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농사법
김영주
텃밭 배춧잎에 당글당글 진초록똥
애벌레 앉은 잎을 조심스레 따내린다
밭에 온 손님이라고
많이 자시고 가라고
풀밭
김유미
풀을 뽑아낸 자리에
내 꿈을 묻고 흙을 덮었다
뒤돌아보면
돋았다가 시드는
시들었다가 돋아나는 싹들로
눈이 푸르다
멀다
그러나 무엇이 열릴지 몰라서
갈아엎지 못하는 언덕의
게으른 농부
임덕연
콩도 안 심네
하루내내 기다렸다
콩새도 날아가고
볍씨도 안 뿌리네
봄내 기다렸다
벱새도 날아가고
일년내내 기다려도
찾아오는 친구도 없네
두어 번 울다 까치도 날아가고
아, 이포 게으른 농부
풍란
성향숙
잘린 소나무 등걸에 착생해
나누어 받을 무엇이 있을까?
뿌리를 성하게 내뻗는다
버석버석 갈라질 때까지
나무속의 감춰진 희망을 찾아
뿌리내림을 멈추지 않는다
죽음을 옹골지게 파먹으며
쓸리는 바람 견뎌내고
액세서리처럼 달라붙어
죽어서도 아름다운,
죽음보다 더 큰 의미가 되도록
소나무를 장식한다
배나무가 있는 풍경
최기순
아버지는 하루 종일 배밭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고전처럼 읽던 땅은 흉작에는 빚 걱정을 풍작에는 어린애 볼기 같은 배를 파묻어버리게 했다
나는 아버지의 꿈들이 가랑잎처럼 버석거리는 땅 아래
시든 배꽃 같은 아버지 살을 묻었다
옷을 입히고 벗기는
이용준
입히기
인사한다,부드럽게
논밭을 갈고 파종한다
벗기기
인사한다, 고마워하며
수확하고 저며둔다
그런데 농부여
그대는 언제나 스스로
입고 벗을 수 있겠나
정작 텅 빈 들녁이
안타까워하고 있으니 말일세
써레질
이종구
모내기를 위해
써레질하는 써레 위에는
어린 손주나 아이들을 앉힌다
어린 모를 꽂기 전에
거칠게 젖었던 흙의 마음을
곱게 어루는 일이다
써레 줄을 매달고
텀벙거리며 도는 암소도
다 안다는 듯 부드럽게 걷는다
천수답
정수자
못물이 그들먹한 오월 들녘 지날 때면
흙물 든 어깨 위로 새로 빚은 햇귀들과
봄 내내 하늘물 받든 삽의 시간이 비쳤다
천수답의 일생이란 하늘과의 동침인 듯
아버지 삽날엔 가끔 낯선 빛이 서리었다
새벽 내 무릎 꿇고 읽은 바람의 문맥 같은
그런 논의 족보로 출렁이는 소만 무렵
조회 선 듯 파르란 모 뭉클 젖어 쓸다가
시라는 재 천수답 어귀 녹스는 삽을 보았다
진경산수도
여강농인
초록빛
천의무봉이신가
오월 평야
밥이 곧 하늘님이라지만
하늘님 눈 미치지 못한 데 많이
있어서
어제 모를 낸 넝넘이들 논에
수천 수만 반가사유 미륵들
초록 법설이 황홀하였다
오래간만에 뵈옵는
진경산수도였다
객토
박남원
겨울 건너온 논에 가서 황토를 뿌렸다.
질병처럼 검어진 흙, 그 위에
붉은 흙들이 덤프트럭에서 쏟아져 내리면
포클레인을 따라다니며 돌들을 걷어내고 괭이와 삽으로 땅을 골랐다.
삼월 중순 지나 때아닌 함박눈 내려
공중을 급히 달려온 눈송이들이
탈지면처럼 상한 논의 상처들을 연신 닦아낸다.
쉴 틈 없이 뛰어다니며 흙을 뿌려도
어렵고 힘겨운 수혈,
허름한 농가 깊숙이 묻어둔 감당할 수 없는 내환은 쉬 회복되지 못한다.
