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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아발다라보경
(楞伽阿跋多羅寶經)
송(宋)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최윤옥 번역
능가아발다라보경 제4권-3
4.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에 대해 말씀하신 품[一切佛語心品]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구(句)에서는 과거의 부처님이 항하(恒河)의 모래 수만큼 많다고 하셨고, 미래와 현재도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습니까? 말씀대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습니까? 여래께서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 해설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말한 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3세(世)의 모든 부처의 수가 항하의 모래 수와 같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세상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으로서 비유로써 말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범부는 상(常)에 계착하고 외도는 망상으로 악견(惡見)을 증장시켜 생사가 끝이 없다. 생사를 싫어하여 벗어나게 하고, 돌이켜 열심히 정진하여 훌륭한 곳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그들을 위해 모든 부처를 쉽게 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우담발화(優曇鉢華)처럼 보기 어렵다고 하여 방편을 구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또 교화할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부처는 우담발화처럼 만나기 어려우니, 우담발화는 과거에 본 사람도 없었고 현재에 보는 사람도 없으며 미래에 볼 사람도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여래란 세상에서 모두 볼 수 있으나 저절로 통달한다는 인식을 세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는 것이 우담발화와 같다고 한 것이다.
대혜야, 저절로 통달한다는 것을 스스로 건립하는 것은 세상의 생각을 초월하므로, 저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이 믿을 수 없는 것이며, 자각성지(自覺聖智)의 경계여서 비유할 길이 없다. 진실로 여래는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을 뛰어넘는 것이어서 비유할 수가 없다.
대혜야, 그러나 내가 비유하여 ‘부처는 항하의 모래 수와 같다’고 말한 것에는 잘못이 없다. 대혜야,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를 모든 물고기나 자라나 악어나 사자나 코끼리나 말이나 사람이나 짐승이 밟는다고 하여도 모래는 ‘저들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지 않아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자성도 청정하여 모든 더러움이 없다.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의 자각성지(自覺聖智)는 항하의 모래와 같이 큰 신통력이 있어 자재하다.
모든 외도나 모든 사람이나 짐승들이 괴롭혀도 여래는 생각을 일으켜 망상을 일으키지 않으니, 여래는 고요하여 기억도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여래의 본원(本願)이 삼매락(三昧樂)으로 중생을 안락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괴롭힘을 받는 것이 없으니,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 등과 같아서 다름이 없다.
또 탐욕과 성냄을 끊은 까닭이다. 비유하면 항하의 모래는 땅의 자성이어서, 겁이 다해서 불탈 때 모든 땅[地]을 다 태워도 저 지대(地大)는 자성을 버리지 않으니, 화대(火大)와 함께 생기기 때문인 것과 같다. 그 밖의 어리석은 범부가 땅이 탄다는 생각을 하나 땅은 타지 않으니, 불의 인(因)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대혜야, 여래의 법신(法身)은 항하의 모래와 같아 무너지지 않는다.
대혜야,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가 한량없는 것처럼 여래의 광명 또한 이와 같이 한량이 없으니,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해 모든 부처와 대중을 두루 비추는 것이다.
대혜야,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 이외에 따로 다른 모래를 구한다면 영원히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대혜야, 여래ㆍ응공ㆍ등정각도 생사(生死)와 생멸(生滅)이 없으니, 이는 인연을 끊었기 때문이다.
대혜야,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가 늘고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대혜야, 여래가 지혜로 중생을 성숙시키는 것도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으니, 신법(身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법이란 무너짐이 있으니, 여래의 법신은 이 신법이 아니다. 마치 항하의 모래를 눌러 짜도 기름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심하게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이 여래를 핍박하고 나아가 중생들이 열반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법계(法界)와 자삼매(自三昧)와 원락(願樂)을 버리지 않으니, 중생을 크게 가엾이 여기기 때문이다.
