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의 씀에 있어 양봉사를 상세히 기록하자니 너무 오랜 세월의 흐림이고, 또 모두가 소홀했던 옛 일들이라 구전(口傳)과 연로하신 지역 어른들의 증언을 종하해 기록함을 밝혀며, 왜곡(歪曲)되고 미화(美化)되지 않게 사실에 접근했지만 행여 잘못 된 점이 있다면 표현의 부족이라 넓게 이해하시고 양해가 있으시길 바란다.
고령의 양봉사! 이는 한국의 양봉사이다. 어려운 시절 감히 상상 할 수도 없었던 신기술을 가장 먼저 고령땅에 접해 전국을 이동하며 퍼뜨렸으니, 이동양봉 부분만은 누가 뭐라해도 우리나라 최초임을 확신한다. 해방 전 혼란의 그 시절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는 일부 한의(韓醫)들이 토종벌 한 두통으로 일년에 한번 석청(꿀)을 떠서 약재(藥材)로 사용하였던 것이 전부였다. 그러하기에 소위 꿀(석청)은 금고 k같이 귀한 약재이고 감히 식용으로는 맛도 볼 수 없는 고가의 약이었다. 그런데 양봉으로 다량의 꿀을 생산하는 신기술을 펼친이가 있었으니, 고령지역 양봉의 시초이며 우리나라 최초로 밀원지를 찾아 나서는 이동양봉을 개척한 선구자(先驅者)가 한분 있다.
1. 고령양봉의 선구자 : 김 기윤(基潤)-1915년 전후 생, 평안북도 안주출신 좌우사상으로 혼란하였던 1948년 전후 이북에서 부인과 아들 하나를 데리고 남하했다고 전해지나 무슨 연유로 남하했는지 알수는 없다. 그렇다고 어떤 좌익 사상에 연관된 분은 결코 아니라고 전해지며 6.25 이후 우파에 서서 어려운 분을 대변하며 도왔던 행적의 전언(傳言)에서도 증명이 된다. 훤칠한 키에 이북 말과 서울 표준말을 멋지게 하는 귀공자 타입의 덕망을 갖춘 신학자(神學者)였다. 영어와 일어를 잘하는 신지식인(新知識人) 선생님으로 노년기에 접어들어 우곡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부임 후 덕망(德望)으로 제자들을 교육시켰지만 우곡국민학교(현 우곡중 부지)가 1950년 6.25 사변에 화재로 전소(全燒)돼비리니 일시 피난을 우곡에서 맞이했다. 난리가 끝나고 국민학교는 오늘날의 연리초등학교 자리로 이전하게 폐허가 된 터에서 선생께서 손수 흙담을 교실에 만들어 배움터를 만드니 ‘우곡고등공민학교’이며 교장을 맡으셨다. 이는 정식 학교로 인가되지 않은 중·고등교육의 과정으로 신학문으로 개몽과 농촌소득 증대가 될 수 있는 다량번식의 가축사육 기술과 신 농법 기술에 중점을 두고 젊은 학도들을 육성시켜 나갔다. 교사 채용에도 신문물을 아는 지역의 일부 학식있는 분을 선생으로 임명하니 처음 1기생이 50여 명에 달했다. 재임 중 학교 뒤에 거처를 마련한 사택에다 보지도 못한 백돼지(흰돼지, 미국 돼지라고 일컬었음), 벌, 토끼, 닭 등을 사육하며 다산(多産) 번식의 신기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증언에 의하면 병아리 부화기를 만들어 다산(多産)의 병아리도 까고(그 당시만 해도 획기적인 신기술 이였음) 계란의 유·무정란 선별법, 앙고라 토끼 사양범, 흰돼지 사육법 등 그 당시 접근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농촌에 전파했다. 이뿐만 아니라 탁월한 신지식의 선생께서는 영어와 모든 분야의 신학문을 가르쳤고 기독교 신자로서 장로 역할도 하면서 지역의 교회유치(전도)에도 관여를 했다. 일설에는 남한에 오기 전 미국에서 선교사(宣敎師)로 종교와 신기술을 배웠다하나 정확한 확인히 되지 않지만 우곡을 떠나기 전 먼저 부인과 아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으니 무슨 연관도 있는 듯 하다. 학교를 열고 3기생까지 모집할 때 쯤 고령중학교, 우곡면 인근의 창녕 이방에 옥야중학교, 구지의 구지중학교 등에도 정부의 인가(認可)된 중등교육기관이 들어서니 급격히 학생 수가 줄어들었다. 사유인즉 공민학교 졸업으로는 고교진학을 하려면 중등검정고시를 치러야만 했기에 3기생 배출한 채, 학생없는 교장직을 지니면서 이동양봉의 길로 나아갔다. 이것이 고령의 이동양봉의 시초이며 한국 양봉사에도 처음 밀원지를 찾아 가는 개척의 길이였으니 그 시대인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고난과 모험의 길이었다. 이 탁월한 선구자 김기윤 씨를 알아야 한국의 이동 양봉사를 알 수 있기에 구전(口傳)을 수집해 그분의 전기를 이나마 밝혀둔다.
