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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국가 폴리스(polis)의 탄생
도리아인들이 그리스 땅을 차지하고 300여년이 지난 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 전역에 걸쳐 작은 촌락이 합쳐진 도시국가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도시를 두고 폴리스(Polis)라고 한다. 폴리스는 미케네문명이 파괴되자 무질서가 지속되면서 각 부족들이 모여 스스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연합의 성격을 띤 전사들의 공동체 국가였다. 당연히 혈연과 지연으로 맺어진 운명공동체였으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의 안전도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폴리스적 동물, 즉 정치적 관심이 높은 시민으로서 권력의 중심에는 동서양이 그랬듯 대지주인 동시에 스스로 무장을 갖춘 중장기병으로 정치는 물론 군권까지 장악했다. 폴리스는 기원전 8세기 말로 가면서 비교적 안정을 찾아 갔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앞으로 자주 등장하는 아테네를 비롯해 스파르타, 테베, 코린트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는 5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여름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그야말로 쾌청한 날씨지만, 농사짓기에는 버려진 땅이었다. 그러자 이들이 택한 것이 바다였다. 폴리스체계 자체를 에게해에 산재해 있는 섬을 비롯해 소아시아 등 지중해 각지로 확산시키며 신민지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 정책은 궁극적으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교역망의 발달을 가져왔고, 폴리스 내 수공업을 발전시키는 내수경제에 혁신을 불러왔다. 생산에 맞게 해외시장이 개발되면서 규모의 경제가 확대된 것이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부유층이 탄생했고, 폴리스 방위에 자발적으로 동참함으로써 귀족들이 독점적으로 행사했던 군사력이 평민에게까지 확대하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자리 잡는다. 한발 더 나아가 귀족정치에서 민주정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해가는 쾌거를 이루게 되는데, 이들 중 대표적인 도시국가가 아테네였다.
이들 폴리스에는 공통점 몇 가지가 있다. 도심 가장 높은 언덕에는 신전이 위치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상상하면 가장 이해가 쉽다. 신민들은 아침이면 태양빛에 붉게 반사되는 환상적인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며 하루의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올라가는 입구만 제외하곤 삼면이 모두 가파른 절벽으로 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는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다. 멀리 적이 침입하는 것을 가장 빨리 알아볼 수 있다는 것도 이들의 선택이었다. 외세의 침략이 일어나면 시민들은 아크로폴리스로 피해 수성에 나서기에도 알맞은 지형이었다. 도심의 언덕을 폴리스라고 부르다가 가장 높은 언덕이라는 형용사가 추가되면서 아크로폴리스가 된다. 그렇지만 이곳 역시 도시국가의 상징적인 까닭에 외적으로부터 파괴되어야 할 첫 번째 목표였다.
각설하고, 그리고 또 하나 일반 시민들이 살아가는 민가 밀집지역에 ‘아고라’라고 하는 소통의 공간, 즉 시장을 비롯해 정치 논쟁을 벌이던 토론장이자, 여론의 형성, 사교의 장이 마련된 것도 공통점이다. 아크로폴리스가 생명이 무한대인 신들의 영역인 만큼 엄숙하고 장엄한 장소라면, 아고라는 언젠가는 죽어야할 운명을 지닌 인간들의 영역인 만큼 늘 북적북적 거렸다. 입심 좋은 소피스트(Sophist)들이 진리라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무기, 농기구, 포도주, 올리브유를 비롯해 외국에서 잡혀온 노예들 거래를 위해 흥정하는 소리가 뒤섞였을 법하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동남쪽으로 피라이우스 항구와 에게해가 보인다. 반대로 눈을 돌리면 비록 흔적뿐이나 평평한 평지에 스토아학파 기념관 지붕이 보이고, 건너편 높은 언덕에 대장장이 신이자,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남편인 헤파이스토스 신전이 보이는데 그 사이와 주변이 광장 아고라였다. 가까이 가서보면 마치 폐허를 방불케 하는데 로마의 왕 카라칼라의 조각이 다른 조각상들과 함께 높은 기둥위에 올려 있다. 그러나 얼굴은 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마모가 되어 고단했던 그리스 역사를 보는 듯했다.
이 외에도 이들 폴리스 도시국가들은 공통된 언어를 사용하고,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면서 발전해나간다. 그리스인 스스로를 종족을 계보형식을 따라 헬렌, 즉 ‘헬레네스(Hellenes)’라고 부르는 반면 주변 이민족을 미개인, 혹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인다는 뜻인 ‘바르바로이(Barbaroe)’라고 부르며 구분했다.