대혜야,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가 물을 따라 흐르지 물이 없는 곳에서는 흐르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대혜야, 여래가 말한 모든 법도 열반을 따라 흐른다. 그러므로 ‘항하의 모래와 같다’고 말한다. 여래는 모든 가는 것[去]을 따라 유전(流轉)하지 않으니, 가는 것은 곧 무너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생사의 근본 진리는 알 수 없으니, 까닭을 알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가는 것을 말하겠느냐? 대혜야, 가는 것이란 단절의 뜻이니, 어리석은 범부가 알지 못한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중생이 생사의 근본 진리를 알 수 없다면, 어떻게 해탈을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끝없는 옛날부터의 거짓된 허물과 악(惡)과 망상과 습기의 인(因)이 없어지면, 자기 마음이 현전(現前)에 바깥 경계의 이치를 알아 망상의 몸이 바뀌고 해탈이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무변한데 그렇다고 전혀 소유(所有)가 없는 것은 아니니, 저 망상이 무변 등의 다른 이름을 짓기 때문이다. 안팎으로 관찰하여 망상을 벗어나면 달리 중생이 없을 것이니, 지혜나 이염(爾炎)과 같은 모든 법이 다 적정(寂靜)하리라. 자기 마음이 나타낸 망상임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망상이 생기니, 알면 곧 없어진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도사(導師)를 관찰하면
마치 항하의 모래 같아
무너지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또한 구경(究竟)도 아니니
이는 바로 평등한 것이다.
모든 여래를 관찰하면
마치 항하의 모래와 같아서
모든 허물을 다 벗어나고
따라서 흐르나 본성(本性)은 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부처의 정각(正覺)이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희를 위해 일체 모든 법이 찰나(刹那)에 무너지는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것이 모든 법의 찰나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란 선(善)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不善]과 무기(無記),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유죄(有罪)와 무죄(無罪),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받아들이는 것[受]과 받아들이지 않는 것[不受]을 말한다.
대혜야, 간략히 말하면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과 습기(習氣)이다. 이것은 5수음(受陰)의 인(因)이니, 이 심ㆍ의ㆍ의식과 습기가 어리석은 범부의 선(善)하거나 선하지 않은 망상을 자라나게 한다. 대혜야, 삼매락(三昧樂)과 삼매정수(三昧正受)를 닦아 현재법의 즐거움에 머무는 것[現法樂住]을 현성의 선한 무루[賢聖善無漏]라고 한다.
대혜야, 선(善)과 불선(不善)이란 여덟 가지 식(識)을 말한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여래장(如來藏)인 식장(識藏)과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과 다섯 가지 식신(識身)이니, 외도가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섯 가지 식신은 심ㆍ의ㆍ의식이 함께하여 선(善)과 불선(不善)이 서로 전전하여 변하고 무너지며, 끊임없이 흘러들어 무너지지 않는 몸이 생기며, 또한 생기고 없어진다. 자기 마음으로 나타나서 차례로 없어지고 다른 식(識)이 생기며 형상( 形相)이 차별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는, 의식(意識)이 다섯 가지 식과 함께하는 것을 받아들여 상응하여 생기나 찰나도 머물지 않는다. 이것을 찰나라고 한다.
대혜야, 찰나란 식장(識藏)인 여래장과 의(意)가 함께하여 식(識)을 일으키는 습기이다. 이와 같은 것이 찰나이다. 번뇌가 없는 습기는 찰나가 아니다. 이는 어리석은 범부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찰나를 논하는 데 계착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찰나이면서 찰나가 아닌 줄 깨닫지 못하고, 단견(斷見)으로 무위법(無爲法)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대혜야, 7식(識)은 유전하지 않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지 않으며, 열반의 인(因)이 아니다. 대혜야, 여래장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는 것이고, 더불어 인(因)이 되어 주며,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4주지(住地)와 무명주지(無明住地)에 빠진 어리석은 범부는 깨닫지 못하고 찰나에 망상으로 마음을 훈습한다.
또 대혜야, 금(金)이나 금강(金剛)이나 부처의 사리(舍利)와 같이 기이하고 특이한 성품을 얻어 끝내 무너지지 않는다. 대혜야, 만일 무간도(無間道)를 얻었는데 찰나가 있다면 성인은 성인이 아니어야 할 것이나, 성인이 아닌 적이 없다. 마치 금이나 금강이 비록 오랜 겁수(劫數)를 지나더라도 칭호(稱號)와 양(量)이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은데, 어찌 어리석은 범부는 나의 은밀한 설법을 잘 알지 못하고서 안팎의 모든 법에 대해 찰나라는 생각을 내는가?”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6바라밀(波羅蜜)을 만족하면 정각(正覺)을 이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여섯 가지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바라밀에는 세 가지 차별이 있으니,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과 가장 높은 출세간[出世間上上]이다.
