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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337. [역경의 열매] 이상춘 (1-15) 하나님과 함께 한 약속의 열매 '상록수장학재단'
경북 김천 가난한 시골 가정서 출생… 집 바로 뒤에 주님은 교회를 준비하셔
이상춘 이사장이 회사와 상록수장학재단 현판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강민석 선임기자
사람들은 나를 '성공한 기업인'이라고 부른다. 아마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 ㈜에스씨엘을 비롯해 4개의 회사를 운영하며 연매출 1500억여원을 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150억원 정도를 투입한 상록수장학재단을 설립했으니 기업의 사회공헌 측면에서도 많은 점수를 주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난 이렇게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들이 성공의 척도로 비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약속의 열매'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처절하게 고통스러웠던 사업의 위기와 절망의 순간마다 '너와 함께하겠다'고 하신 약속을 어김없이 지켜주셨다. 이제 끝이라며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을 때에도 피할 길을 주시고 기적의 손길을 내미셨다. 하나님이 안 계셨다면 나의 삶, 나의 회사, 나의 가족은 아마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약속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다. 이것은 지금 이후로도 내게 이어질 약속이 분명하다.
나의 간증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 시골소년이 주님을 만나 어떻게 변화되고 또 성공했으며 나눔의 삶을 살고 있는지가 큰 주제다.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좌정하셔서 용기와 힘을 주시고 놀라운 축복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발견하길 원한다.
내 고향은 경북 김천 대덕면 관기리 467번지다. 면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시골 중의 시골이었다. 나지막한 뒷산을 끼고 벌판이 시원스레 펼쳐진 우리 마을은 50여호가 한 가족처럼 어울려 살았다.
1956년, 한국전쟁 후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나는 동네 동갑친구만 13명이 있었다. 우리 집도 벼농사와 누에, 담배 농사를 지었지만 모두 찢어지게 가난했다. 6남매 맏아들인 나는 한번도 새 교과서로 공부해본 적이 없다. 다 찢어진 선배 책을 물려받았고 도화지 살 돈을 달라고 어머니를 무척이나 괴롭혔다. 도시락 못 싸가는 것은 다반사였다. 리더십이 있었던 나는 동네 골목대장으로 신나게 뛰놀던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근처 냇가에서 고기도 잡고 여름이면 멱 감고 겨울엔 썰매를 탔다. 소 먹일 풀을 베고 나무를 한 짐씩 해오는 것도 우리의 몫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 뒤에 작은 교회가 생겼다. 관기교회란 간판을 건 이곳은 뛰놀기만 하던 우리에게 전혀 다른 문화가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불시에 예배 초청을 받은 우리들은 목사님의 성경인물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 맞춰 준비하는 성극과 합창단 일원이 되는 것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새벽송 돌기는 아주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간간이 학용품과 간식을 받는 재미도 쏠쏠했다. 신앙은 소리 없이 내 가슴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김천시내에 있는 미션스쿨인 시온중학교에 입학했다. 동급생 13명 중 불과 5명만 중학교에 입학했다. 동네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김천까지 너무 멀어 하숙을 해야 했기에 어려운 살림에 모두 포기했던 것이다. 그래도 장남인데 중학교는 가야 하지 않느냐는 아버지의 배려로 까만색 교복을 입게 된 나는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상춘 (1) 하나님과 함께 한 약속의 열매 '상록수장학재단'
* [역경의 열매] 이상춘 (2) "동생 4명 위해 고교 입학 대신 기술 배우거라"
* [역경의 열매] 이상춘 (3) 첫 직장 스프링공장… 고된 일과에도 월급 300원
* [역경의 열매] 이상춘 (4) 21세 어린 나이에 회사 설립 "주님 감사합니다"
* [역경의 열매] 이상춘 (5) 신혼의 아내, 사업 번창에도 공장 식당서 헌신
* [역경의 열매] 이상춘 (6) 갑작스런 불황에 "도와주세요" 100일 새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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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이상춘 (15·끝) 사업 성공·나눔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의 열매'
◇약력=1956년 김천 출생, 숭실대 졸업, ㈜에스씨엘 대표이사, 중국 원일정밀유한공사 사장, 재단법인 상록수장학재단 이사장, 재경김천향우회장, 김천대 명예교수, 국립암센터 이사, 동탑산업훈장(모범 기업인) 수훈, 아너소사이어티 대상 수상
***[역경의 열매] 이상춘 (2) “동생 4명 위해 고교 입학 대신 기술 배우거라”
미션스쿨 중학 입학 종교부장 맡아… 아버지의 간청에 500원 들고 서울로
중학교 앨범에 남아 있는 이상춘 이사장의 졸업사진. 성적이 상위권이었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당시 미션스쿨인 시온중학교에 입학해서 교회를 다녔던 이력 때문에 학교에서 종교부장을 맡았다. 이 직책은 성경 과목 시간에 교목을 도와 학생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돕고 행사 시 대표기도를 하는 등 역할이 꽤 중요했다.
개구쟁이었던 초등학교 때와 달리 중학생이 되자 교회생활도 열심히 하고 성적도 상위권인 모범학생이 되었다. 졸업반이 되어 인근 성의고등학교에 원서를 내고 입학시험을 일주일 앞둔 때였다.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상춘아 이리 좀 와서 앉아라” 하셨는데 나를 불러놓고도 한참이나 아무 말씀이 없이 담배만 계속 피우고 계셨다.
예감이 좋지 않아 “아버지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으세요”라고 물었더니 한참을 머뭇거리시다가 어렵게 입을 여셨다. 미안하지만 고등학교 시험치지 말고 서울 올라가 친척 할아버지 회사에 가 기술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아니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여쭈었더니 내가 고등학교를 가게 되면 동생 4명을 중학교에 보낼 수 없으니 맏이인 네가 양보해 서울로 가서 기술을 배우라는 말씀이었다.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이제 시험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시험이라도 쳐보아야지요. 그리고 가든 안 가든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드시면서 “아니다 만약 시험을 쳐서 합격이 된 뒤 서울을 보내게 되면 아비 마음이 얼마나 더 아프겠느냐 그러니 어차피 가야 될 것 같으면 시험보지 말고 그냥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난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며칠을 생각해도 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신 아버지의 삶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로 떠나기 전날, 우리 집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우셨고 아버지도 내내 침울하셨다. 더 공부하고 싶어 하는 장남을 공부시키지 못하고 서울로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나는 지금도 이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릿해진다. 그리고 학비가 없어 공부를 못했던 피눈물 나는 아픔이 결국 오늘 내가 상록수장학재단을 설립해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주는 첫 씨앗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1년 3월 1일로 선명히 기억한다. 난생 처음 서울로 가기 위해 김천고속버스터미널에 갔다. 간단한 옷보따리를 들고 서울행 버스에 오르는 내 뒤로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들렸다. 나도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울컥 쏟아져 엉엉 울고 말았다.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나는 몇 번이나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동시에 마음으로 다짐하는 기도를 드리고 또 드렸다.
