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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천하 기재 (6)
포숙(鮑叔)은 관중과 함께 임치성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 관중(管仲)은 죄를 사면받은 것이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그는 죄인의 신분이었다. 제환공의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함께 성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포숙(鮑叔)은 관중을 성밖 교외의 한 작은 집에 머물게 한 후 혼자만 성안으로 들어가 제환공을 뵈었다. 그는 노나라에 다녀온 일을 보고한 후 엉뚱한 인사를 올렸다.
"우선 한 가지를 위로드리며, 다음으로 한 가지를 축하드립니다."
제환공(齊桓公)은 포숙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했다.
"한 가지 위로할 것과 한 가지 축하할 것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규(糾) 공자는 주공의 형님입니다. 주공께서 형님을 없애신 것은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위로의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하할 일은 무엇이오?"
이에 포숙(鮑叔)은 숙였던 허리를 펴며 흔쾌히 입을 열었다.
"관중은 천하 기재(奇才)입니다. 소홀과는 그 유가 다른 사람입니다. 신이 이제 그를 죽이지 않고 데려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주공께서 어진 신하를 얻으셨는데, 어찌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환공은 별로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다.
"관중(管仲)은 과인에게 활을 쏜 자이오. 지금도 나는 그 화살을 보관하고있소.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를 죽여 젓갈을 담고 싶지만, 그대의 간곡한 청에 눌러 참고 있는 것이오. 그런데 어진 신하라니? 임금을 죽이려 했던 자를 어찌 어진 신하라 할 수 있단 말이오?"
"신하된 자로 자신의 주인을 위해 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관중이 주공을 쏜 것은 그때 그가 규(糾) 공자의 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공께서 관중을 용서하여 등용하시면 그는 마땅히 주공을 위해 활로 천하를 쏠 것입니다. 어찌 천하를 허리띠의 쇠고리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제환공(齊桓公)은 고개를 끄덕이긴 하였지만 아직도 분이 가라앉지 않은 표정이었다.
"알겠소. 내 그대의 낯을 봐서라도 관중(管仲)을 용서하기는 하겠소. 하지만 신하로 받아들이는 문제는 좀더 생각을 해보아야겠소."
포숙(鮑叔)도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일단 관중을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한 것만도 큰 성과였다. 그는 궁정을 나오자마자 다시 교외로 가서 관중을 자기 집에 데려다놓았다. 그러고는 밤낮으로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나누며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제환공(齊桓公)의 즉위와 관련된 모든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제양공 이래 어지러웠던 정국도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제환공은 그 동안의 일에 대해 공이 큰 신하들을 일일이 포상했다. 어떤 대부들에게는 벼슬을 내리고, 또 어떤 귀족들에게는 영지를 하사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포숙(鮑叔) 한 사람뿐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포숙이 정경(正卿)에 오를 것이라 예상했다. 정경은 재상에 해당하는 직위이다. 포숙은 자타가 인정하는 일등공신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제환공은 지금쯤 공자 규(糾)와 같은 신세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재상에 오른다 해서 불만을 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환공(齊桓公) 역시 포숙에 대한 보답으로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제환공은 따로이 포숙을 불러 말했다.
"그대는 재상이 되어 나라 정사를 맡아주시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포숙(鮑叔)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사양하는 것이었다.
"주공께서 신을 위해 정경 벼슬을 내리시는 뜻은 잘 압니다. 하지만 재상이란 사사로운 정리나 공훈에 의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결코 나라 일을 다스리는 데 적임자가 아닙니다."
"과인은 그대의 능력과 지혜를 잘 알고 있소. 그대는 사양하지 마시오."
"주공께서 신을 잘 안다고 하시지만, 그것은 제가 아랫사람으로 있을 때의 모습뿐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압니다. 저라는 사람은 오로지 매사에 삼가고 조심할 뿐입니다. 그저 정해진 예와 법을 지키는 데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는 신하 된 자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일일뿐, 결코 나라를 다스리는 능력과는 무관합니다. 지키는 것과 다스리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
"대저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먼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외적을 다스리고, 모든 나라 제후들에게 덕을 펴고, 나라를 태산처럼 튼튼히 하고, 주공에게 한없는 복을 누리도록 하게 하고, 주나라 왕실에는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어림도 없습니다."
포숙(鮑叔)의 말을 듣고 있던 제환공은 비로소 그의 사양이 겸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포숙이 말한 바와 같은 인재를 얻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제환공은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내밀며 물었다.
"그대가 말하는 그런 인재가 오늘날 세상에 있소?"
포숙(鮑叔)이 아무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주공께서 꼭 그런 사람을 구하시려고만 한다면 어찌 없겠습니까?"