대혜야, 세간의 바라밀이란 나[我]와 나의 것을 계착하여 받아들이고, 극단에 치우친 견해를 받아들이며, 온갖 생(生)을 받는 곳에서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과 같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단바라밀(檀波羅蜜)을 만족하는 것이니, 지계[戒]ㆍ인욕[忍]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 바라밀 역시 이와 같다. 이로써 범부는 신통을 얻거나 범천(梵天)에 태어날 수 있다.
대혜야, 출세간바라밀이란 성문이나 연각이 열반을 받아들이는 데 떨어지기 때문에 여섯 가지 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니, 자기 자신이 즐겁기 위해 열반락(涅槃樂)을 구하는 것이다.
가장 높은 출세간바라밀이란 자기 마음이 나타낸 망상을 헤아려 받아들인다는 것과 자기 마음이 둘이라는 것을 깨닫는 까닭에 망상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모든 갈래의 중생들을 거두어 주되 분(分)을 가리지 않고, 자기 마음이 물질의 모습에 계착하지 않으면서 모든 중생을 안락(安樂)하게 하기 위해 단바라밀을 행한다.
훌륭한 방편(方便)을 일으켜 곧 그것에 연(緣)하여 망상이 생기지 않도록 계율을 지키니, 이것이 시바라밀(尸波羅蜜)이다.
저 망상이 생기지 않도록 인내하여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을 알게 되니, 이것이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이다.
초저녁부터 한밤중, 새벽까지 정진하는 방편과 수순하여 수행하는 방편으로 망상이 일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이다.
망상이 모두 없어져 성문에 떨어지지 않고 열반을 받아들이니, 이것이 선바라밀(禪波羅蜜)이다.
자기 마음이 망상의 성품이 아닌 것을 지혜로 관찰하여 두 극단에 떨어지지 않고, 이전의 몸[先身]을 훌륭하게 변화시켜 무너뜨릴 수 없게 하며, 스스로 깨달은 성인의 세계를 얻으니, 이것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공(空)과 무상(無常)과 찰나(刹那)는
어리석은 범부가 망상으로 짓는 것
강물과 등불과 종자와 같은
그런 찰나라고 생각한다.
찰나에 어지러운 번뇌가 그치고
적정하여 짓는 것을 벗어나
모든 법이 생기지 않으니
내가 찰나의 뜻을 말한다.
물질은 생기면 곧 없어지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이를 말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상속하는 성품은
망상으로 훈습된 것이다.
무명(無明)이 그 인(因)이 되고
마음이 그것을 따라 생기니
물질이 생기기 전에
중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차례로 상속하여 없어지니
나머지 마음은 저것을 따라 생긴다.
물질이 머물지 않을 때
무엇에 연(緣)하여 생기겠는가?
저것을 따라서 생기므로
진실하지 않은 인에서 생기니
어찌 성취함이 없이
찰나가 무너지는 것을 알겠는가?
수행자의 정수(正受)와
금강과 불사리(佛舍利)
광음천(光音天) 궁전이
세상의 무너지지 않는 일이다.
정법(正法)에 머물러
여래의 지혜를 구족(具足)하면
비구가 평등을 얻으리니
어찌 찰나를 보겠는가?