이들 도시국가들은 결속을 다지기 위해 4년마다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에 모여 올림피아제전을 열었다. 이것이 현대 올림픽의 기원이다. 물론 지금과는 달리 창던지기, 달리기, 씨름, 원반던지기, 높이뛰기 다섯 가지 경기 모두 골고루 잘해야 하는 5종 경기만 치러졌다. 그리스 사회는 한 가지에 능한 장인은 요즘처럼 인기가 없었다. 용감하고, 노래도 곧잘 부르는가 하면, 지혜롭기까지 하면서 농사꾼인 오디세우스 같은 만능 재주꾼을 선호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 등 직업을 철저하게 구분하던 조선과 달리 이미 3,000년 전이었지만, 직업에 귀천이 없었던 시대였다. 물론 동양은 글을 잘하는 사람이 대접을 받았다면, 그리스, 혹은 로마는 탁월한 언변을 지닌 웅변가가 인기가 높았다.
아고라가 만들어낸 토론문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 쥐꼬리만큼씩 알고 있는 스토리텔링작가에게도 희망의 메시지인 것 같아 기분이 좋다.
* 민주정의 아테네
현재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는 지혜와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 이름만큼이나 역사가 깊다.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 폴리스 대표격의 도시국가다. 기원전 8세기 전후로 귀족들이 정치․군사적 권력이 점차 강화되면서 왕정이 약화된다. 그러자 당연히 귀족과 교역과 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시민들의 대결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왕정으로 시작해 군주정으로, 다시 민주정으로 가장 이상적으로 발전 형태를 나타냈던 것이다. 이들은 비록 귀족과 시민들 간 권력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지만, 과거의 교훈은 잊지 않았다. 도리아인들에 대한 방어의 필요성이 이들을 한 곳으로 뭉치게 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서나 존재했다. 기원전 6세기에 접어들면서 상공업이 발달하자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결국 스스로 부채를 해결하지 못해 노예로 전락하는 시민이 늘어났다. 이때 아테네 최초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솔론(Solon)이 등장한다. 그는 정치가이자 탁월한 장군이기도 한 그는 기원전 594년, 그는 재산 정도에 따라 정치적인 권리를 차등을 주는 개혁, 금권정치를 단행한다. 특히 부채노예를 금지하고, 그 스스로 읊었듯 정당하게든 부당하게든 팔려간 사람들과 빚의 멍에를 피해 이국땅을 방황하는 사람들을 아테네로 돌아오게 했다. 이렇게 부의 차등에 따라 권리마저 차등을 주는 정치는 1세기가 조금 더 지나고 플라톤에 의해 ‘큰 문자 속에서 고찰한다.’라는 ‘국가론’이 탄생했다. 뛰어난 문화를 가진 선진국 이집트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비판하며,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기 본성에 따라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했다. 이 플라톤의 국가론은 존경받는 지식인, 교육을 받은 귀족에게 권력을 준다는 미국 건국 당시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미국 헌법의 기초가 된다. 현재 미국이 선거인단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플라톤은 선진 이집트의 문화를 동경했다. 물론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허점도 찾아냈다. 참정권은 아테네에 거주하는 사람 중 여성, 외국인, 미성년자, 노예, 전과자, 빈민, 이방인 등을 제외하면 겨우 10%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솔론의 금권정치는 새로운 권력의 등장을 부추겼다. 계략에 무척 능한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이라는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은 빈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이들을 기반으로 권력의 중심에 선다. 이때 금권정치는 귀족은 물론 평민들에게도 그리 환영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귀족은 귀족대로, 평민은 평민대로 욕망, 즉 제한된 권력행사에 모두가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결과는 두 신분간의 극심한 대립을 가져왔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했던 빈민세력을 등에 업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정권을 탈취하여 스스로 참주에 오른다. 권모술수에 능했던 그는 자신의 지지기반인 하층민을 위한 정책을 폈다. 토지재분배를 통해 농업 중심의 안정을 택했으며, 상공업을 장려하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민중의 이익에 앞장섰다. 특히 귀족지배의 기반이었던 4개의 혈연부족을 해체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원래 민중의 자치구인 데모스를 기반으로 중심도심, 해안, 내륙지방 등 이 3지대로 분류하며 내치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아테네 번영의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그였지만, 그도 인간이었다. 그가 죽자 아들 히피아스(Hippias)가 기반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히피아스가 독재로 치달으며 폭정을 일삼자 참주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참주정은 결국 붕괴를 앞당기게 된다. 히피아스가 처음부터 폭정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권위와 정책을 오롯이 이어받은 그는 아테네를 발전시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형제의 우애가 남달랐던 히피아스는 기원전 514년에 동생 히파르코스가 암살당하자 격분을 참지 못하면서 그 여파가 폭정으로 이어졌다. 결국 아테네의 귀족세력이 스파르타에 건너가 설득에 성공하면서 스파르타의 군대를 이용해 그를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페르시아로 도망친 히파이스는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를 침공할 당시 길잡이를 자처하며 훗날을 도모지만, 결국 마라톤 전투에서 죽고 만다.
