변화다.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변화는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우리는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안다. 변화가 일어나기 전을 보면 너무 이르고 변화가 일어나고 난 다음에 보면 너무 늦다. 우리가 아는 원자론적 사고의 관측법은 변화가 일어난 다음 결과를 보는 것이다. 결과는 오염된다.
사물 - 그냥 보면 된다.
사건 - 원인측을 보면 이르고 결과측을 보면 늦다.
변화의 진행과정에 환경이 간섭하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밸런스를 잡는 것은 결과다. 달리는게 원인이다. 달리는 것은 힘이 있고 그 힘에 의해 똑바로 서는 것이다. 우리는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한다. 똑바로 선 다음 달리려고 한다. 비행기를 공중에 띄운 다음에 조종하려고 한다. 조종이 먼저다.
올바른 관측법은 원인과 결과를 겹쳐서 보는 것이다. 단 원인을 먼저 봐야 한다. 사건은 원인에 결과를 담고, 공간은 전체에 부분을 담고, 시간은 시작에 종결을 담고, 에너지는 주는 쪽에 받는 쪽을 담아야 한다. 그것은 차원 개념이다. 차원은 에너지의 전달경로다. 구조론은 에너지의 전달경로다.
연역의 원인측 - 사건을 보고, 전체를 보고, 시작을 보고, 주는 쪽을 본다. 오염되지 않은 절대성을 본다.
귀납의 결과측 – 사물을 보고, 부분을 보고, 종결을 보고, 받는 쪽을 본다. 오염되어 있는 상대성을 본다.
에너지를 주는 쪽 높은 차원에서 에너지를 받는 쪽 낮은 차원을 봐야 사건이 보이고, 변화가 보이고, 에너지의 방향성이 보인다. 바둑이라면 수순이 보인다. 연역과 귀납이 있다. 연역에서 귀납을 보고 원인에서 결과를 본다. 우리가 아는 원자론적 사고의 관측법은 결과에서 원인을 보는 귀납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환경의 간섭이 있다. 간섭에 의해 오염된다. 결과측 정보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화살이 과녁에 명중했더라도 바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게 플루크다. 결과측 정보는 거울에 비치는 상처럼 왜곡된다. 원인측 정보는 믿을 수 있다. 문제는 원인측의 정보가 없다는 사실이다.
궁수가 아직 활을 쏘지 않았다면 활을 얼마나 세게 당겼는지 알 수 없다. 화살이 과녁에 맞고 난 다음에야 활을 어떻게 쏘았는지 알아낼 수 있다. 원인측은 옳으나 정보가 없고 결과측은 정보가 있으나 오염되어 있다. 그렇다면 구조론이라는 필터를 사용하여 적절히 오염을 제거해서 봐야 한다.
세상이 절대적이냐 상대성이냐 하는 물음은 유치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어느 쪽을 보느냐다. 절대성은 주어를 보는 관점이고 상대성은 동사를 보는 관점이다. 주어를 보거나 동사를 보거나 어느 한쪽을 보면 틀렸다. 주어에 술어를 담아서 봐야 한다. 커피를 건네면 잔을 받을까 물을 받을까?
잔을 받으면 물은 이미 받아져 있다. 물을 받으려고 하면 뜨거운 커피에 손가락을 덴다. 인간이 저지르는 절대성과 상대성의 혼선은 주어와 술어 중에 하나만 받겠다는 개소리다. 이건 언어가 아니라 언어도단이다. 주어라는 그릇에 술어라는 음식을 담아 전달해야 한다. 언어감각에 답이 있다.
사건과 사물, 전체와 부분, 시작과 종결, 주는 쪽과 받는 쪽, 절대성과 상대성, 주어와 술어를 동시에 겹쳐서 보되 사건 먼저, 전체 먼저, 시작 먼저, 주는 쪽 먼저, 절대성 먼저, 주어 먼저의 관측법을 터득해야 한다. 사물은 그냥 눈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그것은 결과측이다. 결과측은 수동이 된다.
수동은 본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오염되어 있다. 당신이 본 모든 것은 본 것이 아니라 보인 것이며 오염된 것이다. 구조론이라는 도구를 사용한 방법적 관측이 아니면 안 된다. 이쯤 되면 인류문명은 통째로 잘못이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세상은 결과측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원인측 사건의 복제다. 우리가 원자론적 사고를 뒤집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인간의 언어가 잘못되었다. 인간의 언어는 관측값을 반영한다. 인류는 그냥 눈으로 봤을 뿐 방법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냥 보면 보이는 것을 본다.
