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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19일부터 중공군이 대거 압록강을 건너와 청천강 북방의 산 속에 잠복하고 있는 사실을 제대로 몰랐던 것에 대하여 훗날 큰 논란이 일어났다. 맥아더는 워싱턴의 정보 당국을 탓했지만 현지 사령관인 그가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나마 다행히 이때의 정보 실패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10월 19일에 한국군이 평양에 진입하여 10월 20일 평양을 완전 점령하고 10월 23일 청천강에 도달하였다. 10월 24일에 맥아더는 전 병력을 동원하여 이른바 추수감사절 공세를 감행했다. 이 작전은 9월 27일자 대통령 훈령에 반할뿐 아니라 전술적으로도 경거망동이었다. 중국이 이미 여러 차례 군사개입을 경고한바 있으므로 철저한 대비태세를 갖추고 신중하게 정세를 파악했어야 한다. 하지만 맥아더의 안중에 중국은 없었다. 북한군의 주력은 이미 궤멸된 것으로 간주하고 패잔병을 소탕하는 차원에서 별다른 준비 없이 총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결국 서부전선에서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반격으로 미군 제1기갑사단 제8연대가 운산에서 섬멸당하고 8군은 청천강 선으로 되돌아왔다. 이것으로 추수감사절 공세는 실패했다. 다만 중공군에 대한 정보가 캄캄했던 상황에서 작은 손실의 대가로 중국의 참전 사실을 인지하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것이다.
추수감사절 공세의 진격과 후퇴 - 녹색지대
사려 깊은 사령관이라면 중국의 참전이라는 새로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책을 강구했을 것이다. 유엔군은 동부전선에서도 공세를 중지하고 수세로 전환하여 청천강과 흥남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어야 한다. 만약 맥아더가 그렇게 했다면 추수감사절 공세의 실패는 전화위복이 되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사실을 알고도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계속하여 오히려 전선을 확대했다. 한술 더 떠서 맥아더는 11월 24일 크리스마스 공세를 감행하여 중공군 대병력이 매복하고있는 산악지대로 들어갔다. 이것이 맥아더의 치명적 과오였다. 11월 25일에 개시된 중공군의 강력한 반격에 참패한 유엔군은 11월 28일부터 모든 전선에서 총퇴각했다.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애치슨은 훗날 이렇게 고백하며 후회했다.
“10월 24일의 추수감사절 공세가 실패한 후 우리는 한국의 상황을 몹시 걱정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발생한 위험은 명백했다. 그때 유엔군을 평양~원산 선으로 집결시켜 방어선을 구축하게끔 맥아더에게 지시하도록 대통령에게 건의했어야 했다. 그러나 마셜 국방장관이나 브래들리 합참의장 모두 주저하다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나 역시 대통령의 군사보좌관들이 건의하지 않은 군사전략을 대통령에게 호소하기를 꺼렸다”
1950년 11월 24일 크리스마스 공세 출발선
1950년 11월 25일 중공군 총공세
미육군 2사단 전멸
미해병 1사단 장진호 포위망 탈출도
장진호 포위망 탈출
워싱턴은 큰 충격에 빠졌다. 12월 1일부터 워싱턴의 수뇌부는 한국에서의 전면철수 가능성을 토의했다. 군 수뇌부가 철군을 주장하자 국무장관 애치슨은 철군보다 전쟁 이전 상태에서의 휴전 가능성을 제기했다. 12월 4일 유엔군의 평양 철수에 이어 12월 6일에 공산군이 평양에 입성하고, 12월 7일에 원산이 함락되었다.
고립된 함경도지역의 미10군단과 국군 1군단 병력 10만 5천명 및 피난민 9만 8천명이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흥남에서 해군 함선에 올라 부산으로 철수했다. 1940년의 덩케르크 철수 다음으로 역사상 두번째 규모의 해상철수작전이었다. 흥남철수가 시작된 12월 15일 중공군이 개성과 춘천에 육박하면서 38선 이북이 모두 공산군 수중에 들어갔다. 맥아더는 부산으로 철수한 10군단을 8군에 편입시켜 비로소 지휘체계를 일원화했다.