2. 이동양봉의 시작 선구자 김기윤 씨는 1954년 4월말 경에 80여 통의 벌로 졸업한 제자 박두헌(공림학교 1기생, 교장사택에 함께 거주하며 배웠음)을 데리고 이동양봉의 길을 여니 그 첫 이동지가 고령 인근인 합천군 지릿재 중턱 아카시아꽃 밀원지이다. 연이어 거창군 북삼면(거창 수성대 부근) 밤나무 꽃 밀원지를 찾았고 7월에는 강원도 상장면(황지 부근)에 싸리꽃 또 하장면 등지에 밀원지로 이동했다가 겨울철 우곡 월오, 대곡2리(하라) 등지에 월동을 했다고 희미하게(그때의 정확한 행적은 전부 고인이 돼 버렸기에) 증언을 하고 있다. 이것이 고령 최초의 이동 양봉사이며 국내 최초이다.
그때에 동행한 책임자는 박두헌(도진), 보조 제자는 박경용(월오) 이었고, 2년간을 반복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아마 자금난?) 김기윤 씨는 서울로 이주하였고, 서울 이주 후 양봉과 병행된 한국양토조합(앙고라 토끼 털을 깍아 수출하는?)을 설립조합장을 하니, 한 때 우곡지역에 앙고라토끼 털 깍이 사육 붐을 이루었다.
3. 이동양봉 개척자 박두헌(斗憲, 1934-1973년, 고령 도진) 고령 이동양봉에 실질적인 양봉기술을 전파해 많은 제자들을 육성시킨 뚜렷한 고령출신의 첫 양봉인이다. 고령박씨 소윤공파 27세, 도진인으로 일찍이 소학(小學)과 명심보감(明心寶鑑), 사서(四書)등 한학(漢學)을 족친(族親)에게 수료하고, 뒤늦은 16세에 우곡고등공민학교 1기에 입학해 김기윤 고장의 수제자로 교장 사택에 거주하면서 학문과 신기술인 양봉과 양계 등을 터득했다. 영특함과 대인관계가 좋은 선비타입에 일어와 영어, 독어 등 신학문까지 배운 재주꾼이였다. 어릴 때 벼 타작기계에 오른손을 다쳐 군 입대가 면제됐지만 그 불편한 손이 오히려 서예와 다방면의 손재주에 전화위복이 되었고, 이론적인 양봉기술 서적은 모두 일본어 책으로 배우며 익혔다. 이미 그 당시에 봉침(蜂針)을 이용해 밀원지에서 팔다리 아픈 농부에게 치료를 해주는 신학문의 선비로서 가는 곳 마다 아예 박 선생님으로 경칭(敬稱)을 받았다. 처음 김기윤 교장의 제자로 출발해 이동양봉 2년차에 고령읍 관동에 양봉을 하던 이헌두(憲斗, 1924년생) 씨를 만나 의형제 같은 돈독함으로 인연을 맺으면서, 이동양봉 3년차에는 직접 벌통을 제작 350여 통으로 확장해 본격적인 전국순회 이동양봉을 체계적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이헌두 씨가 자금을 조달하고 밀원지 개척과 꿀 판매를 하면서 현장과 기술적인 이동양봉에는 모든 것을 총괄했다. 1964년부터는 국내에서는 제일 먼저 제주도 밀원지(蜜源地)를 개척해 성읍리(현 민속촌, 민속박물관 자리)에 월동(越冬)을 하고 서귀초, 애월, 구좌리 등에서 봄 유채꽃 꿀을 채취한 후 육지로 이동을 했다. 또 고령을 넘어 한국 양봉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한 분의 거인이 있으니 이헌두(憲斗, 관동 이헌주씨의 제)씨 이다. 이헌두씨는 처음 관동에서 벌을 사육하다 박두헌씨와 인연을 맺으면서 이동양봉을 시작하였고, 그 후 대구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양봉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서울 농협중앙회에 왕래하다가 1967년 서울에 아예 이주해 양봉협동조합 설립에 전념했다. 어려운 역경에도 불굴의 신념과 거침없는 추진력으로 사비(私備)를 드려가면서 그 당시 농협중앙회와 투쟁하며 협상했다. 