그러나 민주정 그리스였지만 행정적, 정치적인 모순도 있었다. 관료집단의 결여가 그것이다. 틈이 벌어지면 누군가가 파고들게 마련이다. 그 누군가가 당연히 돈 많은 유력가문이었다. 이들은 틈새를 파고들며 그리스 사회에 비밀리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그리스는 행정구역 개편과 더불어 500인 평의회를 설치하고 아테네에 참주의 등장을 방지하기 위한 도편추방제가 생겨났다. 깨진 도자기에 독재의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적어 600표 이상이 나오면 10년 동안 해외로 추방하는 제도였다.
* 군국주의의 스파르타
폴리스 중 아테네 같은 민주정으로 발전한 경우와 달리 귀족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폴리스가 스파르타였다. 스파르타는 도리스인이 세운 도시국가로 정복민 스파르타인이 피정복민 노예 헤일로타이(heilotai)와 주변인 페리오이코이(peri-oikoi) 위에 군림했다. 스파르타는 중장보병제를 가장 빨리 채택했다. 특히 전시에는 전 시민이 군국주의적인 제도에 참여해야 했다. 외부에서 보면 군국, 귀족정의 성격이 강하지만, 스파르타 사람 그들 스스로는 매우 합리적인 민주정이라고 생각했다. 스파르타의 정치체계를 보면 왕이 두 명이었다. 이들은 세습가문에서 선출되는 귀족 대표자였지만, 군사지휘권만 지녔을 뿐 그 어떤 정치적인 행위도 펼칠 수 없었다. 행정은 다섯 명의 집정관이 주도했으며, 관직의 감시역할도 담당했다. 특히 집정관은 헤일로타이의 감시와 탄압이 가장 중요한 업무였다.
스파르타 신민은 20세부터 60세까지 병역의 의무를 졌다. 유사시에 병장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입영해 단체 병영생활을 하면서 똑 같은 토지를 배분받아 시민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이 토지는 피정목민인 노예 헤일로타이에 의해 경작되면서 신민으로서 균등한 대우를 받았다. 헤일로타이에 의해 음식이 만들어지고, 차려지면 시민 모두가 함께 식사를 즐겼다. 사정이 이런 만큼 불쌍하고 가련하기 짝이 없는 헤일로타이의 감시가 가장 중요했을 법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제도는 다양한 정치적인 요소로 인해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인근 그리스인들에게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 된다. 똑 같이 먹고, 누리며 즐기는 삶은 대를 이어 양산되는 헤일로타이라는 노예가 있어 가능했다.
* 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16세기 철기문화의 등장과 함께 오리엔트의 바빌로니아가 역사에서 사라지고, 동부 지중해 연안 기름진 땅에 거대 제국들의 등장과 몰락이 반복된다.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가 오리엔트 전역을 통일했고, 기원전 7세기 초 멸망하면서 메디아, 리니아, 이집트, 신바빌로니아 등 4등분으로 갈라진다. 당시 신바빌로니아왕국 수도 바빌론은 세계의 수도로 명성을 떨쳤다. 기원전 550년경 지금의 이란 땅에서 번성했던 아케메네스왕조로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529년에는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에 의해 통일제국이 탄생한다. 서아시아에 막강한 페르시아가 등장하면서 기원전 6세기 나일강 유역의 3천년이라는 어마어마한 기간 동안 자연재해 한번 없이 풍요를 누리던 이집트를 평정하고, 여러 갈래로 갈등을 일으키던 오리엔트를 하나로 묶는다. 힘을 축적한 페르시아는 지중해로 진출해 소아시아 그리스 식민지를 야금야금 삼켰다. 다리우스 1세의 군대 편제만 보아도 막강한 군사력을 가늠할 수 있다. 만인부대, 천인부대, 백인부대, 십인부대로 나누어 결속을 다지게 했으며, 순수 페르시아 군으로만 구성된 친위대인 ‘이모탈’이라는 무적의 부대도 있었다. 이 군사력을 배경으로 기원전 513년 본격적인 정복전쟁에 나섰던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수중에 넣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리스와 만나게 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그리스와의 한 판 세기의 대결을 불렀다. 페르시아의 등장에 대해서는 앞선 ‘오리엔트, 소아시아(Asia Minor) 제국’편에 언급한 터라 이 정도에서 생략한다.
