柯泉亭重建記,가천정중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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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중의 정호동(鄭鎬東)씨가 그 족질 炳南.炳寅과 족제 壽東을 더불어 나를 방문하여 柯泉亭 기문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이 정자는 선조 柯亭.枕泉 두 어른을 寓慕하여 重建한 것입니다,
족인 世均의 지도를 받아 감히 와서 청탁하오니 원컨데 족장께서는 사양하지 마르소서 라고 하였다, 내가 듣고 말하기를 이는 세균군이 할 일인데 병환 때문에 나에게 보낸 것이나 나의 짧은 글솜씨로 老衰까지 겸하였으니 어찌 감히 이 일의 적임이 되겠는가? 응하기는 부끄럽고 거절하면 소흘함이 된다, 그러나 내가 이 일에 情誼로 보면 차라리 부끄러울지언정 소흘함이 없어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하니 사양하지 못할 사정이 있다, 생각컨데 옛날 우리 선조 전랑부군(銓郞府君-從韶)이 존선조 (좌랑부군-치소)과 함께 계적(桂籍)에 올라 臺府에 있을 때 탄탄한 길이 바야흐로 열리려 하다가 마침 단종이 손위하는 때를 만나 외숙부 이대전선생이 순흥에서 순절하는 것을 보고 형제분이 어버이가 늙으신데 봉양할 사람이 없음을 구실로 외직에 보임 해 줄 것을 요청하여 형은 영주로 가고 아우는 금호교수가 되었다, 점필재 김선생이 시를 증정 해 말하기를, 나도 또한 서책을 메고 이를 좇아 갈것이니, 호산의 풍월을 아는 사람을 기다리겠지,라 하고 또 말하기를, 금호에 다시 육영(育英)하는 은택을 퍼뜨릴 것이다,삼가 한가지 보통사람과 같이 고향 가는 사람으로 보지말라,고 하였으니 그 숨은 뜻을 가히 볼 수 있다, 그 당일에 두분이 참고 견디며 자취를 숨겨서 용심의 진밀(縝密)=( 마음 씀이 자세하고 주의깊음)함과 거취의 근신함과 우애의 독실함이 보통사람이 엿보아 헤아림 바가 아니니 후손된 사람이 어찌 잊을 것인가? 좌랑부군의 후손은 영천의 도천에 잉거하여 세세로 지키는 과제를 성수하여 문한이 대대로 끊어지지 아니하더니 5세를 전하여 휘 헌도(憲道) 호 가정(柯亭)은 계씨 침천(枕泉)공 휘 미도(味道)를 더불어 일찍 정훈을 익히고 또 재종숙부 복재선생에게 나아가 경전과 제가와 사기 낙민제서를 배워 날로 달로 진전이 있었으며 학문과 덕행을 힘써 닦아 보익하니 사람들이 정씨문중의 쌍벽이라 일컬었다,
침천공에 삼옥(三玉)의 영예가 있으니 의표와 문장과 필법이다, 재량으로서 남평훈도에 천거되었다, 인조 정묘 1627년의 변란에 형제분이 함께 의려를 일으켜 국난에 나아갔다가 적의 괴수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으며 병자년에 남한산성이 적에 포위된데 이르러서는 또 함께 의려를 일으켰으나 미쳐 나아가지 못하고 화의가 이루어졌으므로 서로 함께 통곡하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다시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고 각각 두어칸 집을 지었다, 백씨는 보강의 아래에 가정이라 현판을 달았으니 대개 도연명의 뜰에 나무를 본다, 는 뜻을 취한 것이고 계씨는 옥천의 위에 침천이라 현판하였으니 상거(相距)가 몇 걸음밖에 안되는 가까운 곳이다, 서로서로 오고 가니 낮도 없고 밤도 없이 서사로써 자오(自娛)하고 간혹 입암에 장여헌선생을 찾아가서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질문하였다, 바깥 세상의 명리에 뜻을 끊고 우유담락은 형제간에 하면서 한 세상을 마치니 백씨는 향년이 92세라, 수직으로 가선대부 중추부사의 품계를 받았으며 계씨는 향년이 93세 이라, 수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의 품계를 받았으니 두분의 뜻과 행실과 사업이 이미 같았고 대질연수가 또 서로 같으니 이는 실로 고금에 드문 기이한 일이라 