“하나님, 저는 서울에 가서 꼭 사업가가 되어 성공하고 싶습니다. 반드시 돈을 많이 벌어 슬피 우신 어머니의 한을 풀어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공부를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 가는 만큼 반드시 성공하게 도와주세요.”
열다섯 살 소년의 기도는 차라리 절규였다. 침울한 마음으로 고향을 떠났지만 버스가 서울에 도착하자 내 눈 앞에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당시 버스터미널은 지금처럼 강남이 아니라 동대문에 있었다.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고속버스가 막 운행을 시작했을 때였다. 시골에서 전혀 보지 못했던 높은 빌딩이며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나가는 사람 코도 베어간다’는 서울에 첫발을 내딛은 내 주머니에는 아버지가 꼬깃꼬깃 모아준 단돈 500원이 들어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상춘 (3) 첫 직장 스프링공장… 고된 일과에도 월급 300원
울고 싶었던 단순노동의 견습생 시절 쉬는 주일 교회 찾아 마음의 평안 얻어
상록수장학재단 장학금 수여식 후 학생들과 함께 한 이상춘 이사장(앞줄 가운데). 지난 7년간 1356명이 혜택을 입었다.
내가 기술을 배우기로 한 서울 용산구 원효로의 스프링 공장은 친척 할아버지가 운영하신다니 안심이 되었고 회사도 제법 클 것이라 생각돼 나름 대우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중 나온 직원을 따라 공장에 들어선 순간 기대는 바로 걱정으로 바뀌었다. 어두컴컴한 공장 안에서는 기계 특유의 냄새가 강하게 풍겨나며 나를 맞았다. 바닥도 기름범벅이었고 기름때가 묻은 작업복 차림의 공원들이 어떤 새내기가 오나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온통 기름때로 번들거렸고 이빨만 하얗게 보였다. 숙소는 더 충격적이었다. 시멘트 벽돌로 대충 막은 공간에 때에 절은 이불이 있고 옷가지와 생필품들이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공동 숙소가 이곳이라니 그저 울고 싶었다. 폐유로 난방을 해서인지 곳곳이 그을음투성이였다. 요즘으로 치면 주물공장과 비슷했다.
다음날 새벽부터 고된 일과가 시작됐다. 선후배의 위계질서는 군대 군기보다 더 셌다. 계속 공장 청소와 공구정리, 식사당번만 죽도록 시켰다. 시킨 일 외로 기계를 작동하거나 허락되지 않은 공구를 만지면 그 자리서 뺨을 맞거나 공구가 그대로 날아왔다. 깜빡 졸다 밥이라도 태우면 난리가 났다.
식사는 항상 제일 늦게 입사한 사원이 후임자가 올 때까지 한다. 자취해본 경험이 있는 나는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즉석에서 김치를 쑥쑥 썰어 넣고 끓이는 찌개와 금방한 밥에 마가린을 넣고 비벼먹는 맛은 지금도 군침이 돌 만큼 맛있었다.
‘용산 스프링’이란 이름의 우리 회사는 각종 기계에 들어가는 크고 작은 스프링을 만들었는데 직원이 15명인 간이수공업 형태였다. 그런데 견습생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단순노동만 시켜 불만이 컸다. 가끔 얼굴을 뵈는 할아버지는 무조건 “열심히 하라”고만 하셨다.
첫 월급봉투가 나왔다. 내 이름이 적힌 노란봉투에 든 액수는 300원이었다. 한 달에 두 번 노는 휴일 날, 이 돈으로 작업복 사고 극장 한번 가고 목욕과 이발한 뒤 30원 하는 짜장면 한 그릇 사먹으면 딱 맞는 액수였다.
작업 ‘시다’ 노릇을 몇 개월 하면서 이곳에선 기술자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월급보다도 난 기술을 배워야 하는데 선배가 이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이상 나는 같은 일만 반복해서 해야 한다. 남보다 먼저 일어나 공장안 내부를 잘 청소하고 시키지도 않은 선배들의 작업복과 장갑을 깨끗이 빨아 주는 등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이렇게 선배들에게 잘 보여야 아주 기초적인 일들을 하나둘 배우게 해 주었다.
쉬는 주일 날, 가끔은 공장 근처의 교회를 찾았다. 예배당에 앉으면 마음에 편안함이 있었고 고향의 부모님과 동생들, 친구들이 생각나 남모르게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반드시 성공해서 보란 듯이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말이다.
어느 정도 기술을 익히고 내 밑으로 후배들이 들어왔다. 월급도 2500원 정도를 받을 만큼 준기술자 대우를 받던 때였다. 어느 날, 을지로 대한스프링 공장에서 일하던 사촌형에게 연락이 왔다. 용산에서는 더 이상 기술을 배우기 어려운 만큼 기술자 대우를 해줄 테니 공장을 옮겨보라는 것이었다. 월급도 1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 당시 성실히 일을 잘한다고 할아버지께 인정을 받고 있었던 나는 망설인 끝에 할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3년 뒤 반드시 기술자가 되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옮겼는데 바로 월급 1만원을 주었다. 꽤 큰돈이어서 서울에 올라온 이후 처음으로 뿌듯하고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상춘 (4) 21세 어린 나이에 회사 설립 “주님 감사합니다”
1977년 시골 땅·소 팔아 공장 차려… “돈벌어 공부 못한 아이들 도울게요”
회사 설립 12년이 지난 1989년, 사장실에서 집무하는 이상춘 이사장. 당시 33세였다.기술자로 제법 많은 봉급을 받은 나는 최소한의 용돈만 남기고 모두 시골 부모님께 보냈다. 부모님은 이 돈을 쓰지 않으시고 모았다가 땅을 사셨다.
이렇게 다른 공장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던 중 할아버지가 다시 나를 부르셨다. 그래도 인척인 내가 성실하게 일했고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았다. 나도 같은 대우라면 할아버지 일을 돕는 것이 낫겠다고 여겨 다시 복귀했다. 복귀 후 빠른 승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3년 만에 복귀해 그동안 닦은 기술과 성실성으로 최고 기술자로 인정받았고 빠른 승진이 이어져 공장장이 되었다. 한 번 외유한 것이 내 주가를 더 높여준 것이다. 월급도 6만5000원을 받았다. 그런데 회사 내 큰 문제가 생겼다.
할아버지께서 후두암 판정을 받아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무척 아끼고 사랑해 주셨기에 충격이 컸다. 공장 내부는 모두 나에게 맡기고 있었지만 외부와 총괄은 할아버지의 동서가 맡고 있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공장은 할아버지 동서에게로 넘어갔다. 그때 할아버지 친척은 모두 그만두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와 거래하던 오명평 사장님이 찾아와 직장을 구해 놓았느냐고 물었다. 아직이라고 대답했더니 이참에 기술도 좋고 하니 공장을 한번 시작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하셨다. 근데 나는 나이도 어리고 아는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고 했더니 자기가 도와줄 테니 한번 해보라 용기를 주며 권유하셨다. 그래서 이때가 기회라 여기고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시 난 21세였다. 공장을 시작하려면 최소한 250만원 정도는 필요했다. 공장을 얻고 시설을 갖추는 데 필요한 최소 비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할 정도로 배짱을 부린 것 같지만 난 용기를 내 일단 창업을 하기로 하고 아버님께 의논을 드렸더니 한번 해 보라고 또 용기를 주셨다.