전란의 시대에 돌입한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전쟁을 위해 도시국가들이 힘을 합쳤다. 각 그리스 지역의 소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침략에 그냥 있지만 않았다. 특히 자치권이 사라지고 참주를 내세워 주권을 빼앗긴 이오니아 시민들은 무역을 통한 이익도 페니키아인들이 가져가자 이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때 아테네는 전함과 군사를 이오니아에 보내 힘을 보탰다. 물론 바다를 통한 무역에 사활이 걸린 아테네가 손 놓고 제해권을 페르시아에 넘겨줄 수는 없었다. 이때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각 폴리스에 사절단을 파견해 그곳의 흙과 물을 요구했다. 이 행위는 복종한다는 뜻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의중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폴리스들이 이 요구에 응한 반면, 다리우스의 예측대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도리어 사절단을 직접 담아가라며 우물에 빠트려 죽이는가 하면, 심지어 지금의 터키 이즈미르 인근 페르시아 땅이었던 사르디스와 성소를 공격해 파괴해버린다. 다리우스 1세가 기다리던 바다. 다리우스 1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이오니아에 군대를 보내 진압에 성공한 후 물자와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아테네 원정에 나섰다. 서양의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대로 세계사에서 사상 처음으로 동서양의 전투가 개시된 것이다. 트라키아와 그리스 북쪽 마케도니아를 점령한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를 향해 파도를 일으키며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늘은 신들의 나라 편이었던가? 바다에서 폭풍과 파도가 몰아치는 바람에 300여척의 배가 침몰하자 다리우스 1세는 분을 삭이며 회군해야 했다.
절치부심, 다리우스 1세로서는 아테네를 그냥 둔다면 지중해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는 제2차 그리스 침공을 시작했다. 당시 페르시아 군대는 600척의 군함으로 무장한 막강 해군을 중심으로 보병 2만5천 명과 기병 1천 명으로 구성된 군사력으로 사기가 중천 했다. 그리스 낙소스와 카리스토스를 점령한 페르시아는 에레트리아 공격에 나섰다. 이때 아테네에서 에레트리아에 4천명의 지원군을 보냈으나 국론이 분열되고 갈등과 반목이 판을 치자 군대를 돌려 아테네로 가버렸다. 앞으로 전개될 전투를 생각하면 아테네로선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페르시아를 상대로 처절한 항쟁을 이어가던 에레트리아는 결국 점령당하고, 페르시아군대는 사르디스의 성역을 불태운데 대한 복수로 시민들을 모두 페르시아로 데려가 노예로 만들고, 에레트리아의 성소마저 파괴해버린다. 그리고 창끝을 아테네로 향했다.