흥남 철수
1950년 12월 24일 흥남부두 폭파
12월 16일 트루먼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12월 22일 합참에서 열린 국무부와 국방부 연석회의에서 군 수뇌부는 국무장관 애치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한국에서 철수하는 구체적 방안을 작성하여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12월 23일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의정부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흥남 철수를 완료한 12월 24일 50만 명의 시민이 서울을 빠져나갔고 곧 70만에 달했다. 신임 8군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중장이 12월 26일 한국에 도착했다.
월튼 워커 육군중장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국무장관 딘 애치슨
국방장관 조지 마셜 육군원수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 육군원수
12월 26일 트루먼 대통령, 애치슨 국무장관, 마셜 국방장관,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참석한 블레어하우스 회의에서 애치슨은 “유엔군은 맥아더의 주장처럼 절망적 상황이 아니다. 우리가 철수하면 한국인들은 살육당할 것이다. 우리의 친구들이 학살당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철수는 역사상 최악의 치욕으로 남을 것이다. 중공군의 전투력을 충분히 시험하기 전까지는 유엔군 철수를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트루먼도 애치슨을 지지했다. 12월 28일 마셜과 애치슨은 병력 증파 없이 한국에서 최대한 저항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합참은 12월 29일 맥아더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로 장문의 훈령을 보냈다.
“만약 중국이 한국에서 유엔군을 축출하고자 한다면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추가 병력을 증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일본을 포함한 다른 지역의 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한국은 대규모의 전면전을 치를 가치가 없는 지역이므로 남아 있는 지상군을 한국에서 중공군과의 전쟁에 사용할 수 없다. 다만 한국의 특정 지역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성공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에 대단히 중요하다. 이를 위해 금강 부근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한다. 추후 중공군이 한국으로부터 유엔군을 축출할 능력을 보유한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 경우 우리는 일본으로의 철수를 명령하게 될 것이다. 철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조건에 관해 귀관의 견해를 제출하기 바란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12월 30일 맥아더는 중국에 대한 네 가지 보복 대책을 합참에 제안했다. 중국 해안 봉쇄, 함포사격과 공중 폭격으로 중국의 군수산업 파괴, 대만 장개석 군대의 한국 파병과 중국 본토 상륙이었다. 확전을 피하면서 가능한 한 한국내의 방어선을 고수하려는 합참의 방침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것임을 알면서도 맥아더는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맥아더가 한국통일을 위해 중국으로의 확전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남한 방어를 비관적으로 본 맥아더는 자신에게 쏟아질 패전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미국의 국력을 총동원하고자 확전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이 서울에서 철수했다. 1월 5일 합동참모본부가 맥아더에게 한국군 증강에 관한 견해를 묻자 맥아더는 1월 6일의 답변에서 한국군 증강보다 일본 경찰예비대의 증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맥아더가 이미 한국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다. 1주일 전 맥아더가 대만군의 한국 파병과 중국 본토에 대한 확전을 제안한 것과는 너무나 모순된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이승만 대통령은 1월 7일 맥아더에게 한국군 50만 명 증강을 위한 무기 지원을 요청했지만 될 리가 없었다.
1월 7일 수원이 함락되고 1월 8일 오산이 함락되었다. 1월 9일 국무부와 합동참모본부는 한국정부, 관료 및 한국군의 철수를 논의하고 약 80만~100만의 인원을 제주도로 옮기는 방안과 그것이 용이하지 않을 경우 오키나와로 옮기는 방안을 수립하기로 했다.
같은 날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에게 그가 제안한 대(對)중국 확전을 수용할 수 없다고 통고했다. 이에 화가 난 맥아더는 1월 10일 합참에 전문을 보내 최대한 신속하게 한반도에서 철수하자고 제안했다. 자신에게는 일본의 방위가 우선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맥아더는 한국에서 최대한 오래 저항하고자 하는 합참의 방침에 또다시 어깃장을 놓았다.
열흘 사이에 맥아더의 주장은 극에서 극으로 바뀌었다. 중국에 대한 대규모 확전에서 전면철수로 급선회한 것은 급박한 위기 속에 맥아더가 평정심을 상실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맥아더는 미군 철수 후 남한 국민에게 밀어닥칠 운명에 무관심했다.
합참의 방침은 남한 국민의 안위를 염려하여 유엔군 철수를 극구 반대한 애치슨 국무장관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합참이 1월 12일에 작성한 <NSC 101>은 한국에서 미군이 철수해야 할 경우 한국 망명정부를 수립하되 가능한 한 오랫동안 저항하기 위해 한국을 최대한 지원하기로 했다. 트루먼은 1월 13일 맥아더에게 전달한 메시지에서 확전과 전면철수를 모두 거부하고 최악의 경우에도 제주도를 근거지로 계속 싸울 것이라고 언명했다.