1977년 당시 공장장으로 내가 그동안 열심히 모은 돈 120여만원과 아버지가 내가 보탠 돈으로 사두셨던 논 3마지기를 다 팔아서 모두 150만원을 마련했다. 부족한 100만원은 시골에서 소도 팔고 부모님이 동네분들에게 이자를 주기로 하고 빌려 보내주셨다.
1977년 5월 20일, 나는 용산 신계동에서 대신스프링이란 간판을 걸고 개업식을 가졌다. 직원은 나를 포함해 총 5명이었다. 100㎡(30평) 가게에 기계를 몇 대 들이니 내부가 꽉 찼다. 비싼 백색전화를 한 대 들이고 낮엔 내가 거래처를 다녔고 밤엔 수주 받은 것을 직원들이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했다.
낮엔 영업, 밤엔 작업하는 일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힘든 것이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는 직원들과 시골의 부모님, 형제들의 기대를 생각하면 더 열심히 뛰지 않을 수 없었다. 여동생이 올라와 직원들 식사를 해주기로 해 고마웠다. 난 사장이 아니라 영업사원이자 공장장이었다. 교회는 잘 못 나갔지만 마음속으로 늘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부족하고 어린 제가 이렇게 회사를 차리고 사장이 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회사를 잘 운영해 많은 돈을 벌어 어머니와 아버지의 응어리를 풀게 해주세요. 그리고 저처럼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기 힘든 학생들을 도울 수 있게 해주세요.”
나의 이 기도는 참으로 단순했지만 하나님은 분명 듣고 계셨고 이후 나의 삶 속에서 참으로 천천히 천천히 역사해 주셨다.
***[역경의 열매] 이상춘 (5) 신혼의 아내, 사업 번창에도 공장 식당서 헌신
23세 청년의 성실함·놀라운 성공에 거래처 사장 사모님 “내 사촌동생을…”
이상춘 이사장이 부인 이금순 권사와 고액 기부자들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 행사에 참석했다.
젊은 패기로 밤낮없이 열심히 일한 결과는 아주 좋았다. 소문이 나면서 공장 일거리가 점점 많아졌고 일손이 부족해 직원을 뽑고 시골에 있던 남동생도 불러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월급을 주고 결산을 하면 내 몫으로 돌아오는 액수가 봉급생활을 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이렇게 2년6개월 정도 열심히 일하니 번 돈이 1000만원쯤 되는 것 같았다. 여기에 다시 1000만원 정도 빚을 내 2000만원을 공장에 재투자했다.
당시 사채 금리가 년 60%(월 5부)로 매우 높았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사업이 아주 잘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장도 넓은 곳으로 옮겨 설비를 새로 하고 당시 막 나온 신형 차(브리샤)를 한 대 뽑았다. 연립주택도 한 채 샀다. 당시 23세 청년치곤 엄청나게 빠른 성공이었다. 내가 남보다 시간을 더 벌 수 있었던 부분은 징집면제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공장장 시절 일을 많이 해 늑막염으로 고생했고 병원에서도 보름 정도 입원했는데 퇴원 후 다시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중 입대 신체검사를 받아 면제 판정을 받았다.
승승가도를 달리는 중에 한 거래처 사장 사모님이 나를 보자더니 “자기의 사촌여동생과 선을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동안 거래하며 나를 유심히 살폈는데 참 건실하고 열심히 사는 모습에 점수를 많이 주었노라고 했다. 이때 선을 보고 만나 1979년 결혼한 이가 바로 아내(이금순 권사)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눈이 아주 예쁘고 여성적인 모습에 매료돼 비교적 결혼을 일찍 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집과 차를 다 가진 사장이란 점이 부각되어 점수를 땄을지는 몰라도 아내 입장에서는 기나긴 고생길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기도 했다.
아내는 결혼하자마자 사장 부인이 아니라 공장 직원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식당 아줌마가 되어야 했다. 회사가 어렵거나 자금이 안 돌아가면 어떻게든 돈을 아껴 나를 도우려 애썼다. 조금이라도 싼 부식을 마련하기 위해 아이를 들쳐업고 먼 시장까지 다녀오곤 했다. 이런 아내의 헌신이 내겐 큰 힘이 되었고 회사가 성장해 오는 힘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사업에 그 어떤 것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평을 하지 않고 나를 믿어주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꼭 필요한 배우자를 주신 것을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회사 규모가 조금 커지면서 말썽부리는 거래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돈을 떼먹고 사라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도어음을 주거나 아예 작정을 하고 사기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은 경험을 통해 처리해나갈 수 있지만 문제는 사회 전반에 걸친 불경기나 사회적 이슈로 인해 타격을 받는 경우였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사회가 뒤숭숭한 가운데 80년, 유류파동이 일어나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물가가 정신없이 뛰기 시작하는데 38.5%까지 올랐던 것으로 안다. 원자재값이 오르니 물건을 하청받아 납품하면 오히려 손해가 나는 일이 발생했다. 나는 사업이 잘된다고 신이 나서 공장을 넓히고 직원도 더 채용했는데 예상치 못한 큰 암초를 만난 것이다.
일거리도 신기할 정도로 딱 끊겼다. 매달 직원들 봉급에 사채이자며 나갈 돈은 많은데 수입이 없으니 정신이 아득했다. 사업 시작 후 처음 겪는 암담함이었다. 입에서 절로 “하나님!”이란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역경의 열매] 이상춘 (6) 갑작스런 불황에 “도와주세요” 100일 새벽기도
10·26, 오일파동에 공장 폐쇄 위기… 간절한 기도에 주님은 새로운 도전을
사업이 한창 잘될 때 고향집을 찾은 이상춘 이사장이 부친과 함께했다.
결혼 전 쉬는 첫째, 셋째 주일은 공장 근처 성산감리교회에 출석하곤 했다. 이 교회 윤병조 청소년 담당 목사님은 후일 나의 결혼식 주례도 맡아 주셨는데 설교를 들으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생활이 좀 소홀해졌고 1979년 10·26사태와 유류파동이 가져온 파장은 23세 청년이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로 돌아왔다. 하루아침에 일거리가 모두 없어지고 연 60%가 넘는 사채 이자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그때 다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었다.
결혼 후 난 집 근처 독산동 가리봉교회를 나가곤 했는데 담임목사님을 찾아가 심방을 요청했다. 집으로 오신 목사님께 지금 내가 처한 사업의 위기를 소상히 말씀드렸다. 그리고 헤쳐나갈 지혜를 알려주십사고 부탁드렸다. 목사님은 우리 부부를 위해 기도해 주시며 요셉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가 누명까지 쓰고 옥에 갇히며 갖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도 지금 매우 힘들겠지만 계속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인내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뿐만 아니라 더 큰 사업가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새벽부터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하셨다.