다급해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스파르타는 국가적 종교행사 기간 중이라 금방 군사를 꾸릴 처지가 못 되었고, 지원군의 출정도 11일이나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종교행사가 중요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스파르타가 행사를 핑계로 미적거린 것은 분명했다. 이때 아테네는 수성전을 펼쳐 스파르타군이 오기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나가서 맞서 싸울 것인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나 아테네는 밀티아데스(Miltiades)라는 출중한 장군이 있었다. 밀티아데스의 설득으로 아테네군사는 동북부 마라톤 평원에서 막 상륙한 페르시아 주력부대 맞았다. 밀티아데스에게는 시민군 1만 명이 전부였다. 그라나 아테네는 델포이의 아폴론신전에서 승리 하리라는 신탁을 들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했다. 해안을 굽어볼 수 있는 언덕에 포진한 밀티아데스 군대와 달리 페르시아군은 1만5천 명이 해안에 운집해 있었고, 나머지 1만 명은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분산해 항해를 이어갔다. 밀티아데스는 급박해졌다. 아테네를 방어할 군사가 없었던 것이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해낸 것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양익포위전술이었다. 적은 수의 아테네 군사를 페르시아군과 대등하게 맞서게 한 후 중앙을 얇게 양쪽은 두텁게 군사를 포진시켰다. 이들 군사 양측에는 하천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형지물까지 절묘하게 이용했다. 페르시아군은 평소와 같이 8열종대로 대열을 맞춘 균등한 전술을 갖추고 있었다. 앞을 향해 나아가던 아테네 군사는 페르시아군과 거리가 좁혀지자 진군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중앙은 상대적으로 속도가 낮았다. 페르시아군은 궁수도, 기병도 없는 이 오합지졸을 얕보았다. 화살의 사정거리에 들자 페르시아 궁수들이 쏜 살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아테네 군사들은 진격 속도를 높여 사정권을 벗어나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리고 양측의 뛰어난 군인들이 페르시아군대 옆구리를 부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진 뒤를 돌아 포위에 성공하면서 전열이 흐트러진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페르이사 군대는 양측을 뚫고 들어오는 아테네군의 전광석화 같은 공격에 기가 꺾이고 말았다. 불과 15분여 만에 거둔 아테네의 승리였다. 아테네군의 피해는 192명으로 미미한 반면에 페르시아군 6천4백 명을 잃어야 했다. 동서양간 최초로 벌어진 전투에서 그리스의 승리로 끝난 이 밀티아데스의 양익포위전술은 이후 평원전투의 교본이 된다.
사실 이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에 등장한 기록으로 100% 믿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는 아테네 전성기에 살았던 이야기꾼으로 아고라에서 청중을 향해 전설 같은 아테네의 전쟁이야기와 명문가, 사건 등을 경이롭게 들려주곤 했다고 전한다. 즉 요샛말로 그의 말 중에 구라나 뻥이 태반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케로는 그를 일러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분명한 것은 그의 역작 《역사》를 쓰기 위해 북쪽으로 우크라이나 지방의 스키타이, 동쪽으로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바빌론까지, 남쪽으로는 이집트, 서쪽으로는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키레네 산맥을 아우르는 넓은 지역을 여행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여행에서 얻은 자료를 기반으로 한 그리스 산문사상 최초의 걸작을 탄생시킨 것이다. 약간의 살을 보테더라도 자료를 구하기 위해 동서남북 사방으로 발품을 팔아서 다닌 것은 전인미답의 위대한 행위였다.
페르시아가 패한 이 전투를 두고 동양에 대한 서양의 승리라며 동양지배, 즉 서세동점의 당위성에 무게가 실린다. 훗날 무수히 많은 시대가 변한 뒤에 어떤 역사가는 이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마라톤 전투는 유럽이라는 아기가 탄생하면서 낸 첫 외침이라고 감동한다. 고대에 아시아는 물론 유럽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며, 동서양의 대립으로 보는 시각 자체도 웃기는 일이다. 더구나 당시 그리스 문명이 유럽이 아니라 지중해, 즉 오늘날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을 아우르는 곳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애써 딴지를 걸면 아테네보다 페르시아의 문명이 더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군국주의적인 스파르타보다는 훨씬 민주적이었다. 당시 스파르타는 노예계급이 해주는 밥을 먹고, 함께 군사훈련에 동참했으며, 기형이 태어나면 죽였고, 여자는 원로원에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예를 든 것은 문명의 반대가 야만이기 때문이다.
마라톤 전투 승리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 전령이 전력질주해서 아테네에 도착한 후 “우리는 승리했노라!” 외치고는 쓰러져 죽었다는 일화다. 그러나 페르시아 해군이 아테네를 침략하는 것을 서둘러 돌아가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헤로도토스 조차도 승리를 알리기 위해 달린 것이 아니라,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밀티아데스 군대가 아테네가 무방비 상태로 놓였음을 알고 있었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 속력을 다해 달려가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마라톤이 되고 올림픽 공식종목이 채택되었다. 이들이 달린 거리가 42km였다. 뒤에 195m가 추가된 것은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에서 영국 여왕이 있는 윈저궁까지 거리가 추가되면서 공식화된다. 여왕이 골인 지점으로 들어오는 선수를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는 게 정설이다.