또한 트루먼은 맥아더가 주장한 한국 철수의 타당성을 판단하기 위해 고위 장교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이 1월 14일 도쿄에 도착했다. 맥아더는 이들에게 한국의 군사적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말했으나 한국을 시찰하고 귀국한 콜린스는 유엔군이 한국을 지킬 수 있다고 보고했다.
8군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육군중장
지리멸렬하여 후퇴한 8군은 신임사령관 리지웨이의 강력한 지휘로 전투력을 재정비했다. 1월 13일 공산군이 영월을 점령했으나 1월 15일 유엔군은 영월을 탈환하고 평택~영월~삼척 선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진 공산군의 남진은 여기서 저지되었다. 리지웨이는 1월 25일에 반격을 개시하여 26일 수원을 탈환하고 2월 10일 영등포와 김포공항을 탈환하여 한강변에 도달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 이후 승리할 때는 기고만장하다가 크리스마스 공세에서 중공군의 역습에 참패하여 파국에 직면하자 극도로 절망하여 한국에서의 전면철수를 주장했다. 그러다가 리지웨이의 반격이 성공하자 원기를 회복한 맥아더는 승리가 눈앞에 왔다며 또다시 기고만장하기 시작했다. 감정의 기복이 이토록 극심한 인물은 어떠한 상황에도 냉철해야 하는 장수의 자질에서 낙제라고 할 것이다.
한국에서의 전면철수를 주장하던 맥아더는 전세가 호전되자 태도를 바꿔 다시금 확전을 주장했다. 합참은 확전을 방지하고자 중국이 개입하기 전부터 만주는 물론 국경 남쪽 8km까지의 북한 지역에 대한 폭격을 금지했다. 또한 교전하던 적기가 압록강 너머로 도주할 때 국경을 넘어 추격하는 것을 금지했다. 중공군의 개입 후에도 이런 제한이 계속되었다. 이에 불만이던 맥아더는 3월 7일과 3월 15일의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한 손을 뒤로 묶인 채 싸우고 있다면서 접경지대와 만주를 폭격하여 적의 보급로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월 16일 한국군과 미군이 서울을 탈환했다. 워싱턴 당국은 이때야 말로 중국과 북한이 휴전에 동의하도록 유도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을 끝낼 의사가 있다는 성명을 준비하고 상대로 하여금 좋은 답변을 할 수 있도록 용어 선정부터 신중하게 검토했다. 3월 20일 합동참모본부는 이러한 계획을 맥아더에게 통보했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외교적 해결보다 군사적 해결을 주장하고, 3월 24일 중국군 사령관에게 최후통첩에 해당하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했다. 휴전 회담을 제안한 그 성명서는 중국 본토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포함하고 있어서 중국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맥아더의 성명은 워싱턴 당국을 크게 당황시켰고 결국 트루먼은 자신의 성명서 발표 계획을 취소했다. 맥아더는 전쟁에서 승리 이외의 대안은 없다고 계속해서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맥아더의 행위는 자신의 상관인 대통령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다. 4월 9일 합동참모본부는 만장일치로 맥아더 해임에 합의하고 합창의장 브래들리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공식 건의했다. 4월 10일 트루먼은 맥아더를 모든 직책에서 해임하는 명령서에 서명하고 다음날 발표했다.
곧 이어 맥아더의 후임에 리지웨이 장군이, 8군사령관에는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임명되었다. 유엔군은 4월 하순에 현재의 휴전선 부근까지 진격하였고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맥아더 해임에 가장 먼저 반발한 세력은 공화당 보수파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해임 발표 당일 미국의 군사.외교정책에 관한 전반적인 조사와 맥아더의 증언을 듣는 청문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청문회는 상원 군사위원회와 외교위원회 합동으로 5월 3일에 개최하기로 결정되었다. 맥아더는 4월 17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뉴욕에서도 대환영을 받았다.