워낙 다급했던 나는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여 100일 새벽기도를 작정했다. 아내도 함께 기도하자고 손을 이끌었다. 매달 이자로 50만원, 봉급으로 30만원, 운영비 등 최소 100만원이 남아야 돌아가는 상황인데 대안이 없었다. 모든 것이 일감이 없어 생긴 일이었다. 공장이 가동되도록 일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기도한 지 한 달이 가까이 되었을 때쯤 처남이 산에서 산삼을 3뿌리 캤다며 한 뿌리를 내게 가져왔다. 갑자기 이 산삼을 D탄좌 이 과장에게 갖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과장을 만나 처가에서 산삼을 캔 것을 가져왔는데 갑자기 이 과장이 생각나 선물로 가져왔다고 했더니 처음에는 “이 귀한 것을 내가 왜 받느냐”며 사양했지만 나중엔 내 정성이 고맙다며 기쁘게 받아주었다. 난 이 선물을 통해 뭔가 대가를 바라진 않았다. 그분의 얼굴이 떠올라 선물하면 좋겠다고 느껴져 행동에 옮겼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새벽 제단을 쌓고 있는 내게 주의 성령께서 인도하신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한참이나 지난 후 이 과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게 제품 도면을 한 장 주면서 이 제품을 만들 수 있느냐는 말에 나는 도면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대기업에서나 만드는 아주 큰 판스프링이었다. 우리 회사는 시설도 없고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 과장이 다시 물었다. “도면대로 제작할 수 있습니까?”
일거리에 다급해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만들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일단 400개를 만들 견적서를 보내고 만들어달라고 했다. 고맙다고 인사를 했지만 이 제품을 어떻게 만들어 납품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밤잠이 오지 않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튿날부터 서울시내에 있는 큰 스프링 공장을 모두 찾아보았다. 이틀이 지날 때쯤 구로동 독립산업 맞은편에 있는 신흥스프링이라는 회사에 가서 도면을 보여드렸더니 똑같은 샘플을 가지고 왔다. 똑같은 제품을 많이 만들어본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는 분이 아니었다.
***[역경의 열매] 이상춘 (7) 기도 응답으로 빚 청산… 하나님은 보너스까지
24세 새파란 청년의 새벽 통성기도… 석탄산업 활황에 위기 한번에 해소
교회의 초청으로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은 간증을 하고 있는 이상춘 이사장.
간신히 찾은 신흥스프링에서 처음 보는 24세의 새파란 청년에게 D탄좌가 주문한 고가의 판스프링 400개를 그냥 만들어줄 리 없었다. 당연히 담보나 계약금을 요구했다. 개당 9000원씩 하기로 했는데 재료를 사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납품 후에 돈이 나온다며 집을 담보로 제공하겠다고 집문서를 갖다 주었다. 사실 우리 집은 이미 대출을 다 받은 상태라 담보가치가 없었다.
그런데 신흥스프링에서는 담보를 가져오니 재료를 사 제작할 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고 나중에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젠 나를 믿는 도리밖에 없었다. 1만2000원에 견적을 올렸고 만든 400개의 판스프링을 납품하니 바로 어음으로 480만원이 결제됐다. 바로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현금 360만원을 신흥스프링에 갖다 주었다. 나 역시 100여만원을 손에 쥐고 ‘기도의 위력’을 절감하게 되었다. 새벽마다 강단에서 부르짖은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셨음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D탄좌와 신흥스프링 모두에 신뢰를 얻어 다시 800개 주문이 들어왔다. 이어 계속되는 주문에 열심히 중간 역할을 했다. 당시 유류 파동으로 석탄제품이 인기를 얻었을 때라 탄광마다 24시간 석탄을 캐고 있었다. 판스프링의 수요가 계속 이어졌다.
기도도 더 열심히 했다. 이런 내게 하나님은 보너스를 또 주셨다. 내가 받는 개당 주문 가격을 대기업이 제작해 받는 가격으로 올려준 것이다. 이것은 내 의도와 달리 제삼자가 왜 더 받을 수 있는 것을 그러느냐며 견적서를 새로 고쳤기 때문이다.
수입은 이로 인해 갑자가 확 뛰었고 벼랑 끝에 몰려 있던 사업의 어려움이 일시에 해소됐고 한 차례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하나님의 복은 이렇게 차고 넘치고 흔들어서 주신다는 것을 이후 사업을 하면서도 계속 느끼게 되었다.
나는 기도로 다시 일어섰다. 목사님의 말씀대로 요셉이 고난 중에 인내하고 승리한 것처럼 3년여 만에 그동안 안고 있던 빚을 다 갚고 1984년 부천에 공장까지 새로 구입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시로선 회생이 힘들어 보였던 내게 D탄좌 이 과장을 만나게 하심으로 닫혀 있던 사업의 문을 열게 해주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우연으로만 돌리기엔 무리다. 하나님의 세심한 숨결과 인도가 순간순간 작용했음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살아계셨다.
나는 다시 잘 나가는 젊은 사업가로 돌아왔다. 대출받아 200여평의 공장까지 매입했고 구로공구단지에 상가도 하나 매입했다. 일거리도 경기가 회복되면서 점점 많아졌고 사업가로서 또 공장 사장으로서 면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은 승승장구하며 항상 잘 나가지만 않는다. 내부적·외부적 요인에 의해 상황이 변화되면 타격을 입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사업이다. 석탄사업의 활황은 내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지만 이것이 지속되진 않았다.
대한민국에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게 되면서 정부가 대기오염 주범인 석탄산업을 억제시키고 도시가스 등 다른 에너지를 도입하는 정책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석탄이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내가 주력으로 해오던 일감도 확 줄었다. 나는 새로운 판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던 중 우리 공장에서 가까운 거리에 잇던 I전기를 방문하게 됐다. I전기와의 만남은 내게 또 하나의 큼지막한 간증거리를 안겨주게 된다.
***[역경의 열매] 이상춘 (8) 1억4000만원대 어음 최종 부도를 막아준 기도
사업 위기 겪던 거래처 일감 몰아줘… 은행 결제 날 하나님은 내게 손길을
장학사업 외에 이웃을 돕는 일에도 수시로 나서고 있는 이상춘 이사장(가운데)이 한 암환자의 수술비를 지원한 뒤 함께했다.
내가 용산스프링 공장장으로 근무할 당시 바로 맞은편에 I전기공장이 있었다. 후일 I전기는 크게 확장되어 부천으로 이전한 상태였다. 전기 소켓과 밥솥코드 등을 만드는 I전기 사장님은 용산에 있을 때 사장님이 직접 오셔서 나와 기술 상담을 하기도 했던 분이었다. 몇 년이 지난 뒤 영업차 사장님을 찾아갔더니 아주 반갑게 맞아주고 차를 대접해 주셨다.