그리고 아테네는 마라톤전쟁에서 승리를 안겨준 전쟁과 지혜의 신 아테나를 칭송하기 위해 파르테논신전을 세운다. 아테나신전이라 하지 않고 파르테논신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테나를 모시는 무녀들이 살았던 ‘처녀의 집’을 파르테논이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원전 490년에 시작된 이 대공사는 10년이 지난 기원전 480년에 완공을 보지만, 1년 뒤 페르시아군의 3차 원정 때 허무하게 파괴되고 만다.
3차 원정에 대해 알아보자. 그리스 2차 원정에도 실패한 페르시아의 대왕 다리우스 1세는 전쟁이 끝나고 만 3년이 넘어서 그리스 원정이라는 원대했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는다. 그의 뒤를 이어 아케메네스 왕조의 제왕에 오른 크세르크세스 1세(Xerxses) 역시 그리스 정복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생의 숙원이었던 그의 아버지 다리우스 1세의 유언을 잊을 수 없었다. 2차 원정 후 10년이 지난 기원전 480년 봄이 되자 3차 그리스 원정을 떠났다. 그리스군 역시 페르시아가 자신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페르시아에 반대한 헬레네 동맹을 맺은 이들은 군대를 재정비하고, 해군을 양성하는가 하면, 아테네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빠르고 강력한 3단 노선 380여 척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스 함선은 높고 단단하게 철로 덧댄 뱃머리로 적 함선을 향해 돌진해 침몰시키는 전략을 짰다.
페르시아군대가 테살로니키지방으로 내려오자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육군은 좁은 협곡 테르모필레를 택해 이들을 맞았다. 그리스 주력 해군이 에우보이아 섬 최북단 아르테미시온만에 정박해 있었고,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130여km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곳을 사수해야 했다.
스파르타군 300명, 7천여 명의 그리스 연합군간의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전투는 6일 동안 치열하게 이어졌다. 바로 2014년 노암 머로 감독의 영화 ‘300:제국의 부활’의 무대가 되는 전투다. 죽고 죽이는 상호간 치열하게 전개되던 개전 7일째 되던 날, 영화에서처럼 배신자 에피알데스가 등장한다. 그의 안내로 샛길을 통해 빠져나온 페르시아 군이 스파르타 배후를 공격하면서 전세는 페르시아 편으로 기울고, 결국 스파르타군은 전멸 당한다.
헐리웃 영화 ‘300’에서 크세르크세스는 마치 흑인에 수염도 기르지 않은 채 금장을 두른 인간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페르시아 정예군인 이모탈을 마치 악마의 탈을 쓴 것처럼 표현하면서 야만인으로 그렸다. 이란인 시각에서 보면 하찮은 삼류 만화가 영화화 된 것에 분노보다 동정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 유럽에 사는 흑인은 또 무슨 죄인가. 꼽추에다 괴물처럼 등장하는 배신자 에피알데스 역시 그리스인이었다.
스파르타 레오니다스 왕 역시도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그가 병력을 나눠 배치한 덕분에 1천여 명의 병사만 희생되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분명한 것은 이곳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맞아 지연시킨 덕분에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패전한 그리스 해군이 에보이아 섬과 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퇴각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각설하고, 사상 최대 1천2백 척의 함대를 포함해 군사 16만~20만 명의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의 여세를 몰아 북부 그리스 도시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해 9월이 되면서 아키타반도를 점령한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침략해 약탈을 자행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를 파괴하는 것도 이때였다.