건달바성(乾闥婆城)과 환(幻) 등
그런 색(色)에 찰나는 없으니
진실하지 않은 색 등을
진실인 듯 본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아라한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리라고 수기하셨으며, 모든 보살 등과 차별이 없다고 하셨고, 모든 중생들의 법으로는 열반에 들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누가 불도(佛道)에 이릅니까? 처음부터 부처가 되고부터 열반에 들기까지 그 중간에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았고 또 대답한 것도 없다고 하셨으며, 여래는 항상 정(定)하기 때문에 또한 생각도 없고 살피는 것도 없다고 하셨으며, 화불(化佛)이 변화로 불사(佛事)를 하신다고 하
셨습니다. 어찌하여 식(識)이 찰나에 전전하여 무너지는 모습을 말씀하시며, 금강역사(金剛力士)가 항상 따라 시위(侍衛)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어찌하여 본제(本際)를 시설하지 않으시고 마(魔)와 마업(魔業)과 악업(惡業)과 과보를 나타내시며, 전차마납(旃遮摩納:旃遮摩那)과 손다리녀(孫陀利女)의 빈 발우를 내보이시어 악한 업장을 나타내십니까?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으셨으면서도 모든 허물을 떠나지 않으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위한 것이다. 이로써 보살행(菩薩行)으로 나아가도록 유인하기 위해서 설한 것이다. 이곳과 다른 세계에서 보살행을 닦는 사람들이 성문승의 열반을 좋아하므로 그들이 성문승을 떠나 대승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 화불(化佛)이 성문에게 수기를 한 것이니, 이는 법불(法佛)이 아니다.
대혜야,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성문에게 수기를 하고 보살과 다름없다고 한 것이다. 대혜야, 다름이 없다는 것은, 성문이나 연각이나 모든 부처님 여래가 번뇌장(煩惱障)을 끊고 해탈한다는 점에서 똑같기 때문이니, 지혜의 장애[智障]를 끊었다는 것은 아니다.
대혜야, 지혜의 장애란 법무아(法無我)를 보고는 수승하고 청정하다 여기는 것이니, 번뇌장은 먼저 인무아(人無我)를 보는 것을 익혔기 때문에 끊어진다. 7식이 없어지고, 법의 장애[法障]에서 해탈하며, 식장(識藏)의 습기가 없어지고, 구경에 청정하며, 본주법(本住法)에 인하기 때문에 전후가 성품이 아니며, 끝없는 본원(本願) 때문에 여래 는 생각도 없고 살핌도 없이 법을 연설한다. 바른 지혜의 교화를 받기 때문이며, 기억하여 잊지 않으므로 생각도 없고 살핌도 없다. 4주지(住地)와 무명주지(無明住地)의 습기가 끊어지므로 두 가지 번뇌가 끊어지고, 두 가지 죽음을 벗어나며, 인무아와 법무아를 깨닫고 두 가지 장애를 끊는다.
대혜야,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과 안식(眼識) 등, 일곱 가지 찰나습기(刹那習氣)의 인(因)을 벗어나고 선무루품(善無漏品)을 벗어나면 다시는 윤전(輪轉)하지 않는다. 대혜야, 여래장이란 열반의 법륜을 굴리는 것이니, 고락(苦樂)의 인(因)은 공연히 뜻을 어지럽힌다. 대혜야, 이는 어리석은 범부가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대혜야, 금강역사의 호위를 받는 것은 화불이니, 진짜 여래가 아니다. 대혜야, 진짜 여래란 모든 근량(根量)을 벗어나는 것이니, 모든 범부와 성문과 연각과 외도의 근량이 다 없어지고 현법낙주(現法樂住)의 무간법지인(無間法智忍)을 얻었기에, 금강역사의 호위를 받지 않는다. 모든 화불은 업으로 생기지 않는다. 화불이란 부처도 아니고 부처를 벗어나지도 않으며, 도공(陶工)의 바퀴 등으로 만들어진 질그릇같이 중생의 짓는 일을 모습으로 설법할 뿐이며, 스스로 통달한 것에서 스스로 깨달은 경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는 7식신(識身)이 없어진다는 것에 의지하여 단견(斷見)을 일으키고, 식장(識藏)을 깨닫지 못하므로 상견(常見)을 일으킨다. 자기의 망상 때문에 본제(本際)를 알지 못하고 자기의 망상인 지혜가 없어지는 까닭에 해탈한다. 4주지와 무명주지의 습기를 끊으므로 모든 허물이 끊어진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3승(乘) 또한 승(乘)이 아니고
여래는 마멸(磨滅)하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모든 허물과 악을 벗어나라는 것.
모든 무간지(無間智)와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위해서
열등한 모든 사람을 유인해 나아가게 하니
그러므로 숨기고 덮어 말한다.