당시 I전기는 제법 유명해 부천에 몇 천평 되는 공장도 있고 나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큰 규모로 운영되고 있었다. 아직 내가 공장장인줄만 알았던 사장님은 그 사이 내가 용산스프링을 거쳐 공장을 차리고 오너가 된 것을 설명하자 잘 생각했다고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저희 회사에 일감이 별로 없습니다. 사장님 일감을 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장님은 바로 인터폰으로 구매과장을 불러 일감을 줄 수 있도록 해보라고 지시했고 구매과장은 곧바로 나를 자기 방으로 안내해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현장에서 30여종의 샘플을 가져와 이 제품들을 생산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 공장에서 생산할 수 있는 것은 20% 정도였다. 나머지는 외주처리할 것을 생각하고 모두 해드리겠다고 하고 주문을 받았다. 회사는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고 샘플을 만들어 갖다 주는 것마다 품질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주문으로 이어졌다.
회사는 철야근무를 해야 할 정도로 주문량이 많아졌고 나도 사원들과 함께 철야를 하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통로를 열어주신 것이라 여기고 밤낮없이 일을 했지만 피곤치 않았다.
그런데 이 큰 회사에서 결제를 약속어음 5개월짜리로 끊어주는 것이었다. 말이 5개월이지 월말 마감에 다음 달 말일 결제를 하면 결국 7개월 후였다. 보통 돈이 급하면 사채시장에 가서 할인(일명 와리깡)을 해서 급한 불을 끄는 것이 당시의 기업들이었다.
7개월 후 내가 I전기에서 받아야 할 돈이 무려 1억4000만원 정도가 될 정도로 크게 불어 있었다. 그때 나 역시 신용이 있어 재료상에서 내게 외상을 주어 물건을 만드는 데는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이 무렵 I전기가 부도날 수도 있다는 소리가 얼핏 들렸고 I전기의 분위기나 직원들의 표정도 좀 어수선 한 것 같았다.
사업경험 없이 순진하기만 했던 나는 종업원이 수백명인 이렇게 큰 회사는 부도가 안 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부도 이야기가 들려도 한쪽으로 흘려버리고 일을 열심히 해서 납품 기일을 맞추는 데만 집중했다.
그런데 우리 회사 결제가 돌아오는 이달 말쯤 부도가 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이번엔 느낌이 심상치 않아 I전기로 달려갔다. 회사에 가서 사장 동생인 전무를 만났다. “부도가 난다니 사실입니까?”라고 묻자 전무는 스스럼없이 “사실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순간 하늘이 푹 꺼지는 것 같았다.
전무는 나를 의자에 앉히면서 “I전기의 가장 큰 거래처인 S알미늄이 부도 처리되었고 받을 돈 몇 십억원을 못 받는 바람에 연쇄 부도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자신들도 피해자라며 억울해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믿었던 사장님은 20일 전 미국으로 도망갔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동안 자재를 사느라 들어간 돈에 외상에, 밀린 결제를 생각하니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1억4000만원이면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다 팔아도 못 미치는 엄청난 액수였다.
***[역경의 열매] 이상춘 (9) 골프에 푹 빠져 주일엔 교회 대신 골프장으로
사업 88올림픽 특수로 승승장구 신앙생활은 점점 게을러지기 시작
1990년대 초 모범사원을 선발해 시상하는 이상춘 이사장(왼쪽). 사업은 88서울올림픽 특수를 타고 승승장구했다.
부도를 예감하고 일단 미국으로 건너간 I전기 사장은 부도 직전까지 자신을 믿고 납품을 해준 회사들의 피해만큼은 막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동분서주하며 제품 수주를 받았고 계약금과 금형비를 선불로 받아 한국에 온 뒤 L/C를 담보로 돌아오는 어음을 막은 것이다.
I전기는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고 이제부터는 로컬로 결제하겠다고 했다. I전기는 다시 정상을 찾아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국의 저임금을 무기로 수출품의 주문은 생산을 다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다. 물량이 많아지자 I전기 위기 때 의리를 지키며 도움을 준 우리 회사에 단연 우선권이 주어졌다. 우리는 평소 물량보다 두 배 이상을 받았다. 완전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내가 바보 같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 것이라 믿는다.
수작업의 한계를 느껴 일본의 좋은 자동기계에 눈을 돌렸다. 일본 오파상을 수소문해서 찾았다. 수작업을 하면 세 사람이 하루 5000∼6000개를 만들어 내던 제품을 일본자동기계로 생산하면 6만∼7만개까지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이 기계야’ 하고 무릎을 쳤다. 품질도 훨씬 좋을 뿐만 아니라 원자재비도 20% 이상 절감됐다.
문제는 대당 3000만원하는 기계값이었다. 엄청 비쌌다. 일본 오파상은 내가 사장 아들인줄 알았다가 사장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랐다. 내 나이 서른이었으니 말이다. 2대를 주문하자 최대한 가격을 낮춰 줬는데 그는 너무 싸게 주어 회사서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기계를 담보로 은행대출을 받아 기계값을 주었고 기계를 돌리기 시작하니 적은 노력으로 큰 수입이 이어졌다. 이것을 계기로 기계 자동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국내에 몇 대밖에 없는 와이어커팅기 등 고가의 기계를 연이어 수입, 히트를 쳐 나갔다. 5층 건물의 공장을 지어 ‘원일정공’이란 회사간판을 걸었다. 일본제 최첨단 와이어커팅기 6대를 돌렸는데 이 사업은 내게 엄청난 수입을 보장해 주었다. 뭐든지 앞서서 개척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부담도 있는 반면 대박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때 유망 중소기업에 금리혜택을 주는 제도도 있어 도움을 받았다.
어느 날 주 거래처 임원의 권유로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골프 이전에 나는 테니스를 6년 이상 즐겨왔다. 골프를 시작해 보니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1년 만에 싱글이 될 정도로 열정을 가졌다. 거래처에서는 주말마다 설악산이나 제주도로 골프를 치러가자고 호출이 왔다. 그들의 요구에 응하면 당연히 교회는 갈 수 없게 되었다. 그 횟수가 잦아지고 골프가 끝나면 술을 마시고 화투를 치며 시간을 보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나도 몰래 이 같은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거래처에서 불러주지 않으면 내가 어디로 가자고 제안도 하게 됐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나는 청소년기가 없었다. 15살에 서울에 올라와 기술을 배우다 21살에 사업을 시작해 낮에는 일, 밤에는 고등학교 야간반에서 학업에 열중하다가 31살에 골프를 배워 전국을 다녀보니 너무나 세상살이가 즐거웠다.
사업은 88서울올림픽 특수로 승승장구하고 서울 화곡동 45평 아파트에 입주, 잘나가는 회사 오너로 수십명의 직원을 거느리며 잔뜩 폼을 내고 있었다. 교회는 부천 참된교회에 출석했지만 생각나면 한 번씩 가는 곳으로 점점 신앙생활에 게을러지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이상춘 (10) 3번의 위기로 단련… 1998년 IMF 사태가 기회로
1992년 연쇄부도 이후 부채비율 낮춰… 외환위기 오자 여유 현금으로 M&A
사업이 다시 안정된 1994년, 이상춘 이사장이 모처럼 가족여행을 떠났다.
