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강성익 (康聖翊)
1747(영조 23) ~ 1819(순조 19), 본관은 신천(信川)으로 자는 오응(五應), 호는 명재(明齋)이다. 1747년(영조 23)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三達里)의 입촌(入村) 시조인 강일명(康一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부터 공은 용모가 단아하고 두뇌가 총명했으며 지혜가 비범하였다. 조부는 강문달(康文達), 증조부는 강사안(康嗣安)이며, 외조부는 김무홍(金武弘)이다.
처음 오봉조(吳鳳祚)에게 학문을 배우고, 소년시절에 주서 변성운(邊聖運)문하에서 수업, 경서와 사학에 통달하였고 시문에 능했다. 1781년(정조 5)에 내도한 제주순무안사시재어사(濟州巡撫按査試才御史) 박천형(朴天衡)이 시취한 시재(試才)에서 김용(金墉), 변경우(邊景祐)와 함께 합격하였다.
11767년(영조43년)에 문과초시에 급제하였고, 1782년(정조 6년)무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인정전(仁政殿)에서 홍패(紅牌)를 받았다. 1783년 전시이대 급제 승문원검교에(承文院檢校)에 기용되고 이어 예조좌랑(禮曹佐郞), 병조정랑(兵曹正郞)등을 지낸 후 1794년 청관(淸官)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아 사간원 정언(司鍊院正言)을 역임했다.
외직(外職)으로는 1800년에 사천현감(泗川縣監), 1801년에는 경북(慶北) 비안현감(比安縣監)등을 역임하면서 청렴과 충직으로 명성을 떨쳤다. 재직중 귀향할 때는 임금님께 안마(鞍馬)를 하사하시고 상경을 하명할실때는 역마(驛馬)를 내리셨다. 사천현감으로 있다가 비안현으로 전임할 때 좌수가 쇄마전 400량을 거두어 주자 그는 " 내가 단기 재직으로 선정을 다하지 못한 것이 유감인데 어찌 쇄마전을 받는단 말인가" 하고 각자에게 환불토록 하니 주민들이, "우리 고을의 청렴하신 명관이 떠나신다"하고 애석해 하였다. 비안현감으로 재직할 때 박봉을 털어 연비루(戀比樓)를 새로 세우고 퇴관할 때는 겨우 노비 둘만 거느리고 빈 손으로 환향하였다.
1793년(정조17년) 어사 침락수(沈樂洙)가 진달(秦達)하되 "강성익은 몸소 밭 갈고 나무를 베어 부모를 극진히 받들고 있다"고 하였으니 그의 효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부모상을 당해서는 애도망극(哀悼罔極)해 하며, 거상정차를 가례대로 엄숙히 치렀다.
1794년(정조 18년) 제주도에서는 극심한 흉년이 들어 도민은 기아에 허덕이고 각장(各場)의 국마 3천필이 도난 당하거나 아사했다. 당시 목사가 삼읍의 각장목졸에게 변상토록 하였는데, 겨우 절반은 변상하였으나 나머니 천오백필은 변상할 길이 없어 전 도민이 곤경에 빠지게 되자 그가 상경 입조하여 "제주도에 심한 흉년이 들어 도민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어 없어진 국마 천오백필은 변상할 능력이 없다"고 실정을 상소하였던 바 정조께서 도민을 사랑하는 그의 뜻을 讚揚하시며 특명으로 국마 변상을 중지케 하고 구호 양곡을 내려 굶주리는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혜택을 입게 되었다.
1814년(순조14년) 찰리사(察理使)가 내도, 도민의 여론을 듣고 도 지성으로 부모를 섬기며 도리를 다하고, 강당을 지어 후진을 계도하는 것을 목격하고 상소하니 관직에 재등용 사헌부 장령이 되었는데 그의 나이 68세였다.
1819년(순조19년) 73세의 일기로 별세할때까지 오로지 애국 충군의 지절로 정결한 곳에 정수단을 마련하고 임금의 만수를 누리시도록 조석으로 북향배례하고 헌작하였으니 그 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성은여천(聖恩如天), 원보무지(圓報無地), 근이설단(謹以設壇), 월헌만수(月獻萬壽)이 비문은 현재 남제주, 성산읍 삼달리 헌수단에 원형대로 보존되어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