에너지를 주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을 본다. 쏘는 활이 아니라 과녁에 멈춘 화살을 본다. 객체가 멈춰야 눈에 보인다. 당신이 무언가를 봤다면 그것은 멈춘 것이며 죽은 것이고 왜곡된 것이다. 자동차 정비공은 죽은 차를 수리하지만 의사는 살아있는 사람을 고친다. 심장이 뛰며 움직이는 존재다.
자전거는 움직인다. 비행기는 움직인다. 생명은 움직인다. 생각은 움직인다. 인류는 살아서 움직이는 것에 대한 논리가 없다. 관측법이 없다. 생각법이 없다. 구조론이 없다. 인류는 그동안 존재의 결과측 절반만 봤다. 세상은 변화다. 우리가 뭔가를 봤다면 변화가 멈추어 왜곡된 것을 본 것이다.
화살이 맞는 과녁을 볼 것이 아니라 활을 쏘는 궁수를 보되 과녁과 겹쳐서 가늠자와 가늠쇠와 표적을 일치시킨 조준선 정렬을 봐야 정조준이다. 궁수 뒤에 카메라를 설치해야 한다. 자신이 어떻게 보는지 그 보는 방식을 봐야 한다. 인류문명은 통째로 잘못되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머피의 법칙
사지 않은 로또는 당첨되지 않는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1 다음에 오는 수는 2다. 주머니에서 떨어진 동전은 그곳에 있다. 엎어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다. 없는 것은 생겨나지 않고 있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다. 그 당연함에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원칙의 힘을 알아야 한다. 변칙의 특이함에 홀리지 말아야 한다. 원칙만 활실히 알아도 상대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구조론은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 어린이는 순수하다. 진리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 그 자체다. 세상에 참과 거짓이 있는게 아니라 순수와 오염이 있다.
참이든 거짓이든 그것은 결과측 정보다. 참과 거짓을 말하면 이미 참되지 않다. 인간의 입을 거쳐간 정보는 모두 왜곡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바라보는 관점이 바르면 바른 것이다. 나는 내 말이 맞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관점이 올바르지 않으면 맞는 말을 들어도 틀린 말이 되어 있다.
구조론이 옳다는 증명은 필요없다. 수학을 모르는 사람의 정답은 오답이다. 사지선다형 시험의 25점은 0점과 같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환경과 간섭하여 오염되므로 진리에서 멀어진다. 모든 결과측 정보는 오염되어 있다. 순수한 원인측을 보면 세상은 진리 그대로다. 관점이 중요하다.
인간이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당연한 사실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맹랑한 개소리와 과학적 사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게 관점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멀쩡한 사람도 ‘손 없는 날’이 어쩌구 하며 수준이하 행동을 한다. 종교 믿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이찍인간도 있다.
많이 배웠다는 전문가들도 조금만 전공을 벗어나면 갑자기 바보가 된다. 날고 긴다는 하버드 인재들이 정치권에 들어와서 바보가 되는게 그렇다. 한덕수, 이준석, 강용석 말이다. 그들의 능력은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라 축적된 데이터에서 나온 것이므로 환경이 바뀌면 0으로 돌아간다.
흰 것은 검다. 흰 것은 모든 빛을 외부로 내보내서 객체 자체에는 남아있는 빛이 없으므로 검다. 검은 것은 희다. 검은 것은 빛을 내부에 가두어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므로 블랙홀과 같이 내부는 흰빛으로 가득하다. 관점을 교정하지 않으면 렌즈의 상이 거꾸로 맺히듯이 정반대가 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상은 눈동자의 망막에 거꾸로 맺힌다. 뇌가 이를 뒤집어 해석한 것이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거꾸로다. 구조론의 처리과정을 통과시켜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움직이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지구는 태양 주변을 도는게 아니라 정지위성처럼 타원궤도에 붙잡혀 있다.
정지해 있는 것은 움직인다. 지구가 돌기 때문이다. 정지위성은 사실 정지해 있지 않다. 정지위성은 지구의 자전과 같은 속도로 공전한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움직이는 사람이다. 만약 당신이 움직인다면 당신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것을 농담 따먹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결과측 관측정보는 모두 관측의 상대성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는 말이다. 당신이 어떤 말을 하든 결과측 정보라면 오염되어 있다. 망막에 맺힌 상처럼 상하가 뒤집어져 있다. 원인측 정보는 오염되지 않는다. 빛이 아직 수정체를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염을 거르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염을 거르는 체를 통과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어떤 말을 하든 그 말은 틀린 말이다. 당신은 오염되지 않는 절대성의 관측기술과 말하기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신에게는 관측의 상대성 오염을 거르는 필터가 없다. 어떤 말이든 원인측 정보는 항상 옳으며 결과측 정보는 항상 그르다.