오전 내내 바쁘게 논바닥을 뛰어다니다 보면
시간은 등짐을 져 나르듯 힘겹게 흐르고
등골엔 연신 식은땀이 흐른다.
한숨 돌려 멀리 곡성 쪽 하늘을 바라보면
들 밖의 시간은 단지 무심할 뿐.
역에 잠시 머물렀던 열차는 들새처럼 이내 길을 떠난다.
호박
김임선
가슴과 허리와
엉덩이가 한 덩어리
단풍 든 아내는 항아리가 되어 늙어가고
한 방울
비에 툭, 금이 가는 독
넝쿨이 뻗어나온다
모 심는 날
장주식
밥 한 그릇에 세상이치 다 담겼다는데
오늘은 밥 수백그릇 모시는 모 심는 날
* 해월신사 말씀에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농자천하지대본
조정
물큰 하늘을 밟고
못물에 드네
못물에 잡아
달포나 익힌 하늘이라야 밥을 기르지
물큰 발가락 사이로 게흙 올라오는
부드러움에 드네
식량전쟁이 이미 개전되어 종교니 민족이니 명분 세워 가까이 온다는데
못물 방방한 논 한 배미쯤 저마다 지켜야하지 않나
땅 밟을 일 없는 아파트 값 오르는지 목이나 빼고 있어도 되나
새끼비암 허리 밟아 소스라치는 소스라침도 없이
뭐시 중허냐면
정용국
제초제 뒤집어쓰고
부스럼 딱지 앉은
일손 타령
이문 타령에
어둑 날이 저무는 논에
글자 심어 싹 티우고
생각 심어 덩굴 올리는
우리 알량한 그 손을 빌려
우렁우렁 모를 내세
술타령 그늘 좋은 날
하늘 같은 모를 내세
5월 논 5월 밭
홍일선
그해 5월 나 광주에 있지 않았다
나 논에 있었다 낫 들고 밭에 있었다
그해 5월 나 광주 정말 모른다
그해 5월 몸서리나는 총소리 탱크소리
두 귀 막고 그냥 벙어리처럼 모만 심었다
황톳물 핏물 송장 썩은 물 뒤범벅
텃논에서 못줄도 없이 아무렇게 막모도 냈다
그해 5월 살려달라는 아우성소리 비명소리 차마 듣지 못하고
보리밭에 누워 멀리 고속도로 군용트럭 긴 행렬 바라보았다
그해 5월 아직 덜 익은 보리밭
조선낫으로 죄 없는 보리이삭 후려치며
허공 후려치며 밭둑에 멀거니 서 있는 수양 버드나무 조선낫으로 찍었다
그해 5월 나 석우리 사는 한낱 농민이었다
― 5월광주 민중항쟁 시선집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유랴>(인동, 1987년)
시니어 라운지 텃밭
장건
상자에 흙을 담아
텃밭을 만들었다
모란시장 오일장에 나가
모종을 이만 오천 원어치 샀다
사 가지고 온
상추 치커리 고추와 봉선화 씨앗을
할머니 꽃밭에 심었다
할아버지 텃밭에는
가지와 오이 쑥갓을 심고
물을 듬뿍 주었다
쑥쑥 자라면
단지 내 어린이집 아기들
샐러드 반찬으로 올려주고
경로당 어르신들
입맛 돋우는
쌈밥 싸 드시게 해야지
텃밭 농사도
하늘이 돕고
도시농부 정성이 깃들어야
풍년일세
끝없는 노동 쌀米
韓 稻 熟
“새 씨앗은 재 넘어서 바꾸어 둔다”는 말이 있어. 벌써 김가네 볍씨로 바꾸어 두었지. 볍씨를 꺼내고, 까 불리고, 동이로 져온 물에 담그고, 소금 넣고, 닭장 장태에 달걀 집어와 물에 띄워 농도 맞추고, 한 번 더 휘휘 저어주고, “이월에 눈 세 번 개불알에 쌀 밥알”이라 올해는 풍년 들 듯 허이.