"그게 누구요?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소?"
"아닙니다. 바로 임치성 안에 있습니다."
포숙(鮑叔)의 말에 제환공의 입이 크게 벌어진다.
"그런 인재가 우리 제나라에 있는 줄은 몰랐구려. 당장 그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소?"
"데려올 수 있습니다. 관중(管仲)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
제환공은 놀란 눈으로 포숙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이 놀림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빛이 싸늘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포숙(鮑叔)은 그에 아랑곳없이 태연히 말을 이어갔다.
"주공께서 제 말을 믿지 않으시면, 제가 일일이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관중(管仲)보다 미치지 못하는 것이 다섯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그에 미치지 못하며, 둘째는 근본을 잃지 않고 나라를 다스리는 능력이 관중에게 미치지 못하며, 셋째는 백성들의 마음과 힘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이 그보다 못하며, 넷째로는 법과 예의를 제정하여 사방에 시행하는 것이 그보다 못하며, 다섯째로는 군사를 다루는 능력이 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어느덧 제환공(齊桓公)은 싸늘한 표정을 풀고 포숙의 말을 넋 놓고 듣고 있었다.
"주공께서 제나라만을 다스리려 하신다면 신 포숙이나 원로대신 고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천하를 다스리기 원한다면 관중을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관중은 인위(人爲)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인위가 무엇이오?"
"인위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말함입니다. 흔히들 공명을 크게 세우는 것은 천명(天命)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천명만으로 어찌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명 뒤에는 반드시 인위(人爲)가 따라야만 합니다. 옛날 은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이 이윤(伊尹)을 만난 것은 천명이요, 이윤이 하(夏)나라를 멸하고 백성을 귀속시킨 것은 인위입니다. 또한 주문왕(周文王)이 태공망을 만난 것은 천명이요, 태공망이 은나라를 멸하고 백성들을 어지러움 속에서 구해낸 것은 인위입니다."
포숙은 연이어 말을 이어갔다.
"이제 주공께서는 오늘날 군위에 오르셨습니다. 주공께서는 걸왕(傑王)이나 주왕(紂王)이 되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탕왕이나 주문왕이 되고자 하십니까? 하늘은 이 제나라에 관중이라는 기재(奇才)를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천명입니다. 만일 주공께서 천하 제후들을 호령하는 방백이 되고자 하신다면 인위를 아는 관중을 부르심에 인색하셔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관중(管仲)은 하늘을 알고 때를 알고 사람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주공께서는 이래도 관중을 불러 쓰시지 않으시렵니까?"
포숙(鮑叔)의 말에 제환공은 입이 벌어졌다.
"관중이 그런 사람이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주공이 관중을 부르지 않으심은 천명을 거역하는 일이 됩니다."
마침내 제환공의 입에서 승낙의 말이 떨어졌다.
"내 어찌 하늘의 뜻을 거역할 수 있으리오. 그대는 지금 곧 관중을 불러오시오. 과인이 친히 그와 얘기해보겠소."
그러나 포숙(鮑叔)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신이 듣건대, 천한 몸으로는 귀한 것에 이를 수 없고, 가난한 자는 부자를 부릴 수 없습니다. 주공이 그를 가벼이 하면 주공 또한 가벼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상대방부터 예의를 갖추어 대우합니다. 또한 비상한 사람에게는 비상한 예로써 대우해야 합니다. 주공께서 관중을 원하시면 먼저 그에게 재상의 벼슬을 내리시고, 국빈(國賓)의 예로 그를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날을 잡아 궁밖까지 나가 그를 맞아들이십시오. 이런 소문이 퍼지면 천하의 인재들이 모두 제(齊)나라에서 일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더욱이 관중은 주공을 활로 쏜 원수입니다. 어찌 세상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환공(齊桓公)은 그제야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포숙(鮑叔)의 손을 움켜 잡았다.
"그대의 말이 옳소. 과인은 그대가 시키는 대로 하겠소."
이리하여 제환공은 태복(太卜)에게 명하여 길일을 잡고 목욕재계를 한 후 황금수레를 몰아 친히 관중의 집으로 나갔다.
관중(管仲) 또한 세 번 목욕하고, 세 번 향수를 몸에 발랐다. 궁에서 내린 상대부에 해당하는 의관을 걸치고 홀(笏)을 들었다.
마침내 제환공은 관중을 맞아 함께 나란히 황금수레를 타고 궁으로 돌아왔다.
길 양편에 가득히 모여 구경하던 백성들은 이 성대한 영접을 보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때의 일을 후세의 사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홀이 죽음을 택한 것은 살아남은 것보다 훌륭하고, 관중이 살아남은 것은 죽음보다 훌륭하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