사업 규모가 커지고 안정되면서 나는 회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회사의 현금보유 비율을 늘리고 위기가 오더라도 그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철저히 하기 시작했다. 숨이 넘어갈 정도의 어려움을 세 번이나 경험했던 터라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저항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찬찬히 돌이켜보니 희한하게도 정확히 6년마다 위기가 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80년 유류파동, 1986년 석탄산업 퇴조, 1992년 노사분규로 인한 자동차산업의 위기였다. 다시 내가 수입대리점과 인천 남동공장을 가동하며 탄탄대로를 달리던 중에 6년이 지났다. 이번엔 그냥 지나가나 했지만 역시 6년이 지난 1998년, 빨간불이 들어왔다. 온 국민이 뼈저리게 기억하는 IMF사태였다.
나라가 부도가 난 이 암울한 상황에서 외국의 기업사냥꾼들은 알토란같은 우리 회사들을 싼값에 집어삼켰다. 중공업 중장비 조선소 제약회사 등에 지분율로 경영에 참여하면서 나중에 엄청난 이익금을 챙겨가게 됐다.
나는 어렵기는 해도 이미 고생했던 경험 때문에 상황이 닥칠 것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 있었다. 따라서 IMF를 준비하지 못하다 속절없이 당한 다른 회사들과는 달랐다. 1992년의 악몽이 부채 비율을 낮추게 해 나를 잘 단련시켜 주었던 것이다.
당시 은행에 넣으면 받을 수 있는 이자가 연 24%였고 달러당 원화가 2000원이 넘기도 했다. 중소기업들은 높은 금리 때문에 대출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를 보다 못한 정부가 중소기업 육성책으로 저금리 대출을 기업에 해주어 우리 회사도 4억원을 빌렸다. 나는 내가 들었던 적금도 다 해약하고 현금동원력을 최대한 늘렸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것이 역으로 회사를 키우는 촉진제가 되어주었다.
난 지금도 아찔한 것이 있다. 1992년 위기 때 은행과 어음의 무서움을 배우지 못했다면 IMF사태 때 우리 회사는 볼 것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난 갖고 있던 현금과 또 지원받은 돈으로 같은 업계 경쟁사를 인수·합병했다. 나보다 훨씬 크게 사업했던 공장들이 내 소유로 등기가 되었던 것은 정부가 기업 경매를 받으면 이 중 90%를 대출해주는 제도가 막 생겨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당진(6000평)과 안산(1200평)에 연이어 공장과 부지를 인수할 수 있었다. 사실 준비를 잘하고 있어서 위기가 기회가 된 셈이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우리 회사는 큰 규모의 회사로 성큼 성큼 도약했다. 2000년 20억원 매출을 처음 돌파한 뒤 매년 매출이 100억원 정도씩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우리 회사가 만드는 패드 스프링은 나중에 자동차 부품 시장의 80%를 차지할 만큼 커졌다.
어느 날 내게 이렇게 쏟아지는 물질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이 분명한데 “왜 이렇게 부어주실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불현듯 내가 자살 직전의 상황에 눈물 흘리며 주님께 서원한 말이 뇌리를 스쳤다.
“주님. 이 위기를 막아주시면 100억원대의 장학재단을 만들겠습니다.”
순간 하나님과의 이 약속을 더 미루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직 내 나이가 한창이고 아직 사업할 일이 멀지만 시간이 항상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여겼다. 내가 고등학교 학비가 없어 눈물 흘리며 서울로 올라오는 아픔을 겪었던 것처럼 오늘도 학비가 없어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에게 약속을 지켜야 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역경의 열매] 이상춘 (11) 곤궁한 학생들에 장학금 지원은 ‘거룩한 투자’
2008년 7월 약속대로 장학재단 설립… 지난해까지 1249명에 14억여원 지급
상록수장학재단 학생수련회 광경. 6년간 학생 1249명에게 장학금 14억2780만원을 지급했다.
장학재단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아주 좋은 건물을 선물로 주셨다. 친구처럼 지내는 한 저축은행장이 “회사가 있는 부천 요지에 상가로만 지어진 큰 건물이 매물로 나왔는데 무조건 사라”고 권했다. 처음엔 사양했는데 월세만 받아도 그 돈으로 대출금을 갚아 나갈 수 있다며 자신이 나서 모든 서류처리를 해주었다. 그 바람에 덜컥 건물이 생겼다. 바로 이 건물을 내가 장학재단에 기증함으로써 매년 이곳에서 나오는 5억여원의 월세가 장학재단운영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나는 평소에 장학재단에서 장학금만 전달하고 덜렁 사진만 찍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청소년들에게 꿈과 비전과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재단 설립을 위한 자료 및 정보를 세세하게 챙기며 철저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드디어 2008년 7월 1일, 상록수장학재단이 발족됐다. 나는 이사진과 실무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곤궁한 환경의 학생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는 일은 거룩한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삶을 변화시켜 지혜와 바른 가치관을 갖게 합니다. 저처럼 어려운 환경으로 진학을 포기했던 친구들에게 더 많은 교육의 기회를 줄 수 있길 저는 늘 기도했습니다. 이제 그 뜻을 이루어 상록수장학재단이 설립됐습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귀한 뜻과 사랑이 담긴 씨앗이 무성하게 자라 풍요로운 열매를 맺도록 여러분이 힘을 모아 주십시오.”
나는 이 장학재단이 주님께 기도하며 서원한 결과물임을 강조하며 반드시 이 속에 기독교신앙과 가치관이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기 때문이었다.
2009년부터는 중고등학생을 선발하여 제1회 장학금을 지급하고 꾸준히 지급대상 인원을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2014년까지 대학생을 포함하여 1249명의 학생들에게 14억278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향후 보다 많은 학생들에게 재단의 혜택이 제공될 수 있도록 장학금 지급 대상 인원을 늘려나갈 예정이다.
또 서울보다는 지방이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고 판단해 고향 김천 지역에 좀 더 많은 학생들이 도움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매년 1월에 장학생을 선발하고 2월 및 8월에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청소년들이 꿈과 비전을 갖고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상록수장학재단은 대학생들과 청소년들을 서로 멘토로 엮어 수시로 조언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년에 2차례 정도 캠프를 열어 유명 강사나 선배들을 초청해 유익한 강의를 듣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장학회에서 해외봉사활동도 데려가고 매사에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일에 치중했다.