모든 부처가 일으킨 지혜로
분별해서 도(道)를 말하니
모든 승(乘)은 승이 아니며
그것은 열반이 아니다.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와 그에 따른 소견(所見)
이것을 4주지(住地)라고 말하니
의식이 일어난 곳이며
식(識)의 집이고, 의(意)가 사는 곳이다.
의(意)와 안식(眼識) 등이
끊어져 없어지는 것을 무상(無常)이라 말하고
혹 열반이라는 견해를 지어
항상 머문다고들 말한다.
이때 대혜보살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저 모든 보살 등이
불도(佛道)를 구하려는 뜻을 두면
술과 고기와 파 같은
음식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상존(無上尊)이시여
불쌍히 여겨 말씀해 주십시오.
어리석은 사람이 욕심내어 집착하는 것
냄새나고 더러우며 명성을 얻지 못합니다.
범이나 이리가 즐겨 먹는 것
어찌 먹을 수 있겠습니까?
먹으면 모든 허물이 생기고
먹지 않으면 복(福)과 선(善)이 되리니
먹고 먹지 않는 것의 죄와 복을
저희를 위해 말씀해 주십시오.
대혜보살이 게송으로 여쭈고 나서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고기를 먹거나 먹지 않는 것의 공덕과 잘못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를 비롯한 모든 보살은 현재와 미래에 온갖 고기를 먹기를 희망하는 중생을 위해 분별하여 설법할 것입니다. 저 중생들을 자심(慈心)으로 서로 향하게 할 것이며, 자심을 얻고 나서 각기 청정하고 명료한 지위에 머물러 속히 구경의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게 하겠으며, 성문이나 연각은 자기가 머무는 경지에 그치어 쉬고 난 뒤 다시 무상보리를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악하고 그릇된 논법을 가진 모든 외도의 무리는 그릇된 소견과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으로 전도되고 계착합니다. 그런 그들도 오히려 이를 막는 법[遮法]이 있어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하물며 여래께서는 세간을 구호하고 정법(正法)을 성취하셨는데 고기를 드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한량없는 인연이 있으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그러니 내가 지금 너희를 위해 간략히 설하겠다.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윤회하는 인연으로 항상 여섯 친척[六親]이 되니, 친척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당나귀나 노새나 낙타나 여우나 개나 소나 말이나 사람이나 짐승 등의 고기를 백정(白丁)이 섞어서 팔기 때문에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이는 부정(不淨)한 기분(氣分)으로 생겨서 자란 것이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중생이 그 기운을 느끼면 모두 두려워하니, 개가 전다라(旃陀羅)나 담파(譚婆) 등을 보면 증오하고 놀라며 두려워하여 무리를 지어 짖는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또 수행자로 하여금 자심(慈心)이 생기지 않게 하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어리석은 범부가 좋아하는 것이니, 냄새나고 더럽고 깨끗하지 못하여 좋은 명성이 없어지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모든 주술이 성취되지 못하게 하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살생하는 사람은 그 형상만 보아도 식(識)을 일으켜 깊이 맛에 집착하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저 고기를 먹는 사람은 모든 하늘이 버리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입에서 냄새가 나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악몽을 많이 꾸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한적한 숲 속에서 범이나 이리가 냄새를 맡는 까닭에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음식을 먹는데 절도가 없어지게 되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수행자로 하여금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려는 생각이 생기지 않게 하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나는 항상‘음식을 먹을 때는 아들의 고기를 먹는다고 생각하고, 약(藥)을 먹는다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따라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고기를 먹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대혜야, 과거에 사자소타사(師子蘇陀娑)라는 왕이 있었다. 그가 온갖 고기를 먹고 사람 고기까지 먹게 되자, 신하와 백성은 감당하지 못하고 곧 모반하여 그 봉록(奉祿)을 끊었다. 고기 먹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허물이 있으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또 대혜야, 모든 살생하는 사람들은 재물의 이익을 위해 살생해서 팔며, 고기를 먹는 모든 어리석은 중생들은 돈을 그물삼아 온갖 고기를 잡아간다. 살생하는 사람은 재물로든 그물로든 하늘을 날고 물에 살고 육지에 사는 중생을 잡아 온갖 것을 살해하고 팔아서 이익을 구한다.
