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변신』
1. 카프카의 <변신>은 한 편의 ‘가족 잔혹극’과 같다. ‘가족’은 어떤 경우에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헌신해야 한다는 명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특히 냉혹한 이익과 실용적인 가치만이 중시되는 ‘자본주의적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비참하게 전락한 상태는 도움과 위로의 대상이 아닌 경멸과 멸시, 그리고 사라져야 할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대우된다는 사실을 <변신>은 고발하고 있다.
2. 외판원으로 일하던 그레고리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벌레로 변신한 자신을 발견한다. 늙고 무능력한 부모와 어린 여동생을 대신하여 생계를 책임지던 그레고리는 집안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레고리의 희생을 다만 상투적으로만 받아들였다. “식구들은 돈을 감사하게 받았고, 그는 기꺼이 가져다주었으나 특별한 따뜻함은 더 이상 우러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돈 버는 기계’로 인식될 뿐이었다. 그렇기에 변신된 그레고리의 가장 큰 걱정은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이야기가 이 돈을 벌어야 할 필연성에 미치면, (.....) 서늘한 가죽 소파에 몸을 던졌다. 수치와 슬픔으로 몸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3. 변화된 그레고리의 모습에 당혹한 가족들의 삶 또한 극변한다. 그레고리는 방 안에 감금되고 하루 한 두 번 여동생이 가져다주는 무성의한 음식이 놓여질 뿐이고, 그레고리에 대한 진정한 슬픔과 위로는 상실된다. 집안의 어려움 때문에 모두가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날카로워진 신경은 그레고리에 대하여 점차 폭력적인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외로움과 답답함에 시달리던 그레고리는 어느 날 수입을 얻기 위해 받은 하숙생들이 모인 거실에 나가게 되고 그 일은 커다란 파장을 가져온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후, 다시 방에 감금된 그레고리는 비참한 기분과 오랫동안 시달린 굶주림에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가족들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 누구에게도 고통을 위로받지 못한 채 비참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4. 그레고리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아이러니한 ‘희망(?)’을 제공한다. 여동생은 오빠의 죽음 앞에서도 스스로를 방어한다. “우리는 이것을 돌보고, 참아내기 위해 사람으로서 할 도리는 다해 봤어요. 그 누구도 우리를 눈꼽만큼이라도 비난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레고리의 죽음은 집안을 짖누르던 고통을 제거하게 만들었다. 가족의 희망이었던 그레고리는 ‘변신’한 이후 가족의 종양덩어리로 전락한 것이다. 가족은 그레고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레고리가 가져단 준 ‘돈’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레고리의 죽음 이후 가족들은 휴식을 취한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달콤한(?) 휴식이었다. “그들은 오늘 하루는 휴식을 취하고 산보를 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들은 이렇게 일을 그만두고 쉴만한 자격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절대로 휴식이 필요하기까지 했다.”
5. <변신>은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치유되거나 구원받지 못하고 오히려 억압되고 제거되어야 했던 과부, 장애인, 정신병자 들의 비참한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가족’의 명예를 위해 이들은 은폐되고 감춰져야 했던 존재들이었다. 전근대적인 질서가 만들었던 인간에 대한 구속과 억압은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등장한다. ‘자본주의’에서 무능하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은 ‘생산력’을 잃어버린 존재들이다.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리는 더 이상 생존의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 쓰레기일 뿐이다. 냉혹한 가족적 이해관계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이면서도 슬픈 시선이 아닐 수 없다.
첫댓글 가족의 굴레를 벗어나는 인간은 없겠지... 말그대로 운명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