마땅히 그 여경이 있을 것이다, 양가의 후손이 두 정자가 오래 폐한 것을 슬퍼하여 이에 중건할 것을 도모하여 8천만원을 출력하여 2층 거옥을 구축하니 위층은 다락이오, 아래층은 방으로 가천정 이라 현판을 걸었다, 옛날 좌랑공이 그 형 전랑공과 함께 형제간의 급난이 있으면 협심동력하여 의심나고 위태로운 곳에서 벗어 났으니 그 화합한 즐거움은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우애로써 집을 다스려 가정 침천 두분에 전해져서 두분이 능히 선훈을 따라 우락을 같이하고 거취를 같이하여 좌랑공의 유풍여운을 후손에 끼쳐 지금까지 내려와 우애하는 것은 公家의 상하 500년에 이르는 청전이다,
옛날 사마온공이 그 형을 섬김에 공경하기를 엄부(嚴父)와 같이하고 보호하기를 영아(嬰兒)와 같이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우애를 논하는 사람이 온공을 엄지손가락으로 꼽지만은 그 후예가 경보하는 것을 계술(繼述)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사람들의 우애를 말하는 사람은 항상 강피(姜被)와 양만(楊幔)을 말하지만 그 후손이 금만(衾㡢)으로 그 정자의 이름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이제 두분의 세대까지는 300여년이 되었지만 가천으로써 정자를 이름한 것은 이 진실로 우애의 결실로서 옛날에 없던 바요, 금세에 홀로 있는 바이다, 아! 성하도다, 아! 옳은 일이로다, 하물며 그 뛰어나게 지은 집은 나무도 아니오 흙도 아니며 오직 벽돌로서 구축하여 풍우에 후패되지 아니하고 수화에 분소되거나 표류되지 아니하여 오래가기를 도모하는 것이 이것만 같음이 없다, 뒤를 잇는 사람은 동족을 여기에 모아서 노래하고 읊조리며 음식도 먹고, 앉아서 뜰에 나무를 보고 누워서 샘물 소리를 들어면 두분의 영향이 황연히 이목의 사이와 조차(造次)의 즈음에 응접하는것 같은 것이니 비록 잊고자한들 되겠는가? 두분의 효우는 멀리 좌랑공에서부터 세세로 지켜왔으니 뒤에 반드시 백세에 뼏혀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불녕(不侫)한 내가 전랑부군의 후손으로써 그 경모하는 마음이 남보다 뒤지지 아니하니 마땅히 나는듯이 가서 정자에 올라오고 한두루미의 술로 주인에게 권하고 하례할 것이오나, 노병으로 불능하고 앉아서 마음에 느낀 바를 기록하여 기문으로 하는 바 이다,
족후손 동열(東烈) 재배근기
주.
*정동열 = 1906~1992년 자는 명노,호는 송파.또는 만취헌으로 사성공 종소의 현손으로 양계 호인의 11세손, 대전동에서 출생하여 3종 형 동필(東必)과 좌랑공 후손 노전선생 환국,과 함께 자라며 함께 학문을 익혀 많은 기문과 상향문.비문을 남겼고 저서로는 송파유집이 있다,
노전선생의 대전 記에 살펴보면 대전동은 조부께서 그 선조님의 향수와 형제간의 우애의 근본의 동리로 대전에는 현인들이 살아가는 동래로 李氏와 孫,鄭,崔氏의 현인들이 살더라 는 말씀에 李氏는 이대전선생 집이요, 孫氏는 밀양손씨 참봉 순조의 부자분 집이요, 정씨는 생원공 부자분의 삼계방 집이요,최씨는 영천최씨 유정 응사 집을 가리켰고, 현재에도 살고있는 족숙 동필과 동열이 살고 있다, 하였으며 일평생 함께 수학하며 詩 읊조리며 정답게 살았다 하시니, 노전선생이 운명을 하시니 그 행장을 족숙 동열이가 지었고, 순흥연 기,도 지었다,
1.계적 = 문과에 급제한 사람의 명부,
2.대부 = 사간원 사헌부의 총칭,
3.제자 = 제자백가를 가르킴,
4.낙민제서 = 주나라 정자와 주자의 글,
5.사마온공 = 송나라의 학자 사마광을 말함,자는 군실,사후에 태사온국공을 추증했으므로 사마온공 이라 한다,
6.강피 = 강씨의 이불,후한서열전에 강굉이 그 아우 중해와 계강을 더불어 효행이 있었으며 우애가 지극하여 항상 한 이불아래에 기거 하였다고 한다,
7.양만 = 양씨의 휘장, 중국 북조시대에 양파 양춘 양진 삼형제는 우애가 지극하야 사랑방에 휘장을 쳐 놓고 함께 담소하고 침식을 하였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