드디어 1967년 초, 최초로 농협중앙회 소속 특수법인인 ‘양봉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조합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양봉인들은 조합비 조차도 내지 않는 불필요성의 비난과 불화음(不和音)으로 모든 운영비를 부담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67년 가을 양봉조합에서는 농협중앙회에서 양봉업자들로부터 수매한 꿀 150여 드럼을 위탁판매 받았지만 그 조차 쉬이 풀리지 않았던 어려운 역경의 기억도 있다. 그때 본인도 맨 처음 양봉협동조합 직원으로 발령을 받고 근무를 하다 군 입대 관계로 휴직 후 복직하지 않아 그 뒤의 일들에는 상세히 알지 못하지만, 3년 후 박두헌 씨가 작고한 1970년도 이후에는 양봉을 그만둔 것으로 안다. 그 시절 양봉인이로서 이헌두 씨는 조합설립을 위해 이사한 후 1개월 만에 상처(喪妻)까지 하였지만 그 역경에서도 무서울 만큼 열정을 갖고 양봉발전을 위해 추진하였던 뚜렷한 존재였다. 두 개척인이 함께한 그 때의 밀원지로는 5월 초-대전 유성 K-5공군기지 앞 아카시아, 5월 중순-연천 28사단 비무장지대(국방부 허가유) 2차 아카시아, 6월 초-경기도 양평 양수리-밤나무, 7월 초-강원도 오대산, 사금산 등지-싸리, 8월 초-경남 창녕군 이방면 낙동강둔치-메밀, 이외에도 전라도 벌교 자운영꽃, 거창, 합천 묘산 등지의 밤나무 단지 등 경우에 따라 밀원지 코스를 변경 이동했다. 박두헌 씨의 제자(弟子)들로는 박경용(우곡 월오리 출신), 박순헌(우곡 도진리 출신), 이창수(덕곡 예리출신, 현 강원산업 대표), 조기태(우곡 대곡2리 출신, 전 양봉협회 회장), 강영도(강원도 평해 출신), 이용팔(덕곡면 예리 출신) 외 3인이 거쳐갔으나 장기 전념하지 않았고 이중 이창수 씨와 조기태(작고)는 1960년대 말 독립, 이동양봉을 계속해 한국양봉사 발전에 고령인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선생은 이동양봉 중 양봉에 관심을 가진 많은 양봉가에 기술을 전수하니 작고 전까지만 하더라도 양봉계의 선생님으로 전국 양봉가에 인품과 명성을 펼치셨다. 하지만 지병인 간디스토마로 1973년 초, 40세의 젊은 나이로 작고하시니, 남은 벌들은 후손이 처분하였고, 밀원 월동지 제주도에 묻히기를 유언(遺言) 하시어 제주도 표선면 성읍리 민속촌 북편 산록(山麓)에 영면(永眠)하고 있다. 하나의 목격담으로 근래에 관절로 치료되고 있는 ‘봉침요법’에 선생은 이미 1960년대부터 고통받고 있는 환자에게 가끔 치료를 하셨다. 선생은 벌을 이용한 봉침은 진맥을 하고 벌통을 열어 건강한 벌을 손으로 잡아 머리부분에 강약을 조절해 짓누르면서 침을 놓듯이 맥에 쏘이게 해 치료를 했다. 그 일화로 1968년 경기도 양평 양수리(전원일기 무대마을) 밤나무 밀원지에서 한 농부가 걸음을 잘 걷지도 못해 봉침을 선생에게 맞고는 완쾌 돼 농사일을 하게 되었다. 다음 해에 다시 그 밀원지를 찾았을 때 마을 주민들이 와서 벌통 하역과 떠날 때 상차작업을 해주는 고마움을 표하면서 여러 주민이 봉침을 맞는 것을 보았다. 선생은 일본 책자에서 익힌 것으로, 봉침 시에 기구를 사용하고 고통 받은 벌을 이용하면 아무 효능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현재 일부 한의원에서 이용되고 있는 봉침은 용기에 오래토록 보관하고 고통받고 악만 남은 벌들을 핀셋으로 집어 갔다대는 방법에 과연 그 효능을 믿을 수 있을런지? 양봉가들은 깊이 연구 거론돼야 할 과제로 사료된다. ※자료를 제공해주신 우곡면 박돈헌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 저작권자 © 고령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