한편 그리스 함대는 그리스 역사상 반전의 기회가 된 유명한 해전의 장소 살라미스로 향했다. 남은 것이라곤 그리스 함대뿐이었고, 정면 돌파보다 유인책으로 적의 함대를 좁은 해협으로 끌어들인다면 승부를 걸어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여기에 아테네의 이순신으로 부른다면 살짝 모자라는, 하여튼 간에 살라미스해전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있었다. 그는 정적이자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가 죽자 해군 증강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집정관이었다. 그의 전략전술은 정말 탁월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물때와 물길, 그리고 시각적으로 계속 이어질 것 같은 바다가 물길이 막힌 만을 이용한 왜적의 유인, 그리고 학익진 등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 바다를 훤하게 뚫고 있었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는 아테네를 점령하고 육전에서의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해군과 육군을 비롯해 전 아테네 시민까지도 소개령을 내려 살라미스로 옮겨다 놓은 상태였다. 마치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했으나 추위와 굶주림만 가져다 준 텅 빈 도시가 점령자를 반겼을 모습을 상상하면 이해가 빠를 것만 같다. 침략자 페르시아 군대는 텅 빈 아테네 도로에 서서 허탈함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리라. 그의 분노는 신전을 비롯해 약탈과 파괴로 이어졌다. 아테네 시민은 살라미스 섬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분노를 삼켜야 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로서는 승부를 걸어야 했다. 그대로 돌려보낸다면 언젠가 또다시 침략해 올 것이 자명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택한 것은 거짓 정보였다. 배신자를 가장한 군사 몇몇을 보내 “그리스 군 병사들은 대왕의 공포에 짓눌려 달아날 생각뿐이다”고 크세르크세스를 부추겼다. 그리스 병사의 연기가 어떠했는지, 페르시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그리스군을 그냥 둘 수 없었다. 9월 29일 날이 밝음과 동시에 무적 해군을 앞세워 공세에 나섰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원하는 대로 페르시아 해군은 살라미스섬과 아키타섬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구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가장자리에서 숨죽이던 그리스 해군은 때를 기다렸다. 페르시아 함대가 좁은 해협으로 촘촘히 들어서면서 어쩔 수 없이 더 나아갈 수 없게 되고, 밀집대형을 이루자 그리스 해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좁은 해협은 페르시아 군선으로 메워지면서 우왕좌왕 하는 틈을 타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3단 노를 한 그리스 함대는 노가 1단 뿐인 페르시아 함선을 향해 공격해 노를 부러트리고, 함선 좌우를 높고 튼튼한 뱃머리를 이용해 들이박는 공격이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좌충우돌 페르시아 함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페르시아 함선 400여 척이 난파되거나 그리스 해군에 의해 포획되고 만다. 크세르크세스는 전세가 기울어진 것을 알고 통한의 후퇴를 결정했다. 보급품도 문제였고, 무엇보다 군사들의 사기와 오랜 전쟁에 향수병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 해군이 끝까지 추격해 소아시아 지역의 페르시아 함선을 무력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로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지 않게 된다. 해전이 벌어진 살라미스 섬은 신화에 의하면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 아들을 낳은 곳으로서, 그곳을 점령한 자가 바다를 장악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다.
크세르크세스는 퇴각서면서 분을 참지 못했다. 여전히 그에게는 건재한 육군이 있었다.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장군 마르도니우스에게 10만의 군사를 주고 그리스 북부 테살리아지방에서 추운 그해 겨울을 보내게 했다. 이듬해 이른 봄이 되자 마르도니우스는 아테네 인근 플라테이아로 군영을 옮겨 아테네로 사신을 보내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평화로운 자치를 보장하고 파괴된 신전을 재건해주겠다며 화평을 청했다. 아테네와 오랜 라이벌인 스파르타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노!’였다. 마르도니우스는 충분한 군량미를 확보한 후 재차 아테네 공략에 나섰다. 페르시아군이 그리스 중남부 아테네 인근의 아티카를 점령하자 아테네는 또다시 살라미스섬으로 시민을 도피시키며 아테네를 비워버리는 전술을 택한다. 마르도니우스는 다시 사신을 보내 강화를 청했지만, 아테네의 대답은 같았다. 그러면서 아테네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스파르타의 지원을 얻어낸 아테네는 스파르타, 코린트, 페리오코이 등 그리스 연합군을 형성해 아티카 반도의 트리아 평원에서 일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페르시아 군대는 아테네를 또 한 번 파괴한 후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테베의 보이오티아로 물러났다. 그리스 연합군은 키타이론산 기슭에 주둔하면서 페르시아 기병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리스 연합군 지휘관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 장군은 2차 정벌 당시 협곡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 병사 300명과 함께 죽은 레오니다스 왕의 사촌이었다. 파우사니아스가 지휘하는 8만 명의 그리스 연합군 중방보병부대와 페르시아군은 대치상태를 이어갔다. 그리스 군은 기병이 있는 페르시아군과 평지에서 맞붙고 싶지 않았고, 페르시아 역시 언덕위로 군대를 보내기를 주저했다. 그러면서 몇 번의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면서 그리스군이 의외로 쉽게 승리하자 자연스럽게 플라타이아이 평원에서 대치하게 된다. 페르시아 기병은 생각보다 조직적이지 못했고 말안장에 등받이가 없는 탓에 겨우 창이나 던지고 빠지는 수준인 것을 간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8일간이나 대치상태로 지냈다. 어이없게도 양측 모두 자신들의 신에게 신탁을 구했는데 전쟁을 하지 말라는 괘가 나온 것이다. 이때 페르시아의 마르도니우스 장군은 그리스 후방을 교란해 보급로를 끊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밤을 틈타 물을 구하려던 스파르타 군대가 해가 뜨면서 혼돈상태에 빠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개시한 페르시아군은 정작 아테네 군대와 코린트 등 협공으로 몇 번의 밀고 밀리는 전투를 이어가다 결국 마르도니우스 장군까지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7천 명의 호위병들은 끝까지 항전하다 장렬한 죽음을 택한다. 나머지 병사들도 패주를 거듭했다.