상록수 장학생인 J양(24)은 지난해 서울대 경영대를 졸업하고 올해 대학원(외교학)에 들어갔다. J양은 “환경적으로 매우 어렵고 힘들었을 때 상록수재단의 장학금은 큰 힘이 되었다”며 “그 감사함으로 요즘 캠프 때마다 가서 고교생들의 고민상담도 해주고 많은 대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주려고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난 이 장학생들이 서로 끈끈하게 연결돼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서로 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학생들도 지부를 만들어 자신들끼리 모여 찬양도 하고 기도하는 것을 볼 때 아주 흐뭇하다. 앞으로 더욱 발전해 한국의 귀한 일꾼들을 많이 배출해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역경의 열매] 이상춘 (12) 나눔은 주는 것이 아니라 뿌리는 것입니다
태국의 난민촌 메솟에 초등학교 설립… 고향 김천엔 청소년 위한 상록수교회를
장학재단이 건립한 태국 메솟초등학교의 어린이들.
한국의 상록수장학재단이 자리를 잡고 잘 운영되는 가운데 단기선교차 태국과 미얀마 접경지역 난민촌인 메솟을 방문했다. 한창 공부해야 할 어린아이들이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에게도 공부를 가르쳐야 꿈과 소망을 갖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한국에 돌아와서도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교육은 새로운 세계로 문을 열고 들어가게 만든다. 이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은 현장을 보고 도우라는 사명을 주신 것이다. 그래, 이것도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실천하자.”
나는 그곳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님과 연결해 학교를 짓기로 하고 예산을 보냈다. 준공식 날 너무나 기뻐하며 환호성을 지르던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나는 국내 장학생들이 방학을 맞으면 수시로 이곳 메솟초등학교로 데려가 봉사활동을 하게 한다. 자신들보다 몇 배나 열악한 상황의 빈민가 어린이들을 보고 또 도우며 스스로 깨닫고 배우는 것이 참으로 많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것이 산교육이라 생각한다.
이어 고향 김천 시내 중심가에 청소년들이 출석하는 상록수교회도 건축했다. 상록수재단 사무실도 지부 형식으로 함께 열었다. 이 교회는 현재 장년은 많지 않고 청소년 청년들만 200여명 출석하는 교회로 잘 운영되고 있다. 여기에서 더 욕심을 내기로 했다. 김천혁신도시로 꾸며지는 신개발 지역의 종교부지 870평을 매입했고 이곳에 다시 멋진 상록수청소년교회를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기도 중이다. 초현대식으로 청소년들이 환호할 수 있는 멋진 공간과 예배장소가 설계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장학재단을 운영하며 많은 청소년을 만나 대화하면서 자아가 형성되는 이 시기에 멘토를 잘 만나 바른 인격과 신앙이 형성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낀다. 여기서 부모의 역할은 한계가 있다. 부모가 자녀들의 바른 멘토가 되어 주기가 너무나 힘들다. 이는 세대 차이로 인해 소통이 잘 안 되어 대화가 엇나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발학생들에게 학비 외에도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해주고 1년에 두 차례 수련회를 열어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되는 강연과 토론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대학생과 멘토를 맺게 해 진학이나 진로상담을 하도록 관계를 형성시켜 주는데 이 효과가 놀랄 만큼 크다. 최고 명문인 서울대에 다니는 장학재단 선배의 조언과 격려로 농촌의 한 고교생의 생활과 태도가 변화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 상호 네트워크를 통해 사랑과 나눔, 헌신과 봉사, 보람과 기쁨의 릴레이가 이어지도록 돕고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조하기보다는 “과연 내가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살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삶의 중심에 행복과 감사, 보람과 자부심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반드시 동행해야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임을 강조했다. 주님이 함께하시면 그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다고 용기를 심어주었던 것이다.
나는 장학사업과 교회설립, 학교건축 등에 사업에서 번 돈을 아낌없이 쏟으면서 엄청난 기쁨을 얻었다. 또한 ‘나눔은 주는 것이 아니라 뿌리는 것’이라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상춘 (13) 검소·절약으로 이룬 ‘아너소사이어티 기부 부부’
물질을 초월해야 한다는 가르침대로 국립암센터·숭실대 등에 1억원씩 기부
모범기업인으로 선정돼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이상춘 이사장.
내가 운영하는 회사(SCL)가 글로벌 기업으로 가는 데 국내 공장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중국에 진출키로 했다. 우리는 현대계열의 M기계와 협력사로 일을 많이 했는데 이 회사의 권유로 중국에 동반진출하기로 했다.
우리 회사는 항구도시인 톈진에 5000여평 규모의 공장을 짓고 부품생산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힘들고 수업료를 많이 냈지만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될 기지가 되었다.
많은 한국기업이 중국에 진출했다가 실패한 경우도 많았다. 이는 현지사정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결과였다. 인적·물적 자원과 자금력이 건강하지 못하면 국제 경쟁에서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신앙도 이와 비슷하다. 평소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되지 못하면 난관에 부닥쳤을 때 순식간에 신앙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다.
나는 무엇을 결정할 때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반드시 기도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결정을 하면 바로 실행에 옮겼다. 내 사전에는 머뭇거리는 것이 없다. 그동안 공장 부지를 사거나 투자를 결정할 때 느낌이 오면 그날로 계약을 하고 진행을 바로 시작했다. 그런데 거의 실패를 보지 않는 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생각에 내가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더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되고 있다.
사업이 안정되고 회사 경영이 확대되면서 나는 나눔의 폭을 점점 늘려가기 시작했다. 학교와 교회를 지은 것 외에 중국 선양에 교회 두 곳을 더 세웠다. 그리고 1월에 1억씩 기부키로 했다. 대부분 연말에 연말정산 후 기부를 계획하는데 나는 먼저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와 국립암센터, 숭실대 등에 1억원씩을 기부했다. 또 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열매)에 1억원을 기부하고 아내의 이름으로도 1억원을 기부해 부부가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하게 됐다.
사람들은 내가 많은 곳에 기부금을 척척 내니 돈을 쌓아놓고 있다가 기분 나는 대로 기부하는 것으로 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웬만하면 비행기도 일반석을 이용하고 술·담배를 하지 않으니 절약되는 돈이 많다. 이렇게 남긴 부분들을 계산해 적정액이 되면 도움이 필요한 곳에 내놓는 것이다. 나 개인이 쓰는 돈은 거의 없고, 있더라도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는 편이다.
기독교는 물질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주님이 원하시면 아낌없이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일 뿐 실생활에서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땀 흘려가며 힘들게 벌었고, 아끼고 아껴 모은 돈을 하나님께 또 이웃과 사회를 위해 내놓는다는 것은 물질관이 확실히 바뀌지 않으면 실천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러므로 내 것이 아까우면 남의 것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작은 도움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맞다. 나눔과 섬김도 내가 먼저 하고 받기를 바라야 한다. 난 섬기지도 않으면서 기대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은 내게 두 아들을 선물로 주셨다. 모두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주 안에서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강조했는데 이대로 된 것이 또 다른 감사의 조건이다. 신기한 것은 맏며느리가 결혼 전 남편감이 갖추어야 할 10가지를 놓고 오랜 기간 계속 기도했는데 아들이 이에 모두 해당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도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려주는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기도는 응답이다’란 말을 참 좋아한다.