흰 것이 검고 검은 것이 희며 움직이는 것이 정지해 있고 정지한 것이 움직이고 있는 이유는 그게 결과측 정보이기 때문이다. 과녁에 맞은 화살은 명중해도 바람에 밀려 맞은 것이므로 그게 플루크다. 쏘지 않은 화살은 확률적으로 맞아 있다. 던지지 않은 주사위는 1/6 확률이 정확하다.
바른 말하기 기술, 바른 관측기술, 바른 생각하기, 관점의 교정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과측을 보면 무조건 틀렸다. 옳아도 틀렸고 틀려도 틀렸다. 사지 않은 로또는 당첨되지 않는다. 그것은 원인측 정보다. 무조건 옳다. 닫힌계 안에서 거짓을 하나씩 배제할 때 진실은 자명하다.
머피의 법칙은 농담이 아니다. 일어날 일은 닫힌계 안에서 에너지 압력이 임계에 도달할 때 일어난다. 일어나지 않으면 뒤로 리스크가 축적되므로 더 위험하다. 권투선수가 제대로 맞았는데 멀쩡하다면? 골병이 들었다. 겉으로 상처가 없다면 속으로 뇌가 흔들려서 펀치 드렁크에 걸린다.
순수와 오염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신의 응답을 듣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사는 이유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있다. 신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게임이다. 나는 어쩌다 게임에 휘말렸고, 신이 이겼고, 내가 졌기 때문에 의무를 다해야 한다.
게임 속으로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다. 의무 때문이다. 나는 공짜로 태어나지 않았다. 환경이라는 던전과, 돌아다니는 NPC들과, 몸과 마음이라는 밑천을 받아서 태어났다. 이미 많은 투자가 들어가 있다. 그게 다 빚이 된다. 게임에 참여하는 순간 의무가 발생한다. 이겨야 의무에서 벗어난다.
신에게 졌기 때문에 쫓겨서 여기까지 왔다. 다음 스테이지로 올라갈 실력이 안되는데도 신은 슬그머니 뒷문을 열어주었다. 모르는 새 게임머니도 충전되어 있었다. 그렇게 빚이 쌓였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므로 게임을 계속할 밖에. 나는 미래를 예견했고 예견이 맞아떨어진 것이 신의 승리다.
예견은 나의 대본이다. 신이 대본을 쓴 스테이지를 내가 깨면 신이 지고 내가 대본을 쓴 스테이지를 신이 깨면 내가 진다. 예견이 빗나가면 나는 이런 게임 안해 하고 때려치우면 된다. 그것은 부름과 응답이다. 네트 너머에서 날아온 공을 받아넘겨야 한다. 랠리가 계속 이어져서 멈추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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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은 무오류다. 구조론은 어떤 둘을 연결하는 순서와 방향의 관계를 정리할 뿐 어떤 구체적인 사실에 개입하지 않는다. 모든 오류는 관측자의 개입에 의한 오염의 형태로 일어난다. 1이나 2는 숫자일 뿐 수학이 아니다. 1이 1이면, 2는 2고, 3은 3이라는게 수학이다. 구조론은 1이나 2를 건드리지 않는다.
1이 사과 한 개를 말하는 것인지 호박 한 덩이를 말하는 것인지는 관심없다. 구조론은 주어와 술어의 순서와 방향만 따진다. 방향이 같으면 순서가 다르고 순서가 같으면 방향이 다르다. 1이 2보다 순서로 앞선다는 사실을 밝힐 뿐 그것이 과연 1이 맞는지는 상관없다. 그것은 이론을 벗어난 해석의 영역이다.
진리와 비진리가 있다. 우리는 진리를 참이라 하고 비진리를 거짓이라 한다. 틀렸다. 맞고 틀리는 문제는 이미 거짓이다. 판단의 잣대에 의해 오염되었다. 진실은 순수냐 오염이냐다. 진리가 순수라면 거짓은 오염이다. 사건의 원인측이 순수라면 결과측은 오염이다. 절대성이 순수라면 상대성은 오염된 것이다.
구조론은 어떤 사실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논하지 않는다. 오염되지 않은 처음 출발선을 찾아 표시할 뿐이다. 에너지는 출발선에 모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있다면 어떻게든 게임은 굴러갈 것이며 상호작용 과정에 용해된다. 더하고 빼면 같아져서 결국 정해진 길을 가게 된다. 에너지를 조달하는 것이 전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