“논에는 물이 장수”라 잖아. 문전옥답 고래실논에 가래질로 두둑 막고 “가래 장치꾼 호랑이도 무서워한다”는데 힘자랑하지 말고 구령 맞춰 잘 땡겨야지. 써래질하고, 또 한 번 재벌하고, 판장 올리고, 반질반질 떡판 만들고
눈을 뜬 듯 만 듯한 볍씨를 뿌리고 고르게 펴야지. “입하 바람에 씨나락 몰린다.”고 그러잖아. 서낭당 들머리 정갈한 붉은 흙 두어 지게면 충분하지. 삼태기에 담아다가 살짝 뿌려 볍씨 덮고, 물을 그득 대어주면 사나흘 지나 벌써 하얗게 올라오지. 참으로 신기한거야.
하늘에 햇볕, 땅에 땅심, 시원한 물 마시고, “삼사월은 굼벵이도 석자씩 뛴다.” 는데 모 자라는 소리에 잠을 깨네. 일촌(一寸) 정도 자라면 첫 번째 피사리지. 눈에 불을 켜고 잘 봐야해. 아차잘못 피 대신 볏모를 뽑으면 패가망신한다더라구. “익은 밥 먹고 선소리하듯” 설렁대면 일이라네.
이촌(二寸) 쯤 자라면 피는 피끼리 벼는 벼끼리 생긴 모습이 서로 달라 피사리에 흥타령이 나오지 허리 한번 펴고 얼씨구, 피 한 주먹 내던지며 절씨구, 하늘바래기 논배미가 배들배들 거려도 고래실엔 물이 가득 “피 한해 자라면 칠년은 고생이라”잖어. 또 보고, 또 뽑고, 돌아서서 또 뽑고...
한 장(丈)을 넘긴 모판 마지막 피사리라. 큰놈만 뽑아내면 영락없는 피사리니, 태종우 기다릴 거없다 “단오 물 잡으면 농사 다 짖는다. ”하니 올해는 딱 맞구나.
서둘러 모를 내는데. 한섬지기 고라실 넓디넓은 논바닥 쳐다보고 질리지 말고 “한술 밥에 배부른가.” 부지런히 들어가서 모를 내세. 동네사람 품앗이라 못줄도 잡아야하고, 모 쪄서 나르는 모쟁이도 필요하고, 뒷설거지 빼고 나면 한사람이 하루에 두어 마지기, 여기저기 거머리 물려 근질근질 가렵잖어. “거머리 물린데 가려우면 비가 온다.” 옛말 있지. 비 맞으며 모를 내면 풍년은 기약이야. “대추가 콧구멍에 들랑날랑하면 올모라니 그때까지 모를 내세. 못밥은 한껏 퍼서 밥심으로 버티고 지나가는 나그네도 한 그릇 ”부지런한 거지도 먹고 간다잖어“
모내고 나면 물 관리야. 충분히 물을 대고 오뉴월 뙤약볕에 논매기가 시작 되지. 덥다고 투정하지 말고, “쌀 더위가 풍년”이라지. 애벌매기 품앗이로 돌고 나면 “거친 두벌매기 꼼꼼 애벌보다 낫다.” 했어. 벼 포기 꿋꿋하여 눈 찔리고 코 찔리고 유두 날 돌아오면 부지런히 논매기를 마쳐야지. 그렇다고 너무 서두르면 “급한 밥 목메는 법” 호미 씻어 걸어두고, “어정칠월 동동 팔월” 너무 믿으면 사단 나지. 장마 들면 물 관리에, 도복피해 방지하고, 방천 날까 논둑 관리, 물고에 보명개도 퍼내고, 둠벙도 손봐야지. “천둥 번개 심한 해는 풍년 든다.”는데 논둑을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야 해. 모포기가 발소리 듣고 자란대요.