샌프란시스코의 맥아더 환영
뉴욕의 맥아더 환영
뉴욕의 맥아더 환영
4월 19일 맥아더는 워싱턴의 상하양원합동회의에서 그 유명한 고별연설을 했다. 맥아더는 의회 연설에서 한국전쟁의 해결책으로 중국에 대한 압박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맥아더는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중국의 역량을 최대한 파괴하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구절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의회에서 고별연설하는 맥아더
맥아더는 상원 합동위원회의 첫 번째 증인으로 5월 3일부터 5일까지 3일 동안 의회에서 증언했다. 맥아더에 대한 청문회의 주요 내용은 소련의 한국전 참전 의도, 대만 국부군 활용 문제, 한국전쟁에서의 핵무기 사용 문제, 중국 본토에 대한 확전 문제 등이었다. 맥아더는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대만 문제에 관해서는 대만 국부군이 한국전쟁에 참가하거나 중국 본토에 상륙작전을 감행하면 한반도에서 중국군의 압력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한국전쟁에서 핵무기 사용을 제안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를 부인했다. 현재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적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맥아더는 자유주의 국가 내부의 공산주의를 포함하여 전 세계 모든 공산주의라고 대답했다.
그의 답변은 한국전쟁이 공산주의에 대한 전면전의 시발점이라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중국 본토 폭격에 대한 질문에 자신은 중국과의 전면전을 원치 않으며 자신이 주장한 작전은 단지 중국을 압박하여 평화회담에 응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공산주의를 주적으로 간주하며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외치던 그가 중국과의 평화협상을 위해 확전을 주장하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 중국으로의 확전이 3차 세계대전을 불러올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판단할 문제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청문회는 맥아더의 아시아에 대한 인식이나 한국전쟁에 관한 전략이 구체성이 없는 모호한 것임을 세상에 알렸다. 맥아더 청문회가 끝난 후 12명의 증인을 상대로 6월말까지 계속된 청문회를 통해 맥아더의 주장은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마셜 국방장관은 맥아더가 상부의 정책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해임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고 밝혔다.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과의 제한전쟁 역시 결국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지역에 우리의 군사력을 너무 많이 투입하게 됨으로써 우리가 감당해야 할 위험을 증가시킬 것이다. 맥아더의 전략은 미국을 잘못된 전쟁을 위해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에게 몰아넣게 될 것이다."
청문회 후 맥아더는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자신의 해임과 트루먼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비난하는 연설을 계속했지만 그에 대한 관심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는 1952년에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힘도 못 써보고 아이젠하워에게 패배했다. 해임 이후 맥아더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는 한동안 민간기업의 명목상 회장으로 있다가 1964년 4월 3일 85세에 노환으로 병사했다.
1952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연설하는 맥아더
맥아더는 개인적으로 트루먼에게서 막중한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은 태평양전쟁에서 최대의 공훈을 세운 니미츠를 제치고 조역인 맥아더를 연합국최고사령관으로 발탁했다. 덕분에 맥아더는 9월 2일 연합국을 대표하여 일본의 항복을 받고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일본을 통치함으로써 영광의 절정에 올라섰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7월 7일 트루먼은 71세의 고령인 맥아더를 최초의 유엔군사령관에 임명했다. 이에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다음과 같은 감사전보를 보냈다.
“이번에 두 번째로 본인에게 큰 영광을 주신 데 대해 (1945년에 대한) 생생한 기억과 함께 거듭 감사드리며 본인은 오직 세계평화를 위해 애쓰시는 각하의 기념비적 투쟁에 절대적으로 헌신하고 각하에게 완전한 개인적 충성을 드린다는 맹세를 반복하는 바입니다”
트루먼에 대한 맥아더의 충성 맹세는 말뿐이었다.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을 때 맥아더는 경례도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맥아더가 필리핀, 호주, 일본, 한국 등에서 사령부를 지휘하고 아시아태평양에서 20여 년을 복무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정보를 왜곡하고 상황을 조작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동양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로 알려진 맥아더는 아시아의 현실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고 미국 정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혹평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장군으로 맥아더가 손꼽힌다.
<참고서적>
6.25전쟁과 미국 – 남시욱, 2015, 청미디어
맥아더와 한국전쟁 – 이상호, 2012, 푸른역사
6.25 화보
1.4.후퇴 - 얼어붙은 한강을 걸어서
1951년 1월 8일 강릉 교외 피난민 행렬 (트루먼 도서관 소장 사진)
광화문 앞
종로
을지로 5~6가
숭례문 부근
1950. 9. 30 대전역
수원성문
1951년 부산의 천막촌
1951. 3. 23 문산에 강하하는 미군 낙하산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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