그날 오후, 그리스 본토 플라타이아이전투의 승패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오니아의 미칼레를 지역에서 페르시아-테베 연합군과 대치를 이어가던 스파르타의 레오티키다스 왕은 플라타이아이전투에서 그리스가 승리했다는 루머를 퍼트렸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서로 공을 다투려는 그리스 연합군의 경쟁적인 공격으로 페르시아군의 기세가 완전히 꺾이고 겨우 반 정도의 군사만 살아남아 돌아갈 수 있었다.
* 파르테논 신전
군사의 수가 승패를 좌우를 가늠하는 잣대는 될 수 있어도 무기와 군장비의 수준 차이처럼 승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그리스 연합군의 긴 창, 접근했을 때 적을 살상하기 용이한 짧은 검, 투구와 청동갑옷과 방패가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지도 무시할 수 없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그리스군은 살라미스 해전에 이어 이듬해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아테네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아테네는 평화가 찾아왔지만, 몇 번의 페르시아군의 방화로 폐허에 가까웠다. 이들이 가장 먼저 복원한 것이 바로 파르테논신전이었다. 승리를 안겨준 아테나에 대한 칭송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파르테논신전은 기원전 447년에 당시 그리스의 유명한 건축가인 페이디아스와 익티노스, 칼리크라테스 등에 의해 시작되어 기원전 432년에 와서야 약 15년간의 공사를 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르테논신전도 세계의 중심이 로마로 이동되면서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로마에 의해 교회로 탈바꿈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15세기 오스만제국의 이슬람이 발칸을 지배하자 모스크로 변신했고, 베네치아의 공격으로 신전의 일부가 파괴되는 비운을 맞아야 했다. 그러나 1801년 약탈의 끝판왕이자 시인 바이런에 의해 약탈자라고 매도당해야 했던 영국의 엘긴 경의 약탈이이어지고, 지진과 현대에 와서 산성비 등 자연재해까지 덮치면서 파르테논신전은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인류의 보편적 문화유산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공식마크가 파르테논신전의 기둥과 지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3차 원정도 실패한 페르시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페르시아 군대는 개전 초기에는 승승장구했으나 결정적으로 살라미스해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대패한 후 전세는 완전히 기울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크세르크세스가 자장 믿었던 마르도니우스 장군마저 전사하자 결국 그리스 정복을 포기해야 했다. 그것에 덧대 크세르크세스 역시 궁정의 내란으로 살해되는 비운을 맞는다. 그리스 정벌 실패에도 불구하고 훗날 역사가들이 그의 20년 통치시절은 치세로 평가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ArtaxerxsesⅠ) 때 와서 결국 ‘키몬의 평화체결’로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오던 그리스 원정에 포기의 종지부를 찍는다.
-계속-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궁금한것이 도시국가 polis와
경찰 police는 혹시 연관이 있나요? 진짜 궁금해지네요?
ㅎㅎ 저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글쎄요? 저도 예전에 궁금해하다가 포기한 기억이 있습니다.
언덕을 뜻하는 폴리스와, 캅스랑 전혀 연관성이 없는 듯합니다.
중우정치와 대중 인기영합주의... 역사는 돌고 돕니다.
인기영합이 곧 정치발전을 이루고,
일단은 동기부여란 엔진에 기름칠은 잘 하게 맹글지^^*..
책을 낸다는 것 자체도 남에게 읽히기 위함이니
에둘러 말하면 이 또한 대중 인기영합주의의 일환으로...
역사는 돌고 돌고... 그러다 뒤로 돌다 다시 그자리로 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