장마가 지나가면 태풍이 불어오지. 태풍이 한 번일까 두 번일까. 여뀌대 이파리 얼룩무늬 들여다 보지. 배동시기 물차면 소출은 절반이야. 물고관리 논둑관리 틈틈이 돌아보고, 도복된 논 일으켜 세워 청취를 방지하고, 논바닥에 도구 쳐서 물을 바짝 빼야하네. 정신 바짝 차려야지. “다된 밥에 코 빠진다” 옛 말에 이르기를“가뭄 끝은 있어도 홍수 끝은 없다” 했지. 참매미 울어대면 참새 떼 걱정이네 . 새끼로 도리뙈기 만들어 힘차게 돌리면 “딱딱” 참새도 쫒아야지. “메뚜기도 여름이 한철”이라는데 정신 바짝 차려야해. “칠팔월 제비가 논에 앉으면 풍년” 든다는데, 제비가 많기도 하다. “날 가물면 늪 내린다” 했는데 그럴 일은 없겠네.
“백중날은 논두렁 보러 안 나간다” 했으니 잔치마당이나 벌이는 거지. 고추잠자리 높이 날면 벼알이 고개 숙이기 시작 해. “벼알 익는 소리에 동네 개 다 짓는다” 했지 “처섯 날 비오면 십리안에 천석이 없어진다.”그랬거든. 처서 날 비 없고“가을 안개에 곡식는다”는데 안개가 자욱하니 가을 날씨 좋아지니, 신발짝 던져서 위에 걸리면 양석이야. 논두렁에 물고를 활짝 열고, 도구를 잘 쳐야지, 도구다라 내려오는 참게잡이는 덤이지. 찬 이슬 걷히고 나면 낫 갈아 논으로 가네. 숫돌 챙겨야지 낫 챙겨야지. 양반네 팔자걸음으로 한 글자 음송하신다. “도숙황만야 춘래록편산(稻熟黃滿野 春來綠遍山)이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여덟 줄씩 잡아 서서 한주먹에 여섯 포기 우두두둑 베어낸다. 허리가 동티나지 않도록 쉬엄쉬엄 담배 한 모금하고 하야지. 아무리 힘들어도 “일 년 시집살이 못하는 사람 없고 벼 한 섬 못 베는 사람 없다.”는데 할 만큼은 해야 해.
고래실엔 솔가지 꺾어 그 위에다 볏단 올려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고, 마른 논엔 논바닥에 그대로 말려야지. 가을볕에 한 삼 일 말려주고 뒤집어서 한 사나흘 말려주고, 마당질할 근처에다 낟가리를 쌓아야지. 비가 오면 탈이니 동가리를 돌려돌려 막음질을 잘해야 해 . 커다란 노적봉 바라보니 “쌀고리에 든 닭”처럼 “안 먹어도 배부르네.”
그네는 어디 있나 단단히 설치하고, 한쪽에선 태질하고, 한쪽에선 훌치기라, 이리저리 튀는 놈은 튀지 못하게 간수하고, “담 밑에 구랭이 있고 북대기 속에 벼알 있다.”했어. 뒷자리는 갈퀴로 긁어 도리깨질 욱신욱신, 풍선으로 불며 키질해서 몇 섬이나 나올라나.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 부지깽이라도 두들기세. 말 통을 들고 벼알을 백 근씩 되어 섶에 담고 달음질. 볏광에 쌓아둔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궁이에 불 지피고, 볏광에 벼를 꺼내 디딜방아 찧는거야. 쿵덕쿵덕 어지간히 벗겼으면 함지에 담아놓고 키질을 해야 해. 하늘에 올렸다 받았다 반복하면 쌀알은 앞으로 모이고 왕겨는 바람에 날려가잖아. “쌀에 뉘섞일까.” 걱정되니 체로 한 번 더 거르면 청취하고 쌀겨는 밑으로 빠져 온전히 쌀이 되지.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어. 남은 쌀은 쌀독에 넣고, 충분한 만큼 덜어 내어 물에 씻고, 뜨물 받고, 한 번 더 씻고 뜨물 받고, 뜨물도 귀한 것이니 받아서 요긴하게 써야해. 된장국도 끓이고 말야. 조심조심 수채에 쌀알 흘리면 집안 망한다고 지청구니 했잖어, 조리질 살살 해서 가마솥에 안치고 붙은 불에 화력 더해 풍선질 빙빙 돌리면 그제서야 밥이 되지. “밥이 보약”알어. 세상에 약 중의 약. 밥이 된다는 내력이네. 그렇게 여든여덟 번 노동 중에 노동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