***[역경의 열매] 이상춘 (14) 인생 위기는 기도와 믿음, 만남으로 극복된다
올해 38주년 맞은 회사 SCL 고속성장… 가족과 이웃·동료의 도움으로 이뤄져
교회의 초청으로 약속이 맺은 열매에 대해 간증하고 있는 이상춘 사장.
인생에는 누구나 위기가 있다. 이 위기는 기도와 믿음을 통해 신앙으로 이겨내기도 하지만 귀한 만남을 통해 극적으로 극복되기도 한다.
올해 38주년을 맞은 우리 회사(SCL)가 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다방면으로 사회에 공헌할 수 있었던 것은 나 혼자만 잘해서 된 것이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가족과 이웃, 동료와 곳곳의 귀한 사람들끼리 만남을 통해 좋은 일이 생기고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도움은 일방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주고받는 것이다. 내가 삶 속에서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나 역시 도움을 주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며 산다.
나보다 연장자로 형님처럼 모시며 친하게 지내온 L회장이 있었다. 사업도 나보다 크게 하시고 한때 잘나가던 회사였는데 IMF 외환위기 때 휘청거리다 2001년 부도를 맞고 공장이 경매에 넘어가는 큰 어려움을 만났다. 공장은 땅만 2만3140㎡(7000평)에 건물이 3966㎡(1200평)나 되었다. 우연히 나는 당장 6억원을 마련하면 경매 중인 공장을 찾을 수 있는 회생의 길이 있지만 없으면 수십 년간 쌓아올린 공장이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가 L회장이 완전히 빈손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위기에 있는 L회장을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주위에서는 모두 말렸지만 나는 L회장을 은행으로 오라고 해 6억원에 대한 보증을 서서 쾌히 빌려줬다. 모두가 외면하는 이 막바지 상황에 사회에서 만나 그저 형, 동생하며 친하게 지내던 내가 거금을 빌려주니 L회장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사장. 날 뭘 보고 이렇게 도와주나. 잘못되면 그 돈도 다 날아가는데.”
“형님. 제가 형님 좋아하잖아요. 평생 일구신 기업이 남에게 넘어가는 것을 제가 못 보겠어요. 이제 용기를 내시고 다시 회사를 일구세요. 응원합니다.”
L회장은 나의 도움에 용기백배해 어려움을 딛고 재기에 성공, 회사를 잘 운영해 나가고 계신다. 내가 할 수 있는 도움이 상대에겐 엄청난 힘이 될 수 있다.
또 1977년 21세 새파란 청년인 나에게 사업을 해보라며 용기를 주고 이끌어준 당시의 오명평 사장님은 이제 75세이시다. 이분에 대한 고마움도 항상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제법 오랜전부터 우리 회사의 감사로 모시고 잘 대우해 드리며 함께 일하고 있다.
나는 인간관계도 고마움과 의리를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하나님과의 신앙적인 부분에서도 예외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위기에 기도원을 찾아가 부르짖고 눈물 뿌려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다가도 사업이 잘되고 모든 것이 잘 풀릴 때 신앙이 느슨해지거나 곁길로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보곤 한다.
힘들고 병들고 고난 중일 때 믿음은 더 성장한다.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이라”는 말씀이 정확하지만 잘될 때 더 긴장하며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와 말씀 실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내 오랜 신앙생활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 중 하나가 바로 시편 23편이다. 이 중에서도 1∼6절 말씀을 매우 좋아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 되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신다니 마음이 저절로 평안해진다. 또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고 내 잔이 넘친다는 이 시는 하나님을 가까이 의지하며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주는 최고의 격려가 아닌가 한다.
***[역경의 열매] 이상춘 (15·끝) 사업 성공·나눔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의 열매’
영수증 처리된 기부금만 36억 넘어… 이땅의 젊은이 꿈·소망 잃지 않기를
출석하는 부천 상록수교회에서 이상춘 이사장의 전 가족이 다 모였다.
요즘 많은 곳으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는다. 사업가로서 어느 정도 자리매김을 했고 특히 사회 공헌과 나눔에 관심이 크니 이런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사양을 많이 했는데 강의를 하다보니 내가 걸어온 길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앞으로의 사명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어 승낙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 강연 제목은 언제나 ‘약속이 맺은 열매’이다.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을 실천해 나가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삶에 대한 참된 가치와 의미를 찾아보자는 내용인데 호응이 크다.
많은 분이 내게 궁금해하는 것은 두 가지로 집약된다. 사업 성공의 비결과 또 어떻게 그렇게 큰 액수의 나눔을 실천하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인 성공의 요소는 꿈, 목표, 자신감, 실천, 열정, 끈기, 최선 등일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도 중요하지만 이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해주는 분명한 성경 구절이 있다. 바로 잠언 11장 24∼25절 말씀이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이 말씀은 내가 오랜 기간 체험한 바로도 정확히 맞는 메시지다. 그래서 강연에서 꼭 인용을 한다. 그리고 또 하나 300년간 12대를 이어왔다는 경주 최 부잣집 가훈을 예로 든다. 과거를 보되 단순 명예직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며, 일정한 재산 이상을 모으지 말며,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지 말며,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며, 흉년에 약식을 풀어 구제하며, 가문의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간 무명옷을 입히라는 내용이 바로 유명한 육훈(六訓)이다. 이것을 찬찬히 살펴보면 결국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만이 아니라 각자의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고 노력할 때 복을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아직도 신앙적으로 많이 부족한 내가 올해 장로로 피택돼 안수를 받는다. 종으로 부름받는 이 성스러운 직책을 주시는 것은 남은 삶도 이웃과 사회에 그리스도의 빛, 향기를 드러내라는 명령이라 여기고 순종하려고 한다.
세무서에서 ‘아름다운 납세자’란 이름의 상을 내게 준다고 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성실히 회사의 세금을 낸 것은 물론 공인된 사회복지기관에 내가 기부금을 내어 영수증 처리된 액수가 36억원이 넘었다고 한다. 사실 영수증이 처리되지 못하는 기부도 상당히 많으니 실제 액수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렇게 나눌 수 있도록 사업에 복 주시고, 나눔의 마음을 활짝 열게 해 주신 분도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난 앞으로 주님이 내게 주신 상록수장학재단을 통해 이 땅의 젊은이들이 꿈과 소망을 안고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다. 또 김천 혁신도시 종교부지에 특별하고 멋진 디자인으로 청소년전문교회를 건축해 청년 전도의 전진기지가 되도록 준비하고 있다. 지구촌 고통받는 이웃을 돕고 복음이 필요한 곳에 교회를 설립하는 일에도 관심을 갖고 정진해 나갈 것이다.
이 연재가 계속되는 동안 많은 분으로부터 격려를 받아 지면을 통해서나마 감사드린다. 아울러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도움을 주신 분들께 인사드리며 특히 아내(이금순 권사)의 헌신적인 내조에 깊은 고마움을 꼭 전하고 싶다. 독자 여러분의 가정과 생업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시길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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