대혜야, 또한 가르치지 않고 구하지도 않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어육(魚肉)을 잡거나 먹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대혜야, 내가 언젠가 다섯 가지 고기를 먹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고, 혹은 열 가지를 규제하기도 했는데, 지금 이 경(經)에서는 모든 종류를 어느 때건 방편으로 허락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금한다.
대혜야,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먹는 것도 없는데 하물며 생선이나 고기를 먹겠느냐? 또한 남에게 가르치지도 않으니, 대비(大悲)를 앞세우는 까닭이다. 모든 중생을 외아들처럼 보므로 자식의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일찍이 모두 친속(親屬)이었으며
더럽고 깨끗하지 않은 것이 섞였다.
부정(不淨)한 곳에서 생기고 자랐으며
기운을 느끼면 모두 두려워한다.
모든 고기와 파
그리고 모든 부추와 마늘 등
온갖 방일(放逸)한 술을
수행자는 항상 멀리한다.
또 항상 마유(麻油)와
모든 구멍 뚫린 상(床)을 멀리하니
저 작은 벌레들이
그 속에서 공포에 떨기 때문이다.
음식이 방일을 낳고
방일이 모든 각(覺)을 낳고
각에서 탐욕(貪欲)이 생기니
그러므로 먹지 말아야 한다.
먹는 데서 탐욕이 생기고
탐욕이 마음을 미혹에 취하게 하고
미혹에 취함이 애욕(愛欲)을 길러
생사에서 해탈하지 못한다.
이익을 위해 중생을 죽이고
재물로 온갖 고기를 잡아들이니
두 가지 모두 악업(惡業)이므로
죽어서 규호옥(叫呼獄)에 떨어진다.
만일 가르침과 생각과 구함이 없다면
3정육(淨肉)도 없으니
저것은 까닭 없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먹으면 안 된다.
저 모든 수행자는
이런 까닭에 모두 멀리 벗어나야 하니
시방의 부처님 세존이
모두 다 꾸짖는 것이다.
끝없이 윤회하며 서로 서로 잡아먹으니
죽으면 범이나 이리의 부류에 떨어지고
더러운 냄새가 혐오스러우며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어리석으리라.
대부분 전타라(旃陀羅)나
사냥꾼, 담파(譚婆)의 종족으로 태어나고
혹은 다이니(陀夷尼)와
모든 육식성(肉食性)으로 태어난다.
나찰(羅刹)이나 고양이나 살쾡이 등
두루 이 가운데 태어나 돌다가
박상(縛象)과 대운(大雲)
앙굴리마라(央掘利魔羅)로 태어난다.
이 『능가경(楞伽經)』에 이르러
나는 모든 고기를 먹지 못하게 제정하니
모든 부처와 보살
성문의 꾸지람 들으리라.
먹고 참회하지 않으면
태어날 때마다 항상 어리석고 어두우니
먼저 견문의(見聞疑)를 말하고
다음에 모든 고기를 끊어라.
망상으로 깨닫지 못해
고기 먹는 곳에 태어나며
저 탐욕의 허물이
성해탈(聖解脫)을 장애한다.
술과 고기와 파와 부추와 마늘
모두 성도(聖道)를 장애하는데
미래의 중생들은
고기에 대해 어리석게 말하리라.
이것은 깨끗해서 죄가 없다 말하고
우리가 먹는 것은 부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하리니
먹으면서 약을 먹는다 생각하고
또한 자식의 고기를 먹는다 생각하라.
족한 줄 알아 싫어해 벗어날 생각하고
수행자는 걸식을 행하라.
자심(慈心)에 안주하면
항상 싫어해 벗어나게 된다고 나는 설했다.
범과 늑대와 모든 악한 짐승들
항상 그와 함께 노닐고 멈추리니
온갖 피와 고기 먹으면
중생이 모두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자심으로 고기를 먹지 말라.
고기를 먹으면 자비심(慈悲心)이 없어
영원히 바른 해탈을 등지고
성인의 표상(表相)을 멀리하리니
그러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범지종(梵志種)과
모든 수행처(修行處)와
지혜롭고 부귀한 집에 태어나는 것
이는 고기를 먹지 않은 까닭이다.
[출처] 능가아발다라보경-제4권-3|작성자 byuns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